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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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현대문학 세계 단편선 <대프니 듀 모리에 - 지금 쳐다보지 마>와 똑같은 작품이 실려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차를 비교하면서 겹치는 작품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워낙 이 단편집을 흥미롭게 읽기도 했고, 듀 모리에의 다른 작품도 즐겁게 읽었던 터라, 아직 내가 읽지 않은 단편들 모음이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게다가 책 소개를 보니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에 걸쳐 쓴’ 초기 걸작 단편을 모아 낸 선집이라고 한다. 거장이 거장으로 자리 잡기 전, 얼마쯤은 어설프고 풋풋한 그런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내 생각은 책을 받아 읽는 순간 와장창 깨지고 만다. 아니, 이게 정말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에 쓴 작품이라고? 그렇다, 거장은 애초부터 거장인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나는, 제목에 끌려 <집 고양이>부터 읽었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암고양이》처럼 왠지 ‘고양이’가 등장하는 그런 작품일 것 같았다. 느긋한 고양이가 등장하지만 그 고양이와 얽힌 기괴하고 짜릿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그런 내용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생각 또한 와장창 깨진다. 서스펜스의 왕이자(여왕이 아니다!!), 인간의 저 밑바닥 욕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내려다 보고 있는 대프니 듀 모리에가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쓸 리가 없다. 비록 아무리 초기 작품이라 할지라도. 이 작품에는 단 한 번도 고양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고양이의 특성을 비롯하여, 얼마나 묘사를 잘했는지 온갖 고양이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린 꼬마였던 ‘나’는 파리에서 숙녀 교육을 마치고 드디어 성숙한 어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 같은 존 삼촌과 함께 사교계를 누빌 꿈에 부푼다. 그런데 그 기대는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순간 무너지고 만다. 처음으로 화장한 ‘나’의 얼굴을 본 어머니는 전에 없이 쌀쌀맞게 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한다. 게다가 늘 졸린 얼굴이던 존 삼촌은 그날따라 기묘하게 눈을 빛내며 ‘나’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한다.

존 삼촌은 사실 혈연관계는 아니다. 모녀가 그를 처음 만난 건 ‘나’가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프린턴 해변의 얕은 물에서 해수욕을 하던 때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존 삼촌은 집안 식솔로 여러 해를 함께 지내오면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대신 처리한다. ‘티켓을 구입하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장사꾼을 상대하고, 청구서를 지불하고, 역에선 그들의 가방을 옮겨주고, 차를 마실 땐 빵과 버터를 건네주고, 전화를 받고, 약속을 기록하는 수첩을 정리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면 양손을 문지르면서 아양을 떨며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 오랜 세월,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어머니와 함께 한다. 어머니에게 여러모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이제 마흔을 훨씬 넘긴 존 삼촌. ‘나’의 친구는 언젠가 그에 대해서 “저 사람이 너희 어머니가 키우시는 집고양이야?”하고 묻기도 한다. 나는 친구의 그 말에 크게 웃으면서도 어딘가 그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존 삼촌은 ‘구석에서 조용히 가르랑거리다가 절대 발톱을 드러내는 일 없이 평화롭게 후다닥 우유 접시로 달려가는 고양이’ 모습과 어쩐지 닮았기 때문이다.

사실 독자는 존 삼촌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나의 ‘어머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 ‘어머니’에게 빌붙어 사는 기둥서방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게다가 성숙하게 자라서 젊음 그 자체로 빛나는 딸을 보고 기뻐하기보다는 질투와 시기를 느끼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엄마가 딸을 경쟁상대로 느낀다는 것도 곧 알 수 있다. 그 두 모녀 사이에서 이 ‘집고양이’ 존 삼촌의 능글맞은 변화를 엿보는 일은 아주 흥미롭다. ‘나’가 기차역에 내렸을 때부터, 아니 ‘나’가 드레스를 사러 갔을 때 쳐다보던 그 음흉한 시선에서 이 존 삼촌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예상가능한데, 그런 변화를 고양이에 비유하고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매력적인 젊은 아가씨를 꾀어낼 궁리를 마친 존 삼촌은, 자기의 은밀한 연인인 ‘어머니’의 눈을 피해 딸을 만나기 위해 ‘나’의 귀에 속삭인다.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나한테 오너라. 어머니는 걱정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찾아오면 돼.” 이렇게 말할 때 ‘나’는 ‘잠깐이지만 그의 모습이 정말로 잘 먹고 자라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면서 나직이 가르랑거리며 등을 활처럼 굽히는 얼룩고양이처럼’ 보인다고 생각한다. 존 삼촌은 때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고양이처럼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둡고 축축한 벽에 기대어 자신이 만든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는 교활하고 냄새나는 도둑고양이’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고양이에 빗댄 묘사와 그 상황이 너무나도 절묘해서 그저 감탄이 나온다.

다정함과 친절함으로 감춘 존 삼촌의 음흉한 속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쩐지 차가워진 어머니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집고양이, ‘작고 뺀질뺀질하고 땅딸한 남자’의 정체와 ‘미모가 사라져 겁을 집어먹고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기 딸의 젊음을 시기해 질투에 사로잡힌 여인’인 ‘어머니’의 저열한 속내도 깨닫게 된다. 이 또한 성장이라면 성장이겠지만 참으로 그 대가는 쓰디쓰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대프니 듀 모리에를 경쟁상대로 느끼고 끊임없이 견재했던 듀 모리에의 친어머니와의 자전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읽혀, 작품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왠지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복잡하고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친밀한 관계의 부도덕한 이면, 사랑스러움도 없고 로맨스도 없었다. 그녀도 자기 차례가 되면 이렇게나 어머니와 똑같은 가면을 쓴 채 거짓으로 점철된 가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집고양이’,  163쪽)



