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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 ㅣ 나남신서 91
김종갑 지음 / 나남출판 / 2008년 7월
평점 :
132쪽
현대인에게 몸은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나 자율적 통일체로 주어지지 않는다. 타고 태어난 운명은 더욱이나 아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옛말만큼 우리에게 낯설고 이물스런 개념도 없을 것이다. 기원적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은 리콜이나 애프터서비스처럼 성형외과나 바디클리닉 등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관리되고 집중적으로 교정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앤서니 기든스의 주장처럼 이제 몸은 하나의 "프로젝트", 보드리야르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아름다운 소비대상"이다. 프로젝트나 상품으로 간주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는 몸의 파편화이다. 만약 몸을 하나의 온전한 유기적 전체로서 받아들인다면 몸의 한 부위에 성형의 칼을 들이대는 순간 몸 전체가 새로운 이물질의 침입에 적응하기 위해 방어 체계를 형성하고, 그러면서 미세하게나마 총체적으로 유기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렇다면 예측할 수 없는 몸의 반작용이나 부작용이 두려워서 감히 성형의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무도 지방흡입수술이나 박피수술, 성형수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33쪽
몸은 한꺼번에 하나로서 주어진 총체가 아니라 분해되고 재결합될 수 있는 부분들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싫증이 나면 자유롭게 부분을 떼어내고 새롭게 장식을 할 수 있다.
134쪽
몸의 파편화는 외계인의 침입이나 신종 바이러스처럼 현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류가 문명화의 길을 걸으면서 몸도 점차 파편화되기 시작하였다. 만약 몸을 부분들의 기계적 결합으로 볼 수 없었다면 서양의학, 특히 해부학은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처럼 주어진 유기적 전체를 부분으로 분해하고 계, 기관, 조직 등으로 분류한 다음 다시 하나의 몸으로 봉합하는 과정, 우리의 몸을 해부대 위에 놓인 개구리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의술의 발달에 선행되었다.
135쪽
몸의 재현과 관련해서 발생했던 몸의 파편화, 몸의 수학적 건축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데카르트도 그러한 육체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화가들과 차이가 있다면 그가 몸을 물리적인 현상으로 접근하였다는 점이다. 몸이란 무엇인가?
136쪽
칼로 자르면 두 동강이 난다는 점에서 몸은--잘라지지 않는--정신과 다르다. 몸은 자르면 최소 단위를 향해서 계속 분절되는 것이다.
육체는 계속해서 분할 될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명한 진리이다. 그러나 바로 이 자명한 진리로서 육체의 무한 분할 가능성 명제에서 딜레마가 탄생한다. 그리고 바로 이 딜레마를 중심으로 현대의 육체는 전통적 육체로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원칙적으로 무한하게 분할할 수 있는 듯이 보이지만 분할이 반복되다 보면 소실점처럼 어느 순간에 더 이상 분할 될 수 없는 지점에서 분할의 대상 자체가 소멸해버린다. 이론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존재가 실제적으로는 갑자기 무로 사라지는 것이다. 양의 변화가 질적 변화를 초래하고, 그러면서 생명은 죽음으로, 유기체는 무기체로 바뀌어버린다.
146쪽
빅토리아 베컴의 사진은 그러한 새로운 논리와 질서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 주목되어야 하는 증상은 육체의 파편화이다. 두세 배 크게 확대되는 순간 육체는 자신이 지금껏 속해있던 세계와 균형 잡히 관계로부터 일탈하면서 부분들로 파편화된다. 가령 빅토리아는 그녀의 가슴, 어깨, 어깨 아래 살, 허리, 뱃살, 주름 등의 부위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다.
우리가 몸을 경험하는 방식은 확대하고 축소하며 파편화하는 카메라의 시
147쪽
선을 반영하고 있다. 어쩌면 거꾸로 카메라의 시선은 확대하고 축소하며 파편화하는 우리의 시선을 모방하고 있다고 말해야 옳은지 모른다. 양자의 관계는 일방적이라기보다 쌍방적이다.
212쪽
아름다움의 경험에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판단, 자유로운 상상력의 활동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다른 타자가 아닌 주체의 고유한 미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스코리아 심사처럼 정해진 기준표의 요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판단은 주체 자신의 판단이라기보다는 기준표의 판단이라고 해야 옳다. 그러한 판단의 주체는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가 아니다. 그는 기준표-주인의 명령에 굴복하고 복종하면서 후보들의 매력을 판단하는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후보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명령(로고스)에 따라서 몸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준표라는 목적에 가까워지도록 자신의 몸매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를 창조하는 현대의 미학적 인간의 이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213쪽
몸매 만들기는 몸의 예술화가 아니라 몸의 종속화이며, 자유로운 자기 창조가 아니라 강요된 노예적 노동의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