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레사와 함께한 마지막 오후들 창비세계문학 47
후안 마르세 지음, 한은경 옮김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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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이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통렬하다. 잘생긴 바람둥이 좀도둑 마놀로, 남부러울 것 없는 여대생 떼레사-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욕망하는 두 남녀의 사랑을 통해 하층민과 부르주아 그 두 계급이 지닌 문제점까지 날카롭게 꼬집는다. 고전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완전히 깨뜨려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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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4-26 1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조만간 멋있는 서평도 올라올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0-04-26 20:03   좋아요 1 | URL
하하하 이런 말씀을 ㅎㅎㅎ

다락방 2020-04-2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평으로 보면 제가 이십대 초반에 읽은 <여대생과 좀도둑> 생각이 나는데요!! 지금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요. 읽어봐야겠어요.

다락방 2020-04-26 20:56   좋아요 0 | URL
아앗 혹시나 싶어 검색해봤는데 <여대생과 좀도둑>의 저자고 후안 마르세 에요! 이 책이 그 책인가봐요!!!!!!!!

잠자냥 2020-04-27 07:22   좋아요 0 | URL
네 그 책입니다!
 

어제 아침, 습관적으로 트위터를 열어 이것저것 둘러보다가 나는 어떤 방송 이미지를 캡쳐해 올린 장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방송은 도움이 필요한 가출 청소년을 봤을 때 주변에서 어떤 반응을 하는지 살펴보는 일종의 실험 카메라 같았다. 캡쳐된 이미지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성인 남자와 카페에 앉아 있었다. 가출한 그 아이에게 성인 남자가 성매매를 제안하는 대화들이 오갔는데, 그 대화를 엿들은, 카페 안 성인 여성들이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소녀에게 다가가 ‘오지랖’인줄 알지만 아무래도 나쁜 일인 것 같다고, 돈이 없다면 언니가 주겠다고 밥은 먹었느냐면서 소녀를 달래 그 장소를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다. ‘언니가 도와줄게’ ‘밥 먹었니?’하는 말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가 카페에서 친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데, 가까운 테이블에서 이와 같은 장면, 그런 대화를 듣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런 소녀에게 다가가 선뜻 도와주겠다고, 밥은 먹었느냐고 말할 수 있었을까?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채고, 저 애를 어떡하지, 생각하면서 친구와 소곤거리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와주겠다고 선뜻 나섰을까? ‘오지랖’일 거야, 하면서 내 마음속 외침, 그러니까 지금 저 아이는 도움이 필요해, 어서 도움의 손길을 주라는 그 목소리를 억누르고 말지 않았을까. 결국 그 아이가 성인 남성과 함께 카페를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어쩌면 세상이 이럴까 하고 자괴감에 빠지고 말지 않았을까. 그냥 거기서 멈추지 않았을까. 이렇게 소시민 같은 내게 이 방송 이미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그 트윗을 살며시 북마크했다. 때로는 오지랖 부려야 할 때도 있다고, 누군가는 도움의 손길을 바라면서 신호를 보내고 있을 거라고, 그 신호를 알아차려야 한다고, 그런 신호에 예민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해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읽은 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 때문에 이 장면들이 다른 그 어느 때보다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던 것 같다. <충실한 마음> 이 작품에는 바로 그렇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한 소년이 등장한다. 이제 고작 열두 살, 중학생인 테오, 작고 연약하고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이 소년은 언뜻 보기엔 그럭저럭 잘 자란 편인데도 무언가 예사롭지 않은 구석이 있다. 테오의 선생님인 엘렌은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지만, 그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집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어디가 아픈 것일까? 학대당하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테오를 주시하면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하지만 이렇다 할 증거가 없어 엘렌이 해 줄 일이 없다. 오히려 테오에게 집착할수록 동료 교사 및 교장과 마찰을 빚게 된다.

