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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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된다. 훨훨 나는 모습이 틀림없이 나비였다. 즐거운 기분으로 마음껏 하늘을 날아다니다 보니,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장자인 줄 알지 못한다. 문득 꿈에서 깨어 보니 분명, 장자이다. 장자는 멍하니 생각한다. 자신이 꿈에 나비였는지, 나비가 꿈에서 장자였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너무나도 유명한 장자의 ‘호접지몽’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문득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장자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에서 장자라고 할 수 있는 ‘나’는 ‘세계의 끝’에도 존재하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도 등장한다. 장자의 ‘나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세계의 끝’ 이야기일 것이다. ‘세계의 끝’에서 그려지는 공간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마을로 일각수가 살며, 알 수 없는 ‘벽’으로 둘러 싸여있다. 이곳 사람들은 외부와 격리된 채 ‘마음’이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그 때문에 안락하고 평온하게 나날을 보낸다. 그런 이들 틈에서 나는 ‘그림자’를 빼앗기고 기억도 잃은 채 살아가다가 도서관에서 꿈을 읽는 일을 하며 이 마을의 수수께끼와 함께 마을이 생겨난 이유를 풀어나가게 된다.

꿈을 꾸고 있는 주체인 ‘장자’에 비유할 수 있는 세계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야기일 것이다. ‘세계의 끝’에 비하면 이쪽이 한결 현실적이다. 물론 이쪽도 일상의 흔한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사뭇 놀라운 일들이 펼쳐진다. 암호를 취급하는 ‘계산사’로서 살아가는 ‘나’는 인간의 잠재의식을 이용한 수치 변환술을 다루는 존재이다. 어느 날 ‘나’는 늙은 박사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의뢰받는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박사로부터 받은 선물을 열어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두개골이 들어있다. 나는 이 두개골을 조사하러 도서관을 찾고 마침내 두개골의 정체가 일각수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기이한 일에 휘말려 낯선 남자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더욱이 사라진 박사를 찾기 위해 모험을 하던 중 박사로부터 ‘나’의 세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것은 과연 꿈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오래 전에 읽었을 때 나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기묘하지만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를 즐겼다. 현실을 벗어난 설정, 그래서 이게 과연 말이 될까 싶으면서도 묘하게 말이 되는 이야기들. 그런데 이제 다시 읽으니, 오히려 상상 속, 아니 무의식의 세계로 느껴지기만 했던 ‘세계의 끝’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한결 현실처럼 다가온다. 벽으로 둘러 싸였고,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래서 도리어 편안한 그들. 그런 틈바구니에서 그림자마저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는 그저 ‘나’의 무의식이 아니라,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세계, 어쩌면 그래서 떠나고 싶지 않은 세계로 다가오기도 한다. 일상에 지쳤을 때 사람들이 곧잘 그런 상태를 꿈꾸듯이 말이다. 그 평온하고 아름답지만 쓸쓸한, 그래서 조용한 ‘세계의 끝’에 비해 일상이 뒤흔들리고 쫓는 자와 쫓기는 자, 기이하고 신비로운 만남과 안타까운 작별이 공존하는 ‘하드보일드’한 세계는 왠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 직접 머물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나’는 그곳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는 순간 안타까워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박사가 아무리 그에게 “지금 있는 이 세계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세계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끝납니다.”(525쪽)라거나 “자네의 존재는 끝나지 않아요. 다만 다른 세계로 들어가 버릴 뿐이야.”(530쪽) 말한다 하더라도, 그가 ‘발을 오른쪽으로 내미느냐 왼쪽으로 내미느냐에 따라 세계가 달라’(549쪽)지더라도, 그는 결국 지금 이 현실, 맥주를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가끔은 마음에 드는 여자와 섹스를 하며 사는 이 세계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게다가 그 자신이 다시 한 번 인생을 시작한다 해도, 역시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계속 잃어 가는 인생이-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666쪽)

인식 하나만으로도 세계는 변한다. 늙은 박사의 말처럼 이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드보일드한 세계의 ‘나’가 그 세계의 끝을 안타까워하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순간에는 똑같은 마음을 지닐 것이다. 마음을 잃어버린 채 평온하게 살아가는 무의식, ‘불완전한 부분을 불완전한 존재에 떠넘기고 웃물만 홀짝거리면서’ 살아가는 그 ‘세계의 끝’의 삶보다는 상처 입고 고통을 겪더라도 하드보일드한 세계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살아가고 싶은 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또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버리고 갖가지 아름다운 감정과 뛰어난 자질과 꿈이 소멸되고 제한되었다 해도, 나는 나 자신이 아닌 무엇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 ‘정말 그런 걸 절망이라고’(667쪽) 말할 수 있을까? 나비가 되어 한껏 유쾌하게 날아다녔던 장자도 깨어난 뒤 그것이 꿈인 줄 알았기에 즐거운 기분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오가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가 ‘너의 인생은 제로야’ 소리칠지라도 육체를 지닌 존재로 사는 것의 고통과 기쁨, 그리고 그 소멸의 슬픔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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