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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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는 꿈에 나비가 된다. 훨훨 나는 모습이 틀림없이 나비였다. 즐거운 기분으로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다 보니,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장자인 줄 알지 못한다. 문득 꿈에서 깨어 보니 분명, 장자이다. 장자는 멍하니 생각한다. 자신이 꿈에 나비였는지, 나비가 꿈에서 장자였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너무나도 유명한 장자의 ‘호접지몽’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문득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장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에서 장자라고 할 수 있는 ‘나’는 ‘세계의 끝’에도 존재하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도 등장한다. 장자의 ‘나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세계의 끝’ 이야기일 것이다. ‘세계의 끝’에서 그려지는 공간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마을로 일각수가 살며, 알 수 없는 ‘벽’으로 둘러 싸여있다. 이곳 사람들은 외부와 격리된 채 ‘마음’이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그 때문에 안락하고 평온하게 나날을 보낸다. 그런 이들 틈에서 나는 ‘그림자’를 빼앗기고 기억도 잃은 채 살아가다가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일을 하며 이 마을의 수수께끼와 함께 마을이 생겨난 이유를 풀어나가게 된다.

꿈을 꾸고 있는 주체인 ‘장자’에 비유할 수 있는 세계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야기일 것이다. ‘세계의 끝’에 비하면 이쪽이 한결 현실적이다. 물론 이쪽도 일상의 흔한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사뭇 놀라운 일들이 펼쳐진다. 암호를 취급하는 ‘계산사’로서 살아가는 ‘나’는 인간의 잠재의식을 이용한 수치 변환술을 다루는 존재이다. 어느 날 ‘나’는 늙은 박사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의뢰받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박사로부터 받은 선물을 열어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두개골이 들어있다. 나는 이 두개골을 조사하러 도서관을 찾고 마침내 두개골의 정체가 일각수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기이한 일에 휘말려 낯선 남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더욱이 사라진 박사를 찾기 위해 모험을 하던 중 박사로부터 ‘나’의 세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것은 과연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오래 전에 읽었을 때 나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기묘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즐겼다. 현실을 벗어난 설정, 그래서 이게 과연 말이 될까 싶으면서도 묘하게 말이 되는 이야기들. 그런데 이제 다시 읽으니, 오히려 상상 속, 아니 무의식의 세계로 느껴지기만 했던 ‘세계의 끝’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한결 현실처럼 다가온다. 벽으로 둘러 싸였고,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래서 도리어 편안한 그들. 그런 틈바구니에서 그림자마저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는 그저 ‘나’의 무의식이 아니라,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세계, 어쩌면 그래서 떠나고 싶지 않은 세계로 다가오기도 한다. 일상에 지쳤을 때 사람들이 곧잘 그런 상태를 꿈꾸듯이 말이다. 그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쓸쓸한, 그래서 조용한 ‘세계의 끝’에 비해 일상이 뒤흔들리고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기이하고 신비로운 만남과 안타까운 작별이 공존하는 ‘하드보일드’한 세계는 왠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 직접 머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나’는 그곳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순간 안타까워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박사가 아무리 그에게 “지금 있는 이 세계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세계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끝납니다.”(525쪽)라거나 “자네의 존재는 끝나지 않아요. 다만 다른 세계로 들어가 버릴 뿐이야.”(530쪽) 말한다 하더라도, 그가 ‘발을 오른쪽으로 내미느냐 왼쪽으로 내미느냐에 따라 세계가 달라’(549쪽)지더라도, 그는 결국 지금 이 현실, 맥주를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가끔은 마음에 드는 여자와 섹스를 하며 사는 이 세계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게다가 그 자신이 다시 한 번 인생을 시작한다 해도, 역시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계속 잃어 가는 인생이-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666쪽)

인식 하나만으로도 세계는 변한다. 늙은 박사의 말처럼 이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나’가 그 세계의 끝을 안타까워하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순간에는 똑같은 마음을 지닐 것이다. 마음을 잃어버린 채 평온하게 살아가는 무의식, ‘불완전한 부분을 불완전한 존재에 떠넘기고 웃물만 홀짝거리면서’ 살아가는 그 ‘세계의 끝’의 삶보다는 상처 입고 고통을 겪더라도 하드보일드한 세계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살아가고 싶은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또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버리고 갖가지 아름다운 감정과 뛰어난 자질과 꿈이 소멸되고 제한되었다 해도, 나는 나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 ‘정말 그런 걸 절망이라고’(667쪽) 말할 수 있을까? 나비가 되어 한껏 유쾌하게 날아다녔던 장자도 깨어난 뒤 그것이 꿈인 줄 알았기에 즐거운 기분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오가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가 ‘너의 인생은 제로야’ 소리칠지라도 육체를 지닌 존재로 사는 것의 고통과 기쁨, 그리고 그 소멸의 슬픔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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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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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큰 병을 앓는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많은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아주 영험한 병원이 있다. 그곳에 입원한 사람들은 그 어떤 심각한 병을 앓다가 입원했더라도 치료 끝에 완벽하게 건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이런 병원이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많은 돈을 마련해서라도 자신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를 그 병원에 입원시킬 것이다.

