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서한집 상응 1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재원 옮김 / 읻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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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은 편지가 많은데도, 다시 읽어도 좋다. 특히 나쓰메 소세키가 자기 문하생이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다 보면 그 따스한 위로와 격려에 나도 모르게 힘을 얻는다. 절친한 벗 시키에게 보낸 편지는 여전히 눈물나게 만들고. 인간 소세키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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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25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신착도서칸에서 봤는데 지나쳤거든요 ㅎㅎㅎㅎㅎㅎㅎㅎ 다시 가면 아직 있을까요?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잠자냥 2020-11-25 11:3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어어요. 예전에 읽은 편지들이 많아서 또 사긴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진지해 보이는 소세키가 나름 좀 웃긴 면도 있답니다. ㅋㅋㅋㅋ

scott 2020-11-27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와이프에게 폭군에 폭력도 휘둘렀는데 제자들에게 따스한 스승이였네요

잠자냥 2020-11-27 09:32   좋아요 0 | URL
네, 여기 편지에도 보면 부인에게는 다정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던 것 같고요.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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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잘 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작가가 있다. 하루키는 어떠한가? 돌이켜 보면 나는 그의 수많은 에세이와 소설을 종종 읽었어도 그 안에서 가족의 흔적을 느낀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특히 그 많은 에세이에서 그의 부모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 적이 있던가? 그렇지 않다. 소설만 봐도 부모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 같다. 때문에 하루키가 <고양이를 버리다>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한다니,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라……. 하루키도 이제 꽤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인상 깊은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느 여름 오후, 소년 하루키는 아버지와 함께 해변으로 고양이를 버리러 간다. 지금으로서야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를 유기한다면 온갖 비난에 시달릴 테지만 그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다. 하루키가 아버지와 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장면을 묘사할 때, 내 머릿속에도 유년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장면을 읽다가, 이 고양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조금은 예상할 수 있었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그 오래전, 어느 날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노랑 눈에 온몸이 새까만 고양이었다. 할머니는 녀석이 마당에 있는 쥐를 잘 잡는다면서 밥도 주면서 챙겨주기 시작했다. 아주 흔한 ‘나비’라는 이름도 당신이 몸소 붙여주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마당 장독대나 지붕 위에서 가르랑 거리는 녀석을 피해 다니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마당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나비’를 예뻐하던 막냇동생에게 물어보니 할머니가 가방에 담아서 버린다고 데리고 나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순한 녀석이다. 지금 키우는 내 고양이들은 병원에 가려고 케이지에 넣으려고 하면 몇 시간을 씨름해야 하는데, 할머니 혼자 그 검은 고양이를 가방에 넣었다니, 참으로 순한 녀석이 아닌가. 아니면 이 집에서 더는 환영받지 못하리라는 걸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일까. ‘나비’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지 않았던 나는 그렇구나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동생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린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방 안에서 놀다 지겨워진 우리는 마당으로 나갔는데,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붕 위에서 ‘나비’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제 온몸을 핥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천연덕스럽고 느긋해 보였다.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가냐는 듯 참으로 당당했다. 한참 뒤에 할머니가 돌아오셨다. 시침 뚝 떼고 “할머니 어디 갔다 와?” 하니, “나비가 하도 시끄럽게 해서 저기 내다 버리고 왔다” 하신다. 동생들과 나는 배꼽을 잡고 웃으며 지붕 위를 가리켰다. 지붕 위를 쳐다 본 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저런, 저런 요물! 아주 멀리 내다버렸는데!”하시고는 당신이 졌다는 듯 꾸부정한 허리를 매만지며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나비’는 할머니보다 훨씬 빨리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역시 고양이는 남다른 데가 있구나, 무서운 존재야,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무렵 하필이면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키도 아버지와 함께 해변에 고양이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놀랍게도(?) 그들보다 먼저 고양이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이때 하루키는 아버지의 얼굴에 스치는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엿본다. 처음에는 둘 다 어리둥절해 하다가 아버지는 이내 감탄하고 마지막에는 다소 안도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고양이를 계속 키우게 된다. 하루키는 이 일화와 아버지의 표정에서 아버지의 과거, 그가 살아온 생애를 더듬는다. 아버지는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장남이 아니었던 그는 그 옛날 형편이 어렵던 시절, 입 하나라도 줄이고자 하는 마음에 남의 집에 양자로 갔다가 파양되어 돌아온 경험이 있다. 하루키는 버려졌으나 집으로 다시 돌아온 고양이를 보며 안도하는 아버지 얼굴에서 이런 아버지의 삶을 유추해낸 것이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불단 앞에서 오래도록 경을 외운다. 어째서일까. 수수께끼 같은 이 행동 또한 아버지의 삶과 관계가 있다. 승려의 집안에서 태어나 조용히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전쟁터에 끌려가 참혹한 경험을 한다. 그때 죽은 동료들을 위해 불단 앞에서 오래도록 경을 외우는 아버지를 알게 되기까지 하루키에게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속했던 부대를 후쿠치야마 보병 제 20연대라고 착각하는 바람에 아버지의 군 이력을 자세히 조사하기까지, 그렇게 하고자 마음먹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아버지가 속했다고 생각했던 보병 제20연대는 난징 함락 당시 가장 먼저 공격한 것으로 이름을 날린 부대였고, 이 부대의 행동에는 유난히 피비린내 나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하루키는 아버지가 이 부대의 일원으로 난장 공략전에 참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오래도록 품었던 탓에 그의 종군 기록을 조사해보려는 결심을 좀처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양이를 버리러 간 기억, 돌아와 안도하는 표정, 불단 앞에서 매일 아침 불경을 외우던 아버지의 모습……. 이런 사소한 행동에서 하루키는 아버지의 중요한 상처 두 가지, 버림받은 기억과 전쟁의 참화를 몸소 겪은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상처와 아픔을 헤아리고 이해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아버지와 성격이 달랐던 하루키는 아버지와 오랫동안 불화하고, 이십 년이 넘도록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지경까지 간다. 마침내 그가 아버지와 어렵사리 대화를 다시 나누게 된 것은 아버지가 죽기 얼마 전, 아버지의 나이 아흔 살, 하루키가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던,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87쪽)


