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 / 산책자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30-32

아렌트가 처음 연방주의를 고민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파시즘에 대항한 동맹을 설명하기 위해서였으며, 이후에는 1940년대 중반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에게 주어진 가능성과 관련하여, 그리고 <혁명론>에서 매디슨주의적인 주장(31)을 재고하면서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을 쓸 당시에는 이런 논의가 매우 흐릿합니다. 비록 간헐적이긴 하지만 아렌트가 지속적으로 연방주의에 의지하는 것은 주권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는 흥미롭습니다.

아렌트는 개별주권의 연합에 반대합니다. 대신 개인주의를 넘어서고 주권을 분산시킬 수 있는 사회적 다원성 개념을 제도화하는 방법으로 연방을 사유했습니다. 그녀의 논의는 공동체주의와도 거리가 있는데, 연방이란 여러 집단의 공동작업을 전제하긴 하지만 이 집단들 사이에 필연적인 공통의 소속감을 가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아렌트는 문화적 친밀성을 통치기반으로 요구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야말로 우리가 아렌트의 민족주의 비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아렌트는 유대원 주권이라는 원칙에 의거한 이스라엘 건국에 반대했습(32)니다. 아렌트는 이스라엘 건국 움직임이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고 이스라엘과 영토를 공유하고 있는 정당한 거주자인 비유대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을 영원히 지속시킬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57

버틀러: 아렌트가 대명사를 사용하는 방식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녀는 혁명을 이론화하면서 인간 존재들은 함께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혁명은 '우리'가 함께 행동할 때만 일어날 수 있지요. 즉 어떤 행위가 효과가 있으려면, 그것은 '우리'의 행위여야 합니다. 아렌트는 이 글에서 '나'로부터 '우리'로의 변환을 효과적으로 해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러한 변환 자체가 충분히 실효성 있는 행위라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행동의 필요조건을 구성한다고 볼 수는 있습니다.

예컨대 아렌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정치적 삶은 우리가 조직을 통해 평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정에 기대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직 다른 것을 형성하는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에 있을 때에만 행동할 수 있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며, 공동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58

여기에서 '인간'이란 개개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공통성과 평등의 상황을 가리키며, 공통성과 평등은 변화와 행위를 구축하는 기본 전제입니다.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평등한 존재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행동하고, 변화를 만들어내고, 무엇인가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의 개인적 행동은 평등의 조건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그 개인적 행동은 무엇보다 평등을 확립하는 행동이어야 하고, 이를 통해 개인의 행동은 복수의 행동이 되고,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행동이 될 기회를 갖게 됩니다.

 

63-64

아감벤과 아렌트 중 누구도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이 노래(스페인어로 불린 미국 국가-인용자 주)를 충분히 이론화하지 못했으며, 이 노래를 온전히 설명해낼 수 있는 언어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화 작업은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만들어지는 민주주의, 정치적인 영역에서 선명하게 나타나는 미학적인 표현, 그리고 우리가 '공적 영역'이라고 부르는 것과 노래의 관계를 다시 고찰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노래는 거리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데, 이때 거리는 집회의 자유를 얻지 못한 자들이 자유롭게 모이는 모순의 장소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로 이러한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노래를 부를 장소로 거리가 선택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64)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또한 거리라는 공간의 틀을 다시 짜고, 법적으로 금지된 바로 그 순간에 집회의 자유를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적인 정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법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구하는 행동 자체가 인정을 요구하는 바로 그 법에 반하는 것이라는 모순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75

오늘날 우리는 전지구화 국면에서 민족국가의 쇠퇴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국가의 계보적 힘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일반적으로 민족국가의 쇠퇴는 전지구적 자본의 이해를 위해서 국가를 재구조화한 정치적, 경제적 과정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아렌트는 그 쇠퇴의 이유가 애초에 민족국가라는 형태가 결점투성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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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관련 기사

국가, 극복할 것인가 지켜낼 것인가
“민족국가라는 이름으로 이방인 추방”
“세계적 자본주의 횡포에 구성원 보호”
페미니스트 버틀러-스피박의 두 시각
 
