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이론 -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 테니스 알마 인코그니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노승영 옮김 / 알마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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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좋아하고 테니스를 잘 했던 사람이 쓴 애정 넘치는 테니스 에세이. 특히 마지막 페더러에 관한 에세이는 테니스 에세이 고전 중 고전에 속하지 않을까. 테니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 테니스 치고 싶다. 팬데믹이라 요즘 하지 않는 테니스 경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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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토요일인 오늘, 나는 회사에 나와 있다. 한 달에 한두 번쯤은 꼭 이렇게 토요일에도 근무한다. 쉬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노친네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라 어쩔 수가 없다. 임시공휴일도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토요일은 개인 사정을 이야기하고 회사에 나오지 않는 이들이 종종 있어서 회사는 평일보다 한적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평일보다 마음이 편하기는 하다.

점심시간이 다 됐을 무렵 상무님이 내 자리로 슬며시 오시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우산 챙겨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하신다. 이건 사장님께서 점심을 사주신다는 신호다. 모든 직장인이 그러할 터인데, 윗사람과 함께 먹는 점심을 좋아할 직원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개의 직장인은 점심때만이라도 자유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나 또한 그렇다. 게다가 오늘은 대충 때울 생각으로 편의점에서 김밥 두 줄을 사왔는데, 이걸 고스란히 다시 갖고 갈 생각을 하니 살짝 얼굴을 찡그리게 되었다. “저, 점심 싸왔는데…….” 중얼거려도 소용없는 항의.

나 말고 다른 직원 한 사람까지 더해서 상무님과 우리 세 사람은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걷는다. 사장님은 이미 그곳에 가 계신 모양이다. 머릿속으로는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장님은 뭔가 특별한 일을 시킬 때 이렇게 미리 밥을 사주시곤 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비가 퍼붓는 구질구질한 장마. 습도도 높고 내리는 비에 바지가 젖는다. 그래도 상무님은 계속 앞서 걸으신다. 어디까지 가시는 걸까. 길 건너에 재래시장이 보인다. 여기까지 오니 동료는 목적지가 어디인 줄 알아차렸는지, 아아, 한다. “국숫집 가나 봐요.” 사장님과 나는 이쪽까지 온 적이 없는데, 이 직원은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가 보다.

재래시장에 들어서니 사장님이 보인다. 노인은 우산을 쓰고 어느 과일 가게 앞에서 과일을 열심히 고르고 있다. 과일 가게 주인은 포도 상자를 포장 중이다. 그러더니 한 상자씩 우리에게 건넨다. 집까지 들고 가기 쉬우라고 커다란 검은 비닐에 그 포도 상자를 넣어준다. 동료가 먼저 받고, 나도 한 상자 받고, 상무님도 한 상자 받는다. “포도가 너무 맛있게 생겼어.” 사장님이 말씀하신다. 동료는 나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아, 저 오늘 약속 있는데…….”하며 커다란 검은 봉지를 난처한 듯 바라본다. 노인은 종종 이렇게 상자째 뭔가를 덥석 안겨준다. 기프티콘을 모르는 분이라 크리스마스 때는 케이크 상자를 안겨주고, 때로는 수입과자점에 대뜸 끌고 가서 과자를 한아름 사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포도 한 상자다.

과일 가게를 지나 국숫집으로 향했는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문을 닫았다. 빗줄기는 굵어지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다들 포도 상자가 담긴 검은 봉지를 들고 망연히 서 있는데, 사장님이 대뜸 “냉면 좋아하지?”하더니 성큼성큼 앞서 걸으신다.

도착한 곳은 함흥냉면집. 전쟁 이후부터 줄곧 그 자리에 있었던 냉면집으로 꽤 유명한 곳이다. 나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이십대의 그 시절로 돌아갔다. 대학생이던 그때, 친구와 그 애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딱 한 번 왔던 곳이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던 그 냉면집. 사장님은 회냉면 4개를 주문하고는 당신 나름의 추억에 잠긴다. “여기 와본지도 벌써 50년이 넘었지.” 소년 시절부터 고생고생해가며 자수성가한 이 노인은 굶주렸던 시절 이야기를 하며 그때 처음 먹은 냉면 맛을 예찬한다. 포도도 참외도 모양은 하나같이 예전보다 다 예쁜데 맛은 왜 그때 맛이 안 나는지 모르겠다며 비 온다고 포도 상자 내버리지 말고 집까지 잘 가져가서 엄마랑 먹으라고 당부하신다.

나는 냉면집을 휘 둘러본다. 스무 살 즈음에 왔던 이곳- 그때는 다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에 앉아서 냉면을 먹었다. 어쩌다 친구 부모님과 이 냉면집까지 왔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친구네 집에서 놀고 있는데, 어머니가 냉면이 먹고 싶다 하셨고, 그 바람에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나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이 냉면집을 찾았던 것 같다. 친구 어머니는 그때 신장이 안 좋아서 일주일에 한번은 꼭 투석을 받았다. 엄마가 아프니까 외출을 자주 못했던 친구 집에 내가 종종 놀러가곤 했던 그 시절. 그러다 보니 그 애 부모님과 나는 뜻하지 않게 많은 식사를 함께 했던 것 같다. 그날도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차에 옮기고, 다시 휠체어에 태우는 방법으로 냉면집까지 갔다. 그렇게 힘들게 가서 냉면 한 그릇을 참으로 맛나게 싹싹 비우던 그 애 어머니.

