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언제 읽어도 좋은 시(詩)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펼쳐 읽다가 나는 다시 한 번 미소 짓는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울까, 눈앞에 선명하게 그 광경이 그려진다. 어디 이 시뿐인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여우난골족’ 등등 백석에겐 말 그대로 주옥같은 시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나는 백석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그동안 그의 시(詩) 말고는 다른 작품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백석의 수필과 소설을 접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고 하니, 그저 반가울 뿐이다. 게다가 이 책을 엮은이가 일찍이 <정본 백석 시집>을 펴낸 ‘고형진’이니 더 믿음직스럽다.

책을 펼치고 가장 첫 번째 작품인 ‘해빈수첩海濱手帖’부터 읽는다. 바닷가 마을 풍경을 ‘개’, ‘가마구’, ‘어린아이들’로 나눠 묘사하고 있는데, 그 시각과 묘사하는 언어가 시를 쓰는 백석 그대로이다. 그동안 줄곤 외국 문학 번역서를 읽느라 거의 잊고 지낸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오랜만에 백석의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느낀다. 아, 어쩜 이렇게도 좋은가. 역시 백석이구나.



저녁물이 끝난 개들이 하나둘 기슭으로 모입니다. 달 아래서는 개들도 뼉다귀와 새끼 똥아리를 물고 깍지 아니합니다. 행길에서 걷던 걸음걸이를 잊고 마치 밀물의 내음새를 맡는 듯이 제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는 듯이 고개를 쑥- 빼고 머리를 쳐들고 천천히 모래장변을 거닙니다. 그것은 멋이라 없이 칠월 강변의 칠게를 생각게 합니다. 해변의 개들이 이렇게 고요한 시인이 되기는 하늘에 쏘구랑별들이 자리를 바꾸고 먼바다에 뱃불이 물길을 옮는 동안입니다.
산탁 방성의 개들은 또 무엇에 놀라 짖어내어도 이 기슭에 서 있는 개들은 세상의 일을 동딸이 짖으려 하지 아니합니다. 마치 고된 업고를 떠나지 못하는 족속을 어리석다는 듯이 그리고 그들은 그 소리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듯이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우뚝 서서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은 해변의 숭엄한 철인들입니다.
밤이 들면 물속의 고기들이 숨구막질을 하는 때이니 이때이면 이 기슭의 개들도 든덩의 벌인 배 위에서 숨구막질을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끝나도, 언제까지나 바닷가에 우둑하니 서서 주춤거리며 기슭을 떠나려 하지 아니합니다. 저 달이 제집으로 돌아간 뒤에야 올 조금의 들물에게 무슨 이야기나 있는 듯이. (‘해빈수첩’)

어린아이들
바다에 태어난 까닭입니다.
바다의 주는 옷과 밥으로 잔뼈가 굵은 이 바다의 아이들께는 그들의 어버이가 바다로 나가지 않는 날이 가장 행복된 때입니다. 마음 놓고 모래장변으로 놀러 나올 수 있는 까닭입니다.
굴깝지 위에 낡은 돗대를 들보로 세운 집을 지키며 바다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자라는 그들은 커서는 바다로 나아가여야 합니다.

바다에 태어난 까닭입니다.
흐리고 풍랑 센 날 집안에서 여울의 노대를 원망하는 어버이들은 어젯날의 뱃놀이를 폭이 되었다거나 아니 되었다거나 그들에게는 이 바다에서는 서풍 끝이면 으레이 오는 소낙비가 와서 그들의 사랑하는 모래텀과 아끼는 옷을 적시지만 않으면 그만입니다.

밀물이 쎄는 모래장변에서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고 바다에 싸움을 겁니다.
물결이 그들의 그 튼튼한 성을 허물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더욱 승승하니 그 작은 조마구들로 바다에 모래를 뿌리고 조약돌을 던집니다. 바다를 시멸시키고야 말 듯이.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두던의 작은 노리가 그들을 부르면 그들은 그렇게도 순하게 그렇게도 헐하게 성을 비우고 싸움을 벌입니다.
해 질 무리에 그들이 다시 아버지를 따라 기슭에 몽당불을 놓으러 불가로 나올 때면 들물이 성을 헐어버린 뒤이나 그때는 벌써 그들이 옛 성과 옛 싸움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해빈수첩’)



