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것 대산세계문학총서 111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 지음, 안지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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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극장이요, 삶은 연극‘이라는 명제가 이 희곡집 작품들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예브레이노프의 작품을 읽다보면,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한바탕 연극을 하다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00년 전 작품이지만 당장 무대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듯. 아니, 오히려 더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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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 개정2판
장 지오노 지음, 최수연 그림, 김경온 옮김 / 두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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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이 있다. 너무 유명해서 손이 가지 않는 책, 베스트셀러라서 왠지 의심이 가는 책,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거의 짐작 가서 딱히 읽어보고 싶은 흥미가 일지 않는 책. 내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채운 그런 책이었다. 단편이나 마찬가지인 무척 짧은 분량인데도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여태껏 손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은 게 가장 크다. 그렇지 않은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니. 제목이 모든 내용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역시, 짐작이 맞네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일 때문에 읽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관심이 딱히 가지 않았던 책. 그러다 보니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겼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마치 이 책의 화자이자 장 지오노 본인이라고 볼 수 있는 ‘나’가 ‘엘제아르 부피에’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그저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준 평범한 양치기라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내가 아닌 여러 사람을 위해, 묵묵히 나무를 심고 그래서 숲에, 마을에 변화를 불러온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장 지오노가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나무 심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이글을 썼다”고 밝혔듯이,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정말 ‘공동 선(善)을 위해 나무 심은 사람의 훌륭한 이야기로군- 제목이 다 로군’ 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떤 구절 하나가 뇌리에 콕 박혀서 지워지지 않았다. ‘창조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 나갈 뿐이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45쪽) 바로 이 구절. 며칠 뒤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또 읽었다. 어느 순간 숭고한 감동이 밀려왔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지켜보노라니 살짝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감동한 까닭은 그가 여러 사람을 위해 나무를 심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이 작품은 작가를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킨 한 인간의 숭고함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정말 엘제아르 부피에가 처음부터 모두를 위해 나무를 심었을까? 이 땅과 지구를 바꾸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달라지게 하려고, 그토록 큰 명분을 갖고서 도토리 100개를 고르고 심고, 그러기를 수십 년이나 혼자, 묵묵히 반복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커다란 명분은 오히려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타인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곧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누군가의 응답을 기대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한 일에 마땅한 응답이나 기대한 반응이 따르지 않으면 곧 지치고 만다.


그런데 나무 심는 행위 자체가 ‘엘제아르 부피’에 그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가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행한 일이라면? 자신이 심은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이루고 그 숲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맞는 일이 그저 자기에게 더없이 큰 행복이었다면? 그래서 그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묵묵히 날마다 수 십 년을 빠짐없이 그 일을 행해왔다면? 나는 어느 순간, 그가 도토리를 고르고 나무 심는 행위를 글 쓰는 행위에 대입해서 읽고 있었다. 도토리는 단어이며, 나무는 문장이고, 그 나무들이 자라서 일군 숲은 하나의 글이었다. 그 글은 소설이기도 하고, 에세이일 수도 있으며, 한 편의 시이기도 하다. 더 많은 여러 종류의 글일 수도 있다.