표제작인 <인형>은 여러 의미로 충격적이다. 이 작품은 액자식으로, 바닷가에서 발견된 한 권의 수첩 속 이야기를 스트롱맨 박사라는 이가 옮겨 적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박사는 ‘본문에 실린 글은 베이의 어느 바위 틈새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바닷물에 젖어 상당 부분 색이 바랜 너덜너덜한 수첩에서 발견된 내용’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수첩의 주인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으며, 아무리 부지런히 탐문을 해보아도, 주인공의 정체를 밝히는 데 실패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아마도 수첩 주인은 수첩을 숨긴 지점 근처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시신마저 바닷속으로 사라졌거나 자신의 비극과 자기 자신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세상을 떠돌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수첩은 ‘인간은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아차릴 수 있는지 알고 싶다. 너무도 끔찍한 공포와 너무도 크나큰 절망으로 가득차, 두뇌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간혹 있다.’ 이렇게 시작함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아주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내용일 것임을 예고하는데, 실상 초반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리 심란하지는 않아서 조금 뜻밖이었다. 수첩의 주인인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부다페스트 출신 ‘리베카’라는 이름의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나’는 그녀에게 뜨거운 애정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왠지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게다가 가까워져도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길이 없다. 가까워진 듯하면 멀어지고, 멀어진 것 같으면 또 금세 가까워지고, 리베카는 ‘나’를 쥐락펴락하는 데 선수 같다. 리베카는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왠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리베카는 말한다. “나는 애정을 품을 만한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고, 사랑에 빠져본 적도 없어요. 난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기보다는 언제나 사람들을 싫어했어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리베카 곁을 떠나지 못한 채 그녀와 가학/피학적인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러다가 마침내 맞닥뜨린 그녀의 비밀은 당시로서는 그리고 이처럼 심약한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 또한 리베카의 ‘비밀’이랄까, 그 비밀의 베일이 벗겨지는 광경을 맞닥뜨렸을 때는 헐 정말? 진짜? 하는 생각이 들어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아마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할 텐데, 이 작품을 읽을 이들을 위해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인형>은 사디즘, 마조히즘, 관음증을 비롯해 문제의 그 장면에서까지 정말 여러 의미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아무튼 이 작품이 대프니 듀 모리에 20대에 쓰인 것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여년 전 작품일 텐데 이런 생각을, 게다가 리베카라는 여성이 ‘그런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대프니 듀 모리에의 상상력이 시대를 앞서도 한참 앞서고 있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한 단편이 많다.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는 서간체 형식으로 오직 사랑에 빠진 남자의 관점으로 쓰였는데, 처음에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예의와 조심성을 갖추더니, 뜨거운 열정의 시기를 거쳐 여인의 마음을 얻은 뒤 조금씩 편해가는 모습이 놀라울 만큼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격 차이>나 <주말 >같은 단편에서도 사랑하는 남녀의 겉모습과 그 속마음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인생의 훼방꾼>이라는 단편은 ‘믿을 수 없는 화자’, 자기 자신이 늘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타인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데 탁월한, 소름끼칠 만큼 진저리나는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단편집에서 대프니 듀 모리가 창조한 캐릭터 가운데 완벽하게 선한 인물은 없다. 겉으로는 제아무리 선함을 가장하고 있다하더라도 사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그 욕망이 이루어지면 기뻐하고, 좌절되면 분노한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인간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차디차게 비웃는다. “난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낀다기보다는 언제나 사람들을 싫어했어요.”라는 저 리베카의 말은 듀 모리에 그 자신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인간을 잘 관찰했기에 그런 저열한 속성까지 낱낱이 알고 글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것도 무려 20대에 말이다. 서스펜스의 왕 대프니 듀 모리에. 그이의 국내 번역 작품은 이제 <희생양> 하나 남겨두고 다 읽었다. 안타깝다! 또 다른 책이 얼른 번역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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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4-0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이 리뷰 다 읽기도 전에 읽어야겠다고 아주 강하게 마음 먹게 됐어요. 사두고 안읽은 나의 사촌 레이첼도 읽고 싶어졌고요. 아 초조하네요 얼른 사고 싶어서.

20대에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은 천재일까요?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소설을 못쓰고 있는데 말예요. 언젠가는 근사하게 한 편 쓸거야...라고 생각하지만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없어요 ㅠ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타고나는 재능이란 생각이 듭니다.

잠자냥 2020-04-02 16:21   좋아요 0 | URL
대프니 듀 모리에는 천재 같아요. 이야기도 잘 만들어 내고 그 묘사하며... 휴... <나의 사촌 레이첼>도 정말 재미있어요!

다락방 2020-04-02 16:38   좋아요 1 | URL
저 레베카 엄청 재미있게 읽고 나의 사촌 레이첼도 부랴부랴 사두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많은 책들이 그런것처럼 저쪽에 치워져있어요...오늘 집에 가면 어디있나 찾아봐야겠어요. 인생... ㅠㅠ

단발머리 2020-04-06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름만 아는 작가인데 잠자냥님 리뷰 읽고 나니 당장! 읽고 싶네요. 얼른 서둘러야겠어요.
잠자냥님은 이제 <희생양> 하나 남으셨다고 하시니, 레베카, 나의 사촌 레이첼, 인형이 남아있는 제가 부러우시겠어요 호호

잠자냥 2020-04-06 10:32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ㅎㅎㅎ 레베카, 나의 사촌 레이철, 인형 등등 다 너무 재미있어요. 현대문학에서 나온 대프니 듀 모리에 다른 단편집도 그렇고요. 부럽습니다~!! ㅎㅎ

2020-05-07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07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여름 1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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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좋아하게 되는 책이 있다. 별 기대 없이 집어든 책이 온통 마음을 휘어잡을 때도 있다. <사라지지 않는 여름>이 내게는 그런 책이었다. 10대 레즈비언 소녀의 성장담이라면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어느 날, 이성이 아닌 동성을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정체성을 깨달으며 고민하고 방황하고, 상처받고 그러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가는 그런 과정…….

<사라지지 않는 여름>도 그런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이토록 내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이 작품은 90년대를 배경으로 그 시절의 문화와 그때 10대였던 아이들의 마음, 생각, 행동, 말투 등이 놀랍도록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려진다. 주인공 캐머런만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인 아이린, 린지, 콜리, 제이미, 애덤, 제인, 마크, 에린 등등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옆에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이 아이들은 ‘제이미’ 정도만 빼고는 다들 캐머런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거나 남과 다른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상처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세상에 맞서 싸우려 한다. 심지어 ‘콜리’도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가 없다. 콜리는 아주 먼 후일, 캐머런과 함께 보낸 그 여름을 떠올리며 사실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부모님과 강압적인 오빠 등등 주위 상황 때문에 자신의 다이크 기질, 아니 양성애 기질을 완전히 잠재우고, 세상에서 기대하는 ‘예쁜 이성애자 여성’으로 살아가게 될 지라도, 그 여름을 쉽게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아이들의 풋풋한 사랑과 이제 막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의 호기심, 열정, 장난기 섞인 대화들이 줄곧 귓가에서 머문다. 마치 캐머런의 그 여름처럼.

