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치유의 책>의 작가 ‘레지나 오멜버니’의 이름은 처음 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이 데뷔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까닭은 ‘16세기 베네치아에서 의사로 일하며 의학서를 집필하던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흔치 않던 시대, 특히 의술을 펼치는 여성은 마녀로 몰리던 시대에 두려움 없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의사 가브리엘라의 이야기’라는 이 책의 소개 문장은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정작 이 책을 읽고 나는 조금 실망해서 100자평도 가혹하게(?) 남겼다. 알라딘 평가에 별 셋을 줬는데 그랬더니 이 책의 평점은 6점으로 나오더라? 나만 100자평을 남겨서 그런 것 같다. 사실 6점까지는 아닌데... 이 책에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실망스러운 건 사실이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한 점은 ‘여성이 사회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시대에 의사로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가브리엘라’ 그녀의 당찬 모습을 바란 것이다. 그래, 정말 그녀는 ‘두려움 없이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진짜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계속 걸어, 걷고 또 걸어...... 아빠 찾아 삼만리야. 그래서 나는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휴.... 얘 또 걷고 있네, 그만 좀 걷고 뭔가 환자를 돌보면 안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16세기 말 베네치아, 가브리엘라는 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 시절에는 흔치 않은 여성 의사가 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환자들을 돌봤고 대학에서 정식으로 의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그 무렵 여성의 결혼 적령기라는 열여섯 살을 훌쩍 넘어 서른 살이 되었지만, 연애나 결혼과는 담을 쌓고 스스로 ‘의사라는 직업과 결혼한 여자’라고 생각하며 오직 아버지와 함께 환자를 돌보고, <질병백과>라는 책을 쓰는 데 전념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편지 한 장만 딸랑 남긴 채 집을 나가버리고 10년 째 종적을 감춘다. 그 뒤로 간간이 편지를 보내 소식을 전하지만 2년 전부터 그마저도 끊긴다. 그렇다면 가브리엘라 혼자 이 마을에서 의사 노릇하면서 지내면 되지 않느냐? 싶을 텐데, 그게 불가능하다. 마을의 의사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에서는 멘토인 아버지 없이는 ‘여자’인 가브리엘라에게 의사로서의 회원 자격을 더 이상 유지해 줄 수 없다고 통보해 온다. 이것도 너무 오래 봐준 것이라고, 알다시피, 여의사는 아예 허가가 나오지 않는다고.
가브리엘라는 당연히 길드에 항의한다. 지금까지 자기가 돌보던 환자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자기의 여자 환자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길드에서는 남자 의사들이 돌보면 된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다. 거기에 가브리엘라는 ‘여자들은 대게 여자 의사를 선호한다’고, ‘아무리 직업정신이 투철하다 해도 쓸 데 없이 캐묻기 좋아하는 남자 의사보다 여자 의사가 진찰해주길’(26쪽) 원한다고 항명한다. 그러나 길드는 꿈쩍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떠난 뒤 길드는 가브리엘라에게 여자 환자만 진료하도록 제한을 두더니 이윽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리고 이제는 완전히 의사협회에서 제명해버린 것이다. 이런 가브리엘라에게 선택권은 없다. 의사로서 다시 환자들을 돌보려면 아버지를 찾아서 집으로 모셔와야만 한다.
이리하여, 가브리엘라는 유모나 다름없는 ‘올미나’와 그의 남편 ‘로렌초’ 두 사람과 함께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러나 16세기 유럽은 여성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기에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올미나와 로렌초가 함께한다 하더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게다가 약초를 다루거나 의학 지식이 있는 여자는 더 위험하다. 그런 여성은 마녀로 몰아서 처형하는 곳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위험 속에 가브리엘라와 올미나는 남장을 하고 로렌초와 함께 남자 셋이 여행을 하는 것처럼 위장한 채 ‘아빠 찾아 삼만리’를 계속 해나간다. 홍수 때문에 불어난 호수를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면서 이탈리아를 지나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프랑스를 거쳐 모로코까지 여행을 이어가지만, 아버지의 흔적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런 틈틈이 가브리엘라는 <질병백과> 원고를 쓰면서 아버지를 만날 그날만을 간절히 바란다. 과연 아버지를 만나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고, 가브리엘라는 의사로 다시 활동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미하일 불가코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 여성 버전쯤을 기대한 것 같다. 여의사를 인정하지 않은 시대에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면서 그들과 소통하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훌륭한 의사로 자기만의 길을 당당히 나아간 그런 여성의 삶을 그린 소설을. 그런데 이 작품은 의사 자리를 되찾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와야만 했고, 그 여정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 기대에서 일단 어긋났다. 게다가 아버지는 왜 집을 나갔는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버지의 편지에 등장한 사람들을 만나서 아버지 상태를 물어보면 뭔가 병을 앓고 있었고, 우울증과 비슷한 증세, 또는 ‘달의 영향을 받아 미쳐가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마저도 조금 생뚱맞다. 한편, 가브리엘라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남편의 이런 증세를 눈치 챈 것 같고, 이런 까닭으로 부부 사이는 냉랭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정신병이 유전되어 가브리엘라에게도 그런 증상이 나타나나 조금 기대(?)했는데, 그건 또 아니라서 맥이 빠졌다. 결국 아버지의 실종과 정신병은 가브리엘라가 길을 떠나게 만들기 위한 장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런 설정이 또 실망을 준다.