글 쓰는 행위나 나무를 심고 가꾸는 행위 모두 고독을 벗으로 삼아야 한다. ‘그 사람은 말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차 있고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16쪽) 그러나 고독하되 정갈해야 한다. 실제로 ‘엘제아르 부피에’는 고독을 벗 삼아 살고 있지만 제대로 지어진 집에서 살림살이도 정갈하게 갖추고 살아간다. 혼자이면서도 산뜻하게 면도를 했으며 소박하지만 옷차림은 단정하기 그지없다. 그가 기르는 개조차 ‘주인처럼 조용했으며, 살살대지 않으면서도 상냥하게’ 군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독 속에서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딱히 할 일이 없기에 죽어 가는 땅의 상태를 바꾸어 보기 위해 시작한 나무 심기. 그 나무 심기가 자기 자신의 기쁨이자 즐거움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흔들림 없이 오래도록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불안을 느끼지 않고 파괴가 아닌, 창조의 기쁨을 날마다 자기 안에 심은 사람. 나는 엘제아르 부피에를 그렇게 본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의 세이모어 번스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 속에서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작은 원룸에서 일어나 침대 겸 소파를 정돈하는 모습이다. 혼자 살면 침대를 접지 않고 그냥 둬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침대를 접어서 소파로 만들어 놓는다. 집안을 말끔하게 정돈하고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는 그런 생활을 평생토록 이어 온 것이다. 혼자 있지만 언제나 정갈한 주변, 날마다 노트에 기록하는 음표 하나하나, 그리고 그 음들이 만들어 내는 피아노 소리. 그 음표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도토리 한 알 한 알이기도 하고 그 음표와 도토리는 내게 단어 하나하나로 다가온다.


나무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도,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도 내게는 이 덧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더 없이 행복하게, 제대로 잘 살다 가는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어떤 응답을 바라고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묵묵히 걸어간 길.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삶이기에 가능한 마음의 평화. 그런 삶 속에서 인간은 파괴가 아닌, 창조의 아름다움을 터뜨릴 수 있는 게 아닐까. 도토리가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듯, 나 또한 단어 하나하나를 심는다. 그 단어가 문장이 되고 숲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 같은 글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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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학교 - 야콥 폰 군텐 이야기>를 읽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그 작품 속의 야콥은 발전을 거부한, 오히려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바란 반(反) 영웅적 인물로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다. 그 한 작품만으로도 발저의 이름을 가슴에 새겼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다 읽은 뒤 국내에 번역된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그때는 그 작품뿐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발저의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어 나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과 단편을 모은 <산책> 또는 <산책자들>, <세상의 끝>이 번역되었고, 드디어 그의 장편 <타너가의 남매들>이 선을 보였다. 장편이라니! 발저의 작품에 목이 말랐던 나 같은 독자에게는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았다. <타너가의 남매들>을 몇 장 읽지도 않았지만, 아, 역시 로베르트 발저의 작품이 틀림없구나, 무릎을 친다. 감탄을 한다. <야콥 폰 군텐 이야기>의 야콥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면 <타너가의 남매들>의 주인공 ‘지몬’이 되었을 것이다. 확신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타너가의 남매들>이 오히려 발저의 첫 작품에 속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타너가의 남매들>이 쓰인 뒤 몇 년 뒤에 발표한 작품이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발저가 20대 때, 그것도 6주 만에 쓴 작품이라고 하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로베르트 발저,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생각을 담은 작품을 그 나이에 쓸 수 있었을까.



“저는 지몬이라고 합니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재산을 받았는데, 방금 막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썼습니다. 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요. 뭘 배울 맘은 없었죠. 일을 함으로써 낮의 성스러움을 모독할 만큼 무모하기엔 낮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꼈거든요. 나날의 노동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이 사라지고 마는지 아실 테지요, 학문을 터득하느라 태양과 저녁달 없이 지내는 것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 풍경을 감상하는 덴 몇 시간이 필요했어요.” (<타너가의 남매들>, 233쪽)


지몬은 자기소개대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사람이다. 물론 그도 때때로 일한다. 그러나 그 일은 오래 가지 못한다. 자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최소한의 노동만을 할 뿐이고, 그 일의 종류는 수시로 바뀐다. 일을 통한 성장이나 진보 발전 따위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의 젊은 원기를 숨 막히고 융통성 없이 무딘 사무실에서 묵히는 게 싫어 언제나 금세 떠난다. 쫓겨난 적은 결코 없다. 늘 어느 순간이 되면 제 발로 걸어 나온다. 그런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들- 그러니까 ‘근면, 충실, 시간 엄수, 눈치, 냉정, 겸손, 절제와 목표 의식’ 등등 오만가지에 그는 치를 떤다. 절반의 자유를 갖는 게 싫기에 아무것도 안 가진 쪽을 택하겠다는 지몬.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적어도 제 영혼은 제 것이거든요.” (15~16쪽)

