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어 벗 포 더
앨리 스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민음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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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지인들과 사교 모임을 즐기는 당신. 당신은 오늘도 디너파티를 열었다. 지인의 지인으로 파티에 참석한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사십대 중반에 평범한 외모, 조용하고 수더분하고, 아무런 해도 끼칠 것 같지 않은 그런 인상의 남자. 사람들과의 대화에도 곧잘 섞이고, 자기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우지는 않는데 그러면서도 할 이야기는 한다. 아, 그 남자가 자신은 채식주의자라고 이제와 밝히니 조금 당황스럽지만 그는 샐러드를 먹으면서도 즐거울 수 있다면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를 준비할 때쯤 남자가 2층으로 올라간다. 당신은 그가 화장실을 쓰려는가 보다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남자, 시간이 꽤 흘러도 내려올 줄 모른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당신은 걱정이 되어 2층 화장실로 올라가 노크를 하고 괜찮은지 묻는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이 남자와 함께 온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본다. 이 남자를 데리고 온 지인은 화장실 앞에서 똑똑 노크를 하고, 괜찮은지 묻는데 역시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화장실 손잡이를 돌려본다. 어라? 문이 열린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지인은 당황한다. 어딜 간 거지?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그가 벗어둔 재킷과 휴대전화는 그대로 있다. 말도 없이 가다니, 너무 하는군 싶지만 무슨 급한 일이 있으려니 하고, 다시 파티 분위기에 젖어든다.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아침, 그 남자의 자동차가 여전히 당신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본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느낀 당신은 2층으로 다시 올라가고, 2층 예비 침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음을 깨닫는다. 문 밑으로 쪽지가 보인다. “물은 됐습니다. 그렇지만 곧 먹을 게 필요할 거예요. 아시다시피 저는 채식주의자입니다.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 그 남자는 파티 중간에 먼저 돌아간 것이 아니라, 어젯밤 내내 이 예비 침실에서 머문 것이다. 게다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체 무슨 까닭일까? 당신이라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저 낯선 남자를 집 안에 들여놓은 채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데어 벗 포 더>는 이런 상황 아래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데어 벗 포 더>라는 제목처럼 수수께끼 같은 일들의 연속이다. 스스로 남의 집 2층 예비 침실에 갇히기를 선택한 남자의 이름은 ‘마일스 가스’- 앞서 설명했듯이 40대 중반의 그는 디너파티에서 만나도, 거리에서 만나도 특별히 해가 될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없는 평범한 남자이다. 지인인 ‘마크’를 따라서 이 2층 집 여주인인 ‘제네비브 리’가 연 디너파티에 참석했고, 남의 집 예비 침실에 스스로 갇히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열흘이 지난다. ‘리’ 부인은 마일스의 휴대전화 속 주소록을 열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연락을 취한다. 그렇게 연락을 받은 사십대 여성 ‘애나’의 이야기가 ‘데어(There)’를 장식한다. 전화를 받은 애나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마일스와 특별한 관계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일스와는 이십 년 동안 보지 못한 사이였고, 그나마 알게 된 것도 그들이 고등학생이던 시절이다. 한 은행이 후원한 고등학생 글짓기 대회에서 선발되어,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 알고 지낸 사이. 애나는 어찌 되었든 마일스가 스스로 갇혀 있는 집으로 향한다. 그녀는 마일스가 방 밖으로, 집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을까?

‘벗(But)’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But)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건 사람/뭘 그만두라거나 해달라고 요청할 거람?’ 이 장에서는 마일스를 그 집으로 이끈 장본인인 ‘마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마크는 이제 육십 대에 들어선 동성애자로 마일스와는 디너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그저 극장에서 잠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이 통해서 술을 함께 마신 사이일 뿐. 마크와 마일스는 그러나(But)라는 단어에 대해 토론하다 가까워졌다. 그들은 ‘그러나는 서로 연결하는 접속사’이면서도 ‘우리를 항상 옆길로 이끌어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포(For)’는 치매를 앓는 80대 노인 ‘메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이 노인은 마일스와 어떤 관계일까? 마지막장 ‘더(The)’는 ‘브룩’이라는 아홉 살 꼬마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이 꼬마 또한 마일스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 <데어 벗 포 더>는 이렇게 스스로 남의 집 방 안에 갇힌 마일스라는 남자와 그와 어떤 식으로든 ‘희미하게’ 관련이 있는 네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야기는 친절하지 않다. 리 부인이 애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도움을 요청할 때만해도, 독자들은 아, 이제 애나와 마일스의 관계가 밝혀지면서, 마일스가 왜 남의 집 예비 침실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도움(?)의 손길을 받아 방 밖으로 나오게 되는지 이야기가 흐르겠구나 생각하겠지만(나 또한 그랬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플롯을 완전히 깨뜨린다. 상상 밖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마일스가 머물고 있는 방에는 운동기구인 로잉 머신(rowing machine)이 있고, 와인 제조 장비 세트와 1950~60년대 고전 공상과학영화 DVD 모음집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욕실이 딸려 있다. 그는 그 안에서 뭘 하며 지낼까? 대체 왜 스스로 갇히기를 선택했을까? ‘그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을까? 죄수가 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보고자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것일까? 그 행위는 우리가 새처럼 자유롭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죄수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일종의 시답잖은 중산층 게임일까? 어떤 쇼핑몰도 어떤 공항의 중앙 홀도 자유로이 갈수 있고, 또 나뭇결이 고스란히 드러난 멋진 마루가 있는 집의 2층 방으로도 자유로이 갈 수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실은 죄수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게임 말이다.’(98쪽)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무려 석 달이나 흐른다.