그런데 이 병원에는 좀 특이한 조건이 있다. 환자가 입원한 후로는 누구도 환자를 면회할 수 없다. 전적으로 병원에 모든 치료를 위임하고 보호자는 그저 환자가 다 나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환자가 100% 완치되어 돌아온다는 보장만 있다면 면회를 가지 않고도 그저 묵묵히 기다릴 수 있을까? 병원의 실력을 믿고 기다린다고는 하지만, 그 사이 혹시라도 사랑하는 이가 병을 앓다가 허망하게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죽고 만다면 어떨까? 《인간의 피안》 속 <영생 병원>에는 그런 병원이 등장한다. 병원 이름은 ‘묘수 병원’으로 최첨단 의료시설을 갖추고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놀라운 치료 성공률을 보이고 있다.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를 이 ‘묘수 병원’에 입원시킨 나, ‘첸루이’또한 면회 금지라는 규정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만 마음속 한편에서는 싸움이 일어난다. 완치될 때까지 면회 금지라니, 만일 엄마가 다 낫지 않는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홀로 쓸쓸히 죽어가고 있다면? 어머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도 없고 답답하기 짝이 없던 참에 그는 규정을 어기고 병원에 잠입을 시도한다. 면회 금지를 철칙으로 내세우고 있기에 병원에 몰래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데, 첸루이는 그야말로 ‘묘수’를 얻어 병원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의 병실에 들어간 그는 크게 절망하고 만다. 어머니의 상태는 내일이 마지막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매우 심각해 보인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아픈 어머니를 소홀하게 대했던 그는 지나간 날들을 후회하고 그날부터 밤마다 몰래 병원에 들어와 어머니를 간호한다. 그러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결국 어머니의 임종을 의논하고자 아버지 집을 찾아가는 그.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선 첸루이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엄마가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생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첸루이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만, 아버지 옆의 엄마는 진짜 엄마, 그러니까 병실에서 다 죽어가는 엄마와 완전히 똑같다. 단지, 그저 건강하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 다를 뿐이다.

여기까지만 읽고도 독자는 대충 예상할 수 있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지만 ‘면회가 금지된 병원’이라는 참으로 기이한 병원. 그 병원에서는 아마도 환자와 똑같은 복제인간, 그러나 환자와 달리 건강한 존재를 만들어 완치되었다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픈 환자는 입원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 그러다 죽고 나면 가족 몰래 처리하는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게 된다. 첸루이 또한 지난밤에도 병원에서 아픈 엄마를 돌보다 나왔기에, 이 건강한 엄마의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병원에 무언가 큰 비밀이 있다고 느낀 첸루이는 비밀을 파헤치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거대한 진실을 맞닥뜨리는데 그 진실 앞에서 더 큰 갈등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면 어떨까? 나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가 다 죽어가는 병으로 입원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 사람. 가족은 다시 행복을 되찾는다. 어쩐지 가짜인 것 같은데, 그건 그냥 나의 의심일 뿐, 그는 아프기 이전, 병원에 입원했던 그 사람과 똑같다. 함께한 추억, 기억, 나의 사소한 습관 취향까지 완벽하게 다 알고 있고 무엇 하나 달라진 게 없다. 예전보다 덜 감정적이어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하는 일이 거의 드물어졌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가 몹시 아프다가 병이 나은 뒤 새 삶을 살게 되어 조금 변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 ‘가짜’임이 틀림없을 사람과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하는 것은 괜찮을까?

첸루이의 경우 가짜 어머니, 그러니까 복제한 어머니를 가짜라고 밀어내려고 하면서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게 마음처럼 쉽사리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지금 다시 살아서 돌아온 어머니와 행복하다. 첸루이만 입을 다물면 가족의 행복은 영원할 것 같다. 물론 언젠가 아버지도 아프게 되면 그 ‘묘수 병원’에 갈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아버지는 어머니를 잃었다는 고통에, 아픔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 행복을 깨뜨릴 권리가 과연 첸루이에게 있을까? 심지어 첸루이조차도 이 어머니와의 새로운 일상이 익숙해진다. 단지 저 병실에 있을 진짜 어머니의 존재가 자꾸만 마음을 뒤흔든다. 나만 입을 다문다면, 가족 모두가, 주변 사람 모두가 완치되어 돌아온 그 사랑하는 이를 환영하고 다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럴 때 대부분의 인간은 그 누군가의 행복을 깨뜨리면서까지 ‘그는 가짜, 그는 복제인간’이라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고통보다 차라리 그를 복제한 또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게, 더 마음 편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더 행복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그토록 나약하다.