쏘구랑별이니, 산탁, 방성, 동딸이, 숨구막질, 든덩, 조마구, 두던, 노리 등등 아리송한 말들이 많다. 알 듯 모를 듯한 단어를 제 나름으로 상상하면서 죽 읽어 나가면 어느 사이엔가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러고 나서 이 알 듯 모를 듯한 단어, 그러니까 평안북도나 남도, 강원도 등지의 방언을 엮은이가 친절하게 풀이한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감상하면 시에서 그려내고 있는 그 이미지가 더욱 또렷해진다. 나는 첫 수필에서 이미 마음을 빼앗기고 그 뒤로 죽 읽어 나가다가 ‘편지’라는 수필에서 또 한 번 아, 이게 바로 백석이지 하고 감탄한다.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구신이 제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옛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구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고인 샘물 같은 눈으로 나는 지금 당신께서 보내주신 맑고 고운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내냇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 (닭이 우나?) 아 닭이 웁니다. 나는 이만 이야기를 그치고 복밥을 기다리는 얼마 아닌 동안 신선과 고사리와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습니다. (‘편지’)


음력 열엿셋날을 앞둔 고요하고 즐거운 어느 밤, 초롱초롱한 눈으로 잠들지 않은 채, 고운 수선화 한 폭을 바라보다 그 수선화를 닮은 좋아하는 이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이를 떠올리다 보니 ‘새파란 꿈이 안개같이 오르고 노란 슬픔이 내냇(연기)같이’ 피어오른다. 그리하여 백석은 그 긴긴밤을 노란 슬픔과 얽힌 이야기를 편지로 풀어 보낸다. 그리움과 슬픔, 안타까움, 그리고 ‘수선화와 병든 내 사람이나 생각’하겠다는 구절에선 왠지 모를 다정다감한 마음까지 느껴진다.

어떤 수필에서는 백석이 평소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가재미․나귀’같은 수필이 그렇다.


동해 가까운 거리로 와서 나는 가재미와 가장 친하다. 광어, 문어, 고등어, 평메, 횟대…… 생선이 많지만 모두 한두 끼에 나를 물리게 하고 만다. 그저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가재미만이 흰밥과 빨간 고치장과 함께 가난하고 쓸쓸한 내 상에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

묘지와 뇌옥과 교회당과의 사이에 생명과 죄와 신을 생각하기 좋은 운흥리를 떠나서 오백 년 오래된 이 고을에서도 다 못한 곳 옛날이 헐리지 않은 중리로 왔다. 예서는 물보다 구름이 더 많이 흐르는 성천강이 가까웁고 또 백모관봉의 시허연 눈도 바라보인다. 이곳의 좌우로 긴 회담들이 맞물고 늘어선 좁은 골목이 나는 좋다. 이 골목의 공기는 하이야니 밤꽃의 내음새가 난다. 이 골목을 나는 나귀를 타고 일없이 왔다갔다하고 싶다. 또 예서 한 오 리 되는 학교까지 나귀를 타고 다니고 싶다. 나귀를 한 마리 사기로 했다. (‘가재미․나귀’)



백석은 가재미도 좋아하고, 나귀도 좋아하는지 ‘가난하고 쓸쓸한’ 밥상에 한 끼도 빠짐없이 가재미를 올린단다. 그리고 밤꽃 내음새가 물씬 나는 골목을 나귀를 타고 어슬렁어슬렁 다니고 싶다고 한다. 그는 이런 대상을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존재라고 말한다. 가재미에 대한 사랑은 시로 읊기도 했는데, ‘선우사(膳友辭)’라는 시가 바로 그 작품이다.