그분은 몇 년 뒤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오늘처럼 아주 무더운 여름날이었고,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엄마가 너 예뻐하셨는데, 마지막으로 우리 엄마 볼래?”라던 친구의 말에 얼떨결에 “응”하고 대답했고, 그래서 나는 그분의 마지막, 아니 죽음 후의 첫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게 지금까지도 내가 유일하게 본 죽은 사람의 모습이다. 빨갛게 얹힌 양념 위에 잘 버무려진 명태회 몇 점. 식초와 겨자를 곁들여 새콤달콤한 냉면을 먹으면서 나는 자꾸만 그분을 떠올린다. 어느새 그릇이 비었다. 냉면 가게를 휘 한 번 더 둘러본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그쳤다. 또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나 내가 이 냉면집에 우연히 다시 온다면 그때도 그분을 떠올릴까, 아니면 오늘 포도 상자를 안겨준 이 노인을 떠올리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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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1 16: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따수운 글이어서 댓글 남기고 가요. 고즈넉한 오후 보내세요.

잠자냥 2020-08-01 16:20   좋아요 0 | URL
네~ 비오는 휴일 오후 편안하게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0-08-01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짝 빡친 건,
점심을 사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오전 근무로 알았는데... 토욜날!
점심까지 멕이고 무언가 일을 더
시키겠더라는. 삐삐삐삐삐 ~~~

잠자냥 2020-08-01 17:59   좋아요 0 | URL
하하하, 토요일도 저희는 점심 지나서까지 일합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20-08-0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공감되는 글 잘 보았습니다. ^^

잠자냥 2020-08-01 21: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에디터D 2020-08-01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따뜻해요. 비 살짝 맞은 상태에서 읽어서 그런지 더 좋아요^^

잠자냥 2020-08-01 21:26   좋아요 0 | URL
비가 내려서 그런지 글이 더 그렇게 된 것 같아요. ㅎㅎ

다락방 2020-08-1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로 보면 이렇게 놓치는 글이 생겨서 제가 좋아하는 분들의 서재는 이름찍고 한 번씩 정기적 방문을 해줘야 합니다. 그랬기에 이 글을 뒤늦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어요.
저는 냉면에 얽힌 추억이라고 하면 아름답기보다 뜨거운 것이어서 여기에 풀기는 좀 거시기하고요, 그러나 잠자냥 님의 고운 추억만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잠자냥 2020-08-10 11:07   좋아요 0 | URL
휴가인데 당연히 북플이고 알라딘이고 컴퓨터고 멀리 해야죠. ㅎㅎ 이제 일상으로 복귀하셨군요.
저도 지난주 중반부터 휴가였는데, 코로나에 기록적 폭우에 어디 여행 꿈도 못 꾸고 그저 방콕한 휴가였어요.
다락방 님은 그래도 여행도 잘 다녀오신 것 같아 흐뭇합니다.
그나저나 냉면에 얽힌 뜨거운 추억 궁금하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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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수많은 여성들이 여러 권 책을 사서 주변에 나눔을 했는지 그 마음을 너무 잘 알 것 같다. 나 또한 이 책을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싶다. 특히 안희정, 박원순을 지지하며 정당 이념에 매몰되어 2차 가해에 급급한 이들에게. 김지은 씨에게 보통의 삶이 주어지길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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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티그 을유세계문학전집 102
프랭크 노리스 지음, 김욱동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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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에밀 졸라 ‘프랭크 노리스’- 돈과 황금, 탐욕에 눈먼 인간군상의 처절한 몰락을 소름끼치도록 강렬하게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진짜 잊기 어려울 듯... 프랭크 노리스가 서른둘이라는 너무 이른 나이에 죽지만 않았다면 더 많은,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아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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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7-30 1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예전에 외국어대학 출판부에서 출판했던 건데 역자 심규세 선생이 너무 오래 전 분이라 새로운 번역이 나와 반갑습니다. ㅎㅎㅎ 물론 재독을 하지는 않겠지만.
근데 돌팔이 야매 치과의사가 벌이는 파티 장면, 통거위, 삶은 송아지 대가리, 구운 자도(자두) 먹어치우는 장면이 <목로주점> 제르베즈 아줌마 집에서 거위 먹어치우는 거하고 느므 비슷하지 않아요?
프랭크 노리스가 놀라우리만치 잘 생기고 조숙한 재능을 타고 났다는 게 중평이랍니다. 이런 이가 프랑스 유학을 했으면서도 졸라를 읽어본 건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한 다음이라네요. ㅋㅋㅋㅋㅋ 이런 것도 해설에 써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잠자냥 2020-07-30 09:40   좋아요 2 | URL
예전에 번역되어 나온 줄은 몰랐어요. ㅎㅎ 을유에서 이 책 급하게(?) 만들었는지 오탈자가 좀 보이더라고요. 프랭크 노리스, 이이가 졸라 빠 (응? 이렇게 쓰니 이상하네요 ㅋㅋㅋㅋ)라 그런지 아무래도 졸라의 영향이 작품 곳곳에서 보이더라고요.

해설은 김욱동이 썼는데 서른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죽었고, 졸라를 무척 좋아했다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만 있습니다. 폴스타프 님이 더 해설 잘 썼을 거 같은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번역이 ‘김욱동+홍정아‘라는 게 영 찜찜하더라고요. ㅋㅋㅋㅋㅋ

프랭크 노리스 얼마나 잘 생겼는지 검색해봐야겠어요.....(헐 진짜 꽃미남이네요.ㅋㅋㅋㅋㅋ 제 스타일은 아니지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용소 - 교도관의 수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김현정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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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수용소 문학은 없었다! 수용소에 갇힌 자의 관점이 아닌 교도관의 눈으로 본 수용소 풍경. 잔혹한 범죄자들의 모습이 아닌,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그들의 삶의 기록. 도블라토프 특유의 심드렁한 유머가 빛나면서 종종 체제 비판적 시선도 날카롭다. 그리고 여전히 연민어린 그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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