《인간의 피안》에는 이렇게 나약한 인간의 대체물로 완벽한 존재로서의 분신이나, 복제인간, AI 등이 등장한다. <당신은 어디에 있지>에서는 너무나 바쁜 나머지 분신을 만들어 연인에게 자기 대신 보내는 인물이 등장한다. 분신은 다정하게 연인을 위로하지만 연인의 마음은 공허하기만 하다. 너무나 다정한 존재인데도, 연인은 왜 즐겁지 않을까? 뜻밖에도 연인은 말한다. “저건 화를 낼 줄 모른다는 거야! 내가 저걸 욕해도 저건 화를 낼 줄 모른다고!” 다정함과 친절함만 있으면 사랑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짜증도, 화도 낼 줄 모르는 분신과는 내밀한 감정 교류가 일지 않는 것이다. <사랑의 문제>의 완벽한 인공지능 로봇인 ‘천다’는 가족의 감정을 코르티솔과 세로토닌 치수까지 헤아리면서 분석하지만 인간이 고통을 즐기는, 아니 고통에 기꺼이 몸을 던지려고 하는 그 심리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렇듯《인간의 피안》속 실제 인간은 분신이나 복제인간, AI 등에 비해 아주 많은 성격적 결함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일단 그들은 화를 내고 짜증도 내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등등 감정 조절에 실패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고통 속에 침잠해 있다가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한다. 그런데 이런 감정 조절 실패는 이 책에서 그려지는 세계에서는 사회생활에 부적격한 것으로 판단되어, 대학 입시나 입사 테스트에서 감점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감정 조절 테스트에 합격하기 위해 <사랑의 문제>의 ‘차오무’는 안간힘을 쓰지만 오히려 그것이 깊은 우울증을 불러온다. 이런 차오무에게 호르몬 수치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인공지능 ‘천다’의 약 처방은 과연 답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차오무 아버지의 ‘미안하다’는 진심어린 한마디가 과학적인 처방보다도 더 큰 힘이 되지 않았는가. 그러기에 《인간의 피안》은 갈수록 ‘눈빛으로 소통하고, 눈물을 흘리며, 몸으로 포옹하고, 실패로 고통스러워하는 것 등을 등한시하게’(418쪽) 만들고 있는 이 디지털시대에 결함투성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그 결함 많은 인간성임을 역설적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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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0-07-2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엄마라면 언젠간 가짜 엄마가 복제품인 걸 눈치챌 것 같아요. 그래도 저라면... 복제된 엄마를 넌 가짜야! 라고 쫓아내진 못할 것 같네요. 거짓인 줄 알면서도 건강한 엄마를 본 것만으로 꿈만 같겠지요. 물론 병원에 누워 있는 내 진짜 엄마도 외면하지 못하겠지만요. 제 사정 때문인지 <영생 병원> 이라는 단편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잠자냥 2020-07-21 12:06   좋아요 1 | URL
<영생 병원>은 읽으면서 안 그래도 케이 님 생각도 좀 나고 그랬습니다. 저라면 진실을 모른 채 그냥 완치되어 돌아온 사람을 (가짜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려니 생각하고 살아가고 싶을 거 같아요. 반면 제가 아파서 영생 병원을 다녀온 후, 가짜인 제가 제 가족이나 제 주변 사람곁으로 돌아오면 사람들은 금방 눈치 챌 거 같기도 해요. 본래의 저는 짜증도 많고 신경질적인 인간인데, 가짜인 저는 짜증이 너무 줄어들어서? ㅎㅎㅎㅎㅎ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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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를 비롯해, 브라질, 멕시코, 페루 등 남미 여행을 꿈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불안감이 스며든다. 치안이 위험하다고 하던데 여행을 가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들. 그럼에도 언젠가 남미 대륙을 꼭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쉽게 접지 못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부풀려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읽다 보면 그것이 괜한 걱정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작품에는 목이 잘린 아이, 어린 아이만 살해하는 연쇄 살인마, 빈민가의 오염된 물 때문에 고양이 코를 가지게 된 아이 등 온갖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와 여성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들을 지켜줘야 할 공권력은 썩을 대로 썩어, 오히려 자기들 이익에 어긋날 때는 가차 없이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단지 소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섬뜩하리만치 생생하다. 실제로 이 책에 실린 여러 단편은 대부분은 실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니 이 생생함이 괜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첫 작품인 <더러운 아이>부터 무척 섬뜩하다. 한때는 부촌이었지만 이제는 퇴락한 어느 동네. 그곳에는 거리의 아이들이 넘쳐난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어린 나이부터 마약에 취해서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리고 이 동네에서 얼마 뒤 목이 잘린 채 죽은 아이의 시신이 발견된다. 주술사의 짓일까 마약에 취한 미치광이의 짓일까. <오스테리아 호텔>의 배경이 되는 호텔은 과거 군사 독재 시절 경찰학교로 쓰였으며 <마약에 취한 세월>에서는 그야말로 마약에 절어  사는 청소년들이 등장한다. 이 작품에 그려지는 아르헨티나 풍경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하루하루 버틸 수 있을지 끔찍하기만 하다. 한여름에는 전력난으로 여섯 시간씩 번갈아 전기가 끊어지고 인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월급을 받아도 빵과 싸구려 고기를 사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심지어 신임대통령은 전화 가입 신청을 해도 몇 년이나 걸리던 관행을 없애겠다는 공약을 자랑스레 내세운다. 통신 회사가 일을 얼마나 엉망으로 하는지, 10년 전에 신청했는데 아직도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웃도 있다. 그래서 기사가 와서 전화기를 설치하면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의 아르헨티나의 모습이다.

이렇게 아르헨티나의 참상을 마주할 수 있는 작품을 읽어나가다가 <아델라의 집>과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 : 페티소 오레후도를 떠올리며>를 읽는 순간에는 공포로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왼팔이 없는 소녀 아델라와 나, 그리고 나의 오빠는 우연히 어느 폐가에 대한 소문을 들은 뒤 날마다 폐가 앞을 서성인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여름밤, 그곳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폐가에 도착하자,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아델라는 정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와 오빠는 그저 환영을 본 것일까? <파블리토가 못을 박았다>에도 환영을 보는 인물이 나온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기 관광 상품인 범죄 및 범죄자 투어의 가이드인 ‘파블로’의 앞에 어느 날부터 어린이 연쇄살인마 ‘페티소 오레후도’의 환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관광 가이드 일을 할 때마다 그 살인마의 환영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것들은 모두 그저 환영일 뿐일까? 사라진 아델라는 무참한 아동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며, 그것을 지켜본 다른 두 아이들은 충격으로 그것이 실제인지 환영인지 영원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내가 아이를 낳은 뒤 부부 관계가 엉망이 되어 버린 ‘파블로’가 아이가 거추장스러운 나머지 아이가 사라지면 좋겠다는 욕망을 품게 되고, 그것이 어린아이만 연쇄 살인한 살인마의 환영을 보게 만든 것은 아닐까? 이렇게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기묘한 이야기는 <이웃집 마당>에서도 이어진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다가 해고된 ‘나’는 우울증을 앓으며 복지사로 일하던 무렵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침대에 묶인 아이들, 쇠사슬에 묶인 아이들, 방에 갇혀 지낸 아이들……. 그러다가 급기야 이웃집 마당에 감금된 아이가 있는 환영에 시달린다. 그런데 이 환영은 정말 단지 환영일 뿐일까? 아니면 ‘나’의 죄책감의 발로일까.