 
고명섭 기자
 




 

»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가야트리 스피박 대담, 주해연 옮김/산책자·1만원


주디스 버틀러(사진 위)와 가야트리 스피박(아래)은 페미니즘 이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적 생산력을 보여주는 여성 학자들이다. 버틀러가 동성애자로서 퀴어이론의 창시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스피박은 인도 출신으로서 탈식민주의 이론의 대모로 통한다. 두 사람의 학문활동을 관찰하면, 페미니즘 이론의 최전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론적 지반에 다소 차이가 있는 이 두 사람은 페미니즘 담론 내부의 경합적 관계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는 이 출중한 학자들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열다섯 살 아래인 후배 버틀러가 먼저 발제 성격의 문제제기를 한 뒤 두 사람이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담은 2006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어바인 캠퍼스의 비교문학과에서 ‘전지구적 국가, 전지구적 상태’를 주제로 삼아 연 학회에서 이루어졌다. 제목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이 대담의 내용은 페미니즘 이론 자체를 다룬 것이 아니라, ‘지구화 시대의 국가’라는 인류적 차원의 문제를 페미니스트적 감성으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이 대담에서 논의의 초점이 되는 것은 흔히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nation-state) 문제다. 여기서 네이션(국민·민족)이 문제인 것은 어떤 기준에 따라 특정 집단을 네이션으로 포섭하고 그 기준 밖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이 네이션 체제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이 문제가 대담의 주제가 된 것은 그 시점에서 벌어진 사태와 관련이 있다. 2006년 4월 미국 전역에서 ‘미등록 이민자’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거나 고용하는 사람들까지 처벌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이 법안을 규탄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수십만명의 라틴계 이민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인 이민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 더 중요하게는 이들이 미국 국가를 스페인어로 번역해 불렀다는 사실에 버틀러는 주목한다. 그는 이런 상황을 ‘수행적 모순’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자신들에게 추방·배제·박탈을 안겨준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통상적인 좌파적 관념이라면, 이런 상황을 국가라는 포획장치에 자발적으로 말려들어간 것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버틀러는 그런 통념과는 다른 적극적 이해를 모색한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틀에 균열을 냄으로써 그 틀을 극복할 전망을 언뜻 보여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적 모순이야말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의 공간을 열어젖힙니다.” 버틀러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빌려, 자유는 자유의 요구, 자유의 수행 자체에서 이미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래를 부름으로써 거리가 자유로운 집회 현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행동은 자유의 표현이자 권리를 향한 호소입니다.” 자신들을 추방하는 나라의 국가를 자신들의 말로 부름으로써 그 국가의 의미를 바꿔버리는 이 모순적 사태야말로 어떤 전망을 보여준다는 것이 버틀러의 주장이다. “그 노래는 언어적 다수집단에 대한 비판이고, 언어적 다수집단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며, 민족을 단일한 개념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다문화주의의 한 방식입니다.”

이때 버틀러가 국가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대담 내내 버틀러는 국가를 곧 ‘네이션 스테이트’로 인식한다. 국가란 근본적으로 국민/비국민을 나누는 배제와 분리를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그 국가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버틀러의 고민이자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피박은 조금 다른 목소리를 낸다. 스피박이 보기에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고삐 풀린 발호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하는 장치로 국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계시민주의는 어찌 보면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어울리는 이념일 수 있다. “국가는 우리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에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최소한의 추상적 구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재분배의 도구가 돼야 합니다.” 자본주의적 착취·수탈·불평등을 막아내고 교정하는 기능을 국가가 수행할 수 있으며, 그런 기능을 수행하도록 국가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가 국가의 박탈·추방 성격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피박은 국가의 저항 거점 성격을 강조하는 셈이다. 대담 말미에 버틀러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동력으로서 자기창조”에 관해, 다시 말해 혁명에 관해 이야기한다. “만약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고통받았기 때문이고, 비판의 언어를 만들어내고 서로 뭉쳤기 때문이며, 역사와 분석에 기반해 연대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피박도 이 설명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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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 나남신서 91
김종갑 지음 / 나남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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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쪽