“저는 출세하고픈 욕망도 전혀 없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부분인 게 저한테는 최소한입니다. 저는 출세라는 걸 맹세코 대단하게 여길 수가 없거든요. 이런 거에 뭐 굉장할 게 있나요. 너무 쬐그만 책상 앞에 서 있느라 일찌감치 굽은 등, 쭈글쭈글 주름 많은 손, 창백한 얼굴, 망가진 평일 바지. 후들거리는 다리, 뚱뚱한 배, 상한 위장, 탈모로 맨숭맨숭한 머리, 핏기 없고 열정 없는 눈, 의무에 충실한 바보였다는 의식에. 사양합니다! 저는 차라리 가난하지만 건강한 채로 있겠어요. 저는 물론 딱 한 사람한테서만 존중받고 있기는 합니다. 즉 저 자신한테서요. 하지만 그 사람한테서 존중받는 게 저로선 가장 중요한 그런 한 사람이죠. 누가 ‘평생직장’이라는 낱말이나 이 낱말에 내포된 터무니없는 요구를 갖고 저를 대하면 저는 광분해요. 저는 인간으로 남아 있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저는 위험한 것, 신비스러운 것, 어슴푸레한 것, 통제 불가능한 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322쪽)


간간이 일하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회적 출세나 신분 상승, 일함으로써 돈을 벌고, 부를 쌓는 등의 경제적 성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지몬.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자연을 벗 삼는 일이다. 황홀한 전망이 눈앞에 펼쳐지고 오감이 자연스레 휴식하며 생각은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연 속의 산책. 일하면서 휴가를 갈 수 있지 않느냐고 반박하는 사람에게 지몬은 말한다. 개한테 던져 주듯 그렇게 주어지는 자유는 증오한다고. 고꾸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삶과 겨룰 생각이라고.

회사에서 주겠다는 증서, 말하자면 경력증명서 같은 것조차도 거부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증서를 물어본다면 자기 자신을 보면 안다고만 말할 것이라고. 그게 오히려 분별 있고 제대로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증서를 거부하는 이유 또한 어딘가에 묶여서 일하는 것과 그 틈틈이 주어지는 휴가를 거부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증서란 자신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기억시켜 줄 뿐이기 때문이다. 늘어지고 맥없는 상태를, 부질없이 허송세월한 시절을, 화가 나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오후들을, 아름답지만 쓸데없던 절절한 동경의 저녁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타너가의 남매들>을 읽노라면 지몬은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야콥이며, 그 야콥과 지몬은 모두 로베르트 발저 그 자신이나 마찬가지임을 깨닫게 된다. <타너가의 남매들>의 다른 인물, 즉 지몬의 형인 카스파, 누나 헤드비히는 실제로 발저의 형과 누나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즉 <타너가의 남매들>은 <발저가의 남매들>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발저라는 인물과 그 일가에 깊은 관심이 생긴다. 그들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이렇게 여느 사람들과는 매우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을까? 마주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하긴,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이 작품 속 지몬의 독백과도 같은 이야기들과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지몬과 클라라, 지몬과 헤드비히, 지몬과 클라우스 등 거의 모든 이야기가 지몬과 다른 인물들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대화는 독백과 마찬가지이고, 그 독백을 듣는 사람은 독자이다.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지몬의 일자리가 바뀌어 있고, 사는 곳이 바뀌었고, 때로는 연인이 달라지기도 한다. 지몬의 이 수다스럽지만 내밀한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어떤 의문이 든다. 정말 우리는, 아니 나는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성장이나 발전, 진보 같은 개념들이 언제나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정말 그게 선(善)일까?