열두 살 캐머런은 어린 시절 단짝 친구인 아이린과 어느 여름 장난처럼 첫 키스를 하게 된다. 그 첫 키스는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캐머런과 아이린은 어른들 눈을 피해 또 다시 서로의 입술을 찾는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다. ‘여자끼리 키스하면 안 된다고 누가 말해준 적은 없었지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았기 때문’이다. 키스는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며, 같은 학년 아이들도, TV에서도, 영화에서도, 세상에서도 다들 그렇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루트 비어, 훔친 풍선껌, 도둑 키스’ 무엇보다 언제나 함께인 아이린 등등 열두 살치고는 아주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던 캐머런 앞에 어둠이 닥친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사고 소식을 들은 캐머런은 ‘엄마 아빠는 우리 일을 몰라, 엄마 아빠는 몰라, 그러니까 우린 안전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아이린과의 키스가 들키지 않았다는,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 것에 캐머런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 이 죄책감을 내내 떨쳐버리지 못한다.

할머니와 이모의 보살핌 속에 캐머런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고, 그 사이에 장난처럼 키스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 ‘린지’와도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우정을 나눈다. 린지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이며 대항문화적인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또래인 캐머런보다 일찌감치 동성애 세계에 눈을 뜨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아이이다. 그리고 캐머런은 린지를 통해 ‘동성애자의 언어’와 ‘세계’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콜리’를 만나게 된다. 콜리는 아주 예쁘고 매력적인 아이로, 린지나 아이린처럼 성적 취향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부류이다. 남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고, 남자친구도 있는데 콜리는 캐머런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다. 단지 우정일까? 혼란스러운 캐머런은 콜리를 마음에서 자꾸 내몰 수밖에 없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나는 그냥 알맹이 없는, 실없이 웃는 아이일 뿐이라고 애써 거짓으로 꾸미면서 콜리를 멀리해도 둘은 어느덧 가까워지고 결국 이 관계는 파국을 불러온다.

아이린과의 키스를 부모님한테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두려움 많고 소심한 캐머런이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이 폭로되는 것, 그러니까 ‘아웃팅’만큼 끔찍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만다. 할머니와 이모가 캐머런의 정체성을 알게 되고, 극단적인 조치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기독교 캠프에 보낸다. 그곳에서 캐머런의 동성애 성향을 억누르고 정상으로 ‘바로잡아’ ‘고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콜리로 인해 아웃팅당하고, 기독교 캠프에 끌려가면서도 캐머런은 내내 콜리의 체취를 그리워하며 콜리를 생각하고, 언제쯤 콜리 테일러를 미워할 수 있을지, 그러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자신을 아프게 했어도 도저히 미워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기독교 캠프에서는 캐머런처럼 동성애 성향으로 말미암아 가족의 손에 강압적으로 끌려온 아이들이 모여 있다. 그런 아이들끼리 모아두면 연애를 하라고 더 부추기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캠프는 엄격한 규율과 삼엄한 감시로 그런 싹을 잘라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캠프의 교사인 리디아는 세상에 동성애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동성애는 일명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들이 주입한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캐머런의 증상은 ‘동성매력 장애’라면서 이 장애를 캠프에서는 모두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캠프에 따르면 수영을 잘하는 캐머런에게 ‘수영이나 육상처럼 운동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환경도 동성매력 장애 증상을 부추기는 요인이란다. 어디 그뿐인가, ‘남자아이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부적절하고 건강하지 못한 패턴’이나 ‘건강하지 못한 모방 욕구’, ‘여자다운 옷차림이나 스타일을 권유받지도, 보상받지도 못함’, ‘엄마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못함’, ‘현실 도피를 위한 물건 훔치기’ ‘동성과의 적절한 관계 형성 능력 부족(아이린)’, ‘비밀스런 영화 보기 의식’, ‘부모님을 대체하는 루스 이모에 대한 분노=여성성에 대한 저항감’, ‘영화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집착’, ‘린지의 영향력’ 등등이 모두 동성매력 ‘장애’를 부추기는 요소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원인을 제거하면 캐머런은 이성애자로 돌아서게 될까?


나는 내가 아이린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처음 느꼈을 때가 언제였는지 생각해보았다. 아홉 살 때였다. 여덟 살이었나? 그전에는 유치원 선생님인 필딩 부인에게 반했다. 도대체 여섯 살의 나이에 나를 ‘동성매력장애로 고통 받게’ 만들 일이 뭐가 있을까. (2권 54쪽)


이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캐머런를 비롯해 이 기독교 캠프에 갇힌 아이들이 ‘동성매력 장애’라고 부르는 질병을 고쳐서 이른바 ‘정상’ 상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병이 아니고, 장애는 더더욱 아니며 고쳐서 정상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그저 캠프에서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는’ 일을 하게 될 뿐이다. 캠프에서의 삶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삶’이며 ‘호박 속에 갇힌 선사시대 벌레의 삶’이다. ‘죽었지만 확실히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얼어붙어 유예된 상태’. 이런 상황을 캠프의 아이들, 그러니까 캐머런, 제인, 애덤, 마크, 에린 등등은 알고 있고, 그렇기에 그곳에서 진짜 자신을 숨긴 채 적응하는 척, 달라지는 척하면서 그 시간을 견딘다. 견디는 동안 감시의 눈을 피해 자기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 기독교 캠프의 논리는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게이나 다이크 기질을 없애겠다는 취지로 이루어지는 ‘적합한 성역할 활동’을 보면 실소가 터진다. 아니 씁쓸한 분노랄까. 남자아이들은 팀 스포츠, 낚시, 하이킹을 하고 이웃 목장을 몇 시간 도우면서 카우보이 일을 한다. 여자아이들에게 적합한 성역할 활동이란 머리를 크게 부풀린 미용사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가고, 제빵 수업을 받고, 화장법을 배우고, 인형을 가지고 와서 임심과 신생아 돌보기를 하는 것이다. 수영에 소질이 있고, 수영팀 여자아이들이 거의 모두 코치인 테드를 짝사랑할 때, ‘테드 코치처럼 되고’ 싶은 캐머런, 그래서 시합이 끝나면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고 사다리 없이 팔 힘으로 수상안전요원석에 훌쩍 올라가고 지프를 모는, ‘수상안전요원 대장’이 되고 싶은 캐머런에게 화장법이나 제빵 기술, 임신과 출산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캠프에서는 누구도 캐머런을 ‘캠’이라고 부를 수 없었는데, 리디아의 말에 따르면 이미 중성적인 이름을 더 남성적으로 들리게 하는 애칭이기 때문이다. 오마이갓! 육두문자로 욕을 퍼부어주고 싶다. 캐머런, 아니 너는 캠이야. 수상안전요원 대장이 되고 싶은, 여자를 사랑하는 캠이라고!