나라면 방문을 부숴버리거나, 경찰을 불러서라도 강제로 문을 따 버릴 텐데, 집주인인 리 부인은 모든 폭력을 싫어한다면서 그러기를 거부한다. 마일스가 제 발로 나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모든 폭력을 싫어한다는 리 부인의 태도에는 속물적인 욕망이 깃들어 있다. 마일스는 어느덧 대중들에게 ‘마일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남의 집 예비 침실에서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하고 살아가는 이 남자는 이제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 기억하기 쉬운 이름인 ‘마일로’라는 이름까지 갖게 되었고, 리 부인 집 앞에는 언론과 유튜브 등이 진을 친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환호하며, 그를 기념품 등 상품화해서 판매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난다. 리 부인도 이런 상황이 싫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마일스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아주 강력하게 자기 존재를 사람들 앞에 각인시킨다. 없지만 있는 사람, 그러니까 부재하지만 현존하는 인물이다. 사람들이 ‘기사 제목 같은 데서 더(The)라는 단어가 없어도  더(The)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 이 사람 ‘마일로’와 같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낯선 사람의 집 어느 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집은 우리 집이어서 이 상황이 무척 불공평하고 부적절해 보일 뿐이다. (143쪽)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패트릭
왜냐하면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엘리너
왜냐하면 서로 보살펴 주기 위해서 엄마
왜냐하면 오래가는 것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아빠 (324쪽)


이 알쏭달쏭한 작품은 수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데, 무엇보다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실제로 여기, 또는 거기(There)에 육체가 있어야지만 존재하는 것일까? 마일스는 방 안에 갇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관념(생각) 속에서 그런 상태일 뿐이다. 누구도 마일스가 방 안에 있는 것을 본 사람은 없다. 실제로 마일스가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디너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가 응당 화장실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가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당연하다는 듯이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그가 거기(There) 없는데도, 거기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But) 그는 화장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2층 예비 침실 문 아래에 쪽지를 남겨둠으로써 그 안에 있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된다. 하지만 이 마저도 어떤 누군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실제로 보지는 못한다. 그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For) 거기에 있기를 선택한 것일까?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일스가 사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정말 어떤 면에서는 마일스처럼 모두 ‘낯선 사람의 집 어느 방(생각/관념)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보내고 싶어도 쉽사리 내보내기 어려운 형태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희미한 관계에서도 영향을 끼친다. 마치 정관사 더(The)처럼. 이 작품은 이렇게 인간의 관념과 인식, 존재에 관한 고정관념에 질문을 던진다. 이 수수께끼 같은 작품은 책을 덮고도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아리송한 여운을 남기는데, 그런 안개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를 잡은 듯한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계속 읽을 작가 목록에 ‘앨리 스미스’를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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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1-19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허, 이것 참.... 서평인 거 같기도 하고, 리뷰인 거 같기도 하고, 그냥 독후감인 거 같기도 한데, 확실한 건, 낚시라는 거.
이걸 물어? 말어? 으아, 참.... 물어? 말어?, 아몰랑!!!!

잠자냥 2021-01-19 22:26   좋아요 0 | URL
ㅎㅎㅎ 호불호가 있을 수 있는 작품이라 막 추천은 못하겠습니다!
 
시간은 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2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 지음, 김혜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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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러시아 작가, 그러니까 남자 작가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컸다. 그런데 요즘은 여성 작가의 글을 읽는 기쁨이 크다. 작년에 빅토리아 토카레바를 발견했다면 올해는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를 그 반열에 올려본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와 닮은 듯, 다른 작품 세계. 두 사람 모두 현대 러시아 여성 작가라 그런지,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많이 쓰고 있다. 그다지 화려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고단한 여성들의 삶.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의 작품이 훨씬 어둡다. 너무나 어두운 이야기를 썼다는 이유로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에서 출간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하니 짐작이 가지 않는가.

얼마나 어둡기에? 호기심이 인다.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를 새해 첫 권으로 읽기에 부적절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으나 새로운 러시아 작가를 만나고 싶은 욕심이 더 앞서서, 2021년은 《시간은 밤》으로 시작한다. 이 책에는 중편인 <시간을 밤>을 비롯해 아주 짧은 단편 열 두 개 등 모두 열 세편이 실려 있다. 첫 번째 단편인 <알리바바>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이윽고 나는 페트루솁스카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크고 까만 눈에 평범하고 교양 있어 보이는 유대인 여자 알리바바는 선술집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사실, 알리바바는 전에 사귀던 남자가 어이없는 이유로 집에서 내쫓았고, 자기만의 공간이 없었기에 눈치 보이는 엄마 집을 제외하고는 딱히 갈 곳이 없다. 알리바바는 이 선술집에서 술을 사마시기 위해 집에서 블로크 전집 여덟 번째 권을 들고 나왔다. 아홉 권짜리 부닌 전집은 이제 네 권밖에 남지 않았다. 아나톨 프랑스는 세권 밖에 남지 않았고. 술값으로 쓰기 위해 책을 팔아치운 것이다. 이런 묘사에 조금씩 반한 나는 알리바바의 사연이 더 궁금해진다. 책을 팔아서 술을 사마실 정도인 그녀는 알코올중독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그날은 운이 좋아서 아내도 엄마도 없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는 남자를 낚는 데 성공하고 그의 집에 함께 가게 된다. 친구들 집을 전전하는 일도 이제는 더 할 수 없는 알리바바는 이 남자의 집에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앞서 말했듯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는 지나치게 암울한 이야기를 쓴다는 이유로 출간 금지당한 작가였다. 알리바바의 삶 또한 그리 쉽게 행운의 햇살이 비치지는 않을 것이다.

두 번째 단편 <밀그롬>에서는 자기 옷을 처음 만들어 입는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라고 해서 어린아이인줄 알았더니, 웬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갓 대학생이 된 18세 소녀이다. 고등학교 내내 교복 하나로 지내다가 더는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처음으로 장학금에서 일부를 떼어내 옷을 지어 입을 천을 산 것이다. 그런데 이 옷 만들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는 재봉틀을 갖고 있는 ‘밀그롬’이라는 여성을 소개받게 된다. 소녀는 망가진 천을 들고 밀그롬을 찾아가고, 혼자 사는 노파인 밀그롬의 안타깝고도 서늘한 삶을 마주하게 된다. 첫 번째 단편에서도, 두 번째 단편에서도 여성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젊은 여자도, 중년 여성도, 노년 여성도 하나같이 삶은 힘겹기만 하다. 이어지는 모든 단편에서도 그렇다.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아가는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가난에 쪼들리고 미혼모이거나 남편 없이 홀로 자식들을 키운다. 그러다 보니 알코올중독이거나 정신병을 앓기도 한다. 제대로 된 남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멀쩡(해 보일)한 때는 그저 여자를 침대로 데려가기 직전 그때뿐이다. 여자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면 다들 어디론가 사라졌거나, 사라져간다.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병상에 누워 돌봄의 대상이 되거나, 집 안에 있더라도 아내나 엄마 등 여자에 기생해서 살아간다.