이 작은 책은 나에게 온갖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이십 년 이상 대화하지 않은 아버지, 그가 죽기 직전에야 화해한 아들……. 내게도 이십 년 이상 대화는커녕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아버지가 있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좋아하지도 않고, 그가 죽는다 하더라도 하루키처럼 대화를 나누며 화해할 생각도 들지 않는 아버지이지만 그럼에도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뭐가 어찌되었던,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 것 같다. 내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좋은 아버지는 아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가정에 알맞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돌아보면 하루키가 아버지를 추억하듯이 내게도 아버지와 얽힌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자전거를 가르쳐 주고, 내 인생 첫 자전거를 사준 사람도, 기타가 갖고 싶다는 말에 고등학생 때 선뜻 통기타를 선물한 사람도, 대학 입학 기념으로 모토로라 타키온을 사온 사람도 모두 아버지였다.

책장을 넘기다 작은 그림 하나에 시선이 오랫동안 머문다.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가 나란히 있는 이 그림.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 모습 같기도 하고, 나와 내 아버지 모습 같기도 하다. 피를 나눈 사이이지만 언젠가는 서로 결국 각자의 길을 걷게 되는 존재들. 때로는 불화하기도 하는 존재들. 하루키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그 나이에 내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에 아버지와의 화해가 과연 가능할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은 책은 아버지, 그리고 그를 낳은 할머니와 고양이에 얽힌 이런저런 상념을 깊은 밤에 불러일으킨다. 하루키가 아버지의 사소한 몸짓에서 한 사람으로서의 상처나 아픔을 헤아렸던 것처럼, 내게도 그런 계기가 될 일이 과연 있을까. 내 아버지의 인생이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면 나 또한 지금 이렇게 나로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를 곰곰 생각해 본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 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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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24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리뷰를 좋아해서 늘 읽곤 하지만 이 리뷰는 특히 좋네요. 이 책이 얼마나 얇은지 이미 들어왔는데, 그 안에서 이런 감상이 끌어올려지다니... 이 책이 더 궁금해지고요.
그런 한편 아버지란 존재는 대체 어떤걸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분명 나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오롯이 사랑할 수만은 없는 그런 감정에 대해서요.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아버지랑 친한 사이이고 친구들이 그런 아버지와 저의 관계를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느냐 하면 거기에는 그렇다는 답을 할 수가 없거든요. 그보다는 인간적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을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0-11-24 11:36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정말 얇아요. 작고 ㅎㅎ 그런데 후기에 보면 하루키가 이 책은 단독으로 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그게 좀 이해가 가요. 다른 글들하고 섞어서 엮어 내기 좀 뭐한 그런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하루키의 그 심정도요...