현대인에게 몸은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나 자율적 통일체로 주어지지 않는다. 타고 태어난 운명은 더욱이나 아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옛말만큼 우리에게 낯설고 이물스런 개념도 없을 것이다. 기원적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은 리콜이나 애프터서비스처럼 성형외과나 바디클리닉 등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관리되고 집중적으로 교정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앤서니 기든스의 주장처럼 이제 몸은 하나의 "프로젝트",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아름다운 소비대상"이다. 프로젝트나 상품으로 간주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는 몸의 파편화이다. 만약 몸을 하나의 온전한 유기적 전체로서 받아들인다면 몸의 한 부위에 성형의 칼을 들이대는 순간 몸 전체가 새로운 이물질의 침입에 적응하기 위해 방어 체계를 형성하고, 그러면서 미세하게나마 총체적으로 유기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렇다면 예측할 수 없는 몸의 반작용이나 부작용이 두려워서 감히 성형의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무도 지방흡입수술이나 박피수술, 성형수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33쪽

몸은 한꺼번에 하나로서 주어진 총체가 아니라 분해되고 재결합될 수 있는 부분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싫증이 나면 자유롭게 부분을 떼어내고 새롭게 장식을 할 수 있다.

 

134쪽

몸의 파편화는 외계인의 침입이나 신종 바이러스처럼 현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류가 문명화의 길을 걸으면서 몸도 점차 파편화되기 시작하였다. 만약 몸을 부분들의 기계적 결합으로 볼 수 없었다면 서양의학, 특히 해부학은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처럼 주어진 유기적 전체를 부분으로 분해하고 계, 기관, 조직 등으로 분류한 다음 다시 하나의 몸으로 봉합하는 과정, 우리의 몸을 해부대 위에 놓인 개구리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의술의 발달에 선행되었다.

 

135쪽

몸의 재현과 관련해서 발생했던 몸의 파편화, 몸의 수학적 건축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도 그러한 육체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화가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가 몸을 물리적인 현상으로 접근하였다는 점이다. 몸이란 무엇인가?

136쪽

칼로 자르면 두 동강이 난다는 점에서 몸은--잘라지지 않는--정신과 다르다. 몸은 자르면 최소 단위를 향해서 계속 분절되는 것이다.

육체는 계속해서 분할 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명한 진리이다. 그러나 바로 이 자명한 진리로서 육체의 무한 분할 가능성 명제에서 딜레마가 탄생한다. 그리고 바로 이 딜레마를 중심으로 현대의 육체는 전통적 육체로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원칙적으로 무한하게 분할할 수 있는 듯이 보이지만 분할이 반복되다 보면 소실점처럼 어느 순간에 더 이상 분할 될 수 없는 지점에서 분할의 대상 자체가 소멸해버린다. 이론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존재가 실제적으로는 갑자기 무로 사라지는 것이다. 양의 변화가 질적 변화를 초래하고, 그러면서 생명은 죽음으로, 유기체는 무기체로 바뀌어버린다.

 

146쪽

빅토리아 베컴의 사진은 그러한 새로운 논리와 질서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증상은 육체의 파편화이다. 두세 배 크게 확대되는 순간 육체는 자신이 지금껏 속해있던 세계와 균형 잡히 관계로부터 일탈하면서 부분들로 파편화된다. 가령 빅토리아는 그녀의 가슴, 어깨, 어깨 아래 살, 허리, 뱃살, 주름 등의 부위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다.

우리가 몸을 경험하는 방식은 확대하고 축소하며 파편화하는 카메라의 시

147쪽

선을 반영하고 있다. 어쩌면 거꾸로 카메라의 시선은 확대하고 축소하며 파편화하는 우리의 시선을 모방하고 있다고 말해야 옳은지 모른다. 양자의 관계는 일방적이라기보다 쌍방적이다.

