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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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은 책 읽는 계절이라는 말 때문에 그런가, 부쩍 관심 있는 작가의 새로운 책 출간 소식도 들려온다. 그중 단연코 눈길을 끄는 이는 윌리엄 트레버이다. <그의 옛 연인>이라는 책을 본다. 제목도 그렇고 책 표지 이미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손길 때문에 또 한 번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옛 연인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해져온 어떤 소식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는 내용이려나? 궁금하다. 이 신간을 더 기다리지 않고 사보는 것은 당연하다. 언제부터인가 윌리엄 트레버는 내게 그런 작가가 되었다.


<그의 옛 연인>을 사서 책을 펼쳐본다. 표제작인그의 옛 연인」부터 읽어볼까 싶었지만 왠지 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뽑은 이유가 따로 있을 것만 같아서, 이 책을 대표하는 작품- 그러니까 하이라이트와도 같은 작품이려나 싶어서 아껴 읽기로 하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기로 한다. 첫 작품인「재봉사의 아이」부터 읽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야기의 시작은 평범하다. 평화로운, 조금은 따분해 보이는 자동차 정비소 풍경이 그려진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곧 무언가가 일어날 것임을. 그리고 그 일은 아주 커다란 사건일 수도 있고, 또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재봉사의 아이」의 주인공은 ‘재봉사의 아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카할’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이름도 없이 그저 ‘재봉사의 아이’로 불리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아이. 그런데 그 아이가 카할에게 지울 수 없는 멍에가 되어 남는 것이다.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이의 엄마, 그러니까 재봉사인 그녀는 아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아이 엄마는 신뢰받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과연 믿어줄까? 겉보기에 카할은 이 게임에서 승자처럼 보인다. 그냥 그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울까? 재봉사의 아이는 평생 카할의 뒤를 쫓아다닐 것임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레버가 빚어내는 인물들이 거의 그렇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일상을 사는,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삶은 그 일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으로 변하고 만다. 곁에서 그 일이 무엇인지 지켜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는 ‘무언가’ 커다란 지진과도 같은 파열이 일어난다. 평범하지만 악하지 않은, 보통 정도의 ‘양심’이나 ‘죄책감’을 가진 그들은 그 어떤 일을 겪고 난 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으리라.


완벽한 관계,그의 옛 연인에는 연인 또는 부부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모두 안정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속내도 그러할까? 은 시작부터 심란하다. 남자와 여자가 어느 ‘방’에서 만난다. 그와 그녀가 ‘불륜’ 사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다. 그들은 왜 어느 방을 빌려 이렇게 몰래 숨어서 만나는 것일까?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을까? 그녀, ‘캐서린’이 남자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놀랍다. 그녀는 살해 혐의로 기소된 남편의 알리바이를 거짓으로 증언했다. 그 뒤로 9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해왔고 남편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결혼 생활은 이미 그때 깨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은가. 


완벽한 관계 속 연인들도 그렇다.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프로스퍼’이지만, 그런 그에게 ‘클로이’는 문득 이별을 고한다. 그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리지도 않은 채 집을 나선다. 프로스퍼는 클로이를 찾아 그녀 부모님 댁을 방문하지만, 클로이의 부모는 딸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를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다. 프로스퍼는 클로이에게 분명히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둘이 곧잘 가던 카페에 홀로 앉아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자와 그 카페에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질투에 휩싸이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싸운 적 없음’이 과연 완벽한 관계를 말해주는 증표일까? 클로이의 생각과 반응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둘은 과연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는 어떤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지만 프로스퍼와 클로이를 지켜보는 독자라면 그들이 다시 만나더라도, 그 관계는 예전 같지 않을 것임을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그의 옛 연인에 바로 그런 커플이 등장한다. 가을에 어울릴 법한 애틋하고도 아련한 사랑이야기일까 싶었는데,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시작부터 누군가의 편지를 훔쳐 읽는 사람이 나온다. ‘조이’는 남편 ‘찰스’의 편지, 그러니까 그의 옛 연인으로부터 전해온 편지를 훔쳐 읽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나이는 지긋하다. 이미 흰 머리가 성성하다. 조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남편의 연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훔쳐 읽어왔다. 찰스와 그녀가 통화하는 내용도 엿듣는다. 남편은 오늘도, 흰머리가 성성한 그 나이에도 옛 연인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쇼핑’해야 할 것이 있다면서 집을 나선다. 조이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눈을 감아준다. 아무렇지 않게 남편을 배웅한다. 그 부부의 일상은 아마도 평생 그래왔듯이, 그들이 눈을 감는 그날까지 그렇게 지속될 것이다.