<검은 물속>은 아르헨티나 현실을 한층 더 생생하게 전달한다. 부패 경찰관들이 소년 두 명을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 남부 지구의 경찰관들은 사람들을 보호하기보다 청소년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곤 한다. 아이들이 ‘협조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 협조란 대부분 마약을 훔쳐 자기들에게 갖다달라거나, 경찰이 압수한 마약을 팔아달라고 하는 부탁이다. 아이들이 빠진 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리아추엘로강이다. 강은 플라스틱과 기름 찌꺼기, 공업 약품 등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쓰레기가 한꺼번에 떠내려 오는 바람에 강물이 흐르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피나트 검사에게 빈민굴의 임신한 여자아이가 찾아온다. 여전히 시체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은 소년 중 한 아이가 2주 전 강물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제보를 확인하려고 피나트 검사는 몸소 그 위험한 빈민가에 찾아 나서는데, 그곳에서 맞닥뜨리는 풍경은 지옥도 그 자체이다. 시체는 정말로 살아 돌아온 것일까? 울부짖는 사람들과 뒤섞여 점점 위험에 빠져가는 피나트 검사와 절망에 찬 빈민가 신부의 외침은 암흑과도 같은 아르헨티나의 현실을 잔인하게 보여준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썩어 문드러진 이 강이 우리의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도 말자. 쓰레기는 모두 여기 내버리자. 어차피 강물은 다 떠내려갈 테니까! 결과가 어떻든 일절 생각하지 말자, 뭐 이런 식이죠. 모두가 천하태평인 정도로만 여겼어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마리나, 이 강을 오염시킨 모두에게 책임이 있었던 거예요. 그들은 무언가를 감추려고 했어요. 세상에 나타나거나 알려져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말이죠.” (<검은 물속>, 294쪽)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강렬한 무엇인가를 남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하철에는 모두가 아는 ‘지하철 여인’이 있다. 그녀는 몸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어 온통 녹아내리고 일그러진 모습이다. 그런 모습으로 구걸하고 다니니, 사람들은 끔찍하게 여겨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거나 돈을 내던지고는 도망가기 일쑤이다.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그녀는 집세 식비 등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늘도 구걸에 나선다. 어쩌다 그녀는 그렇게 된 것일까? ‘지하철 여인’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녀의 남편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가 남편을 버리고 떠날 참에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남편은 아내의 삶을 완전히 망가뜨려버린 것이다. 그녀 몸에 불을 질러 다른 남자와 떠나는 것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처절하게. 그러고는 지하철 여인의 남편은 그녀가 자기 몸에 스스로 불을 지른 거라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지하철 여인’처럼 남편이나 남자 친구, 아버지 등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불을 지르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여자들을 불태우는 건 아랍이나 인도 같은 데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지껄인다. 참다못한 많은 여자들이 ‘불타는 여성들’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불길 속에 몸을 던지는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한다. ‘여자들이 자기 남자들을 감싸주고 지켜주면서도 여전히 그들을 무서워한다고 믿고 싶어’(328쪽)한다는 이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깨부수고 싶은 것이다.


“얘야 불을 지르는 건 남자들이란다. 그들은 예전부터 우리 여자들을 불태웠지.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몸에 불을 지를 거란다. 그렇지만 우리는 절대 죽지 않아. 이제는 우리 몸의 상처를 당당하게 보여줄 거라고.”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334쪽)