“신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를 배반하는 몸을 지니는 것보다는 자기 좆을 잘라내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 지옥에서 누가 어떻게 그 녀석을 구해주겠어?” (2권 187쪽)

“세상에. 방금 다 말했잖아요. 이곳의 설립 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어서 변하게 만들려는 거라고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해야 한단 말이에요.” (2권 202쪽)


애덤의 말 그대로 이 기독교 캠프는 ‘신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로 10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나 성역할까지 고정하려고 들고 있다. 그러나 제인이 아는 한,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알다시피, 지금까지 치료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행동을 바꿀 순 있지만 감시가 없어지는 순간 다 끝”이며 “행동이 변화했다고 해서 내면이 바뀌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치료라는 건 없으니까.” 다들 더는 비용을 낼 수 없어서 떠나거나, 아니면 졸업해서 떠난다. 그것도 아니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든지. 이런 미래 앞에 캐머런, 아니 캠은 어떤 선택을 할까. 소심하고 두려움 많고, 자신의 정체성을 누군가가 알아차릴까봐 전전긍긍하던 그 10대 소녀는 이토록 폭압적인 기독교 캠프에서 마침내 자기만의 길을 나아간다.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하기보다는 끌어안고 사랑하는 쪽으로. 수면 아래가 아닌, ‘호안선 너머, 숲 너머, 울퉁불퉁한 산 너머, 그 너머, 그 너머’ 온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마 그 세상에서는 상처받을 일이 또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린과 보낸 여름, 콜리와 보낸 여름은 사라지지도 않고, 누군가가 억지로 지워내려 한다고 지울 수도 없다. 그 여름 자체가 캠의 일부였고, 정체성 그 자체였으므로. 그 여름을 간직하고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는 캠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게 된다. 너의 여름은 찬란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찬란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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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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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축축 처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책도 별 재미가 없다. 습관처럼 읽고는 있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리 감동어린 이야기가 책 속에 펼쳐져도, 그건 그저 책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만 같다. 기분이 처지는 날에는 인생 자체에 회의가 밀려온다. 어차피 이렇게 천천히 늙어가며 죽어서 무덤으로 갈 인생,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삶의 의미를 모르겠는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지복의 성자>를 읽는다.

아룬다티 로이, 그 이름만 보고 이 책을 사두었다. 그이의 신간 소식, 그것도 소설이라니, 반가운 마음이 컸다. 사두고 몇 주 그냥 두었던 책을 손에 들고 몇 장 읽어 나가는데, 온갖 고민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잊힌다.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아 요즘은 책도 재미없네’했던 생각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음을 다잡고 이 작품을 읽게 된다. 그저 이렇게 재미있다고만 느끼며 흘려보낼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고, 그 어느 순간 아, 정말 아름답다, 말할 수 없이…….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다.

첫 장부터 의미심장하다. <지복의 성자>를 다 읽은 이라면 대부분은 처음 두세 쪽이 얼마나 잘 쓰였는지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서커스 없는 광대, 궁전 없는 여왕이라고 헐뜯을 때에도 그 상처가 그녀의 가지들 사이로 산들바람처럼 불어가게 했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음악을 고통을 달래주는 진통제로 삼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곧 그녀의 이름으로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영어를 아는 한 남자가 그녀 이름을 거꾸로 하면 ‘마즈누Majnu’가 된다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영어에도 라일라와 마즈누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서 마즈누는 로미오, 라일라는 줄리엣이라고 그녀에게 알려준다.
 
다음에 만났을 때 영어를 아는 남자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말한다. 그녀 이름을 거꾸로 쓰면 ‘무즈나Mujna’가 되고 그건 아무 뜻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관없다고 말한다. “난 다 되니까요. 난 로미와 줄리이고, 라일라와 마즈누죠. 그리고 무즈나도 돼요. 안 될 게 뭐예요? 내 이름이 안줌이라고 누가 그래요? 난 안줌이 아니라 안주만(모임 집합이라는 뜻)이에요. 난 메필(음악과 춤이 있는 소규모 연회)에요. 모든 사람과 아무도 아닌 사람,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모임.”(13~14쪽)이라고 말한다.

그녀 이름에 얽힌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지복의 성자>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단 몇 문장에 압축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뒤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감탄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 이름에 얽힌 말들이 그냥 흘릴 수 없으리라는 걸 예감했다고나 해야 할까.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아가며 궁전 없는 왕비, 서커스 없는 광대이며, 로미오가 될 수도 있고 줄리엣이 될 수도 있는 사람,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속삭임으로 자신의 상처를 바람에 씻겨낸 사람, 그녀의 이름은 ‘안줌’이다. 그녀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자 아무도 아닌 사람. 그녀는 자신을 왜 이렇게 이야기할까?