테오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독자들은 곧 알게 된다. 테오는 유일한 친구인 마티스와 종종 사람들 눈을 피해 술을 마신다. 고작 열두 살짜리 꼬마가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다. 그런데도 술 냄새 감추는 법을 기막히게 잘 알고 있어서 감쪽같이 엘렌의 눈을 비롯해 선생님들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이 아이를 이렇게 술에 절게 했을까? 사실, 테오의 부모는 아이가 어렸을 때 이혼했고, 테오는 일주일씩 번갈아 전혀 소통하지 않는 두 부모의 집을 오가며 살아간다. 전남편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엄마와 직장에서 쫓겨난 뒤 점점 더 무기력해져만 가는 아빠 사이에서 테오는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몰래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 대한 멈출 수 없는 미움 때문에 테오를 향한 엄마의 증오어린 말들은 아이를 짓밟는다. 작고 연약한 몸으로 테오는 그 많은 말들을 견뎌낸다. 말들이 그를 갉아먹고 마침내 테오는 ‘참기 힘든 초음파, 그에게만 들리는 하울링. 그의 뇌를 찢는, 들리지 않지만 반복되는 진동’(31쪽)과도 같은 이명현상에 시달리게 된다. 엄마의 고통은 고스란히 테오 몫이다. ‘어떤 때는 전기 충격 같았고, 어떤 때는 깊이 베인 상처 같았고, 또 어떤 때는 주먹으로 한 방 얻어맞는 느낌’이다(60쪽). 그런데도 테오의 부모는 아이의 문제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테오를 계속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다. 과연 테오는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엘렌이 테오가 이상하다고 느끼게 된 것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테오의 신호, 도와달라고 온몸으로 조용히 소리치고 있는 그 신호를 알아차린 것은 엘렌 자신도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학대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부했고 그래서 그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상처, 그 깊은 트라우마는 여전히 그녀를 힘들게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테오가 보내는 그 희미한 신호, 아니 신호랄 것도 없지만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그 징후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아마 어쩌면 저 방송 속의 소녀에게 도움을 준 여성도 비슷한 경험-그것이 꼭 가출이나 성매수 남성을 만났거나 하는 경험이 아니더라도-이 있었기에, 이 사회가 어린 소녀들이, 아니 여성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없는 곳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저 소녀의 신호를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게 아니었을까. 테오를 계속 눈여겨보았던 엘렌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호한다. 그 무언의 약속은 때때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할 수가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게 고작 이런 거구나. 잃어버린 것들과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손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약속들을 지키는 것. (<충실한 마음>, 168쪽)


따뜻한 마음, 밝은 마음, 예쁜 마음, 상처받은 마음, 순박한 마음……. 마음에는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충실한’이라는 수식어는 마음 앞에 놓이기에 조금 낯설기도 하다. ‘충실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제목을 놓고 생각해본다. 엘렌은 애써 잊으려 노력한, 어린 시절의 자기 트라우마와 마주하는 고통을 무릅쓰더라도 테오를 돕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동료 교사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도 도우려는 마음을 막지 못한다. 테오의 엄마로부터 문제 있는 선생 취급을 받으면서도 “아세요, 부인? 아이들을 구멍 속이나 줄 끝자락에서 발견하면, 그땐 너무 늦은 거예요.”(93쪽) 말하며 테오로부터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자기의 상처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인간으로서 누군가를 도우라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마음, 바로 그게 인간의 마음이자, 사람다운 ‘충실한 마음’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부디 테오의 상태가 ‘구멍 속이나 줄 끝자락’에서 발견한 것이 아니기를 내내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또한 모두가 ‘충실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리라.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마음,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누군가의 희미한 신호일지라도 외면하지 않는 마음, 내게 이득이 될지 않을지라도 조금은 ‘오지랖’을 부려볼까 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다친 참새’를 다시 날게 해줄 것이다.


걸어가면서 그는 소니아와 함께 뱅센 숲에서 돌멩이를 줍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돌멩이들을 다친 참새라고 얘기하곤 했다. 조심스레 그것들을 잡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고, 때로는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대화를 건네기도 했다. 고쳐주겠다고, 키워주겠다고 약속했고, 곧 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윽고 돌멩이가 손바닥의 열기를 빨아들이며, 그래서 기력을 차린 듯싶으면, 그는 막 구해준 다른 돌멩이들로 채운 주머니 속에 그것을 넣었다. (<충실한 마음>,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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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23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글 읽다가 눈물이 핑도네요. 저 역시 듣는다면 밥은 먹었는지, 지금 필요한 돈은 언니가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그런 언니가 되고싶다고,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지라퍼가 될거예요.

잠자냥 2020-04-23 12:42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은 지금도 충분히 그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언니라고요. ㅎㅎ
 