스스로 불을 지르는 여성들이 속출하자, 국가는 이제 불 지르는 여인들을 색출하려고 혈안이 된다. 그때 ‘지하철 여인’은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인신매매만큼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까요. 불에 타 괴물처럼 변한 여자에게 욕정을 느낄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언제 자기 몸에 불을 지를지 모르는 미친 아르헨티나 여자들을 좋아할 남자는요?”(340쪽) 어쩐지 웃기면서도 슬프고 한편으로는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아내나 여자 친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그녀들이 잠자는 틈을 타 알코올을 뿌려 불을 지른 그 남자들. 그들은 이제 여성이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저항하자, 제 몸에 불을 지른 여인들을 색출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다. 무엇이든 자기들 뜻대로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르헨티나 남자들과 그들의 권력, 공권력의 폭력 앞에 힘없고 약한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은 약에 취하거나 우울증을 앓거나 거식증에 시달리거나 그도 모자라 분신을 하기에 이른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빈민가로 변해 해가 지면 주민들은 절대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곳. 괜히 나갔다가 강도를 당하기 일쑤고, 골목에 끼리끼리 모여 포도주를 마시다가도 급기야 총질까지 해대는 일이 잦은 곳, 군인들이 자신들이 죽인 민간인의 시신을 숨기기 위해 시멘트에 죽은 사람들을 섞어 그 시멘트로 다리를 만든 곳……. 한때 부유했지만 군사 독재와 경제 불황을 겪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가난한 이들, 그런 이들에게 일상처럼 일어나는 폭력, 기형아가 속출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만큼 심각한 환경오염까지 겹친 아르헨티나의 참혹한 현실은 결코 환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시무시한 공포라고 이 작품은 생생하게 증언한다. 작가는 <검은 물속>의 한 인물이 말을 빌려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드러낸 것은 아닐까. “차라리 불이 나서 그 빈민가가 다 타버렸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모두 물에 빠져 죽든지, 당신 같은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라요. 눈곱만큼도 모른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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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0-07-15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편히 읽을 수 없는 책인 것 같네요. 아르헨티나... 남미에선 그래도 부유한 측에 속하는 나라 아닌가요? 근데도 저런 지옥이라니. 너무 충격적입니다. 멕시코, 브라질, 콜럼비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차라리 장시간 국경을 닫았던 쿠바가 남미의 청정지역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잠자냥 2020-07-15 15:57   좋아요 0 | URL
일단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와서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요. ㅎㅎ 이 책 작가가 1973년생이던데요, 작가가 10대 20대였던 90년대~2천년대 아르헨티나 상황이 아주 나빴더라고요. 부유하게 살던 나라에 군사독재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거의 몰락 직전까지 간 모양인 거 같습니다. 그런 현실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고요. 물론 아르헨티나에도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이 분명 있지만 빈부격차가 정말 어마어마한 거 같고요.

비단 아르헨티나 뿐만 아니라, 남미를 보면 권력자들이 부패하고 그걸 제어할 공권력마저 썩어빠지면 정말 답이 없는 거 같아요(요즘 코로나 피해만 보더라도 브라질 같은 곳은 정말.... 빈부격차로 그 폐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고요).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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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책 선물쯤이야 흔한 일 아닌가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정말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사람이 보낸 선물이라 그 기쁨은 더 컸다. 선물을 보낸 이는 알라딘 서재의 거물이자, 여왕이자, 유명인사이자 셀럽(으응?)인 다락방 님이다. 다락방 님이 최근에 쓴 <에이미와 이저벨> 관련 글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책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흥미가 당긴다고 댓글을 달았는데, 덜컥 그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올리브 키터리지>를 기프티북으로 보내신 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입소문은 들었으나 이상하게 흥미가 일지 않아 여태 읽기를 미뤘던 책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터라 선물 받은 기쁨은 더욱 컸다.

그 후로 나는 ‘알라딘 기프티북’의 유용함을 알게 되어, 다락방 님에게도 답례로 책 한 권을 보냈고, 카프카를 좋아하는 친구에게도 최근 출간된 현대문학 세계문학단편선 <프란츠 카프카>를 한 권 보냈다. 친구 또한 기프티북의 간편함에 놀라며, 또 갖고 싶던 책을 선물 받은 행복감에 그날 하루를 기쁘게 보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는 까닭은 책 한 권이 누군가에게는 때로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책으로도 얼마든지 소중한 인연이 만들어지고, 또 그런 인연을 깊이 있게 가꿔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더욱이 최근 <사랑의 역사>를 읽고 나니 책 한 권으로 이루어진 인연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의 역사>에는 도무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을 제목만 읽고는 구구절절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어쩌면 흔한 러브스토리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읽기시작하자마자 조금 당황했다. 주인공은 ‘레오 거스키’라는 노인으로, 죽음을 앞둔 이 팔십대 노인이 독백처럼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던 내게는 참 뜻밖이다. 그런데 이 노인은 곧 자신의 소년 시절, 첫사랑 이야기를 꺼낸다. 레오 거스키에게 ‘앨마 메러민스키’는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다. 레오와 앨마는 어린 시절 폴란드의 한 마을에 살았다. 레오가 서툴지만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모두가 앨마를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조금씩 자라났지만 곧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나치의 위협이 심해질 무렵, 앨마는 먼저 미국으로 떠난다. 독일의 침공으로 집과 가족을 모두 잃은 레오는 몇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 뒤늦게 앨마가 있는 미국으로 떠난다.

아, 그래, 이 노인의 지극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인가 보구나 싶어질 때 또 다른 뜻밖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번에는 ‘앨마’라는 이름의 열 네 살 소녀가 화자로 등장한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 궁금하다. 이, 앨마가 그 앨마인가? 그런데 보아하니 소녀의 이름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의 여주인공인 ‘앨마’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인 <사랑의 역사>는 책 속의 책인 ‘사랑의 역사’의 제목이기도 한 셈이다. 소녀는 엄마와 남동생과 살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빠는 아주 오래 전에 엄마에게 스페인어로 쓰인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선물하면서 책 앞에 이렇게 썼다. “샬럿, 나의 앨마에게 내가 글을 쓸 줄 알았다면 당신을 위해 이런 책을 썼을 거야. 사랑을 담아. 다비드”. 앨마 그녀는 누구였을까. 자기에게 이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앨마라는 사람이 소녀는 궁금하다. 엄마는 앨마가 모든 사람, 누군가가 사랑한 적 있는 모든 소녀, 모든 여자라고 말하곤 한다. 소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어쩐지 앨마가 그냥 소설 속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작가가 직접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사랑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쓸 수 있었을까. 특정한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으리라.

