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을 한 권 선물 받았다. 책 선물쯤이야 흔한 일 아닌가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정말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사람이 보낸 선물이라 그 기쁨은 더 컸다. 선물을 보낸 이는 알라딘 서재의 거물이자, 여왕이자, 유명인사이자 셀럽(으응?)인 다락방 님이다. 다락방 님이 최근에 쓴 <에이미와 이저벨> 관련 글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책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흥미가 당긴다고 댓글을 달았는데, 덜컥 그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올리브 키터리지>를 기프티북으로 보내신 것이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입소문은 들었으나 이상하게 흥미가 일지 않아 여태 읽기를 미뤘던 책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터라 선물 받은 기쁨은 더욱 컸다.
그 후로 나는 ‘알라딘 기프티북’의 유용함을 알게 되어, 다락방 님에게도 답례로 책 한 권을 보냈고, 카프카를 좋아하는 친구에게도 최근 출간된 현대문학 세계문학단편선 <프란츠 카프카>를 한 권 보냈다. 친구 또한 기프티북의 간편함에 놀라며, 또 갖고 싶던 책을 선물 받은 행복감에 그날 하루를 기쁘게 보낸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는 까닭은 책 한 권이 누군가에게는 때로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책으로도 얼마든지 소중한 인연이 만들어지고, 또 그런 인연을 깊이 있게 가꿔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더욱이 최근 <사랑의 역사>를 읽고 나니 책 한 권으로 이루어진 인연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의 역사>에는 도무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을 제목만 읽고는 구구절절한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어쩌면 흔한 러브스토리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읽기시작하자마자 조금 당황했다. 주인공은 ‘레오 거스키’라는 노인으로, 죽음을 앞둔 이 팔십대 노인이 독백처럼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던 내게는 참 뜻밖이다. 그런데 이 노인은 곧 자신의 소년 시절, 첫사랑 이야기를 꺼낸다. 레오 거스키에게 ‘앨마 메러민스키’는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다. 레오와 앨마는 어린 시절 폴란드의 한 마을에 살았다. 레오가 서툴지만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모두가 앨마를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조금씩 자라났지만 곧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나치의 위협이 심해질 무렵, 앨마는 먼저 미국으로 떠난다. 독일의 침공으로 집과 가족을 모두 잃은 레오는 몇 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다 뒤늦게 앨마가 있는 미국으로 떠난다.
아, 그래, 이 노인의 지극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인가 보구나 싶어질 때 또 다른 뜻밖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번에는 ‘앨마’라는 이름의 열 네 살 소녀가 화자로 등장한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 궁금하다. 이, 앨마가 그 앨마인가? 그런데 보아하니 소녀의 이름은 ‘사랑의 역사’라는 책의 여주인공인 ‘앨마’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인 <사랑의 역사>는 책 속의 책인 ‘사랑의 역사’의 제목이기도 한 셈이다. 소녀는 엄마와 남동생과 살고 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빠는 아주 오래 전에 엄마에게 스페인어로 쓰인 ‘사랑의 역사’라는 책을 선물하면서 책 앞에 이렇게 썼다. “샬럿, 나의 앨마에게 내가 글을 쓸 줄 알았다면 당신을 위해 이런 책을 썼을 거야. 사랑을 담아. 다비드”. 앨마 그녀는 누구였을까. 자기에게 이름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앨마라는 사람이 소녀는 궁금하다. 엄마는 앨마가 모든 사람, 누군가가 사랑한 적 있는 모든 소녀, 모든 여자라고 말하곤 한다. 소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어쩐지 앨마가 그냥 소설 속 인물이 아닌 것 같다. 작가가 직접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사랑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쓸 수 있었을까. 특정한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이런 글을 쓸 수 없었으리라.
한편 소녀 ‘앨마’에게는 또 다른 임무가 있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아빠를 도무지 잊지 못하는 엄마를 위해 새로운 사람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 번역가인 엄마에게 신비로운 편지가 도착한다. ‘제이컵 마커스’라는 정체 모를 남자가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할 테니 ‘사랑의 역사’를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것이다. 앨마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와 엄마를 이어주면 어떨까 상상을 하다가 곧 작전을 짠다. ‘제이컵 마커스’라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낼 단서를 찾기 위해 그가 보낸 편지와 엄마가 번역한 책을 뒤지던 소녀는 점점 책 속에 등장하는 소녀, 자신에게 이름을 준 ‘앨마 메러민스키’가 실존 인물일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소녀는 엄마와 제이컵 마커스를 이어줄 수 있을까? 소녀에게 이름을 준 ‘사랑의 역사’ 속 앨마 메러민스키는 정말 실존 인물일까? 독자도 궁금증이 일어난다.
이쯤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오 거스키’가 ‘사랑의 역사’를 쓴 작가가 아니겠느냐고, 그러니까 소설 속 여주인공 이름이 ‘앨마 메러민스키’가 아니겠느냐고, 너무 쉬운 이야기잖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게 쉽사리 답을 주지 않는다. ‘사랑의 역사’를 쓴 작가는 ‘레오 거스키’가 아니라 ‘즈비 리트비노프’라는 이름의 무명작가로 그의 이력을 보면 1941년 폴란드에서 칠레로 도피했고 유일하게 출간한 책은 스페인어로 된 ‘사랑의 역사’ 그 한 권뿐이다. 레오 거스키는 폴란드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칠레에 간 적이 없다. 게다가 ‘사랑의 역사’의 서문은 ‘즈비 리트비노프’의 아내인 ‘로사’가 썼다. ‘앨마’와는 전혀 다른 인물인 것이다. 리트비노프는 그토록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쓰면서 평생 ‘앨마’를 그리워한 것 같은데, 왜 결혼은 로사라는 여자랑 했을까? 앨마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 작품은 이렇게 서로 전혀 관계없는 다양한 인물들이 ‘사랑의 역사’라는 책 한 권으로 맺어지게 된 인연을 따라가며 한 개인의 역사와 그 한 사람의 삶을 때로는 완전히 뒤바꿔버리는 이 세계 역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간다.
‘즈비 리트비노프’가 쓴 ‘사랑의 역사’는 그다지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는 책 속의 책인 ‘사랑의 역사’ 몇몇 구절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즈비 리트피노프의 ‘사랑의 역사’는 딱히 내가 좋아하는 류의 글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사랑의 역사’라는 책은 ‘초판본 이천 부 중에서 일부는 구매되어 읽혔고, 다수는 구매되어 읽히지 않았으며, 일부는 선물로 주어졌고, 일부는 서점 진열장에 놓인 채 바래가면서 파리들의 착륙장이 되었고, 상당수는 폐지 압축기에 들어가 아무도 읽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다른 책들과 함께 재생지 원료로 갈가리 찢’기는 역사를 이루며 서서히 소멸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최소 한 부는 누군가의 인생을, 한 사람 이상의 인생을 바꾸게 된다. 적어도 소녀의 아빠 다비드는 이 책을 무척 좋아해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고, 그 여자와 결혼해 딸의 이름을 책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짓지 않았는가. 어떤 이는 크게 주목하지 않아도 또 다른 이에게는 생을 뒤흔들 만큼 강력한 영향을 주는 책. 책이란 참 그렇게 놀라운 존재이다. <사랑의 역사>에서 나는 그런 인연의 힘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