그런 부류의 인간들의 사랑은 언제나 고상하고 플라토닉해서 어떤 것에도 대가를 치르려고 하지 않는다. 비물질적인 사랑인 것이다. 혼자 쓰기에도 늘 돈이 부족해서, 그네들은 동전 한 닢에도 목을 맸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동차, 컴퓨터, 비디오카메라 등을 사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무언가를 위해 평생 돈을 모았으며, 공짜로 ‘결혼하기’를 아주 좋아했다. 아무래도 여자에게 들어가는 자신의 물건을 무슨 현금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시간은 밤>, 204쪽)

가난하고 불완전한 삶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걱정은 온통 여성의 몫이다. 남편도 없이, 이렇다 할 변변한 직업도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우며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보니, 여자는 자기 의지와는 달리 아이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쉽게 뒷골목 아이가 되고, 자기에게 아주 작은 애정과 관심을 보이는 남자만 있어도 금세 마음을 열어 결국 미혼모가 된다. 그러면 또 그 아이는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게 되고, 가난과 고독과 절망, 알코올중독과 정신병이 또다시 대물림 되고 만다. 끊고 싶어도 도무지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이다.

중편이자 이 책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은 밤>에는 이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주인공 ‘안나’는 가난한 오십대 중반의 시인으로 남편 없이 딸과 아들을 키운다. 시인이라고는 해도, 그녀의 시는 일 년에 오직 한 번, 여성의 날에 시 두 편이 잡지에 실리는 게 고작이다. 안나는 아버지 없이 컸으며 엄마는 늘 그녀에게 상처만 주었다. 딸 ‘알료나’ 또한 안나가 그랬듯이 책임감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남자를 만나 미혼모가 된다. 그런 딸을 한심하다고 구박하면서도 손자만큼은 보물처럼 키우며 돌보는 안나. 한편 아들은 패싸움에 휘말렸다가 가난 때문에 다른 애들의 죄까지 뒤집어쓰고 감옥에 들어가 있다. 출소한 후로도 변변한 일자리를 얻기는커녕 알코올중독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머니와 자식만으로 이루어진 가족 형태가 반복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진 것이다. 안나가 자신의 엄마에게 상처받았듯이 이제는 안나가 딸 알료나를 아프게 한다. 모녀는 애증의 관계, 상처 주고받기를 일삼는다. <시간의 밤>은 버림받은 여자와 아이들이 어떻게든 가정을 이루려 애쓰다 실패하는지, 그런 그들이 나이 들어가며 고독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세밀하게 그린다.



모든 것이 허공에 매달린 날붙이 같았고, 우리 삶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져버릴 듯했다. 덫이 탁, 하고 닫힌다. 매일같이 우리 뒤로 그렇게 덫이 닫혔고, 때로는 위에서 통나무가 떨어지기도 했다. (<시간은 밤>, 228쪽)


페트루솁스카야의 작품을 읽는 일은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수세미처럼 너덜너덜해 인간’(198쪽)의 삶이, ‘마치 늪으로 빠져들 듯 모스크바의 삶 속’(155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과장도 미화도 없이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나는 말한다. ‘직장과 남자는, 아이들이 자라온 시간을 되짚어보건대, 체호프 작품에서 나오는 것과 똑같다. 하나같이 속물적이다. 하지만 한발 물러서 보면 무엇인들 속물적이지 않겠는가?’(237쪽)하고. 이 속물적인 인간의 삶이 날것 그대로 까발려진다. 그토록 힘겨운 그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소비에트 사회의 모순도 자연스레 눈앞에 그려진다. 가난하고 힘없는 여성과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잔혹하기만 한 소비에트 사회. 그러나 그 가난은 결국 그들의 아버지(스탈린 또는 국가)가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그 아버지는 나 몰라라 방관만하는 사회. 이런 날선 비판의 시선이 작품 전반에 스며있다. 러시아에는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위대한 작가들이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그들의 아내였던, 소피아, 안나 같은 여성들이 있었다. 남자들의 삶에 가려져 희생을 강요당하고 그러고도 악처 소리나 듣는 그 여성들. 그런 여성들의 참모습을 페트루솁스카야는 생생히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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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1-06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 샀습니다. ㅎㅎㅎㅎㅎ

잠자냥 2021-01-06 15:52   좋아요 2 | URL
그런데 이 책 읽다 보면 술 마시고 싶어져요! ㅋㅋ

Falstaff 2021-01-06 16:03   좋아요 2 | URL
앗,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요. 하, 좋아요 한 열 번 클릭하고 싶어요!!!! ㅋㅋㅋㅋ 산 김에 토카레바도 얹었습니다!

레삭매냐 2021-01-06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렁 집에 가서 책 찾아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1-06 17:55   좋아요 0 | URL
쉽게 찾게 되시길 바랍니다~

단발머리 2021-01-06 2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은데, 암울한 분위기가 잠자냥님 리뷰만으로도 완벽하게 전해지네요. 러시아에 이런 훌륭한 여성작가가 있었다니요.
톨스토이랑 도스토예프스키만 아는 나란 사람 ㅠㅠ

잠자냥 2021-01-06 22:12   좋아요 0 | URL
빅토리아 토카레바랑 이 작가는 꼭 읽으세용~ ㅎㅎ

syo 2021-01-06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 것들 자꾸 쌓아주시는 잠 모님과 fal 모님. 이 애증의 고수들....^ㅂ^

잠자냥 2021-01-06 22:12   좋아요 0 | URL
읽으세용~ ㅎㅎㅎ

coolcat329 2021-01-07 13:13   좋아요 1 | URL
아! ㅋㅋ 동감입니다.

다락방 2021-01-07 1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믿고 따르겠습니다!

잠자냥 2021-01-07 10:47   좋아요 1 | URL
토카레바 좋아하셨으니까 이 책도 마음에 드실 거라고 생각합니닷!
 