한편 소녀 ‘앨마’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있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빠를 도무지 잊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새로운 사람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번역가인 엄마에게 신비로운 편지가 도착한다. ‘제이컵 마커스’라는 정체 모를 남자가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사랑의 역사’를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것이다. 앨마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와 엄마를 이어주면 어떨까 상상을 하다가 곧 작전을 짠다. ‘제이컵 마커스’라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낼 단서를 찾기 위해 그가 보낸 편지와 엄마가 번역한 책을 뒤지던 소녀는 점점 책 속에 등장하는 소녀, 자신에게 이름을 준 ‘앨마 메러민스키’가 실존 인물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소녀는 엄마와 제이컵 마커스를 이어줄 수 있을까? 소녀에게 이름을 준 ‘사랑의 역사’ 속 앨마 메러민스키는 정말 실존 인물일까? 독자도 궁금증이 일어난다.

이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오 거스키’가 ‘사랑의 역사’를 쓴 작가가 아니겠느냐고, 그러니까 소설 속 여주인공 이름이 ‘앨마 메러민스키’가 아니겠느냐고, 너무 쉬운 이야기잖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게 쉽사리 답을 주지 않는다. ‘사랑의 역사’를 쓴 작가는 ‘레오 거스키’가 아니라 ‘즈비 리트비노프’라는 이름의 무명작가로 그의 이력을 보면 1941년 폴란드에서 칠레로 도피했고 유일하게 출간한 책은 스페인어로 된 ‘사랑의 역사’ 그 한 권뿐이다. 레오 거스키는 폴란드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칠레에 간 적이 없다. 게다가 ‘사랑의 역사’의 서문은 ‘즈비 리트비노프’의 아내인 ‘로사’가 썼다. ‘앨마’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이다. 리트비노프는 그토록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쓰면서 평생 ‘앨마’를 그리워한 것 같은데, 왜 결혼은 로사라는 여자랑 했을까? 앨마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 작품은 이렇게 서로 전혀 관계없는 다양한 인물들이 ‘사랑의 역사’라는 책 한 권으로 맺어지게 된 인연을 따라가며 한 개인의 역사와 그 한 사람의 삶을 때로는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이 세계 역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간다.

‘즈비 리트비노프’가 쓴 ‘사랑의 역사’는 그다지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책 속의 책인 ‘사랑의 역사’ 몇몇 구절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즈비 리트피노프의 ‘사랑의 역사’는 딱히 내가 좋아하는 류의 글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사랑의 역사’라는 책은 ‘초판본 이천 부 중에서 일부는 구매되어 읽혔고, 다수는 구매되어 읽히지 않았으며, 일부는 선물로 주어졌고, 일부는 서점 진열장에 놓인 채 바래가면서 파리들의 착륙장이 되었고, 상당수는 폐지 압축기에 들어가 아무도 읽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다른 책들과 함께 재생지 원료로 갈가리 찢’기는 역사를 이루며 서서히 소멸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최소 한 부는 누군가의 인생을, 한 사람 이상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적어도 소녀의 아빠 다비드는 이 책을 무척 좋아해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고, 그 여자와 결혼해 딸의 이름을 책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짓지 않았는가. 어떤 이는 크게 주목하지 않아도 또 다른 이에게는 생을 뒤흔들 만큼 강력한 영향을 주는 책. 책이란 참 그렇게 놀라운 존재이다. <사랑의 역사>에서 나는 그런 인연의 힘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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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7-0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홍~ 완전 행복하셨겠다는^^
<올리브 키터리지>는.. 개인적으로 정말 누구에게나 추천하고픈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서... 얼른 읽기를 강추합니다!!!

잠자냥 2020-07-07 15:02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기분 좋고 행복하고 그랬어요. ㅎㅎ
<올리브 키터리지> 곧 읽겠습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0-07-0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기프티북이 있는줄 몰랐어요~~
알라딘 홈에 있나요?
책선물 받으셔서 정말 좋았겠어요^^

잠자냥 2020-07-07 16:09   좋아요 1 | URL
네, 저는 눈여겨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있더라고요.
선물할 책을 장바구니에 담으신 다음에 주문하기 바로 아래에 있는 ˝선택 상품 선물하기˝를 클릭하시면 기프티북 페이지로 연결되더라고요. 선물 받을 분의 정보는 핸드폰 번호/ 알라딘 서재 주소 / 이메일 / 카카오톡 이중 1개만 알고 있어도 가능해요. ^^

아니면 더 간단하게 특정 책 정보 페이지에서 장바구니 담기가 아니라 ˝선물하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다락방 2020-07-0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거든요. 소녀가 엄마와 사는건 기억나는데-소녀가 ‘덜 사랑해주세요‘ 라고 혼자 생각하던 장면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이런 내용인지는 전혀 기억이 안나네요. 기억도 안나는데.. 책은 뭐하러 읽는걸까요? 허무하네요... 니콜 크라우스의 다른 책을 아주 오래전에 사두고 읽지 않았는데... 책장 어딘가 뒤져보면 나올겁니다. 하하하하하. 독서인생 뭘까요? 물론, 책을 선물받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알라딘 서재의 거물이자, 여왕이자, 유명인사이자 셀럽(으응?)인 다락방 왔다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7-07 16:12   좋아요 0 | URL
네, 이 책 안 그래도 구간 정보 찾아보니 알라딘 서재의 거물이자 여왕이자, 유명인사이자 셀럽인 다락방 님 글이 보이더라고요. ㅋㅋㅋ 예전에는 민음사에서 나왔고요, 그 페이퍼를 보니 다락방 님은 분명 이 책을 읽으셨고, 니콜 크라우스의 다른 책인(최근 출간되 제목은 <위대한 집>), <그레이트 하우스>도 갖고 계실 거 같습니다.