99% 페미니즘 선언
낸시 프레이저.친지아 아루짜.티티 바타차리야 지음, 박지니 옮김 / 움직씨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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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앵겔스 ‘공산당 선언’의 오마주인 페미니즘 선언문. 왜 마르크스인가? 자본주의 철폐없이는 진정한 여성해방은 있을 수 없음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리고 그 대안까지. 짧지만 깊고 날카로우며 뜨거운 선언문. 그리고 바로 지금 여기에 필요한 선언문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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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혹 창비세계문학 75
헤르만 브로흐 지음, 이노은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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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차례 선거가 끝났다. 자신의 이념에 근거한 정당이 승리했거나 패배했거나 그에 따라서 자기 나름의 분석을 하기에 바쁘다. 이런 선거가 끝나고 나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아닌, 자기 이념과 어긋나는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이 어쩌면 그렇게나 많은지 의아해하며 그들, 그러니까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궁금해 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인터넷을 통해서 퍼지는 가짜 뉴스에 ‘현혹’되었다던가, 신문이나 언론에서 줄기차게 해온 주장에 ‘세뇌’되었다던가 등등.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의심 없이 맹목적으로 믿었기에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라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비난한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종교와 관련한 신념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런 논쟁은 더 첨예해진다. 만일 그 종교가 사회에서 용인받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는, 그래서 이단이라고 취급받는 종교라면 사람들의 비난은 더 심해진다. 어떻게 ‘그런’ 종교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지, 의심하지 않는 믿음, 광신도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면서 개탄한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허무맹랑한 주의주장에 쉽게 ‘현혹’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혀를 내두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돌아봐도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동가들의 말과 행동에 ‘현혹’되어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고, 시간이 흐르면 그 선동에서 깨어나 지나간 시간의 만행들을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형태를 달리해 또다시 나타나는 온간 선전선동에 인간은 현혹되어 인류를 저버리는 일들까지 기어코 저지르고 만다. 저 먼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러했고,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그러했으며, 종교 원리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 수많은 자살폭탄테러도 그러했다. 이성과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새로 등장한 바이러스와 관련한 온갖 괴소문들이 번져가고 거기에 인간은 ‘현혹’당해 도저히 이성을 갖춘 인간이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저지르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와이파이를 통해 번진다는 이야기에 인터넷 망을 끊고 다니는 저 유럽인의 광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며, 바이러스를 빌미로 일상처럼 번져가는 인종혐오와 차별은 또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은 다양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한번 어떤 노선에 접어들어 그곳에 고정되고 나면 자신의 다양성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안에 머물러 있게 되고 더 이상은 어떤 것으로도 그를 빠져나오게 할 수 없다. (<현혹>, 9쪽)


<현혹>의 이 한 구절은 광기와도 같은 집단 최면 상태에 종종 빠지는 인간 이성(理性)의 그 참을 수 없는 나약함, 그런 인간의 나약함을 노려 대중의 광기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선동가와 그 추종자들의 심리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양성’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한번 어떤 노선에 접어들어 그곳에 고정되고 나면 자신의 다양성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인간이라는 허점 많은 존재. 그런 존재들은 쉽사리 선동가에게 현혹되기 쉽고 그 안에 머물러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그런 까닭에 헤르만 브로흐의 <현혹>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선동가에게 현혹당해 집단 광기의 상태에 빠졌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10여년이 흐른 뒤, 도시를 등지고 알프스 산간마을에서 은둔하다시피 의사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어느 날 우연히 ‘마리우스 라티’라는 방랑자와 마주친다. 왜소한 체격에 갈리아풍 콧수염, 서른 혹은 서른을 조금 넘긴 나이. 꿈꾸는 듯 멍하면서도 대담해 보이는 눈길. 갈리아 지방 출신 소시민으로 보이는 마리우스는 첫인상부터 왠지 불쾌하다. 이 마리우스는 아랫마을 농부 ‘밀란트’의 집에 임시 일꾼으로 기거하며, 독특한 말과 행동으로 주민들을 점차 현혹시킨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기계 타작 금지를 역설하는 한편, 거대한 증기 제분소 때문에 인간이 병들게 되었다며 기계문물과 대량생산을 거부하라고 부추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라디오를 비롯해 기성복 구입도 해서는 안 된다. “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은 절대로 몸에 좋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질병은 방탕함에서 오는 것”이라면서 정결한 삶을 주장하며 미혼모를 마녀라고 낙인찍어 따돌리고, 직접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도시인의 생활을 비난하면서 서비스 직종을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경멸하기도 한다. 때문에 마을에 라디오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해가는 서비스업 종사자 ‘베취’는 마리우스가 괴롭히기 아주 좋은 대상이다.