의문은 곧 풀린다. 안줌은 이른바 ‘히즈라’이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동시에 남자이기도 하고 여자이기도 한 제3의 성. 힌두어로 그런 이들을 ‘히즈라’라 부른다. 안줌은 인도의 올드델리에서 칭기즈칸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여기는 무슬림의 넷째 아이로 태어난다. 아들의 탄생 소식을 접한 안줌의 부모는 더할 수 없이 행복감에 젖는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안줌의 엄마는 아들의 남성 성기 아래 여성 성기가 있음을 발견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들’을 갖고 싶었던 안줌의 아버지는 아들의 여성적인 성향 따위는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으며 아들 안줌, 그러니까 그녀의 어린 시절 이름인 ‘아프타브’를 아들로 키우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아프타브는 아버지가 칭기즈칸처럼 용사였던 선조들이 전장에서 보인 용맹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아무런 감흥이 없다. 오히려 칭기즈칸이 아름다운 아내 보르테 카툰과 결혼하게 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자신이 칭기즈칸 같은 용사보다는 보르테 카툰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다가 우연히 시장에서 여장을 한 히즈라를 보고 그녀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마침내 열다섯 살에 아프타브는 그의 가족이 수세기 동안 살아온 터전에서 겨우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히즈라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 ‘꿈의 집’이라는 의미의 콰브가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안줌은 남성 성기를 제거하고 호르몬제를 복용하면서 자신이 꿈꾸던 ‘여성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몇 년이 흘러 안줌은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히즈라가 된다. 영화제작자들이 서로 그녀를 차지하려고 했고, NGO단체들도 그녀를 독점하려 한다.

얼핏 보기에, 비록 ‘땜질된 몸’이지만 자신과 비슷한 이들과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안줌은 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그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면 나름 행복한 인생일 것 같다. 그러나 삶이 늘 그렇듯이 뜻대로만 풀리지 않는다. 콰브가에서 삼십년 넘게 살던 그녀가 마흔 여섯이라는 나이에 문득 그곳을 떠나고 싶다고 한다. 두니야(세상)로 돌아가서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 ‘엄마’가 되고 싶다고……. 어쩌면 안줌은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녀 앞에 우연히 한 아이가 나타난다. 사원 계단에서 울고 있는 세살쯤 된 아이 ‘자이나브’를 발견하고 안줌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아이의 엄마가 된다. 자이나브는 안줌의 유일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엄마가 되고 싶다던 소망도 이뤄졌는데, 안줌은 왜 무덤가에서 나무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으로 태어난 안줌, 그리고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재탄생, 그녀가 꿈꾸던 엄마로서의 삶의 시작 등등은 이 작품의 초반에 해당한다. 앞으로 안줌이 만나게 될 다양한 사람들과 그녀와 얽히는 ‘틸로’라는 또 다른 여성의 이야기까지 교차하면 <지복의 성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며 살아가는 인도 사회의 축소판으로, 그들의 삶을 통해 그 세계가 지닌 온갖 모순과 고통, 처참한 현실을 더 없이 세밀하게 그려나간다.

책을 읽는 동안 인도와 파키스탄, 구라자트 학살, 카슈미르 분쟁 등을 검색해봤다. 이 책을 읽는 많은 이들이 그랬을 것이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카스트제도, 빈부격차 등등 얼핏 알고만 있던 인도의 복잡한 현실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 안줌의 처지는 어떻게 보면 그 몸 자체로 인도의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힌두교 안의 이슬람, 인도 안의 이슬람교도, 또는 카슈미르인. 그 모든 것들이 그 한 몸에서 날마다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은 과연 끝이 날 수 없는 것일까? 신이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 보기 위해 히즈라를 만들었다는 말처럼 히즈라와 같은 인도는 정녕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일까?


“신이 왜 히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
“여기서 누가 행복한데? 전부 가짜고 속임수야. 너 같은 정상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너 말고 너 같은 어른들을 말하는 거야. 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뭐지? 물가 상승, 자녀 입시, 남편의 폭력, 아내의 부정행위,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 결국엔 해결이 되는 외적인 문제들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물가 상승, 입시, 때리는 남편 부정한 아내가 전부 우리 내부에 있어. 폭동도 우리 내부에 있지.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고. 인도-파키스탄 전쟁도 우리 내부에 있어. 그리고 그것들은 절대로 해결이 안 돼.”(39쪽)


구라자트 학살을 몸소 겪고, 그 충격으로 콰브가를 떠나 공동묘지에서 폐인처럼 살던 안줌, 나무처럼 살아가던 그녀의 변화에서 그 해답이 있을지 모른다. 안줌은 슬픔에서 벗어나 무덤들 사이에 방을 꾸며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든다. 파라다이스라는 의미의 ‘잔나트’. 죽은 이들이 사는 공간인 묘지가 삶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곳은 안줌만이 아니라 모든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을 위한 보금자리가 된다.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다. 게다가 매춘부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에서 받아주지 않는 여자의 시신을 목욕시켜 장례를 치러주면서 이곳은 게스트하우스 겸 장례식장도 된다. 산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죽은 사람들까지 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진정한 파라다이스.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지켜보노라면 이곳이 무덤인지, 저곳- 그러니까 여전히 폭력이 난무하고 계급과 그에 따른 차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저 인도의 ‘두니야’가 무덤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 ‘두니야’에 비하면 ‘만신창이가 된 묘지의 천사들이 만신창이가 된 피수호자들을 보살피며, 두 세계 사이의 문을 열어두어 이승의 영혼들과 이승을 떠난 영혼들이 같은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처럼 어울릴 수 있게’ 해준 이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는 진정으로 축복받은 천국 같은 공간이 아닐까. 그래서 이곳에서는 ‘왠지 모든 게 조금은 더 견디기 쉬워’진다’(522쪽)

한때 안줌의 엄마가 어린 아들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의지했던 신, 그리고 이제는 안줌이 섬기는 지복의 신 ‘하즈라트 사르마드’는 페르시아 출신의 성인(聖人)이다. 그는 일생의 사랑을 찾아 인도 델리로 온 뒤 유대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힌두교인 소년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의 목이 잘리는 순간까지 소년을 향한 사랑의 시를 읊는다.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인 그. 그 신의 모습에서 어느덧 안줌의 모습이 떠오른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그 모든 ‘정상’을 벗어난 이들을 산 자와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온 마음으로 껴안는 안줌. 그녀가 바로 21세기 지복의 신 ‘사르마드’가 아닐까. 하나의 종교, 하나의 성별만을 고집하는 경직된 인도에 이 안줌 같은 존재야 말로 답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고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는 안줌의 포용성 안에 인도의 또 하나의 상처라고도 할 수 있는 ‘우다야’같은 아기도 새로운 해가 떠오르듯이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지복의 성자>는 내게 ‘잔나트 게스트하우스’같은 존재가 되었다. 삶에 조금 지쳤을 때 안줌 같은 사람이 진심으로 나를 껴안아주고 괜찮다고 토닥여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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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03-1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하하하.... 저도 지금 책장에서 대기중입니다. 이 글 읽으니 기대 만빵입니다!