<그의 옛 연인>의 원제는 <Cheating at Canasta>이다. 이 책에도 속임수 커내스터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속임수가 있는 카드놀이. 어쩌면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 부부나 연인처럼 상대를 속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나 수치감을 잊고, 아니 잊어야만 하는 남자는 스스로 양심을 속인 채 남을 협박하여 살아가며(아일랜드의 남자들), 십대 소녀 ‘애슬링’은 또래 소년이 맞아 죽는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척 해야만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객기), 엄마를 잃은 딸의 빈자리를 다른 여자로 채워주어야지만 가족이 다시 화목할 것이라는 아빠의 믿음(아이들)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딸은 엄마를 잊을까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자식들을 생각하느라 죽음을 앞둔 남편에게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한 어느 노부인(올리브힐에서)은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남은 생이 평화롭지는 않다. 


이렇듯 윌리엄 트레버의 <그의 옛 연인>에는 크든 작든 양심을 속이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트레버의 시선은 그들을 단죄하는 ‘재판관의 눈길’이기보다는 이해와 연민으로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다.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삶과의 카드게임에서 이정도 속임수는 쓰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임수조차 쉽게 잊어버리거나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급급하지 않은가. 그러나 트레버가 빚어낸 인물들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양심의 소리, 죄책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흔들리고, 대개는 스스로 유폐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쓸쓸한 여운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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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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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윌리엄 트레버. 이 책에 실린 단편 속 인물들은 모두 하나씩 어떤 사건(크든 작든)을 겪고 삶이 이전과는 달라진다.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희미한 ‘양심의 선‘을 넘어버린 이들. 그 미세한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한 섬세하고도 서정적인 트레버의 시선.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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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사울 레이터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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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찍은 사진 한 장은 때로 기나긴 문장보다 많은 것을 전한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이 그렇다. 몇 마디 말보다도 어떤 시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면서 그의 사진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몽글몽글 물기를 맺혀준다. 사울 레이터를 잘 몰랐음에도 단 한 장의 사진에 마음이 끌려 그의 사진집까지 구매하게 되었다. 책 표지를 장식한 사진. 눈 내린 길, 빨간 우산을 들고 걷는 한 사람의 이미지. 그 사진에 홀려 책 정보를 살펴본다. 몇 장의 사진이 더 눈에 들어온다. 아, 이 책을 갖고 싶다. 

어느 날 들른 서점에서도 검은 코트 차림에 빨간 우산을 든 이 여인의 사진 한 장은 줄곧 내 눈을 사로잡는다. 책을 펼쳐들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아, 이 책을 사서 두고두고 보고 싶다.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렸는데, 그의 사진과 함께 비는 촉촉하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흰색과 검은색, 빨강의 단순한 조화. 눈 위에 찍힌 발자국. 무엇이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었을까. 

오래전 나는, 사진작가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보통 그들은 ‘빨강’이 있을 때 사진이 한결 좋아진다고 믿었다. 실제로 찍은 결과물을 보면 그랬다. 빨강은 사진을 살려주는 마법과도 같은 색이었다. 사진작가들에게 ‘빨강’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레이터의 빨간 우산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의심했었다. 어쩌면 그 또한 ‘빨강’이 사진을 살려준다는 사실을 아는, 그래서 어쩌면 그런 흔한 기교로 사람들의 눈을 홀린 건 아닐까. 

그런데 그 비오는 날, 레이터 사진집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의 사진에는 ‘빨강’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느꼈다. 그날 이후,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을 머리맡에 두고 주로 잠들기 전에 몇 페이지씩 넘겨본다. 사진만 쭉 훑어보고 나서는 곳곳에 적혀 있는 그가 남긴 말들을 읽어본다. 그래, 그래서 이런 사진이 나왔구나. 나는 이 한 권만으로 사울 레이터의 팬이 되고 만다. 이 땅에서도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런 꿈을 꾸면 좋겠어.’ 잠들기 전, 그의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빗방울 흐르는 창, 수증기 맺힌 창, 빨강 우산, 노랑 스쿨버스, 노랑 택시, 흰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초록 가게, 꿈꾸듯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 카페 구석에서 글을 쓰는 여인……. 틀림없이 자고 나면 기분 좋을 그런 꿈이다. 아니, 이미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그렇다. 어렴풋한 수증기와 빗방울, 왠지 따뜻할 것만 같은 하얀 눈, 꿈꾸는 사람들의 눈빛으로 인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꿈속 어딘가를 거니는 것 같다.  
   