 

 

212쪽

아름다움의 경험에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판단, 자유로운 상상력의 활동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다른 타자가 아닌 주체의 고유한 미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스코리아 심사처럼 정해진 기준표의 요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판단은 주체 자신의 판단이라기보다는 기준표의 판단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한 판단의 주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가 아니다. 그는 기준표-주인의 명령에 굴복하고 복종하면서 후보들의 매력을 판단하는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후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명령(로고스)에 따라서 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표라는 목적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의 몸매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를 창조하는 현대의 미학적 인간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213쪽

몸매 만들기는 몸의 예술화가 아니라 몸의 종속화이며, 자유로운 자기 창조가 아니라 강요된 노예적 노동의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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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는 이제 돌이 막 지났다, 하지만  아이의 현재 연령과 상관없이 내 마음 속의 아이는 때로는 초등학생이 때로는 내 또래가 때로는 두살짜리가 되기도 한다.  그냥 내 마음대로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면서 대비하는 것이다.   

집을 장만할 때 다소 조급하고 낭만적으로 구했던 터라, 거주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아이와 관련하여 이 집을 정말 잘 골랐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는, 일층이라는 점과 초등학교로부터 불과 2분거리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가끔 상상 속에서 아이는 늦잠자다 일어나다 학교에 달려가도 크게 늦지 않을 거리. 매일 지각과 싸워야 했던 나로서는 정말 흐뭇해지는 상상이다.  

하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그 짧은 거리에도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매일 매일 그 길을 갈 것이고, 그 길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싹한 공포를 느낀다.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정겨운 것이 아니라, 공포의 원인이 된다는 건 정말 씁쓸한 일이다.    

나영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후배가 말했다. "왜 요즘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건 '요즘'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나영이 사건에 달린 수많은 댓글에 쏟아지는 고백들, 수많은 나영이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묻어뒀던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여줬고, 네티즌들은 공감과 격려의 리플을 달았다.  그들은 예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묻어뒀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영이보다는 동네 노인을 250만원의 벌금형에 처하게 만든 초등학생 소녀의 것과 같은 종류의 기억이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싫지만 참았던 손길들, 말들, 눈길과 숨결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폭력인지도 몰랐고, 알았을 때에도 그 이야기를 듣고 고소해줄 엄마가 없었다. 엄마도 몰랐고, 모르는 게 약이었으니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유정이 분노했던 대상은, 성폭행 자체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던 엄마였다. 하지만 그 엄마는 특정화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성폭행의 상처들이 피해자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말해주고  싸워줄 이가 없었다. 

 

 나영이 사건을 이슈화하는 언론을 보면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비슷한 사건들을 발굴하여 보도하는 기사를 보면서, 나는 이제서야 눈 뜨는 사회가 너무 속상하고 그 개안이 한시적인 것일까봐 걱정스럽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성폭행의 피해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위험과 피해자이면서 침묵을 강요당해야 하는 억압을 감내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많은 나영이들이 이야기할 수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줄 상시적인 창구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추행은 새치기를 당하거나 누군가의 발에 밟히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피해자들은 그런 일들의 피해자처럼  '그냥'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나영이들이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는, 더 많은 나영이가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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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5년간 버려진 성폭행 법의 참담한 실체 공개 - 2부
    from 낯선이름의 시선 2009-10-04 16:12 
    형법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 ------------------------------------------- 제297조 : (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제298조 : (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299조 : (준강간, 준강제추행)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
 
 
 

나영이 사건이라는 검색어가 계속 인기검색어로 뜨길래  

나역시 봤고, 그 끔찍한 사실에 경악하며, 청원에도 서명했다.   

아직 아이와 함께 살지 않는 나지만, 너무나 공포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이 사건을 남일처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이라든가 <밀양> 때문에라도 

한동안 가장 극악한 범죄행위의 하나로 꼽혔던 것이 아동유괴와 살해였는데 

그 못지않은,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한 범죄가 아동성폭행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다.

 

네티즌들도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그덕에 뉴스에도 헤드라인으로 계속 뜨는 엄청난 이슈가 되어버렸다. 

 

그런데...그런데 말이다. 

