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라
칼 에릭 스베이비. 텍스 스쿠소프 지음, 이한중 옮김 / 뜰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사회적 발전을 어떻게 볼 것인가. 급격한 경제성장을 거쳐 OECD가입국이라는 명찰까지 얻기에 이른 대한민국. 이와 함께 항상 등장하는 박정희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나는 혼란스럽다. 어느 쪽의 말이나 옳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양측의 주장은 장기간 집권을 통해 이루어온 개혁과 성장의 옳고 그름을 따진다. 그가 이끌어온 정책을 통해 변화한 한국을 근거로 하고 있고, 이는 추리나 추측이 아닌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숫자로 표현되는 성장에 대한 논거는 반박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은 개인의 철학에 따라 판정을 하게 되는데 오히려 나의 어설픈 앎이 판단력을 흐리는 경우라 하겠다. 하지만, 민중의 삶과 그 지속가능성에 대한 가치로 판단하자면 분명히 ‘성장’의 ‘그늘’이 돋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자유주의 경제는 관리대상이 되는 영토의 ‘확장’과 ‘소비’를 기반으로 한다.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기업이 크고 수출이 늘고 신기술과 문물이 들어오고 그들의 지식을 얻기 위해 ‘두뇌’들이 유학을 떠나기도 하고 그들이 지식으로 다시 들어오고 하는 일들이 오늘의 우리 사회의 현재의 ‘수준’에 이르게 한 원동력이다. 하지만, ‘다수의 행복’이라는 가치로 보자면 과연 못 먹고 못 입던 그 시절에 비해서 국민의 행복함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일각에서 GNP가 아닌 GNH(Gross National Happiness)로 따져보자는 주장과 연관하여 우리의 것은 투발루와 파키스탄, 쿠바 등과 같은 나라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자살자가 해마다 늘어나고 이민자들이 늘어가고 돈을 노린 칼부림과 총성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대에 사는 것이 결코 안정과 편안함과는 어울리지는 않는 일이다. 개화기 이전의 조상의 삶은 대부분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에 의해 수정되거나 삭제된 영향으로 이 책의 저자와 같은 시각으로 분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분명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문화는 무너져버린 전통적 가치와 함께 급격히 쇠락해왔음은 틀림없는 일이다.

총을 가지고 있던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항해술 덕택이었다. 자신들만이 ‘중심’이라 믿었던 유럽 백인들에 의해 원래 있던 원주민들의 땅을 ‘신대륙’이라 일컬으며 미개한 ‘원주민’들의 정신과 문화를 짓밟았다. ‘신대륙’을 접수한 유럽의 백인들은 당시 그들이 자랑하는 ‘문명’에 길들여진 수준의 눈으로 원주민을 바라본다. 지저분하고, 미개하며, 헐벗고, 문맹에다 교양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불 수 없는 그들은 미생물 같은 존재였다. 침략과 약탈의 시대가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던 시대. 파리채로 파리를 잡는 것보다 더 쉽게, 총으로 원주민을 살해했다.

책의 배경이 되는 호주대륙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등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침략속의 살육은 자연스럽게 ‘노예제’로 이어졌다. 미개한 원주민들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노력은 소수의 학자에 의해 꾸준히 있어왔지만 이미 한줌의 재처럼 남아있는 그들의 전통과 문화, 관습을 좆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다만 이 책은 그들 문화를 이해하는 서구의 학자와 원주민의 핵심가치를 담은 ‘이야기’를 전수받은 원주민의 후예가 함께 기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이목을 끈다.

그들의 창조 설화부터 시작해서, 역할과 소통,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어찌 보면 일개 변방에 사라져가는 소부족의 ‘이야기’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뭐가 그리 중요할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다.


   
  우리사회가 상대적으로 워낙 발전되었기 때문에 덜 발전된 사회로부터 배울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덜 발전된 것이 대체 어떤 것일까? 세계를 지속시키는 것일까, 착취하는 것일까? 자연을 보살피는 것일까, 오염시키는 것일까?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일까, 제국을 건설하는 것일까? 무형의 것을 생산하는 것일까(예술, 지식, 관계), 유형의 것을 생산하는 것일까(자동차, 컴퓨터, 총)? 자연요법의 개발인가, 화학약품을 개발하는 것일까?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한 두 시간씩 ‘일’하는 것일까? 여덟 시간 이상 일하는 것일까?
 
   

 


결론처럼 다가오는 위의 글은 왜 지금 우리가 석기시대의 문명을 가진 미개한 ‘원주민’의 소통방식과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지를 말하려하는듯 하다. 후대가 살아야 할 이 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한 지금 ‘소비’로 지구생태계를 위협하는 오늘의 산업사회가 그들에게 배울 점은 충분하다. 다만 어떻게 받아 ‘지금’의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은 또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이미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우리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탈무드’처럼 세대를 전해서 공동체의 문화를 전달하는 이런 방식이 그들의 방식이었다. ‘눙가바라’ 전통방식에 따라 공저자의 손으로 그려진 그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피카소의 그림을 통해 얻는 쾌감과 비슷하지만 또 다른 좀 더 넓은 세계관과 감정, 문화와 이야기를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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