지나간 시절, 1950년대나 60년대로 짐작되는 한때. 그 무렵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포착한 레이터의 사진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시절이 꼭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찍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그 외로움은 희석된다. 물기 어린 창이나 부옇게 흐려진 거울이 필터처럼 외로움과 고독감을 걸러준다. ‘뒷모습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는 사울 레이터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조용히, 담담하게 전한다. 

때로 화려한 모델을 피사체 삼기도 했지만 그는 하퍼스 바자와 같은 잡지 사진을 찍기보다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담기를 원했다. 함박눈 맞으며 우편배달 하는 사람, 카페 웨이터, 구두닦이의 구두, 공사현장에서 나무판자를 옮기는 인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남자, 간판을 그리는 사람, 기다리는 노인, 버스에 앉은 신사, 개와 산책중인 여인,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 남자, 카메라가 신기한 아이들, 풀쩍 뛰어내린 고양이, 볕을 쬐는 개, 창밖으로 나가고 싶은 듯한 마네킹까지…….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사진가가 주는 선물은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일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 사울 레이터의 말처럼 그가 찍은 사진들은 모두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한다. 쉽게 지나치기에 그러고 나면 더욱 그리워질 사소한 것들.

브레송이나 윌리 로니스, 카쉬의 사진을 나는 좋아했다. 잘 찍은 사진은 모두 흑백 사진이라고 여겼다. ‘결정적 순간’을 이야기한 브레송의 말처럼 사진은 순간 포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그 모든 생각을 뒤흔든다. ‘목적 없이 그저 세상을 바라본다’는 태도로 찍은 그의 소박하면서도 아련한 사진은 빨강 노랑 초록으로 빛난다. 모두가 흑백 사진을 고집하던 1950년대에 그는 컬러를 담는다. ‘미술의 역사는 색채의 역사다.’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의 믿음은 옳았다. 그의 렌즈를 지나 세상 밖으로 나온 ‘색깔’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이제 사울 레이터만의 ‘컬러’가 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빛깔로 이루어진 세계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색채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울 레이터의 예민한 감각은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사진만큼 그림 또한 무척 아름다워 몇 점이든 소장하고 싶어진다. 사진, 그림 모두 특별할 것 없는 대상을 담았지만 그만의 남다른 시선과 색채 감각 때문에 세상 유일한 사진이,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장소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라는 그의 말은 그래서 인상 깊다. ‘인생에서는 무엇을 얻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내놓는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사울 레이터. 그는 틀림없이 이 세상에 의미 있는 그 무언가를 남겨놓은 셈이다. 늘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어느 페이지든 펼쳐서 보고 느끼고 싶은,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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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사울 레이터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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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고독한 도시의 사람들. 그런데 사울 레이터의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는 그들은 따스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장소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다’(91쪽)라는 그의 말처럼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알려주는 책. 빗방울, 눈, 우산, 모자, 여자, 빨강과 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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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멘 호수.백마의 기사.프시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4
테오도어 슈토름 지음, 배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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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슈토름의 작품은 처음 읽는다. 독일 문학은 지루하고 관념적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이 책도 언젠가는 읽어보겠다고 보관함에 담아두기만 했다. 도서관 신간 도서 코너에서 깨끗하고 산뜻한 모양새로 나를 반기지 않았다면 이렇게나 빨리 읽어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을 빌릴 때 모두 다섯 권을 대출했는데, 이 작품을 가장 나중에 읽었다. 도서 반납 기간이 다 되어가서 읽을까 말까? 그냥 가져다줄까? 고민하다가 부랴부랴 읽었는데, 웬걸. 이번에 빌려온 다섯 권 가운데 가장 좋았다.

'임멘 호수', '백마의 기사', '프시케' 세 작품이 실려 있다. 첫 번째 작품인 '임멘 호수'를 몇 장 읽지 않고도, 이야기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이미 ‘아, 이 책을 그냥 반납해했다면 정말 아까울 뻔 했구나.’ 생각했다. 어느 노인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액자식 구성 때문에 실화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는 낭만적이고도 한없이 서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마치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동화 한 편을 들려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동화는 시작부터 조금은 쓸쓸하다. 행복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이 든다.