블랙 유니콘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움직씨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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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로드의 <블랙 유니콘>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백인 남성의 시에,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졌는가를 깨닫는다. 로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는 흑인이자 레즈비언이며 페미니스트이다. 1950년대부터 여성운동과 페미니즘, 퀴어 운동과 담론을 형성한 이론가로 흑인 여성 디아스포라 페미니스트 조직화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60년대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백인과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문단 주류를 깨뜨린 최초의 흑인 여성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블랙 유니콘>에 앞서 읽었던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로드는 ‘시는 사치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로드는 ‘삶을 성찰할 때 우리가 어떤 빛을 비추느냐에 따라 우리가 빚어낼 삶의 형태와 그 삶을 통해 이룰 수 있는 변화가 결정된다. 우리가 마법 같은 일들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실현할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런 빛 속에서다. 시는 바로 그런 빛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시를 통해 이름도 형식도 없이 미처 태어나지 못한 채 느낌으로만 존재하던 아이디어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으며 ‘꿈이 개념을, 감정이 아이디어를, 앎이 이해를 낳듯이, 경험을 정제해 나온 진실어린 시는 우리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시스터 아웃사이더>, 39쪽). 로드가 보기에 시는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일깨워 주는 경험의 정수’이며 그렇기에 시는 사치가 아니다. ‘시는 우리가 존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생명줄’이자, ‘이름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시스터 아웃사이더>, 41쪽)

한마디로 로드에게 시는 ‘생존과 변화에 대한 꿈과 희망을 확인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언어로, 아이디어로, 좀 더 구체적인 행동’(<시스터 아웃사이더>, 41쪽)으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렇기에 그는 여성이자 흑인, 레즈비언으로서, ‘흑인 여성 시인전사(戰士)’로서 시를 썼으며 그것이 바로 자신이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이었다.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꾸는 일, 그 자체가 로드의 시(時)인 셈이다. <블랙 유니콘>은 바로 그 흑인 여성 시인전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 책은 ‘블랙 유니콘’, ‘살아남기 위한 기도’, ‘재창조’, ‘시스터 아웃사이더’ 4장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장을 여는 시는 ‘블랙 유니콘’은 제목에서부터 많은 것을 상징한다.


블랙 유니콘

블랙 유니콘은 탐욕스럽다
블랙 유니콘은 성마르다.
블랙 유니콘은 오인되었다.
그림자로
또는 상징으로
차디찬 땅을 헤치며
끌려 다녔다.
내 분노를 향한 조롱이
안개처럼 흩뿌려진 곳을,
유니콘의 뿔이 놓이는 건 그녀의 무릎 위가 아니라
커져 가는
달 구덩이 깊숙한 곳이다.

블랙 유니콘은 가만있지 못한다
블랙 유니콘은 수그릴 줄 모른다
블랙 유니콘은 자유롭지
않다. (<블랙 유니콘>, 23쪽)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희귀한 존재인 유니콘. 그런데 그 유니콘은 우리가 익숙하게 상상하듯 하얀 모습이 아니다. 검다. 게다가 순수한 존재가 아니라 탐욕스럽고 성마르다. 그림자나 상징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끌려 다녔고, 무엇보다 자유롭지 않다. 이 블랙 유니콘이 로드를 비롯한 아프리카 출신 흑인 여성들을 뜻함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자유롭지 못하고, 타자화되어 그림자처럼 오인된 존재. 그러나 그 블랙 유니콘은 ‘수그릴 줄’ 모른다. 그렇기에 로드는 그 다음 시 ‘여성이 말한다’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나는 여성이었다/아주 오래전부터/드넓은 미래를 품은 위험한 존재/나는 /여성이고/ 백인이 아니다.’ (‘여성이 말한다’, 25쪽). 나는 여성이며, 흑인이다가 아니라 ‘백인이 아니다’ 엄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선언에는 짜릿한 전율이 인다. 나 또한 ‘유색colored’ 여성이지 않은가. 첫째 장에서 흑인 여성임을 선언한 로드는 ‘예만자의 집에서’, ‘다호메이’, ‘코냐기 여자들’과 같은 시를 통해 흑인의 신화와 흑인 여신을 호명하고 노래한다. 폭력과 식민의 역사에 맞서 온 흑인 여성들의 저항을 기록하며 아프리카 여성 신화를 1970년대 미국의 흑인과 흑인 여성들의 삶과 연결 짓는다.

로드는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여성/생태학>의 저자인 ‘메리 데일리’에게 편지를 보내 묻는다. 왜 아프리카의 여신 아프레케테는 예로 들지 않았느냐고, 왜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여신들의 이미지는 백인이며, 서구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 나온 것이냐고. 비(非)백인 세계의 여신들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역사와 신화적 배경이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여성이 똑같은 억압을 겪는다고 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수많은 다양한 도구들을 고려하지 못한 것’ (<시스터 아웃사이더>, 95쪽)이라고 지적한다. ‘백인 여성의 역사와 신화만이 권력과 배경을 요구하는 모든 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춘 유일한 여성사라고 보는 가정, 그리고 백인이 아닌 여성들과 그들의 역사는 그저 들러리나 피해 사례로만 가치가 있다는 가정이 어떤 식으로든 여성들 사이의 인종차별과 분열을 조장하는지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블랙 유니콘>의 첫째 장은 바로 그 편지 내용을 로드가 시로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 이다.

두 번째 장 ‘살아남기 위한 기도’에는 흑인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시로 그려진다. 누군가는 그들을 ‘미쳤다고/못됐다고 우쭐거린다고 약하다고 흑인이라고’ 부른다. 그런 상황 아래 그들은 ‘서로의 입 속 가득한 고통을/말하려 애쓰며 말하려 애쓰며’ 말하려 애쓴다. 그러다가 ‘채찍 끝에서/혀에서/서로의 배신이란 가장자리에서/존중’의 의미를 배우기도 한다. ‘길에서 마주친 서로의 얼굴로부터/그 아름다운 검은 입으로부터/낯익은 신중한 눈으로부터/눈을 돌리고/홀로 스쳐 가는 것’임을(‘헤리엇’, 47~48쪽). 그들 아이들은 ‘해골 아이들’이다. ‘아이들 얼굴 아래에는 햇살이 없다/어둠도 없다/남아 있는 심장도 없다/새벽이면 아이들의 몸을/여성으로 돌려놓을/그 어떤 전설조차 없다.’(‘사슬’, 49쪽) ‘선택이라는 잠깐의 꿈조차도 마음껏 누릴 수 없’으며 그들의 일상은 ‘해가 뜨면 두려워한다/해가 계속되지 않을까 봐/해가 지면 두려워한다/아침에 다시 뜨지 않을까 봐’. 그렇기에 ‘아이들의 꿈이 우리의 죽음이 닮아가지 않도록’ ‘미래를 길러 낼 단 하나의 지금을 찾아야만’한다(‘살아남기 위한 기도’, 62~63쪽). 이토록 혹독한 삶인데도 로드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기원한다. ‘자라나 거라/검게 그리고 아름답게’(‘앨빈 프로스트를 위한 추도사’, 79쪽), 로드의 시에서 검정은 아름다움이다.