선우사(膳友辭)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여기서 ‘선우膳友’란 ‘반찬 친구’를 말한다. 가재미 반찬을 친구라고 풀이한 것도 참신하지만 흰밥과 가재미처럼 새하얀 것들을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백석의 생김새를 보면 단아하고 곱다. 담백하게 생긴 미남상이랄까. 평소 가재미나, 나귀, 흰 바람벽, 눈이 푹푹 나리는 날의 흰 당나귀, 초생달, 명태, 노루, 짝새, 바구지꽃 등등 소박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를 아끼고 사랑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단풍처럼 화려한 것에는 마음이 쉬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뇨 빨간 정(情)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 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여 시월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살찐 따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해서 청청 하늘이 눈부셔한다.
시월 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 단풍도 높다란 낭떠러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이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단풍’ 전문)


이처럼 <정본 백석 소설․수필>에는 백석의 향토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쓰인 수필 열 두 편과 소설 네 편을 만날 수 있다. 수필이 시처럼 아름답고 따스하다면 소설은 사뭇 느낌이 다르다. 사실 백석이 처음 문단에 이름을 알린 것은 시가 아니라, 1930년 조선일보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였다. 이 책에서 바로 그 작품을 볼 수 있는데, 토속적인 평안도 방언으로 마을 사람들이 주고받는 소문을 이용, 과부와 유부남의 일탈된 성(性 )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도발적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애잔하다. 그런 이들,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연민이 엿보인다. 이런 경향은 ‘마을의 유화遺話’에서도 이어져 가난한 어느 노부부의 애환을 쓸쓸하지만 연민 어린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닭을 채인 이야기’는 동물과 무생물을 의인화해 마치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수필도 소설도 작품 수가 많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편, 백석의 시에서 그러했듯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을 사랑했던 그의 면모를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어 왠지 내 마음도 나리는 저 흰 눈처럼 깨끗해지는 그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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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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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저 밑바닥 욕망까지 이토록 낱낱이 들여다본 작가가 또 있을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이 초기작들은 웬만한 작가의 전성기 작품에 비할 수 있다. 특히 표제작 ‘인형’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사디즘, 마조히즘을 넘어 ****까지! 완전 시대를 앞선다. 너무 금방 읽어서 안타까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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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백석 소설·수필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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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수필도 소설도 잘 쓰는 백석. 특히 수필은 정말 새로운 발견. 백석다운 아름다움이 넘친다. 백석의 인간적 면모도 엿볼 수 있고.... 백석 연구가 고형진 교수의 백석 발굴 노력도 빛을 발한다. 소장 가치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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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밤뿐인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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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우울하고 부서질 듯 예민한 청년의 하루 심리를 좇는다. <스토너>의 존 윌리엄스의 치기어린 시절의 작품. 얘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작품 후반에 이유를 알면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지는데, 그렇다고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 작가가 정작 왜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는지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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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2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이 짧은 평만으로도 저는 왜이렇게 신경질이나죠? ㅎㅎ

잠자냥 2020-03-25 15:3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이 책 읽으면 더 짜증나실 걸요. 작품 끝에 주인공이 하는 ‘그런 짓‘이 정말 짜증나거든요(한마디로 압축하자면 ‘백남짓‘) 암튼 존 윌리엄스는 이 작품 출간 바라지 않았을 거라는 데 100원 겁니다.
 
사라지지 않는 여름 1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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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좋아하게 되는 책이 있다. 별 기대 없이 집어든 책이 온통 마음을 휘어잡을 때도 있다.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10대 레즈비언 소녀의 성장담이라면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어느 날, 이성이 아닌 동성을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정체성을 깨달으며 고민하고 방황하고, 상처받고 그러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가는 그런 과정…….

<사라지지 않는 여름>도 그런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이토록 내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이 작품은 90년대를 배경으로 그 시절의 문화와 그때 10대였던 아이들의 마음, 생각, 행동, 말투 등이 놀랍도록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려진다. 주인공 캐머런만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인 아이린, 린지, 콜리, 제이미, 애덤, 제인, 마크, 에린 등등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옆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이 아이들은 ‘제이미’ 정도만 빼고는 다들 캐머런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거나 남과 다른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상처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세상에 맞서 싸우려 한다. 심지어 ‘콜리’도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가 없다. 콜리는 아주 먼 후일, 캐머런과 함께 보낸 그 여름을 떠올리며 사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부모님과 강압적인 오빠 등등 주위 상황 때문에 자신의 다이크 기질, 아니 양성애 기질을 완전히 잠재우고, 세상에서 기대하는 ‘예쁜 이성애자 여성’으로 살아가게 될 지라도, 그 여름을 쉽게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풋풋한 사랑과 이제 막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의 호기심, 열정, 장난기 섞인 대화들이 줄곧 귓가에서 머문다. 마치 캐머런의 그 여름처럼.