소꿉친구인 라인하르트와 엘리자베트. 어린 라인하르트에게 세계는 온통 엘리자베트이다. 엘리자베트는 그가 보호해야 할 존재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피어나는 그의 인생에서 모든 사랑스러움과 경이로움을 의미했다’('임멘 호수', 22쪽). 라인하르트는 직접 쓴 동화나 시를 엘리자베트에게 들려주며 언젠가는 그녀와 함께 인생을 꿈꾼다. 그렇지만 그 어린 아이 눈에도 어쩐지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할 것만 같다. 산딸기를 찾아 숲속을 온통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듯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다. 조금씩 성장하고 공부 때문에 고향을 떠나게 된 라인하르트는 엘리자베트와 줄곧 편지를 주고받으며 남다른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그럼에도 둘의 관계는 변하고 만다. 라인하르트가 선물했던 홍방울새가 죽고 그 자리를 에리히가 선물한 카나리아가 차지하고 있듯이.


“집에 오래된 노트가 있어. 거기에 온갖 노래와 시를 써넣곤 했지. 하지만 그만둔 지 오래야. 책갈피에 에리카 꽃 하나가 꽂혀 있어. 하지만 시든 거지. 그걸 누가 나한테 줬는지 알아?”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을 내리깔고 그가 손에 쥐고 있는 풀잎만 쳐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다.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임멘 호수', 52쪽)


시든 에리카 꽃. 붙잡으려고 해도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호수 위의 수련. 세월의 변화와 함께 달라진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듯 온갖 자연 속 사물로 상징되면서 안타깝고도 애상적인 분위기를 전한다. “엘리자베트, 저 푸른 산 뒤에 우리의 청춘이 있었어. 그 청춘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라인하르트의 이 말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순수했던 시절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거의 예외 없이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 아닐까. '임멘 호수'는 순진무구한 첫사랑이 이런저런 현실 앞에서 무너지고,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전형적인 이야기임에도 읽는 내내 그 서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남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백마의 기사'는 슈토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데,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어디선가 백마를 탄 하우케의 고독하고도 쓸쓸한 모습이 눈앞에 나타날 듯하다. 이 작품 또한 액자 구성으로 이루어지기에 백마를 탄 기사가 실제로 존재했을 것만 같다. ‘백마의 기사’는 제방을 지키는 유령 기사의 이야기다. 안개 자욱한 바닷가를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백마를 탄 기사 이미지 때문에 작품 초반 분위기는 몽환적이면서도 조금 으스스하다. 그런데 이윽고 펼쳐지는 이야기는 조금 뜻밖이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 제방에만 온통 관심을 쏟은 하우케 하이엔- 그는 집이 가난하여 제방감독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본인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 뜻하지 않은 기회 등으로 그 자리에 오르고 만다.

그러나 미신과 전통을 굳게 믿는 마을 사람들에게 하우케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태도는 반감을 불러오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하우케는 이성과 기술로 자연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으며 주위 사람들의 반감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그가 그렇게 앞만 보고 나아간 데는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또한 컸으리라.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 오만하며 누구와도 섞이지 못하는 태도는 그에 대한 불신을 강화하며 그 불신에 기묘한 소문이 덧붙여지면서 그와 그의 가족은 더욱 고립되고 만다. 스산한 분위기 때문에 하우케에게 불행이 덮칠 것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는데, 마침내 그 일이 일어나고 말 때는 안타까움과 함께 깊은 연민이 솟구친다.

'임멘 호수'가 서정적 낭만으로 가득한 작품이라면 '백마의 기사'는 전설과 미신이 많은 바닷가 마을 사람들과 이성과 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인 하우케의 대립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담담한 어조로 전한다.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인 하우케를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성적이고 계몽적이기에 자신들과는 이질적인 존재, 이제까지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존재, 그래서 낯선 존재를 향해 사람들은 흉흉한 소문을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를 조금씩 믿어간다. ‘난폭한 사람이나 악독하고 고집불통인 성직자를 성인으로 만들거나, 단지 우리보다 더 뛰어나다는 이유로 능력 있는 사람을 유령이나 귀신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백마의 기사', 212쪽) 했는데, 바로 그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슈토름은 어릴 때부터 고향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동화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실린 작품 모두 전설이나 동화를 읽는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여느 전설이나 동화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려운, 서정미가 넘친다. 자연을 무척 사랑했고, 그 아름다운 자연을 묘사하는 슈토름의 빼어난 솜씨에서 한편의 서정시와도 같은 작품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테오도어 슈토름- 이제야 처음 만났지만 다른 작품도 더 궁금해지는 그런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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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 제가 잠자냥 님의 꽁무니를 촐래촐레 쫓아다니는 것 같군요 하지만 거기에 매력이 가득하다면 기꺼이~...늘 땡큐요^^

잠자냥 2019-01-12 17:11   좋아요 1 | URL
ㅎㅎ 좋은 책은 많은 사람이 읽으면 더 좋은 거니까요. 모쪼록 즐거운 독서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