로드의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황량하고 거친 사막과 같은 흑인 여성의 삶이 진솔하게 그려지면서도 그저 그 고통을 울부짖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히 마주하고, 과거에는 더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힘겹지만 앞으로는 그 삶이 평화롭고 윤택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끊임없이 소망한다는 점에 있다. 삶을 향한 그 열정적이고 희망에 찬 자세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3~4장인 ‘재창조’와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자매들 간의 연대를 통한 삶의 재창조를 노래한다. 로드 그 자신은 ‘얼마나 수없이 내 뼈저린 혼란을 검은색’(‘바깥’, 103쪽)이라 불렀는지 모른다며 회한어린 고백을 하지만 이제 그는 ‘나만의 이름을 찾으려 애쓴다’ 그는 이제 ‘나의 형상을 찾는다’(‘바깥’ 104쪽).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해방’(‘하지만 내 딸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155쪽)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 해방은 ‘시스터 아웃사이더’ 즉,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자매들의 연대에 있음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우리는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결코 서로의 굶주림을
어루만지지 못하고
결코
빵 부스러기를 나누지 못했다
두려워서
빵은 적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을 존중하고
또 서로를 존중하라 가르친다.

이제 네게 외로움이란
성스럽고 쓸모 있는 것
이제
더는 필요 없는 것
네 빛은 환하게 반짝인다
하지만 난
알려 주고 싶어
너의 어둠 역시
그윽하고
두려움을 넘어선다고. (‘시스터 아웃사이더’, 170쪽)



로드는 ‘아웃사이더인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 지지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98~99쪽) 말한 바 있다. ‘강인한 여성들은 자신의 증오가 어떤 맛인지’ 알고 있으며 ‘비밀스럽고 참을성 있는 아름다운 여성’ (‘초상’, 90쪽)들은 그 내면의 부드러움을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열망, 마음속의 뜨거운 불로 승화해(‘여성에게서 불을 빼앗지 말라’, 177쪽) 자신들이 처한 억압적인 상황을,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음을 긍정한다. 폭력과 억압 아래 수없이 상처받고 한때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지만 그런 자신을 껴안고 보듬고 나아가 다른 이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음을 시로써 증명한 기록이 바로 <블랙 유니콘>이다. 이런 로드의 시는 ‘눈물을 떨어뜨릴 땅’(‘200주년을 기리는 시’, 142쪽)조차 없던 여성들에게 한줄기 아름다운 위로이자 연대를 위한 뜨거운 외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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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1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기심에 찾아 보았는데,
신간이더라구요. 당근 중고서점에도
없고,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있지
않네요 에잉~

제목은 멋지네요.

잠자냥 2020-12-16 18:03   좋아요 0 | URL
네 따끈따끈한 신간입니다~ 중고로 만나시려면 좀 기다리셔야 할 듯하네요. ㅎㅎ

유수 2023-01-29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유수 2023-01-30 08:35   좋아요 0 | URL
엇.. 이거 반은 오타고 반은 진심으로 눌린 거예요. 애 옆에서 누워서 보다가 뭐지 이 무릎꿇을 리뷰는..생각하다가 아이가 제 폰 만져서 화면을 껐던 거 같은데 이렇게 되었네요. 뭐지 이거(얘) 생각하실까봐 ㅋㅋ 구구절절 달아요

잠자냥 2023-01-30 08: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아무리 확대해서 보려고 해도 정확히 안 보여서 그냥 엄지척으로 생각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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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와우! 이 책 재미있겠다 싶었다. 같은 사건을 99가지 문체로 다시 쓰다니, 어떤 변주가 이뤄질지 생각만 해도 흥미롭지 않은가? 최근 이 책을 읽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읽는 내내 그 기발한 생각에 감탄하면서 웃게 되더라. 실제 사건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출근 시간 S선 버스 탄 한 남자의 모습이 묘사되고, 두 시간 뒤 다시 그 남자가 생라자르역에서 친구와 우연히 맞닥뜨린 장면이 그려진다. 99가지 문체로 변주되는 이 사건은 시작 부분인 이 책 11쪽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문을 실었다.


약기略記
출근 시간, S선 버스, 스물여섯 언저리의 남자 하나, 리본 대신 끈이 둘린 말랑말랑한 모자. 누군가 길게 잡아 늘인 것처럼 아주 긴 목. 사람들 내림. 문제의 남자 옆 사람에게 분노 폭발. 누군가 지날 때마다 자기를 떠민다고 옆 사람을 비난. 못돼먹은 투로 투덜거림. 공석을 보자마자, 거기로 튀어감.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 로마광장에서 나는 그를 다시 만남. 그는 이렇게 말하는 친구와 함께 있음: "자네, 외투에 단추 하나 더 다는 게 좋겠어." 친구는 그에게 자리(앞섶)와 이유를 알려줌. (<문체 연습>, 11쪽)


이런 기본 메모를 바탕으로 99개의 변주가 시작된다. 이 글을 읽고 레몽 크노처럼 당신도 한 번 시도해 보라.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말투를 바꾸거나, 글 형식을 달리하거나, 글의 장르를 다르게 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레몽 크노 또한 이런 방법을 쓴다. 중복해서 말하거나, 조심스럽게 말하거나,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꿈결에서 하듯, 머뭇머뭇 거리는 어조로 저 아침 버스에서의 일화를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희곡으로 각색하기도 하고(그 솜씨가 참 절묘하다), 시(詩)로 바꾸기도 하는데, 그 시는 때로 소네트가 되기도 하고, 자유시가 되기도 한다. 아니, 저 특별할 것 없는 사건이 희곡도 되고 소네트도 되고 자유시도 된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철학 특강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함께 그려보아요’에서는 마치 아이와 함께 그림 수업을 받는 착각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신나는 동요가 되기도 하고, 구성진 가락의 창(唱)이 되기도 한다. 전보, 편지, 광고, 공식서한 등등 레몽 크노의 세계에서는 저 짧은 일화로 모든 게 가능하다.

시선을 달리하면 같은 일화도 완전히 달라진다. 얼마나 달라지는지 직접 느껴보라고 이 책의 ‘당사자의 시선으로’, ‘다른 이의 시선으로’, ‘객관적 이야기’ 이 세 구절을 앞부분만 조금씩 옮겨 보았다.