그 사실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사명감의 네티즌들, 참 고맙긴 한데 

왜 그 퍼다 나르는 글이 죄다 그 성폭행자의 성폭행 과정, 내용에 대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치명적인 장애를 얻게 되었는지만을 알려도 될 것 같은데 

아이를 붙들어다 어떤 행위로, 어떤 과정으로 아이의 장기가 손상되었는지를 

너무나도 선정적인 묘사로 퍼나르고 있다.  

그 내용이 너무도 끔찍해서 몇줄 읽다 저절로 눈이 감겨버렸다.

 

이건..정말 그 아이를 위해서, 그 아이를 성폭행한 그 남자에게 분노해서 그런 건가?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가 그 글들을 볼 때 고마워할까?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신고를 잘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떠올리기도 싫은 성폭행 당시의 상황을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진술하게 한다는 데 있다고 들었다. 

그 죄를 지은 자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그걸 다시 자기 입으로 하고, 상기하는 일은 

엄청난 수치심과 공포를 동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조사하는 경찰이나 검찰은 그 사건이 그저 '사건'일 뿐이다. 

 

지금의 네티즌들도 '분노'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영이와 그녀의 가족들은 일파만파로 퍼져가고 있는 

나영이의 충격적 경험과 상처들에,  

한편으론 새로운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 기분이 들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성폭력 사건 전말의 글귀에 

괴로울 것이다. 

 

나영이 사건을 본 많은 시청자들이 그 아이에게 후원을 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나영이 부모는 거절했단다. 

나영이네 집은 기초생활수급자로 형편이 매우 어렵고(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921440168&cp=nv), 

나영이의 치료비로 앞으로도 많은 돈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도움을 거절했겠는가? 

그만큼, 나영이의 존재가 이런 방식으로 노출되는 것이 공포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영이라는 여성도 앞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지금 그렇게 퍼 나르는 나영이의 경험들이 다시 나영이의 발목을 잡아선 안된다.

네티즌들이 정말...분노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냥 그들이 받은 상처와 결과만을 알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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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30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한, 소위 법 너머에서 또는 법에 '반하여' 행해지는 '개인적 복수'라는 것이 어떤 순간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고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더군요. 저 부모들이 아이가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만약 나였으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 '응징' 또는 '복수'했을 거라고-그자를 죽였을 거라고, 그런 생각만 드네요.

somun 2009-10-01 10:50   좋아요 0 | URL
네, 이해가 갑니다. 저도, 평소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쪽이지만, 나의 딸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신고고 판결이고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서 죽여버리고 싶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이런 일을 하는 자는 용서가 안될 것 같아요. 근데..어제 뉴스를 보니 별 도리가 없는 모양이네요, 법적인 절차상으론 돌이킬 수가 없는. 기껏해야 가석방을 못하게 하는 정도가 전부인 모양...법을 고쳐야 해요.
 

담석증때문에 얼마 전 담낭적출술을 받았다. 나름 전신마취도 하고 하는 '진짜' 수술이었지만 요즘의 의학기술이 워낙 좋아져서, 3박4일이면 퇴원할 수 있는 병이었는데, 나는 좀 특이한 상황때문에 9일만에 퇴원을 하게됐다. 이 특이한 상황이란  처음의 나를 담당한 진료과목이 '내과'였다가, '외과'로 트랜스퍼되었던 것. 처음엔 췌담관 내시경 조영술을 하면서 담도나 담낭에 있을 지 모르는 돌들을 찾아내고, 돌이 발견되면 그것을 제거하는 간단한 내과적 '시술'로 끝날 줄 알고 학기중에 겁없이 입원을 했었다. 그런데 내시경을 넣어 막상 몸 안을 보니, 담낭(쓸개)쪽에 돌이 너무 많아서 외과적 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진단이 내려졌고, 그래서 그 수술까지 받느라 입원이 길어졌다.