잠자냥 2020-03-18 14:25   좋아요 0 | URL
으앗, 이 글은 책 다 읽고 읽으시지... ㅎㅎㅎ 아무튼 아룬다티 로이는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 같습니다.

다락방 2020-03-18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금 읽는 중입니다, 잠자냥 님!!

잠자냥 2020-03-18 14:26   좋아요 0 | URL
오, 현명하게 이 글은 안 읽으셨겠지요? ㅎㅎㅎ 책 재미나게 읽으세요.

다락방 2020-03-18 14:43   좋아요 0 | URL
제가 딱히 현명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만?
잠자냥 님 리뷰를 제가 어떻게 안읽겠습니까. 다 읽었습니다!!

잠자냥 2020-03-18 14:51   좋아요 0 | URL
오... 이런 제 글을 안 읽고 책을 읽으셨다면 더 재미나게 읽으실 텐데... 안타깝습니다;; 그치만 제가 이 글에 쓰지 않은 이야기도 훨~~~씬 많으니까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ㅎㅎㅎ

다락방 2020-03-18 14:59   좋아요 1 | URL
네, 잠자냥 님 리뷰에 있는 이야기는 이미 제가 다 읽은 이야기들이더라고요. 뭐, 그게 아니어도 저는 괜찮습니다만. 으하하하하하하하하.
 
광기와 치유의 책
레지나 오멜버니 지음,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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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기와 치유의 책>의 작가 ‘레지나 오멜버니’의 이름은 처음 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까닭은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의사로 일하며 의학서를 집필하던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흔치 않던 시대, 특히 의술을 펼치는 여성은 마녀로 몰리던 시대에 두려움 없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의사 가브리엘라의 이야기’라는 이 책의 소개 문장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정작 이 책을 읽고 나는 조금 실망해서 100자평도 가혹하게(?) 남겼다. 알라딘 평가에 별 셋을 줬는데 그랬더니 이 책의 평점은 6점으로 나오더라? 나만 100자평을 남겨서 그런 것 같다. 사실 6점까지는 아닌데... 이 책에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실망스러운 건 사실이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점은 ‘여성이 사회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시대에 의사로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가브리엘라’ 그녀의 당찬 모습을 바란 것이다. 그래, 정말 그녀는 ‘두려움 없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진짜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계속 걸어, 걷고 또 걸어...... 아빠 찾아 삼만리야. 그래서 나는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휴.... 얘 또 걷고 있네, 그만 좀 걷고 뭔가 환자를 돌보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16세기 말 베네치아, 가브리엘라는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시절에는 흔치 않은 여성 의사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환자들을 돌봤고 대학에서 정식으로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 무렵 여성의 결혼 적령기라는 열여섯 살을 훌쩍 넘어 서른 살이 되었지만, 연애나 결혼과는 담을 쌓고 스스로 ‘의사라는 직업과 결혼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오직 아버지와 함께 환자를 돌보고, <질병백과>라는 책을 쓰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편지 한 장만 딸랑 남긴 채 집을 나가버리고 10년 째 종적을 감춘다. 그 뒤로 간간이 편지를 보내 소식을 전하지만 2년 전부터 그마저도 끊긴다. 그렇다면 가브리엘라 혼자 이 마을에서 의사 노릇하면서 지내면 되지 않느냐? 싶을 텐데, 그게 불가능하다. 마을의 의사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에서는 멘토인 아버지 없이는 ‘여자’인 가브리엘라에게 의사로서의 회원 자격을 더 이상 유지해 줄 수 없다고 통보해 온다. 이것도 너무 오래 봐준 것이라고, 알다시피, 여의사는 아예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가브리엘라는 당연히 길드에 항의한다. 지금까지 자기가 돌보던 환자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자기의 여자 환자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길드에서는 남자 의사들이 돌보면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거기에 가브리엘라는 ‘여자들은 대게 여자 의사를 선호한다’고, ‘아무리 직업정신이 투철하다 해도 쓸 데 없이 캐묻기 좋아하는 남자 의사보다 여자 의사가 진찰해주길’(26쪽) 원한다고 항명한다. 그러나 길드는 꿈쩍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떠난 뒤 길드는 가브리엘라에게 여자 환자만 진료하도록 제한을 두더니 이윽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의사협회에서 제명해버린 것이다. 이런 가브리엘라에게 선택권은 없다. 의사로서 다시 환자들을 돌보려면 아버지를 찾아서 집으로 모셔와야만 한다.

이리하여, 가브리엘라는 유모나 다름없는 ‘올미나’와 그의 남편 ‘로렌초’ 두 사람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은 여성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올미나와 로렌초가 함께한다 하더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게다가 약초를 다루거나 의학 지식이 있는 여자는 더 위험하다. 그런 여성은 마녀로 몰아서 처형하는 곳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위험 속에 가브리엘라와 올미나는 남장을 하고 로렌초와 함께 남자 셋이 여행을 하는 것처럼 위장한 채 ‘아빠 찾아 삼만리’를 계속 해나간다. 홍수 때문에 불어난 호수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면서 이탈리아를 지나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프랑스를 거쳐 모로코까지 여행을 이어가지만, 아버지의 흔적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틈틈이 가브리엘라는 <질병백과> 원고를 쓰면서 아버지를 만날 그날만을 간절히 바란다. 과연 아버지를 만나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고, 가브리엘라는 의사로 다시 활동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미하일 불가코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 여성 버전쯤을 기대한 것 같다. 여의사를 인정하지 않은 시대에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면서 그들과 소통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훌륭한 의사로 자기만의 길을 당당히 나아간 그런 여성의 삶을 그린 소설을. 그런데 이 작품은 의사 자리를 되찾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와야만 했고, 그 여정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 기대에서 일단 어긋났다. 게다가 아버지는 왜 집을 나갔는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버지의 편지에 등장한 사람들을 만나서 아버지 상태를 물어보면 뭔가 병을 앓고 있었고, 우울증과 비슷한 증세, 또는 ‘달의 영향을 받아 미쳐가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마저도 조금 생뚱맞다. 한편, 가브리엘라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남편의 이런 증세를 눈치 챈 것 같고, 이런 까닭으로 부부 사이는 냉랭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정신병이 유전되어 가브리엘라에게도 그런 증상이 나타나나 조금 기대(?)했는데, 그건 또 아니라서 맥이 빠졌다. 결국 아버지의 실종과 정신병은 가브리엘라가 길을 떠나게 만들기 위한 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런 설정이 또 실망을 준다.