열두 살 캐머런은 어린 시절 단짝 친구인 아이린과 어느 여름 장난처럼 첫 키스를 하게 된다. 그 첫 키스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캐머런과 아이린은 어른들 눈을 피해 또 다시 서로의 입술을 찾는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다. ‘여자끼리 키스하면 안 된다고 누가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았기 때문’이다. 키스는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며, 같은 학년 아이들도, TV에서도, 영화에서도, 세상에서도 다들 그렇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루트 비어, 훔친 풍선껌, 도둑 키스’ 무엇보다 언제나 함께인 아이린 등등 열두 살치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던 캐머런 앞에 어둠이 닥친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사고 소식을 들은 캐머런은 ‘엄마 아빠는 우리 일을 몰라, 엄마 아빠는 몰라, 그러니까 우린 안전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아이린과의 키스가 들키지 않았다는,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에 캐머런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이 죄책감을 내내 떨쳐버리지 못한다.

할머니와 이모의 보살핌 속에 캐머런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고, 그 사이에 장난처럼 키스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 ‘린지’와도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우정을 나눈다. 린지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이며 대항문화적인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또래인 캐머런보다 일찌감치 동성애 세계에 눈을 뜨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아이이다. 그리고 캐머런은 린지를 통해 ‘동성애자의 언어’와 ‘세계’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콜리’를 만나게 된다. 콜리는 아주 예쁘고 매력적인 아이로, 린지나 아이린처럼 성적 취향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부류이다.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고, 남자친구도 있는데 콜리는 캐머런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다. 단지 우정일까? 혼란스러운 캐머런은 콜리를 마음에서 자꾸 내몰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나는 그냥 알맹이 없는, 실없이 웃는 아이일 뿐이라고 애써 거짓으로 꾸미면서 콜리를 멀리해도 둘은 어느덧 가까워지고 결국 이 관계는 파국을 불러온다.

아이린과의 키스를 부모님한테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두려움 많고 소심한 캐머런이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이 폭로되는 것, 그러니까 ‘아웃팅’만큼 끔찍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만다. 할머니와 이모가 캐머런의 정체성을 알게 되고, 극단적인 조치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기독교 캠프에 보낸다. 그곳에서 캐머런의 동성애 성향을 억누르고 정상으로 ‘바로잡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콜리로 인해 아웃팅당하고, 기독교 캠프에 끌려가면서도 캐머런은 내내 콜리의 체취를 그리워하며 콜리를 생각하고, 언제쯤 콜리 테일러를 미워할 수 있을지, 그러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자신을 아프게 했어도 도저히 미워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기독교 캠프에서는 캐머런처럼 동성애 성향으로 말미암아 가족의 손에 강압적으로 끌려온 아이들이 모여 있다. 그런 아이들끼리 모아두면 연애를 하라고 더 부추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캠프는 엄격한 규율과 삼엄한 감시로 그런 싹을 잘라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캠프의 교사인 리디아는 세상에 동성애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동성애는 일명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들이 주입한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캐머런의 증상은 ‘동성매력 장애’라면서 이 장애를 캠프에서는 모두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캠프에 따르면 수영을 잘하는 캐머런에게 ‘수영이나 육상처럼 운동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환경도 동성매력 장애 증상을 부추기는 요인이란다. 어디 그뿐인가, ‘남자아이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부적절하고 건강하지 못한 패턴’이나 ‘건강하지 못한 모방 욕구’, ‘여자다운 옷차림이나 스타일을 권유받지도, 보상받지도 못함’, ‘엄마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못함’, ‘현실 도피를 위한 물건 훔치기’ ‘동성과의 적절한 관계 형성 능력 부족(아이린)’, ‘비밀스런 영화 보기 의식’, ‘부모님을 대체하는 루스 이모에 대한 분노=여성성에 대한 저항감’, ‘영화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집착’, ‘린지의 영향력’ 등등이 모두 동성매력 ‘장애’를 부추기는 요소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원인을 제거하면 캐머런은 이성애자로 돌아서게 될까?