한술 더 떠 마리우스는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전설처럼 전해오던 ‘황금 채굴’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마을 사람들을 강력하게 쥐고 흔들기 시작한다. 마리우스 가까이에는 그의 손발 같은 역할을 하는 ‘벤첼’이라는 자도 있다. 마리우스는 뒤에서 말을 할뿐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는데, 벤첼은 선동꾼 역할을 자처한다. 마리우스와 벤첼, 두 이방인이 벌이는  선동으로 말미암아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의 반목은 심해지고, 마리우스를 믿는 자들과 그를 의심하는 이들 사이의 갈등도 깊어지면서 이 조용하던 산간마을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만다. ‘나’는 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서술하는 기록자 역할을 하지만 그 선동가를 막는 일에는 앞장서지 못한다. 마리우스에 반감을 가지는 한편으로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집단 광기와도 같은 축제에 참여해 그 공기에 취해버리는, 이 마을에서 가장 이성을 갖춘 존재이면서도 그 자신마저 때로는 이성의 끈을 놓고 마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이 오면 의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네.” 말하면서 무기력한 지식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런 상황 아래 이 마을은 마리우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콧수염을 기른 이 선동꾼 마리우스는 당연하게도 히틀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산간마을 사람들, 그들의 암흑 같은 삶은 종교도 구원해주지 못한다. 마을의 무기력한 가톨릭 신부는 어떤 영적 도움을 주지 못한지 오래이다. 그런 상태에서 외부에서 들어온 이 신비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는 물질문명과 기계문명을 반대하고 엄격한 규율을 내세우면서 의지할 것 없이 정신적으로 방황하던 마을 사람들의 내면에 차츰 스며들어 그들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는 심지어 황금까지 약속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마리우스의 행동대장이 벤첼의 모습에서는 괴벨스가 떠오른다. 그 두 사람은 내부결속을 다지기 위해 누군가를 배제해야한다. 볼품없는 외모에 마을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했던 사나이, 그런데다가 서비스업 종사자인 ‘베취’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벤첼은 베취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는다. “그런 존재가 계속 번식을 하려고 하다니.......” “그런 것이 세상에 아예 나탄지 않는다면 더 좋겠죠.” 등등. 마을사람들은 그의 말에 현혹되어 베취를 따돌리고 괴롭힌다. 여기에 죄의식은 없다. 심지어는 한 여성을 제물로 바치는 일에까지 동조하게 된다. 히틀러와 괴벨스, 그 추종자들이 자행했던 유대인 탄압과 학살이 떠오르는 섬뜩한 장면이다.

마리우스는 벤첼을 단지 익살꾼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익살꾼.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의사에게 마리우스는 벤첼이 하는 일은 곧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베취를 따돌리고 괴롭히고, 공격하는 일들이 결국 사실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원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베취를 괴롭히도록 선동하는 일도 정의에 속하는 것”이며 “그저 민중의 목소리일 뿐”이다. 마리우스가 보기에 “모두가 고통당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이 낫다(206쪽). 홀로코스트가 정당화되고 그것에 동조했던 수많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들이 떠오른다.


“현혹되지 말도록 해. 그러면 자네가 도울 수 있을 거야.”
“우리를 현혹시키는 일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나 있을까요? 우리는 그걸 막아낼 수 없을 텐데요.”
“그렇게 되면 자네도 그 일을 겪어내야 하는 거지.” (<현혹>, 374쪽)


의사인 나는 끊임없이 마리우스와 벤첼을 의심하고 불쾌해하며, 그들에게 반감을 갖고 그들의 영향력을 마을에서 거두고 싶어 하지만 딱히 행동은 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어머니 기손’의 존재는 이 마을에 드리운 암흑과도 같은 집단 광기를 거둬낼 수 있는 유일한 빛과도 같다. 그녀는 애초부터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마리우스의 약점과 그 약점에서 비롯된 일그러진 생각과 욕망,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꿰뚫어보고 그에 대한 경고를 하는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마리우스의 ‘현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증오가 두려움과 함께 와야만 해. 그다음에 사랑이 오는 거야..... 중요한 건 잘 죽는 거라네....”라고 말하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인간과 달리 산, 그러니까 자연은 절대 마리우스 같은 자의 현혹에 속지 않는다. 어머니 기손의 이런 주장은 기술 발전과 문명 진보에만 치중해온 서구 문명에 대한 일침이 아닐까.


자연으로 돌아가려다가 이렇게나 잘못된 길로 들어서다니! 대단한 현혹이다! 이제 자연은 그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복수하게 될까! 자연은 폭력에 희생된 정신에 대해 복수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자연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연과 그 무한으로 가는 길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정신, 인간의 자비, 그리고 인간의 신적 탁월함이다. (<현혹>, 556쪽)


자연으로 돌아가려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는 깨달음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마을은 씻을 수 없는 상흔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자연은 계속 흘러간다.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생명을 잉태하고 아이가 태어난다. 그럼에도 마리우스라는 그림자는 쉽사리 걷히지 않는다. 아니, 마리우스와 벤첼이 마을에서 자취를 감추더라도 언젠가 또 다른 마리우스가 등장할지 모른다. 인간의 마음속에 누군가를 따돌리고 괴롭히고자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면 누구나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다. ‘인간들이 어떤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서로 갈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 결국엔 무능과 절망에 빠져, 잠에 취한 상태에서 서로에게 해를 가하게 될 거라는 사실’(346쪽). 이런 사실을 늘 상기하지 않는다면 틈을 노리는 자가, 그리하여 자기 이득을 꾀하는 자가 언제고 나타날 것이다. 이 어둠의 속삭임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도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기마저도 현혹당해 그 일을 겪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 기손의 이 경고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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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1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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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는 한 가지일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고, 아주 깊을 수도 있고 얕을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관계에서 생긴 그 상처들은 사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알아봐달라고 손짓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상처가 치유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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