 

그 과정에서 담석증이라는 같은 증상에 대한 내과와 외과의 접근방식의 차이 같은 것을 그야말로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내과의들은 매우 친절하다. 그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열심히 묻는 편이고, 매우 자주 나의 바이탈 사인을 체크한다. 검사도 진짜 여러번 한다. 간단한 피검사부터 엑스레이며 CT며...반면에 외과의는 교수뿐 아니라 레지던트, 인턴 조차도 정말 바람처럼 휙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며, 수술을 받은 후엔 내 상처나 몸을 쳐다봐 주지도 않아서 깜짝 놀랐다. 심지어 상처부위의 드레싱 한번도 안해주고 퇴원시키더라. 퇴원 후 하루 이틀 뒤쯤 동네 일반외과에 가서 하면 된다면서. 물론 기초적인 내 바이탈 사인이 정상적이었기 때문일 테지만, '시술' 수준인 내시경 한번을 받으려고 시술 전날에 수차례 검사를 하고, 시술 다음날에 다시 그 검사를 거의 재탕으로 다 하는 내과와 비교하면 너무 낯설었다. 나는 수술한 다음 날 '근데 수술이 잘 되었는지 무슨 검사같은 건 안 해요?'라고 담당의에게 물었다가 '네? 무슨 검사를 또 하라구요?'라는 대답을 듣고 한참 무안해지고 말았다.  

 
-하얀거탑에서의 다이내믹한 수술장면 보여주기


나는 왜 외과의들이 저런 태도를 취할까를 생각했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런 유추가 적당한지 모르겠지만, 우리같은 '글쟁이'들은 논문 한편, 아니 이런 블로그에 낙서 한 바닥만 해도, 제가 쓴 글을 보고 또 보며 고칠 데 없나 확인한다. 더이상 고칠 수 없는 마감 때까지 어딘가에는 실수나 오탈자가 있을 것 같아 쉽게 자기 글을 놓아버리지 못한다. 근데 하물며 다른 사람의 몸에 구멍을 내서, 웬만한 사람은 다 가지고 있는 장기 하나를 떼어 버렸는데, 그 과정에 뭔가 실수나 이상이 있지 않을까를 저렇게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 대목에서 떠오른 것이 그동안 내가 봐왔던 수많은 의학드라마들이다. 대부분의 의학드라마의 주인공은 외과의이다. 흉부외과이건 신경외과이건 소화기외과이건 간에, '메스! 썩션!'따위를 외치며 피를 보여주고 꿈틀대는 장기들을 만져대는 외과의들의 역동적이고 '예술적'인 수술과정이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상정하는 의학의 '본령'(?)이다. 우리는 그런 장면들을 보며 의학의 힘을 경외시하곤 해왔다. 반면에 내과의는 보통 여성 인물들이 맡으며, 그들의 역할은 외과의에 비해 부수적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보살핌'의 '포즈'는 경외시할 대상까지는 되지 못한다.

 

 

그런데 미국드라마 <하우스>는 그동안 드라마에서 그려져 왔던 내과와 외과 사이의 이러한 '계급'을 완전히 전도시켰다. <하우스>에서 외과는 내과의인 하우스와 그의 팀원들이 밝혀 낸 환자의 병을 수술로 고쳐주기만 하면(?) 되는 '따까리' 신세가 된다. 병명을 알 수 없는 이상 증세를 보이는 환자로부터 병인을 진단해 내는 것은 모조리 내과의, 하우스의 몫이다.

 