참 그리고 책은 원래 읽고 잊으라고 읽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7-07 16:24   좋아요 1 | URL
맞아요!! 그레이트 하우스를 ‘갖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20-07-07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거여유셀 다락방님 적확하다

잠자냥 2020-07-07 22:1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이거 좋은데요! ㅋㅋㅋㅋㅋ
 
허랜드 SF... F.. C.
샬럿 퍼킨스 길먼 지음, 권진아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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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작품임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샬럿 퍼킨스 길먼의 <허랜드>를 최근에 읽었다. 읽기를 이제까지 미룬 까닭은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허랜드’는 말 그대로 여자들만 사는 나라를 뜻한다. 제목만으로도 상상이 간다. 남자들이 사라진 세상, 그래서 폭력도 착취도 없는, 여자들만 사는 이상적인 세계를 그린 작품이겠지. 남성의 지배도 받지 않고, 차별도 없는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유토피아 같은 세상. 조금은 예상 가능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이 책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알면서도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는 급진적이고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딱 길먼이 살았던 그 시대에 쓰였을 법한 작품이다. 그래서 명확한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그 한계 때문에 나는 이 책에 별 다섯 개를 주지는 못했다. 작품이 쓰였을 무렵을 생각한다면 그 의의만으로도 별 다섯을 주고도 남을 책인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한계가 더 크게 마음에 걸렸다.

<허랜드>는 여자들만 사는 나라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 한 남자의 관점으로 그려진다. 그의 이름은 밴. 어느 날 그는 모험을 좋아하는 친구인 테리, 제프와 함께 미지의 땅을 탐험하기 위해 원정대를 꾸리고 여행길에 오른다. 이 세 남자의 성격은 뚜렷하게 다른데, 테리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의 마초이고 그에 비해 제프는 세 사람 중 가장 섬세하고 이른바 여성스러운 면을 많이 지닌 의학도이다. 이야기의 화자인 사회학도 밴의 성향은 테리와 제프 그 중간쯤에 속한다.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나라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에, 세 남자는 호기심이 잔뜩 일어난다. 그런 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고 부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한껏 기대에 부푼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노라면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예상 가능한 남자들의 반응이 그려진다. 테리는 오직 여자, 여자들만 가득한 이상화된 여름 리조트 같은 곳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아름다운 여성들이 잔뜩 있고, 그 가운데서 마치 하렘의 술탄처럼 군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자들만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발전이나 진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거라고 빈정대기도 한다. “여자들은 늘 그래. 질서나 조직 같은 건 절대 기대할 수 없어.” “발명이나 진보를 기대해서는 안 돼. 아마 끔찍하게 원시적일 거야.” 등등 성차별적 발언을 쏟아낸다. 누군가는 그곳이 수녀원장 휘하의 수녀원 같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평화롭고 정다운 자매애 공동체’ 같은 곳. 그러나 테리는 남자가 없을 리가 없다며 남자들은 산 위에 살면서 여자들만 한쪽에 두는 것일 거라고, 그곳은 ‘일종의 국립 하렘’일 거라고 말한다. 이 테리라는 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인데, 솔직히 ‘여자들만 사는 나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다수의 남자들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드디어 도착한 미지의 땅, 허랜드. 이곳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던 젊은 여성 셋과 마주친 그들은 속임수를 써서 붙잡아 보려고 하지만 웬걸, 여자들의 신체 능력이 대단해서 좀처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녀들을 뒤쫓다가 마침내 이 미지의 땅 깊숙한 곳까지 다다른 그들은, 한 무리의 여성들에게 둘러싸인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와 달리, 젊은 세 여성들은 온데간데없고 그들을 둘러싼 여성 무리는 젊다고 말할 수 없는 중장년 여성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여성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요하면서 진중하고 현명하고 두려움 없고 확신과 결의에 찬 얼굴’들을 하고 있다. 예쁜 여자들이 바글바글하고 그 안에서 하렘의 술탄처럼 군림하길 꿈꾸던 테리 및 밴과 제프는 당황하는데, 그들 앞에는 더 뜻밖의 일들이 기다린다.

이 작품은 세 남자가 허랜드에서 일정 기간 머물며 여자들만 이루어진 사회를 경험하면서 이 세계, 그러니까 그들이 떠나온 미국으로 대변되는 이 사회의 모순, 가부장제, 성차별, 교육 문제 등등을 꼬집는다. 테리는 놀랍도록 진보한 허랜드를 보면서 줄곧 어딘가에 남자가 존재할 거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 여자들만 사는 나라가 이토록 질서 잡히고 문명이 발달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여성다운 면이 거의 없는 여자들을 보며 ‘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처음에 만난 세 여성처럼 젊고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못하고 줄곧 그 예쁜 여자들, 머리가 길고 늘씬한, 여성스러운 여자를 찾아 ‘허랜드’를 뒤지고 다닌다. 밴과 제프는 테리에 비해 덜하기는 하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런 가운데 허랜드의 여성들은 이 남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를 가르치고, 그들을 교육한다. 그들은 과연 교육이 될까? 서로 진정한 소통이 가능해질까?