가브리엘라 어머니 캐릭터도 영 못마땅하다. 아버지가 우울증 환자라고 한다면 어머니는 신경증을 앓는 여성 같다. 딸과 아버지 사이가 좋은 데 비해 어머니와 가브리엘라는 서로를 못 견뎌 한다. 어머니는 딸에게 “네가 편안한 삶을 누리길 바랄 뿐이야. 가브리엘라, 아이도 낳고, 왜 괜찮은 의사 하나를 골라서 결혼하지 않는 거니? 왜 꼭 네가 의사가 되겠다고 그래?” 말하며 딸이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남편을 의학에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하나뿐인 딸마저 의학에 미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못마땅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남편이나 딸에 대한 미움이 조금 지나칠 정도이다. 자기의 온갖 불만을 이 두 사람에게 쏟아붓고 있다고나 할까.


너의 이 광증이, 네가 만날 읽어대는 그 책들, 젊은 여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신체 부위가 버젓이 나오다니!) 책들 때문에 생긴 거라고 내가 믿는 그 광증이 네 분별력을 지워버렸어. 나는 그런 종류의 집착을 전에 네 아버지한테서도 본 적 있단다. 그것 때문에 그이는 자기 연구에 부합하지 않는 거라면 전부 내쳐버렸지. 남자가 그러면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여자가 그러면 흉할 뿐이란다. -가브리엘라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 (185쪽)


우울증을 앓는 아버지와 히스테릭한 어머니, 그리고 이런 어머니와 함께 사는 삶이 감옥과도 같아,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는 딸. 이런 설정은 얼핏 이 가족에 뭔가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기대하게도 하지만 그마저도 아니어서 허무하다. 히스테리한 어머니의 성격도 가브리엘라가 길을 떠나게 만드는 데 거드는 역할을 할 뿐이다. 거기에 그치고 만다. 게다가 나는 엘렉트라콤플렉스나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비슷한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광기와 치유의 책> 이 작품은 비록 의사인 아버지를 찾아야만 의사로서 다시 활동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는 해도, 가브리엘라와 아버지의 관계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비해 한없이 밀착되어 있다. 그 둘이 아무리 ‘학문’으로 통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굳이 어머니를 그 두 사람과 적대적인 인물로 만들었어야 했을까? 엄마와 딸은 왜 친밀하게 서로를 지지하는 사이면 안 되는지 의문이 든다.


“여기 사람들은 여자 의사를 곱게 보지 않아요. 당신이 어디 출신이고, 당신 아버지가 누구든 간에요. 그리고 데어 슈피탈은 방문할 수 없어요. 그곳의 돈 많은 의사들이 우리를 겁내거든요. 우리가 아는 게 좀 있잖아요. 근데 뭘 아는 여자들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니까.” (121쪽)


위의 인용구절만 보면 다분히 페미니즘적인 시선이다. ‘뭘 아는 여자들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아니, 이 구절만이 아니라, 이 작품 자체가 페미니즘으로 읽힐 수 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금지된 시대에 의사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라니!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곳곳에서 여성주의 시각이 담긴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길을 떠난 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남장을 한 가브리엘라는 요즘 시대로 말하면 탈코르셋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남장을 한 뒤로는 여자 옷의 불편한 점을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 ‘보디스와 치마를 안 입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마음껏 숨 쉬고 걸을 수 있었다.’ 등등.

그러나, 이 사람 가브리엘라는 모순덩어리이다. 연애와 결혼을 담 쌓고 살더니 여행길에서 만난 남자들하고 너무 금사빠가 아닌가. 조금만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으면 막 설레고 혼자 사랑을 키워나간다. 지금까지 의사라는 직업과 결혼한 셈 쳤다더니, 아버지 찾아 길을 떠나는 바람에 환자 돌볼 일이 별로 없어지니까 이제 연애로 눈이 돌아간 것인가? 그러다가 결국 ‘해미시’라는 남자를 만나서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결말!!!! 이것은 <작은 아씨들>의 ‘조’가 그 늙수그레한 교수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일만큼이나 못마땅했다. 의사라는 직업하고 결혼했다더니! 막판에는 해미시랑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 왜 모든 여자의 행복은 결혼과 아이 낳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놈의 로맨스!! 로맨스!!!! 게다가 너무 웃긴 게 무슨 슈퍼 울트라 정자와 난자의 만남인지. 가브리엘라와 해미시는 딱 한 번, 그것도 도서관에서(여보세요들!) 짧게 사랑을 나눴을 뿐이데 그때 애가 생긴 게 아닌가........ 내가 뭐 놓친 부분이 있나 싶어서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니까. 응? 나참.

하여간 작가가 혼돈 속에서 집필했는지 가브리엘라가 혼돈 속에서 걸어갔는지, 의사로서 당당히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가 되다만 이야기, 아니 길은 열심히 ‘걸어가기는’한 이야기. 진짜 열심히 걷고 걸어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를 얻어 돌아온 이야기. 그게 바로 <광기와 치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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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10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걷고 걸어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를 얻어 돌아온 이야기라니.... 아, 맥빠지네요. 결국 종착지는 남자여야 하는건지...
책에 실망한 잠자냥 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는 그런 실망이 담긴 리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훗.

잠자냥 2020-03-10 12:50   좋아요 0 | URL
뜨아아.. 조가 늙수그레 교수랑 결혼했을 때 책 집어던진 그럼 심정. ㅎㅎ 물론 조를 아끼듯이 가브리엘라를 아끼지는 않았지만 암튼 참으로 실망스러운 결말이었습니다(아 이거 스포일러 표시했어야 하는데!) 암튼 작가의 데뷔작이라 그러려니 하기로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왜 여성주의 시선을 가장했는지 -_- 고구마 10개 먹은 기분이에요.

