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이제 돌이 막 지났다, 하지만 아이의 현재 연령과 상관없이 내 마음 속의 아이는 때로는 초등학생이 때로는 내 또래가 때로는 두살짜리가 되기도 한다. 그냥 내 마음대로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하면서 대비하는 것이다.
집을 장만할 때 다소 조급하고 낭만적으로 구했던 터라, 거주하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아이와 관련하여 이 집을 정말 잘 골랐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는, 일층이라는 점과 초등학교로부터 불과 2분거리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가끔 상상 속에서 아이는 늦잠자다 일어나다 학교에 달려가도 크게 늦지 않을 거리. 매일 지각과 싸워야 했던 나로서는 정말 흐뭇해지는 상상이다.
하지만 요즘 뉴스를 보면 그 짧은 거리에도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매일 매일 그 길을 갈 것이고, 그 길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싹한 공포를 느낀다.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정겨운 것이 아니라, 공포의 원인이 된다는 건 정말 씁쓸한 일이다.
나영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후배가 말했다. "왜 요즘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이건 '요즘'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나영이 사건에 달린 수많은 댓글에 쏟아지는 고백들, 수많은 나영이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묻어뒀던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여줬고, 네티즌들은 공감과 격려의 리플을 달았다. 그들은 예전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묻어뒀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영이보다는 동네 노인을 250만원의 벌금형에 처하게 만든 초등학생 소녀의 것과 같은 종류의 기억이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싫지만 참았던 손길들, 말들, 눈길과 숨결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폭력인지도 몰랐고, 알았을 때에도 그 이야기를 듣고 고소해줄 엄마가 없었다. 엄마도 몰랐고, 모르는 게 약이었으니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유정이 분노했던 대상은, 성폭행 자체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던 엄마였다. 하지만 그 엄마는 특정화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성폭행의 상처들이 피해자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를 말해주고 싸워줄 이가 없었다.
나영이 사건을 이슈화하는 언론을 보면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비슷한 사건들을 발굴하여 보도하는 기사를 보면서, 나는 이제서야 눈 뜨는 사회가 너무 속상하고 그 개안이 한시적인 것일까봐 걱정스럽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성폭행의 피해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위험과 피해자이면서 침묵을 강요당해야 하는 억압을 감내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많은 나영이들이 이야기할 수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해줄 상시적인 창구들이 마련되어야 한다. 성추행은 새치기를 당하거나 누군가의 발에 밟히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고, 피해자들은 그런 일들의 피해자처럼 '그냥'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나영이들이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는, 더 많은 나영이가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