이 작품에서 내가 가장 실망스러웠던 점은 ‘모성애’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었다. 테리가 허랜드를 일컬어 ‘모성성에 미친 나라’ ‘어머니가 되어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일에 미친 나라’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도 얼마쯤은 이 의견에 동조한다. 시대를 앞선 길먼조차도 여성의 가치는 모성성에 있다고 본 것인가? 나는 여성의 으뜸 가치를 모성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성성 또한 하나의 만들어진 신화이며,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이 사회가 강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허랜드의 가장 숭고한 덕목이자 가치로 ‘모성성’을 내세우는 것에는 반기를 들고 싶었다. 물론 허랜드의 ‘모성’은 전통적인 모성애와 조금 달라서 그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고 모든 기술과 산업에 영향을 미치며 모든 아이를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가장 완벽하게 보살피고 교육하는 개념으로서의 모성’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왜 ‘모성성’에 머물러야만 했을까. 더욱이 좋은 어머니가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을 선별하고, 뛰어난 아이들만을 낳아서 교육하다는 설정에서는 우생학적 편견과 선택도 엿보여서 불편하다.
 
게다가 이 허랜드에는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숭고한 사랑이나 존중과 평등을 기반으로 한 동료애는 존재하지만, 그 밖의 ‘사랑’, 즉 에로스적 사랑은 그 사이에 낄 틈이 없다. 섹슈얼리티에서 출발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남자가 없어서 그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무 순진한 발상이 아닌가? 남자가 없으므로 성적 욕망에서 비롯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정은 오히려 여성의 욕망을 이성애에만 국한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길먼이 살았던 시대에는 동성애를 언급하기가 오늘날보다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는 길먼 자체가 동성애에 관심이 없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나라이기에 섹슈얼리티한 관심이나 성적 기쁨을 누리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설정 또한 이 작품의 빛을 바라게 한다. 하다못해 더 오래전에 사포의 저 레스보스도 존재했는데, 길먼은 왜 여성들만 사는 이 나라에서 에로틱한 사랑과 섹스를 배제한 것일까? 그저 숭고한 모성애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미움도 질투와 시기도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만이 존재하는 사회라니 나는 조금 끔찍할 것 같다. 과연 그런 사회가 유토피아일까. ‘고요한 평화, 넘치는 풍요, 한결같은 건강, 넉넉한 호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매끄러운 운영 덕분에 이제 더 이상 극복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사회라 할지라도 나는 이런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느끼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 이 세 남자와 젊은 세 여성을 ‘결혼’이라는 그 낡은 제도 안에 귀착시키는 결론도 못마땅하기 그지없다. 물론 양성 사회가 다시 가능한지 실험하는 목적이 강하기는 했지만, 굳이 그런 방법 밖에는 없었을까? 결혼 후 테리가 결국 자기 아내라고 생각하는 이에게 하는 짓을 보라. 강간이 아닌가? 물론 이 서로 다른 사회의 남녀를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어냄으로써 이 제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성애와 가부장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결혼’ 밖에는 없었나 싶어서 씁쓸해진다. ‘여자들만 사는 나라’라는 전복적인 설정을 해놓고 정작 디테일한 면에서는 모성성이니, 결혼이니 구태의연한 것이다. 여자들만 사는 나라에도 욕망과 사랑, 섹스 그에 따른 질투나 미움도 있게, 그러나 그 모든 인간적 욕망을 극복하고 다스리면서 그들끼리 잘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는 게 더 유토피아스럽지 않은가? 게다가 세 남성이 미지의 땅을 ‘정복’하려고 가는 설정이 아니라, 철저한 가부장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 여성이 허랜드를 찾아가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설정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진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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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24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올리신 허랜드의 목차를 살펴보니 단편 <누런 벽지>는 없네요. 제가 읽은 구판에는 단편 <누런 벽지>가 실려있었거든요. 이게 진짜 좋더라고요. 아마 이 책의 작가소개에도 나와있을테지만 결혼 후에 작가가 정신병 치료를 받게 되는데 닥터는 그녀에게 글을 쓰지 말라고 하잖아요. 작가가 그런 자기 자신의 삶을 소재로 삼아 <누런 벽지>를 써서 자신의 닥터에게 보냈다는 일화가 엄청 짜릿했어요.

이 책의 다음이야기도 있다고 하는데 그건 아직 국내에 번역된것 같진 않더라고요. 저는 이 책에서 소젖을 먹는 인간에 대해 의아해하는 허랜드의 여자들을 보는게 좋았습니다. 비단 여자들만 사는 나라를 그린것뿐만이 아니라 (결국 그렇게 되겠지만)폭력에 대한 것도 다뤘다고 생각했거든요.

잠자냥 2020-06-24 14:33   좋아요 0 | URL
넵 이 책에는 딱 <허랜드>만 있어요. 저는 <누런 벽지>는 창비 세계문학단편선 미국편에서 읽었어요. <누런 벽지> 정말 좋죠. 그 작품으로 이 사람 이름 각인했던 것 같아요.

아, 이 책의 다음 이야기도 있군요. 아마 미국으로 간 엘라도어가 미쳐버리는 이야기가 아닐지 ㅋㅋㅋㅋ
저도 그 소젖 먹는 이야기는 좋았습니다. 인간이란 참...

다락방 2020-06-24 14:46   좋아요 1 | URL
저도 <허랜드>읽으려고 사서 읽었다가 <누런 벽지>에 반했었어요. 그건 다 읽어갈 즈음 완전 소름돋더라고요!

저도 다음 이야기는 미국으로 간 부부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제 추측엔 여자가 처음엔 미쳐버릴것 같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길들여지는게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