이처럼 <하우스>는  의학, 하면 외과를 떠올리게 하던 기존의 의학드라마들의 공식을 보란듯이 깨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럼 왜 그동안의 의학드라마들은 굳이 외과만을 다루어왔을까? 실제로는 3D과로 취급되어 외과 전공의의 숫자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 같은 현실에서. 그 이유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비주얼'일 것이다. 수술을 해야 드라마에 장면이 살아난다. 그렇다고 성기 등을 노출해야 하는 산부인과나 비뇨기과 수술을 다루긴 어렵겠고, '메스-썩션'의 메아리가 리듬감있게 울려퍼지며 꿈틀대는 심장, 시뻘건 장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줘'가며 뭔가 제대로 인간의 몸을 고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로는 외과만한 진료과목이 없기 때문이다. 외과 드라마들이 어려운 의학용어를 쏼라쏼라해도 보는 데에 큰 불편함이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드라마들이 '듣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뭔 말인지 못알아 들어도 수술 장면을 보면서 그 긴박한 상황과 수술의 극적 성공이나 실패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의학드라마들은 아마도 외과 쪽의 이야기를 다룰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하얀거탑>처럼 간담췌의 권위자라거나 <카인과 아벨>처럼 뇌신경외과 전문의라거나...좀더 외과 내부의 세부전공을 다루긴 하더라도 외과를 벗어나는 것은 시각매체인 드라마나 영화로서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점이 나를 수술한 외과의들이 보였던 '자신감'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내 몸을 직접 보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문제가 있는 장기를 말끔히 떼어냈으니, 더 이상 궁금할 게 없는 것. 내과의들처럼 직접 보지 않고 여러 검사결과를 가지고 추정을 해야하는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따라서 직접 보여 줄 것이 별로 없는 내과를 중심에 두고 다루었으니, <하우스>는 나름 의학드라마로서는 새로울 뿐 아니라 위험한 시도를 감행한 셈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하우스>는 '마니아' 층을 만들 수는 있어도 대중적 인기를 끌기는 어려운 드라마이다. 너무 말이 많고, 그들의 끊임없는 의학적 토론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반 이상은 이해도 안된다. 그럼에도 미드팬들이나 미국의 시청자들이 <하우스>를 즐겨보는 이유는 뭘까? 나는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사생활의 엿보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우스>의 중심 이야기 패턴은 거의 비슷하다. 한 사람이 멀쩡하다가 갑자기 발병해서 병원에 실려온다. 환자는 일부러이건, 혹은 혼수 상태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어서건 간에 자신이 이러한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환자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하우스 박사의 팀은 새롭게 드러나는 증상들에 따라 그때 그때 새로운 처치방법을 택하지만, 처음엔 쉽게 병세가 호전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몇몇의 증세를 단서로 해서, 그리고 그 환자의 사생활(가족, 거주환경, 생활패턴, 성격, 과거의 병력, 가족력 등)을 파악하게 되면서 환자의 병명과 병인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에 따라 처치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시 병을 회복한 환자는 목숨을 구제받은 대가로 자신의 감춰뒀던 사생활, 비밀을 고해성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부분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알아듣지도 못할 의학용어의 홍수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가며 <하우스>를 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 9살짜리 비만의 꼬마 여자아이가 병원에 심장마비로 실려 들어오자 그 아이가 어린아이가  엄마 몰래 다이어트 약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거나, 어떤 대통령 후보가 어렸을 적 간질을 앓았고 그때문에 간질 치료제를 먹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게 만든다거나, 젊은 청년이 부모님 몰래 제3세계국가에 여행을 갔다가 성병에 걸려온다거나...하는,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그들의 몸과 증세를 통해 파헤쳐 까발기는 과정이 재미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뭔 수치가 무슨 호르몬의 이상으로 높아졌는지, 거기에 뭐뭐 약을 쓰면 증세가 호전되는데 대신에 무슨 부작용이 있는지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못알아 들어도 상관이 없다. 



 

외과가 중심이 되는 대부분의 의학드라마는, 병에 걸린 환자가 '왜?' 그 병에 걸렸는지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아니, 외과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병자가 어떠한 생활, 식습관, 복용력 등을 가졌는지는 관심이 없다. 주인공이 백혈병에 걸린 것이 그의 어떤 생활습관때문이라고 말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주인공이 위암에 걸렸다고, 그가 짜게 먹어서, 매운 음식을 좋아해서, 뭐뭐뭐 약을 장기 복용해서 위암에 걸렸다...식의 말을 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병에 걸리게 된 그 사람의 '과거'는 보통 드라마에서 하나도 안 중요하다. 그냥 병에 걸린 것, 그래서 그 이후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것 자체만이 중요하다. 외과의들은 그런 병을 수술로서 치료해주는 것이고.