당사자의 시선으로
그러니까 말이야, 금일의 내 옷차림에 내가 못마땅해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 나는, 제법 재미있어 보이는 새 모자 하나, 그리고 아주 좋다고 생각하고 있던 외투 하나를 마침내 개시한 것뿐이라고. 생라자르역 앞에서 만난 한 아무개는, 내 외투의 앞섶이 너무 벌어져 있다면서 여분의 단추 하나를 거기에다 더 달아야 하나는 사실을 내게 지적해 보임으로써 내 즐거움을 망치려 들지 뭐야(......) (<문체 연습>, 25쪽)

다른 이의 시선으로
오늘 버스 안 승강대 위 바로 내 옆에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코흘리개 애송이 중 한 녀석이 있었는데, 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자식 중 하나쯤 그냥 죽여버리고 말았을지도 몰라. 그 자식, 그러니까 대략 스물여섯에서 서른 살 정도 쳐먹은 이 덜떨어진 애새끼는, 딱히 깃털이 모조리 빠진 칠면조 목덜미 같은 그 길쭉한 목 때문이었다기보다, 오히려, 그 자식 쓰고 있던 모자에 달린 리본, 그러니까 가짓빛을 띤 끈 같은 것이 리본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유달리 내 화를 돋우고 있었어(......) (<문체 연습>, 26쪽)

객관적 이야기
어느 날 정오경 몽소공원 근처, 거의 만원이 되다시피 한 S선(요즘의 84번) 버스의 후부 승강대 위에서, 나는 리본 대신에 배배 꼰 장식 줄을 두른 말랑말랑한 중절모 모자를 하나 쓰고 있는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정말로 긴 목의 소유자였다. 이 사람은 승객들이 오르거나 내릴 때마다 일부러 제 발을 밟았다고 옆 사람을 갑자기 불러세웠다(......) (<문체 연습>, 27쪽)



한 사건인데도 보는 방식, 즉 관점에 따라 조금씩 어조는 물론 의미가 달라지고, 맨 앞에서 소개한 ‘약기’에서는 알 수 없었던 다른 정보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목이 긴 그 남자의 모자에 달린 끈 같은 것이 ‘가짓빛’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이렇게 같은 사건을 관점을 달리해서 쓰는 정도는 초보(?) 수준일 수도 있다. 크노의 99가지 실험적 글쓰기는 이런 기초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나 신선한 아이디어라 절로 경탄하게 된다. 이를테면 냄새와 맛처럼 글로는 도전하기 어려운 분야까지 시도한다(‘냄새가 난다’, ‘무슨 맛이었느냐고’). 언어를 뛰어넘는 시도도 종종해서 ‘라틴어로 서툴게 끝맺기’를 하거나 ‘일본어 물을 이빠이 먹은’, ‘미쿡 쏴아람임뉘타’처럼 읽노라면 웃음이 터지는 글도 꽤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혀를 내둘렀던 점은 ‘수학적으로’ 변형을 시도하거나, ‘사이언스 픽션’으로 만들거나, 하나의 ‘게임’ 설명서로 빚어낸 부분이었다. 그런 글을 읽을 때는 정말 이 인간, 천재가 아닌가 싶어졌다(물론 내가 수학은 젬병이라 크노가 쓴 ‘수학적으로’ 이 글이 정말 수학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지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내가 박장대소하며 웃거나 참 기가 막힌 변주라고 생각한 부분 몇 구절을 더 옮겨 본다. 물론 모두 전문은 아니다. 궁금하신 분들을 이 책을 사보시라.



책이 나왔습니다
일찍이 수많은 걸작을 선보여 그 명성이 자지한 소설가 모씨는 유니크한 재능으로 한껏 빛나는 이번 신작 소설에서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들 너 나 할 것 없이 수긍할 만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맹활약을 펼치는 인물들로만 모든 장면을 연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어느 날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 제법 수수께끼 같은 한 인물을 자기가 타고 있는 버스 안에서 공교롭게 맞닥뜨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사연이 소설 전반을 가득 수놓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멋쟁이 중 단연코 최고인 어느 친구의 조언을 매우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있는 이 신비로운 인물과 다시 조우하게 될 것이다(......) (<문체 연습>, 36쪽)

허세를 떨며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드디어 흩어지기 시작하는 시각, 나는 S선 저 구불구불한 노선에 맞서고 있는 암소 눈의 위풍당당한 어느 버스에 쏜살같이 빠른 화살 모양으로 잽싸게 올라타고 말았다. 전투의 길목 위로 드리운 인디언 전사의 정확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는 어떤 젊은이의 출현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의 목은 다리가 날렵한 기린의 것보다 길었고, 문제 연습 한 편의 주인공이라도 된다는 듯이, 베베 꼰 장식 줄을 두른 말랑말랑한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문체 연습>, 56쪽)


나는 고발한다
여러분, 내가 어떻게 고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고발하고자 한다,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고 토끼 소굴처럼 바글바글한 S선 버스를. 나는 고발한다, 정오라는 시간과 플랫폼의 폼을. 나는 고발한다, 이 젊은이의 젊음과 그의 목 길이,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그가 모자 주위에 두르고 있던, 하나가 아닌 리본의 실상을(......) (<문체 연습>,140쪽)

단카
버스가 오네
재즈 모 청년 타니
어이쿠 충돌
차후 생라자르 앞
이제 단추가 문제 (<문체 연습>, 93쪽)

집합론
S선 버스에 앉아 있는 승객을 집합 A로, 서 있는 승객을 집합 D라고 간주한다. 어떤 정류장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집합 P가 있다. 또한 버스에 오르는 승객 집합 C가 있다(......) (<문체 연습>, 91쪽)

게임의 규칙
이 게임은 주사위 두 개와 (접이식) 놀이판 한 개로 진행한다.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려 8과 4가 나오면 S선(84번) 버스에 오른다. 1과 7이 나오면, 17번(몽소공원)으로 간다. 이 외에는 만원이므로 1번(대기 번호)으로 가고, 이 외에는 포르트샹페레로 간다. 콩트르스카르프에서 되돌아온다. 7과 3이 나오면, 73번(목이 긴 젊은이)으로 가거나 37번(줄을 두른 모자)로 간다(......) (<문체 연습>, 146쪽)

다음 문제를 풀어보시오
조건은 다음과 같다.
a) 축약하여 문자 S로 지칭되는, 소위 버스라 일컬어지는 운송수단 하나;
b) 전술한 버스의 후부 승강대;
c) 이 버스에 실린 호모사피엔스의 대표자 일정수; 이중에서 선택한다(......) (<문체 연습>, 148쪽)


옮긴이의 해제에서는 이 <문체 연습>을 ‘에세이도 소설도 단편도 모음집이라고도 할 수 없고 콩트라고 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것도 아니며 ‘흔히 말하듯 누보로망의 실험적 글쓰기’라고 하기에도 뭔가 부족하거나 과도하다고 느껴지는 글이라고 지적한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이 책이 지금 알라딘에서는 ‘소설/시/희곡’장르로 분류되어 있던데, <문체 연습>은 그 모두가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아니기도 한 참으로 독특한 책이다.