2020-03-11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1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20-03-17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 하던 책이었는데...

뭐랄까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는
가 봅니다. 잠자냥님의 충실한
리뷰 덕분에 굳이 읽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
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개는 흥미로운데 그놈의 얼토
당토 않은 로맨스가 망친 게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잠자냥 2020-03-18 09: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용두사미입니다. -_-;;
로맨스는 그렇게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데, 아버지 찾아다니면서 이렇다할 사건이 없으니까 지루하고 그렇더라고요...
 
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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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첫째 고양이를 만나게 된 이후로 나는 완전히 고양이 덕후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쁜 존재가 고양이라고 말하는 지경이다. 얼마 전에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이 지구가 너무 심심하고 못난 것들로만 가득해서 단 하나 예쁘고 재미난 녀석들을 창조해야겠다, 결심하고 만든 녀석들이 바로 고양이’일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 나는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아니 세 마리와 함께 지낸다. 모두 길에서 데려온 아이들. 엄마에게 버림당해 빽빽 울고 있던 녀석들이 지금은 내 집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늑한 곳을 찾아 한낮의 게으른 잠을 즐기고, 지들끼리 우다다 뛰놀기도 하고, 집사에게 예뻐해 달라고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세 마리가 모두 어느 날 문득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치 <고양이 낸시>의 ‘낸시’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기 고양이 낸시는 나와 같은 인간 집사의 집 앞에 버려진 것이 아니다. 낸시가 버려진 집 앞은 무려 평범한 쥐 가족의 집이다!

쥐의 천적이라는 고양이! 바로 그 고양이의 새끼가 집 앞에 버려져 있다니, 쥐들이 얼마나 놀랬으랴. 그럼에도 낸시를 처음 본 더거 씨는 가여운 아기 고양이 낸시의 귀여움에 홀딱 반해 낸시를 덜컥 집 안으로 들이고 만다. 아들 지미도 낸시를 보고는 완전히 반하고 만다. 너무 너무 귀여운 것이 아닌가! 사실 아기 때부터 우리 고양이들을 키워온 나로서는 아기냥의 그 귀여움을 공감하고도 남는다. 우주 최강의 귀여움이랄까. 그렇지만 나는 고양이보다 훨씬 덩치 큰 인간 집사, 그에 비해 더거 씨와 그의 아들 지미는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고양이 낸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다니 정말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낸시의 귀여움에 반한 더거 씨 가족이야 그렇다 쳐도, 산 넘어 산. 마을 사람들의 눈은 어찌 피할 수 있을까? 자기들 마을에 아기 고양이가, 그렇지만 무럭무럭 성장해 언젠가는 큰 고양이가 되어 자신들을 위협할 그런 존재가 나타났다고 하면 그 누가 반길 수 있을까. 당장 목숨이 위협을 받는데 말이다. 더거 씨는 이런 염려 때문에 낸시에게 줄 우유를 살 때도 남몰래 비밀에 부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마을 사람들은 곧 낸시의 존재를 알아차리는데! 와우, 놀라워라. 더거 씨의 걱정과는 달리 모두가 낸시의 귀여움에 반해 스르르 두려움도 공포도 잊은 채 낸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그 와중에도 걱정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존재하지만....... 이런 틈바구니에서 낸시는 무사히 쥐들과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쥐들이 낸시와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과정을 잔잔하고 귀여운 에피소드들로 그려나간다.

<고양이 낸시>의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낸시’라기보다는 낸시를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대해주는 더거 씨와 지미, 그리고 마을 쥐들이 아닐까. 그들의 따뜻한 이해와 환대, 사랑이 없었다면 낸시가 그토록 귀엽고 다정하고 섬세한 고양이로 자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주는 존재들을 ‘본능’이라는 이유로 ‘사냥감’으로 생각해서 쫓아다니고 괴롭히거나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이해’와 ‘사랑’, ‘존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쥐’가 아닌 ‘인간’이다. 그럼에도 낸시처럼 귀엽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더거 씨와 지미에게 소중한 가족이 된 ‘낸시’처럼 내 고양이들도 내겐 세상 둘도 없는 사랑하는 가족이다. 그러나 쥐와 고양이처럼, 인간과 고양이도 엄연히 종(種)이 다르다. 얼핏 생각해서, 고양이 기준으로 봤을 땐 인간이 쥐에 비해 덩치도 크고 뭔가 도구도 잘 쓰니까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인간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읽기로 고양이들은 인간 집사를 털도 나지 않은, 아직 덜 자란 덩치만 큰 아기 고양이라 생각해서 자신들이 돌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지 않는가. 실제로 그래서 서열이 높은 고양이가 낮은 고양이에게 주로 해주는 그루밍을, 고양이가 인간에게 해주는 일도 드물지 않다. 나만 해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리 둘째 고양이에게 그루밍당해서 침범벅이 되곤 한다. 그럴 때 나는 녀석에게 “엄마! 회사 갔다 올게요.”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종을 뛰어넘어서 인간과 고양이가 애정을 나누듯이, 쥐와 고양이 또한 그런 관계가 가능하고도 남지 않을까.

<고양이 낸시>는 이렇게 남들이 보기엔 서로 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인 고양이와 쥐의 우정과 사랑을, 그것도 돌보는 고양이, 돌봄당하는 쥐가 아닌, 작은 쥐들이 덩치 큰 고양이를 돌본다는 설정을 통해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가 되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나간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쥐 마을의 쥐들과 같다면, 이 지구에 폭력과 혐오라는 단어는 몽땅 사라질 텐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 고양이들에게도 분홍색 리본 머리핀 꽂아주고 공주님놀이를 하자고 해볼까 싶은데, 녀석들은 우다다 뛰기를 더 좋아하는 철부지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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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02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땡투땡투!! >.<

잠자냥 2020-03-02 22:28   좋아요 0 | URL
아마 이 책은 다 읽고 조카에게 주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 ^_^

다락방 2020-03-03 11:58   좋아요 0 | URL
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구매하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