“아침 8시에 일하러 갈 때면 마찬가지로 아침 8시에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과 나는 한 가족이나 되는 듯 느낍니다. 이 무슨 거대한 병영인지요. 이 현대의 삶이란! 그러면서 바로 이 획일성이야말로 얼마나 그럴듯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면, 뭔가를 마주쳤으면 하고 끊임없이 갈망하지요. 그토록 가진 것 없고 그토록 빈곤하기 짝 없는 신세, 스스로가 그토록 가망 없이 여겨진다는 겁니다. 교육받고 갖추었고 철저하고, 그렇게 다 가진 마당에 말이죠.” (22쪽)

“어떤 사람이 책상 일을 하는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일이 있기도 해. 그렇게 되면 그는 50년 동안 회사에서 ‘일했다’는 걸로 무슨 득을 본 걸까? 그는 50년 동안 매일같이 똑같은 문을 드나들었고, 골 천 번 업무 편지들에서 같은 관용 표현을 썼고, 양복 몇 벌 바꿨고 자신이 구두를 한 해 동안 얼마나 조금 소비하는 가에 대해 한 번씩 놀라곤 했지. 우리는 그가 살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수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41~42쪽)


지몬의 통찰력 빛나는 이야기가 뼈저리게 와 닿는다. 위로 올라가기를 거부한 사람,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에 대한 저항, 일부러 작은 존재이길, 아무런 존재도 아니길 고집하고 그것을 온 몸으로 구현한, 발전 없는 존재 지몬, 그리고 야콥. 자신은 뭘 가져 본 적도 없으며, 뭐가 되어 본 적도 없고 부모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뭐가 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기이한 인간 지몬. 그의 모습에서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당당한, 인간으로서 더없이 숭고한 모습을 본다. 현대 사회에서 지몬처럼 살기란 너무나도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그가 외치는 반 성장, 반 영웅적 이야기는 더 가슴을 울린다.



“남들은 저를 한량이라고 여기지요. 하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저는 머물러 있고 앞으로도 아마 머물러 있을 거예요. 머물러 있다는 건 너무도 달콤합니다. 가령 자연이 외국으로 가는 거 봤나요? 다른 데 가서 더 녹색인 잎을 틔운 다음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제 모습을 뽐내자고 나무들이 이주하던가요? 강과 구름은 가지요. 하지만 그건 다르죠. 오묘한 떠나감이에요. 결코 돌아오지 않거든요. 간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게 아니라 날면서 흐르면서 쉴 뿐이죠. 다른 사람들은 여행하고 더 똑똑해져서 돌아오라지요. 저는 어느 날 여기 이 땅에서 품위 있게 죽을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도 남는답니다.” (320~321쪽)


로베르트 발저는 지몬의 저 바람대로,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자연의 품에 안겨 심장마비로 죽었다. 왠지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있었을 것 같다. 야콥-지몬-그리고 발저. 세 인물이지만 동시에 한 사람인 존재. 로베르트 발저가 창조한, 도무지 발전할 줄 모르는 야콥과 지몬은 문학작품이 만들어낸 가장 문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나는 야콥이나 지몬처럼 살 자신은 없다. 도무지 없다. 그럼에도 지몬의 외침은 가슴을 울린다.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을 잠깐 멈추게 한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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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너가의 남매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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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항상 나아가야 하지? 왜 발전해야 하지? 그저 이 자연과 머무르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발저.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야콥 폰 군텐이 어른이 되었다면 바로 이 책의 ‘지몬’처럼 자랐으리라. 성장과 진보, 발전에 대한 발저의 끊임없는 의문은 언제 읽어도 크게 전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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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 개정2판
장 지오노 지음, 최수연 그림, 김경온 옮김 / 두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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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하다. 내게 이 책은 공동 선을 위해 나무를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보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그려놓고, 그 삶을 묵묵히, 성실히 살다간 한 인간의 위대한 기록으로 읽을 때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한 인간이 그렇게 살다 가기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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