레몽 크노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쓰기를 시도했을까?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오른다. 크노는 “내가 <문체 연습>을 쓰게 된 것은, 실제로 그리고 아주 의식적으로, 바흐의 음악, 정확하게 말하자면, 플레옐관館에서 열린 연주를 회상하면서였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처음에 이 열두 편의 에세이에 <정십이면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 이 아름다운 다면체가 열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열 두 개의 얼굴, 여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앞서 내가 사례로 든 ‘당사자의 시선’, ‘다른 이의 시선’, ‘객관적인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문체는 곧 시선이다. 이 <문체 연습>의 99가지 색다른 문체 시도는 하나같이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나를 비롯해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문학 작품을 읽는 이유는 바로 그 다른 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위함이 아닌가? <문체 연습>은 문체가 곧 하나의 시선임을 증명하면서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독자에게 전한다.

옮긴이는 해제에서 크노의 이런 글쓰기가 ‘문학 전통 속에서 꾸준히 진화하며 고유한 역사를 갖게 된 문체, 아직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무형식의 문체, 문어보다는 입말로 자주 실현되는 문체,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만 문학의 언저리에서 좀처럼 진입하지 못하는 문체, 사라진 문체,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폐기될 위험에 처한 문체, 백지에서 벗어나 목소리로 발화되는 문체 등을 하나의 테이블 주위에 불러 아흔아홉 개의 의자 위에 앉힌다’고 말했다. 이 문장에서 문체를 시선으로 바꿔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크노는 자신의 이런 글쓰기를 일컬어 “사람들은 여기서 문학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고자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전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도는 순수한 “문체 연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어쩌면 고루하고 여러모로 녹슨 문학에서 문학을 잘라내는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문체 연습>, 157쪽) 말한다. 그의 말처럼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된 즐거운 문체 연습은 기존의 고루한 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 새롭게 보는 방식을 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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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0-12-09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리뷰로 만난 책들은 모두 읽고 싶지요. 이 책은 더욱!

잠자냥 2020-12-09 10:1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정말이지 문학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읽으면서 감탄할 책이라고 믿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0-12-0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도를 한 것 자체가 신기하네요. 저라면 상상도 못했을텐데요. 저는 살면서 점점 더 제가 얼마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가를 깨닫게 돼요. 문체 연습이 의도였다니.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은 따로 있는가봐요.

잠자냥 2020-12-09 10:3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대부분 작가들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면 자기 문체를 고집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시도를 한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99가지를 만들어냈어요! 다락방 님 레몽 크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사람은 글을 쓸수록 달필가가 된다.˝ 많이 쓰세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0-12-09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도서관에서 빌릴 예정입니다.

얼마나 재밌으려나... 쵝오의 낚시꾼 !!!

<레닌의 키스>는 찾아 두긴 했는디.

잠자냥 2020-12-09 10:46   좋아요 0 | URL
오, 아직 도서관이 문 (다시) 안 닫은 모양이군요!
레삭매냐 님에게도 흥미로운 책이되길 바랍니다!

Falstaff 2020-12-09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범대학 다니는 후배 아이들이, 약기略記 비슷한 걸, 버스에서 만난 사람에 관한 작문을, 글쎄 중간고사 시험문제로 내 준 교수가 있다고, 당시 복학생이었던 제게 신이 나서 떠들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선생은 심지어 시험지에 ˝은사시나무 이파리를 투명 테이프로 붙여라˝는 문제까지 냈답니다. 그이가 오탁번 선생이었군요. 아, 오래 전입니다.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집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0-12-09 13:09   좋아요 0 | URL
오오오, 아주 재미난 문제입니다. ㅎㅎ 수업도 알찼을 거 같네요.
 
레닌의 키스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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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서 많이 읽지는 않았다. 국가 체제가 특수하다 보니 그런 상황 아래 탄생하는 문학작품도 왠지 어떤 종류일지 뻔해 보인달까. 체제를 찬양하거나(그런 작품은 사실 다른 나라에까지 소개될 리 만무하겠지만), 완전히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아예 체제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옌롄커의 <레닌의 키스>는 어느 쪽일까. 이 작품을 쓰고 TV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옌롄커가 이 책을 언급했는데, 직업군인이었던 그가 군대에서 쫓겨났다고 하니, 어떤 작품일지 가히 짐작이 간다. 읽다 보면 체제 비판을 이렇게 해도 될까 싶을 만큼 독한 구석이 있다. 다른 설명 필요 없이,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인민공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느 마을 이야기라고 하면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이 책의 원제는 ‘수활(受活)’이다. 이 제목 그대로, 한자를 병기해 우리말로 옮겨도 선뜻 그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니 원제 그대로 서구에 소개했다면 누가 알아들으랴. 물론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해 몇 장 넘기지 않고 ‘수활’의 의미가 나온다. ‘수활(受活)’ 즉, ‘서우훠’는 중국 북방 방언으로 허난성 서부 바러우산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즐거움, 향락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바러우산맥에서는 특히 ‘고통 속의 즐거움’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인민공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는 ‘서우훠’마을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의 프랑스어판 번역자가 붙여, 유럽과 영미에도 소개된 <레닌의 키스>라는 제목도 꽤 그럴듯하다. 아니, 중국에서 왜 레닌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이 작품에서 레닌은 아주 큰 역할(?)을 한다. <레닌의 키스>는 이 두 가지 이야기, 즉 인민공사라는 거스를 수 없는 국가 체제를 벗어나려는 어느 마을과 ‘레닌’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아주 상징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우훠마을은 좀 특이하다. 세 현이 교차하는 바러우산맥에 자리해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최소 십 여리가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은 명나라 때 조성, 맹인과 절름발이, 귀머거리들이 잔뜩 모여 살기 시작했다. 장애인이 아닌 장성한 사람들은 짝을 찾아 모두 외지로 나갔고, 여자들 또한 전부 외지로 시집을 갔다. 그러다 보니 바깥세상의 장애인들은 마을로 들어오고 마을의 ‘온전한 사람들’은 모조리 밖으로 나가, 현재는 장애인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이런 상황이 이어졌지만 마을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느 군, 어느 현에서도 서우훠마을을 수용하려 들지 않았다. 한마디로 서우훠는 세상에서 잊힌, 세상 밖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 ‘마오즈’라는 전설적인 인물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현재 할머니가 된 마오즈는 서우훠마을의 지도자이자,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도 아픈 기억은 여럿 있다. 마오즈는 열한 살에 홍군이 되었고,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가 되어 산길을 가다 계곡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왼쪽 다리가 부러져 지팡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바러우산맥을 지나다 한 석공에게 구조되어 그가 살던 서우훠마을로 함께 오게 된 것이다. 그 석공과 결혼해 이 마을에 정착하지만 혁명에 참여했던 그녀는 이 궁핍한 마을에서 숨죽이며 사는 세월이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다. 세상과 단절된 채 농사만 짓던 마오즈는 어느 날 다시 혁명의 바람이 불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자신이 마을을 이끌어 혁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앞장서서 인민공사에 가입한다. 그런데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 칠순 노인이 된 그녀는 왜 이제는 인민공사를 퇴사하겠다고 애를 쓰는 것일까. 게다가 거의 반평생을 그 일에만 매달린 것 같다. 이 책의 한 가지 재미는 이렇게 서우훠마을과 마오즈 할머니에 얽힌 사연을 따라가면서 중국의 체제가 지닌 모순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점에 있다.