전 가끔 다락방 님 글 읽다 보면 아버지랑 사이가 참 좋아 보여서 부럽기도 하고, 저런 감정은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는데요. 그런 다락방 님에게도 아버지와의 사이에는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요. ㅎㅎ 아버지에게 좀 복잡한 심정이 있는 사람은 이 책에서 느끼는 게 남다를 것 같아요.

이 책은 다 읽고 값 좋을 때 팔아야지 했는데, 왠지 갖고 있을 거 같습니다. ㅎㅎㅎㅎ

단발머리 2020-11-24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리뷰 & 불평 들었던것 같은데 잠자냥님 리뷰 읽으니 이 책이 새롭게 보이네요. 고양이에 대한 추억도 그렇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그렇구요.마음이 촉촉해지면서도 말랑해지는 그런 리뷰에요. 무엇보다 저의 눈길을 끈 건 이 문장.

그 무렵 하필이면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양이가 무서워 피해다니는 소녀는 그 무렵 이미 <검은 고양이>를 읽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잠자냥님이 된 것이죠^^

잠자냥 2020-11-24 11:54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책에 대한 불평을 보면 대부분 책값에 비해 책이 얇다! 장삿속이 너무 심히다! 인데.... 저도 책을 읽기 전엔 좀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후기 보면 하루키가 이 글은 단독으로 냈으면 좋겠다고 밝힌 부분이 있어요. 글을 읽고 나면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아버지에게 바치는 책쯤으로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ㅎㅎㅎ <검은 고양이> 정말 무서웠습니다!!!!! 제가 그래서 그 작품 때문에 그 시절부터 서른 넘기까지 고양이를 무서워했다는 거 아닙니까. 지금은 세 마리 집사이지만... 냥이들, 무섭기는커녕 그 하찮은 이빨만큼 하찮은 것들 ㅋㅋㅋㅋ 이젠 귀여워 죽겠어요. 인생이란 참 놀라운 반전 ㅎㅎㅎㅎㅎ
 
휴식의 정원 대산세계문학총서 125
바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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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의 정원’이 있는 대저택을 둘러싼 두 가족의 흥망성쇠를 담은 이야기. 바진은 이 두 가족 이야기를 쓰면서 문학이 그저 세상의 비참과 고통을 폭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랑과 용서, 화해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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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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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이렇게 슬픔 많은 인생이라면 살고 싶지는 않을 것 같구나. 등장인물 개개인이 사랑과 연민, 가족애 등으로 버티는 모습을 그리는 가운데 중국 사회가 지닌 모순은 많이 희석된 느낌도 든다. 자전과 펑샤 두 여성 캐릭터도 위화의 판타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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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1-19 0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별로 재미 없게 읽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아서 좀 어리둥절 했습니다. 좀 과하게 조작된, 소설이야 다 조작된 것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런 자국이 많이 나는 거 같아서요.

잠자냥 2020-11-19 09:35   좋아요 0 | URL
<가랑비 속의 외침>이 무척 좋아서 이 작품을 뒤늦게 읽었는데 읽는 내내 좀 의아하더라고요. 푸구이가 자기 인생을 운명이다, 운명이다 하면서 체념하는데 사실 운명이 아니라 선택적인 면도 많잖아요. 일단 도박으로 가산 탕진하는 것도 운명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인정 많은 개인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힘든 인생 버텨나간다고 하기엔,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들을 너무 나이브하게 그린 것 같고요(작가가 아마 그렇게 검열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들의 죽음을 그렇게 쉽게 용서하는 부모라니 저는 믿을 수가 없네요. 위화가 인간을 너무 희망적 존재로 본 것은 아닌가 싶기도. ㅎㅎㅎ 암튼 <가랑비 속의 외침>이 저는 훨씬 좋더라고요.

잠자냥 2020-11-19 09:36   좋아요 0 | URL
아니 그리고 푸구이 같은 놈한테 제발로 다시 걸어가는 여자라니, 자전은 무슨 백치인가요? ㅋㅋㅋㅋㅋㅋ 위화는 자전이나 펑샤 같은 지고지순 순종형 여자가 이상형인가 봅니다.
 