 

그런데 <하우스>의 의사들은 '어떻게 병을 치료할 것인가?'의 답을 보통의 의학드라마들이 하는 방식의, 'A증상에는 A~의 치료법을'과 같은 병-치료(수술)법의 대응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A증세는 a라는 원인때문이다'라는 병의 원인-병의 대응표를 갖고 있다. 그들은 병의 치료법은 증세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을 통해 판단해야 정확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원인을 찾기 위해 병자의 '뒷조사'를 열심히 해댄다. 시청자들은 이 뒷조사가 재미있어서 이 드라마를 즐겨보는 것이다. 이동침대에 누워 수술실을 오갈때 나를 보던 사람들의 '젊은 처자가 어쩌다, 뭔 병에 걸려서?'하는 동정과 동시의 호기심 어린 눈빛들처럼.

 

어쨌든, 병, 증상의 원인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으며, 몸의 모든 부위는 서로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하우스>는 독특하고 또 의미있는 의학드라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우스>의 서사는 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묘한 죄의식이나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못마땅하다. 원인을 열심히 캐고, 그 원인들이 대부분 환자 본인의 사생활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때문에 환자들은 자신이 뭔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이런 병에 걸렸다는 죄책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과의와 외과의 앞에서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된 것도 바로 이 <하우스> 때문이었다. 외과의 앞에서의 나는 거의 아무 것도 고백(?)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과의 앞에서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참 쓸데없이) 솔직했다. 나의 생활습관이나 약물복용의 경험 등에 대해서 너무 열심히 털어놨다. 그러지 않으면 <하우스>에 등장하던 수많은 환자들처럼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을 보이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른단 공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겪은 병원과 의사, 의학이란 <하우스>같은 정도의 내 뒷조사를 요구하진 않았다. 내가 40대 이상의 비만 여성들에게 많이 발생한다는 담석증에 걸린 이유를 알기 위해 실컷 내 사생활(?)을 얘기했지만 원인 규명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나의 담당 내과의는 '원인은 정확하게 모릅니다. 뭐 그게 약간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죠' 식의 애매한 답변 뿐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나의 담당의가 무능력해서라기보다는, 그게 실제 현재의 의학의 수준이어서가 아닐까 싶었다. <하우스>처럼 병의 원인을 명쾌하게 밝히고 단정적으로 그 병에 대해 진단해 내는 일은 현실에선 아직 쉽지 않은(어쩌면 위험한기도 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몸을 통해 한 인간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병에 걸린 환자에게 병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시청자들을 매혹하기 위한 과도한 설정일 뿐. 인체는 여전히 신비롭고 너무나 복잡하며, 현실 속의 의사들은 대체로 이 인간의 몸 앞에 겸손하다. 당신이 어떤 '짓'을 하고 살아서 그런 병에 걸린 거라며 비난(?)하는 일은, '독설가 닥터 하우스'가 드라마 속에서나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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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9-10-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우스 흥미로운 것 같아요. 코난 도일의 홈즈-하우스/왓슨 구도를 그대로 차용해서, 결국 현대적 '탐정'=내과의사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기발한 것 같아요. ㅎㅎ

somun 2009-10-01 10:53   좋아요 0 | URL
그렇죠, 새로운 컨셉인 건 분명합니다. CSI도 그렇고 하여간 사람들은 이런 탐정, 수사물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근데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는 이런 류가 극히 적고, 성공 확률도 매우 낮다는 거...왜 그럴까요?

기인 2009-10-05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눈 너무 아픈데 ㅜㅠ 검정바탕 하얀글씨... 저만 그런가요? ㅜㅠ

somun 2009-10-05 23:15   좋아요 0 | URL
음, 좀 그렇네요...근데 지금 이 스킨포맷은 제가 고르는 게 아니고요, 랜덤식으로 매일매일 알라딘이 알아서 갈아입혀주는 거야요...따라서 내일은 또 다른 스킨이 걸리겄지요...내일 거는 이렇지 않을지도 모르니 좀만 참으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