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라는 감정은 무엇일까?

 

방금 '황경신'이 쓴 <초콜릿 도서관>이란 책을 덮었다. 그녀의 글에 천사들의 회의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은 '인간의 감정에서 질투를 제거할 것인가'라는 안건을 두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다수결이 아니라 모두의 동의를 구해야만 해결되는 천사들의 해법. 참으로 평화적이기에 지난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다수결이란 폭력을 제쳐두고 모두의 합의라는, 도달할 수 없는 해법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만 해도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 천사적인(?) 방법이지 싶다. 그런데 반전은 인간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 인간의 질투를 논할 수 없다는 의견에 따라 또 한 명의 천사가 인간계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로 돌아온 천사가 한 명도 없다는...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질투는 나의 힘?

 

질투란 참으로 오묘하고 복잡한 감정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살아갈 힘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죽을 용기를 주기도 한다. 절망할 힘과 희망을 가질 기회를 주는 질투를 도대체 뭐라고 정의내려야 할까? 질투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그 수많은 질투의 얼굴을 겪었기 때문이겠지. 난 참 많은 것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했었다. 어렸을 때 기억이 사뭇 흐리긴 하지만, 뭔가를 부단히 부러워하고, 부러워한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나는 성장했던 것 같다.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새로운 것 없이 뛰놀 때는 딱히 무언가를 부러워할 일도, 창피해 할 일도 없었는데 다른 동네를 보거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부러워도 하고, 부끄러워도 하며, 자랑스러워도 하고 창피해도 하면서 질투라는 감정을 맛본다. 우연히 만나게 된 이질적이고 고급스러운 세계에 대한 감상. 나도 저걸 갖고 싶다거나 저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

 

내가 기억하고 있던 최초의 질투는 엄마 친구 딸에 대한 것이었다. 요즘과 달리 마당 있는 한옥집이 일반적일 때 그 아이는 아파트라는 곳에 살고 있었고, 한 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자던 그때에 그 아이는 자신만의 방에 놓인 침대에서 잠을 잤고, 주말마다 엄마 손 잡고 사람들로 북적대는 목욕탕에서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때를 밀던 그때 그 아이는 개인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거품 가득한 욕조는 아니었지만 괜히 고급스럽고 여유러워 보이던 곳이었다. 우리 엄마한테도 없던 화장대가 있던 그 아이의 방. 그래서 난 나보다 어린 그 아이 집에 시간이 날 때마다 놀러갔었고, 그 집 근처의 회사에 다니고 있던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돌아왔었다. 그 집을 뒤로 하고 돌아올 때면 꼭 꿈에서 깨어나는 듯 서글프고 허망한 마음이 들곤 해서 나를 부르는 아빠의 전화소리가 원망스럽기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아이를 부러워하던 어린 나의 마음이 아빠에게도 전해졌겠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괜스레 아빠한테 미안한 생각이 든다. 분명 나의 부러움은 죄가 아닌데 왠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아빠에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을 과장되게 늘어놓았고, 아빠는 유독 나의 말에 대꾸가 없었다.

출발부터가 다른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당시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고, 원하는 것은 노력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주입받던 시절이었다.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렸을 때는 참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생활했었다. 원하는 것은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얻을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주문은 나를 희망차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철이라는 게 들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삶은 평등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님을 말이다. 찬란한 봄이 오던 그 시간, 차갑던 겨울을 맞이하던 그 시간 나도 모르게 알게 된 것이 있다.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이 제주도라면 겨울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서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이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봄을 먼저 맞이한 제주도에게 겨울도 먼저 선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봄을 먼저 맞이한 그곳에 겨울은 더 늦게 다가오곤 했다. 자연에서조차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그런 것이다. 평등은 모두가 똑같은 것이 아니라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시작한 사람들에게 출발점을 논할 때 쓰는 참으로 졸렬한 단어였다.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결국 평등을 놓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중시해야 한다는 소리일 테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일까? 

결국 하고픈 말이 없다는 소리일 테지. 평등은 없다. 질투는 힘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는 소리를 하고픈 건데 그래서 결론을 어찌 내야할지. 나에게 질투는?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왜? 좀더 나아지기 위해서.

몰라몰라 나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