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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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카메라에 이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다 보니 사진을 인화하는 일 자체가 드물어졌다. 어느 날은 문득,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앨범을 뒤적이면서 사진을 보며 추억에 잠기는 일은 없겠구나 싶어졌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외장하드 같은 곳에 담긴 사진들은 기계가 바뀔 때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조금 더 부지런을 떨어서 사진을 간추려 인화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해 보기도 한다.


《도덕적 혼란》은 빛바랜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그것도 어느 여성의 한평생이 담긴 낡은 사진첩. 이제는 노인이 된 여성이 자신의 지나간 시절을 담은 사진첩을 꺼내 들여다보며 옛일을 떠올린다. 그 추억은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즐거운 순간도 분명 있지만 못마땅하고 고통스럽고 그 당시는 물론이려니와 지금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여성의 이름은 ‘넬’- 오랜 파트너인 ‘티그’와 아침에 눈을 떠 식탁에 마주한다. 이 노년 커플은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낸 듯 서로에게 무심하면서도 매우 익숙하다. 평온한 한때를 보내는 이들의 일상이 그려지면서 (<나쁜 소식>) 《도덕적 혼란》은 시작한다.

첫 작품을 다 읽고 난 뒤 조금 낯설었다. 내가 이제까지 접한 애드우드의 작품들은 대부분 장편이었고 그것도 주로 《시녀이야기》처럼 SF의 외피를 둘렀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레이스》처럼 조금 먼 시대의 이야기이거나 했다. 그런데 동시대의 늙은 커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편이라니, 게다가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어느 평범한 아침의 모습이라니, 이건 단편인가? 아니면 장편의 시작부분인가 그조차도 불분명하다.

조금 더 읽어보기로 한다. 두 번째 작품인 <요리와 접대의 기술〉에서는 느닷없이 세월을 훌쩍 건너 열한 살 소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녀의 이름은 ‘넬’- 그제야 의문이 조금 풀린다. 앞선 이야기의 노년의 넬과 소녀는 동일인물이다. 《도덕적 혼란》은 바로 이 ‘넬’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소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순간순간 중요한 장면을 포착해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요리와 접대의 기술>의 소녀 넬은 중년의 나이에 노산을 앞둔 어머니와 외딴 시골집에 단 둘이 남겨져 있다. 아버지는 부재중이고, 출산이 임박한 어머니를 돕는답시고 이 어린 소녀가 태어날 동생에게 입힐 옷을 뜨개질 한다. 벅찬 나이임에도 집안일을 거드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소녀는 이 모든 일을 자진해서 즐거이 하고 있을까? 소녀는 왠지 기뻐 보이지 않는다. 출산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대체 아버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저 궁금하기만 하다. 태어난 동생은 예민하기 짝이 없어서 늘 울어대기 일쑤이고, 아이를 달래는 일도 넬의 몫이다. 어머니는 산후우울증인지 아이 돌보는 일도 시들하다. 아니, 다른 집안일도 벅차 보인다. 넬은 여느 아이들처럼 나가서 놀고 싶지만 동생을 돌봐야 한다. 그러다가 자기의 이런 처지에 참다못해 폭발한다. “내가 왜 해야 해요? 내 아기가 아니잖아요. 내가 낳은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낳으셨잖아요.” (<요리와 접대의 기술>, 49쪽)

대체 이 중요한 때 아버지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이 어린 소녀에게 아이 돌보는 일과 집안일이 떠맡겨 진 것일까 불편한 심기가 일면서 넬에게 자못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울하고 그저 시들시들한 넬의 어머니 모습도 마음이 쓰인다. 게다가 넬의 여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어서 다루기도 몹시 까다롭다. 열 살이 넘는 나이차이와 극명한 성격차이를 보이는 이 두 자매의 미묘한 갈등은 왠지 평생 이어질 것만 같다.(<머리 없는 기수>), 조금 더 자라 수험생이 된 넬, 좋아하는 남자 친구도 생겼고 영문학에 관심이 싹튼다. 선생님의 가르침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선으로 문학 작품을 파악하는 능력도 있다. 수학처럼 똑 떨어지지 않는 문학이란 과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는 남자 친구에게 여러 차례 문학을 가르쳐주는 넬. 그런데 서로 다른 관점 때문에, 또는 똑똑한 체하는 넬이 못마땅한 남자 친구의 열등감 때문에 두 사람은 크게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나의 전 공작 부인>). 그리고 이즈음 넬은 남학생과 여학생에게 주어진 길이 다르다는 것도 깨닫는다. 성차별을 일상에서 직접 마주하는 것이다.