가브리엘라 어머니 캐릭터도 영 못마땅하다. 아버지가 우울증 환자라고 한다면 어머니는 신경증을 앓는 여성 같다. 딸과 아버지 사이가 좋은 데 비해 어머니와 가브리엘라는 서로를 못 견뎌 한다. 어머니는 딸에게 “네가 편안한 삶을 누리길 바랄 뿐이야. 가브리엘라, 아이도 낳고, 왜 괜찮은 의사 하나를 골라서 결혼하지 않는 거니? 왜 꼭 네가 의사가 되겠다고 그래?” 말하며 딸이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남편을 의학에 빼앗긴 것으로도 모자라 하나뿐인 딸마저 의학에 미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게 못마땅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남편이나 딸에 대한 미움이 조금 지나칠 정도이다. 자기의 온갖 불만을 이 두 사람에게 쏟아붓고 있다고나 할까.
너의 이 광증이, 네가 만날 읽어대는 그 책들, 젊은 여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신체 부위가 버젓이 나오다니!) 책들 때문에 생긴 거라고 내가 믿는 그 광증이 네 분별력을 지워버렸어. 나는 그런 종류의 집착을 전에 네 아버지한테서도 본 적 있단다. 그것 때문에 그이는 자기 연구에 부합하지 않는 거라면 전부 내쳐버렸지. 남자가 그러면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여자가 그러면 흉할 뿐이란다. -가브리엘라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 (185쪽)
우울증을 앓는 아버지와 히스테릭한 어머니, 그리고 이런 어머니와 함께 사는 삶이 감옥과도 같아,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는 딸. 이런 설정은 얼핏 이 가족에 뭔가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기대하게도 하지만 그마저도 아니어서 허무하다. 히스테리한 어머니의 성격도 가브리엘라가 길을 떠나게 만드는 데 거드는 역할을 할 뿐이다. 거기에 그치고 만다. 게다가 나는 엘렉트라콤플렉스나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비슷한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광기와 치유의 책> 이 작품은 비록 의사인 아버지를 찾아야만 의사로서 다시 활동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는 해도, 가브리엘라와 아버지의 관계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비해 한없이 밀착되어 있다. 그 둘이 아무리 ‘학문’으로 통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굳이 어머니를 그 두 사람과 적대적인 인물로 만들었어야 했을까? 엄마와 딸은 왜 친밀하게 서로를 지지하는 사이면 안 되는지 의문이 든다.
“여기 사람들은 여자 의사를 곱게 보지 않아요. 당신이 어디 출신이고, 당신 아버지가 누구든 간에요. 그리고 데어 슈피탈은 방문할 수 없어요. 그곳의 돈 많은 의사들이 우리를 겁내거든요. 우리가 아는 게 좀 있잖아요. 근데 뭘 아는 여자들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니까.” (121쪽)
위의 인용구절만 보면 다분히 페미니즘적인 시선이다. ‘뭘 아는 여자들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아니, 이 구절만이 아니라, 이 작품 자체가 페미니즘으로 읽힐 수 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이 금지된 시대에 의사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라니!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곳곳에서 여성주의 시각이 담긴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길을 떠난 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남장을 한 가브리엘라는 요즘 시대로 말하면 탈코르셋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남장을 한 뒤로는 여자 옷의 불편한 점을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 ‘보디스와 치마를 안 입으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마음껏 숨 쉬고 걸을 수 있었다.’ 등등.
그러나, 이 사람 가브리엘라는 모순덩어리이다. 연애와 결혼을 담 쌓고 살더니 여행길에서 만난 남자들하고 너무 금사빠가 아닌가. 조금만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으면 막 설레고 혼자 사랑을 키워나간다. 지금까지 의사라는 직업과 결혼한 셈 쳤다더니, 아버지 찾아 길을 떠나는 바람에 환자 돌볼 일이 별로 없어지니까 이제 연애로 눈이 돌아간 것인가? 그러다가 결국 ‘해미시’라는 남자를 만나서 본격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결말!!!! 이것은 <작은 아씨들>의 ‘조’가 그 늙수그레한 교수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일만큼이나 못마땅했다. 의사라는 직업하고 결혼했다더니! 막판에는 해미시랑 결혼해서 애까지 낳아! 왜 모든 여자의 행복은 결혼과 아이 낳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놈의 로맨스!! 로맨스!!!! 게다가 너무 웃긴 게 무슨 슈퍼 울트라 정자와 난자의 만남인지. 가브리엘라와 해미시는 딱 한 번, 그것도 도서관에서(여보세요들!) 짧게 사랑을 나눴을 뿐이데 그때 애가 생긴 게 아닌가........ 내가 뭐 놓친 부분이 있나 싶어서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니까. 응? 나참.
하여간 작가가 혼돈 속에서 집필했는지 가브리엘라가 혼돈 속에서 걸어갔는지, 의사로서 당당히 길을 걸어간 여성의 이야기가 되다만 이야기, 아니 길은 열심히 ‘걸어가기는’한 이야기. 진짜 열심히 걷고 걸어서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를 얻어 돌아온 이야기. 그게 바로 <광기와 치유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