나는 내가 아이린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처음 느꼈을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았다. 아홉 살 때였다. 여덟 살이었나? 그전에는 유치원 선생님인 필딩 부인에게 반했다. 도대체 여섯 살의 나이에 나를 ‘동성매력장애로 고통 받게’ 만들 일이 뭐가 있을까. (2권 54쪽)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캐머런를 비롯해 이 기독교 캠프에 갇힌 아이들이 ‘동성매력 장애’라고 부르는 질병을 고쳐서 이른바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병이 아니고, 장애는 더더욱 아니며 고쳐서 정상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그저 캠프에서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일을 하게 될 뿐이다. 캠프에서의 삶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삶’이며 ‘호박 속에 갇힌 선사시대 벌레의 삶’이다. ‘죽었지만 확실히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얼어붙어 유예된 상태’. 이런 상황을 캠프의 아이들, 그러니까 캐머런, 제인, 애덤, 마크, 에린 등등은 알고 있고, 그렇기에 그곳에서 진짜 자신을 숨긴 채 적응하는 척, 달라지는 척하면서 그 시간을 견딘다. 견디는 동안 감시의 눈을 피해 자기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기독교 캠프의 논리는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게이나 다이크 기질을 없애겠다는 취지로 이루어지는 ‘적합한 성역할 활동’을 보면 실소가 터진다. 아니 씁쓸한 분노랄까. 남자아이들은 팀 스포츠, 낚시, 하이킹을 하고 이웃 목장을 몇 시간 도우면서 카우보이 일을 한다. 여자아이들에게 적합한 성역할 활동이란 머리를 크게 부풀린 미용사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가고, 제빵 수업을 받고, 화장법을 배우고, 인형을 가지고 와서 임심과 신생아 돌보기를 하는 것이다. 수영에 소질이 있고, 수영팀 여자아이들이 거의 모두 코치인 테드를 짝사랑할 때, ‘테드 코치처럼 되고’ 싶은 캐머런, 그래서 시합이 끝나면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고 사다리 없이 팔 힘으로 수상안전요원석에 훌쩍 올라가고 지프를 모는, ‘수상안전요원 대장’이 되고 싶은 캐머런에게 화장법이나 제빵 기술, 임신과 출산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캠프에서는 누구도 캐머런을 ‘캠’이라고 부를 수 없었는데, 리디아의 말에 따르면 이미 중성적인 이름을 더 남성적으로 들리게 하는 애칭이기 때문이다. 오마이갓! 육두문자로 욕을 퍼부어주고 싶다. 캐머런, 아니 너는 캠이야. 수상안전요원 대장이 되고 싶은, 여자를 사랑하는 캠이라고!


“신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를 배반하는 몸을 지니는 것보다는 자기 좆을 잘라내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지옥에서 누가 어떻게 그 녀석을 구해주겠어?” (2권 187쪽)

“세상에. 방금 다 말했잖아요. 이곳의 설립 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어서 변하게 만들려는 거라고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해야 한단 말이에요.” (2권 202쪽)


애덤의 말 그대로 이 기독교 캠프는 ‘신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로 10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나 성역할까지 고정하려고 들고 있다. 그러나 제인이 아는 한,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알다시피, 지금까지 치료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동을 바꿀 순 있지만 감시가 없어지는 순간 다 끝”이며 “행동이 변화했다고 해서 내면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치료라는 건 없으니까.” 다들 더는 비용을 낼 수 없어서 떠나거나, 아니면 졸업해서 떠난다. 그것도 아니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든지. 이런 미래 앞에 캐머런, 아니 캠은 어떤 선택을 할까. 소심하고 두려움 많고, 자신의 정체성을 누군가가 알아차릴까봐 전전긍긍하던 그 10대 소녀는 이토록 폭압적인 기독교 캠프에서 마침내 자기만의 길을 나아간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하기보다는 끌어안고 사랑하는 쪽으로. 수면 아래가 아닌, ‘호안선 너머, 숲 너머, 울퉁불퉁한 산 너머, 그 너머, 그 너머’ 온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마 그 세상에서는 상처받을 일이 또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린과 보낸 여름, 콜리와 보낸 여름은 사라지지도 않고, 누군가가 억지로 지워내려 한다고 지울 수도 없다. 그 여름 자체가 캠의 일부였고, 정체성 그 자체였으므로. 그 여름을 간직하고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는 캠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게 된다. 너의 여름은 찬란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찬란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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