남학생들은 의사, 변호사, 치과 의사, 회계사, 엔지니어가 되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우리 여학생들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진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혼을 하거나 노처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적이 좋다면 이 혼란스러운 갈림길에서의 선택은 어느 정도 미룰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전 공작부인>, 109쪽)


넬은 결혼하느니 영문학을 전공하는 길을 택하고, 대학을 졸업해 프리랜서 편집자이자 단기 계약직으로 살아가는 전문직 여성이 된다(<다른 날>). 그러나 1960년대는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며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여성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시대이다. 넬은 다른 여성보다 많이 배웠는데도 결혼하지 않았기에 안정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늘 주변인으로 맴돈다. 그런 데다가 급기야 ‘티그’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만난다. 그런데 이 남자는 어디가 매력인지 도무지 모르겠는 주제에 유부남이다. 넬보다 나이도 훨씬 많다. 그런 주제에 아내 ‘오나’와 이혼하지 않는다. 도망치듯 시골에 집을 얻어서는 주말마다 아들 둘을 불러서 캠프 여행이라도 온 듯이 지낸다(<도덕적 혼란>, <흰 말>). 그럴 때 넬은 처음엔 자리를 비워주다가 나중에는 베이비시터처럼 ‘티그’와 ‘오나’ 사이의 아이들을 돌본다. 사실 넬은 작가인 오나의 편집자로 일하다, 오나의 주선으로 티그를 알게 됐다. 자유로운 생활을 꿈꾸던 오나가 의도적으로 티그에게 넬을 소개했던 것이다. 뒤늦게야 오나가 원했던 게 ‘가정교사’였음을 깨닫는 넬.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렇게 지내던 그들에게도 노년이 찾아오고 마침내 오나는 넬에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온다(<혼령들>). 이때 나는 티그와 오나 이 두 부부에게 치가 떨릴 만큼 진저리가 쳐졌는데(특히 티그), 넬은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린 시절처럼 동생 돌보기와 같이 자신에게 부당한 일이 주어졌을 때 “내가 왜 해야 해요?” 반문하는 넬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세월은 넬의 그런 당당함을 앗아가 버렸다. 이런저런 것을 모두 헤아린 다음 결국 넬 자신에게 가장 좋으리라 여겨지는 선택을 한 것이겠지만, 오랜 세월 이리저리 치이며 살다보니 스스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만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함이 남는다. 더욱이 티그와 함께 살면서 넬과 어머니 사이는 더 회복하기 어려워졌다. 결혼하지 않은 상대와 함께 사는 것을, 그것도 아내가 있는 남자와 동거하는 것을 어머니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넬의 이 인생이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영문학을 선택한 일? 티그를 선택한 일? 티그와 함께 농장에서 살게 된 일? 티그를 고른 일만큼은 분명 나쁜 선택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이런저런 불행과 고통과 ‘도덕적 혼란’에 빠지게 되지 않는가. 물론 행복한 순간도 있겠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인생에 언제나 좋은 선택만 있을 수는 없다. 뒤돌아보면 후회되는 선택이 얼마나 많은가. 그로 인한 결과도 모두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넬은 그렇게 한다. 자기의 선택이 빚어내는 온갖 결과들을 스스로 감당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늙어간다. 넬 뿐만이 아니라, 티그도 넬의 동생도, 넬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게 늙어간다(<래브라도의 대실패>, <실험실의 소년들>). 생의 끝에 놓인 넬의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에서는 왠지 코끝이 시큰해진다. 모두가 그렇게 늙어갈 테니까. 노년의 커플이야기로 시작해, 황혼기에 접어든 부부의 모습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도덕적 혼란》은 이렇게 한 여성, 아니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그리면서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평생 붉게 타오르는 유화와 같은 작품을 썼던 작가가 노년에 이르러 남긴 단 한 편의 수채화 같은 작품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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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1-18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읽어보려고요. 원래 읽으려했지만 ㅎㅎ 잠자냐님 리뷰 읽으니 새로운 세계네요. 새로운 우주가 열리려고 해요!

잠자냥 2020-11-18 21:01   좋아요 0 | URL
넵넵 읽어 보세요~

비연 2020-11-1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어야겠네요 ^^

잠자냥 2020-11-18 21:01   좋아요 0 | URL
읽으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