마오즈 할머니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류잉췌’, 즉 류 현장이 있다. 그는 중국에 대기근이 닥쳤던 1960년에 태어났으나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이다. 오갈 데 없는 그를 사회주의교육학교 선생이 양자로 입양하면서, 그는 철저히‘사교의 아이’가 되어 어릴 적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 정치, 철학 등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양아버지가 알려준 출세의 비밀을 깨우친 그는 온갖 수단을 써서 관료의 길에 접어들어 빠르게 현장이 된다. 이제 그는 더 큰 꿈을 꾼다. 여전히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솽화이현. 그곳에는 공장도 광산도 없다. 그런데 산이 좋고 물이 맑으니 관광산업을 발전시키자는 것이 류 현장의 생각이다. 베이징에는 마오주석 기념관을 구경하러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도 자금을 마련해 러시아에 가서 레닌의 유해를 사오는 것이다. 레닌의 유해를 솽화이현 훈포산에 안치하면 현의 관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할 테고 현도 순식간에 부유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일개 현장이 아닐 것이고 부위원장이나 부서기 정도도 아닌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다. 세계적인 풍운아가 되어 있으리라!!! 이것이 류 현장의 포부이자 참으로 원대한 계획이었다.

레닌의 유해를 사오는 이 엄청난 기금은 어떻게 마련할까? 뜻밖에도 류 현장은 서우훠마을 사람들의 특기랄까 신묘한 재주를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서우훠마을 묘기공연단을 조직해 세계 방방곡곡에 돌아다니며 공연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공연 입장 수입으로 레닌 유해 구매에 쓸 거액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아니, 그런데 서우훠마을은 장애인만 모여 산다는데 무슨 묘기인가 싶다. 이 마을에는 현재 주민 ‘백구십일 명 가운데 어른 아이 합쳐서 맹인 서른다섯, 귀머거리 벙어리 마흔일곱, 절름발이 서른셋. 한쪽 팔이 업거나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간 사람, 손가락 하나가 더 있는 사람, 키가 자라지 못한 사람 등 여기저기 불편하거나 모자라거나 불편한 사람들도 수십 명’이다. 그런 그들이 보여주는 묘기란 외다리로 빨리 달리기, 귀머거리 마 씨 귀에 대고 폭죽 터뜨리기, 외눈박이 외눈으로 바늘 꿰기, 앉은뱅이 아줌마 나뭇잎에 수놓기, 맹인이 예민한 귀로 소리 알아맞히기 등이다. 과연 이걸로 공연이 될까, 사람들이 몰려올까 싶은 걱정스러운 것 투성이다. 자, 이 묘기단이 그래서 흥행에 성공하는지 어떤지는 직접 보시라. 레닌의 유해를 사오게 되는지도.



이제 해방이 되어 공산당과 마오주석이 가장이 되었다고요, 집집마다 하나로 합쳐서 농사짓는 걸 호조조라고 불러요. 여러 호조조를 한데 합친 것은 합작사라고 한대요. 저는 우리 서우훠마을을 합작사에 가입시켜 각 가구를 하나로 조직한 후 함께 농사를 짓고 수확하며 양곡을 분배하게 할 생각이에요. 저는 서우훠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합작사에 가입해서 서우훠 사람들이 천당의 세월을 보낼 수 있게 할 거예요. (<레닌의 키스>, 227쪽)


한때 혁명을 꿈꾸고 현 정부의 여주석이나 현장이 됐을 거라 당차게 말하던 젊은 날의 ‘마오즈’- 그녀는 인민공사에 마을을 가입시킬 때 마을 주민들에게 천당의 세월을 약속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되어서는 반혁명주의자가 되어 인민공사 퇴사만을 자신의 남은 생의 가장 큰 과업으로 삼고 있다. 그 어느 현에도 속하지 않고, 정부와 국가에서 나 몰라라 하던 시절의 서우훠마을은 몸이 불편한 이들만 모여 살았어도 말 그대로 기쁨이 넘쳤다. 고통 속의 기쁨, 즐거움이랄까. 그런데 혁명을 거쳐 인민공사에 가입한 후 강철재앙, 대흉년, 문화대혁명 등의 풍랑에 휩쓸리며 서우훠마을 사람들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고단해지기만 한다. 아니 처절하다시피 할 정도로 망가진다. 장애가 없는 ‘온전한 사람들’이 마을을 찾아와 수탈하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그 잔혹한 모습에는 아연해질 뿐이다. 그들을 과연 정말 온전한 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오즈 할머니가 꿈꾸던 혁명의 이상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났다. 한때 사회주의 사상의 아버지라 떠받들어졌어도 죽은 레닌의 유해는 러시아에서도 처치곤란, 골칫거리이다. 그러니 중국의 일개 현장이 마을 관광산업을 위해 그의 유해를 유치하려는 야심까지 품지 않는가. 신해혁명, 5·4운동, 문화대혁명 등등 혁명으로 이어진 중국 근현대사. 그런데 혁명은 정말 중국 인민에게 천당 같은 세월을 살게 해주었는가? 서우훠사람들은 묻는다. “제가 평생 할머니 말씀 잘 들었잖아요. 하지만 좋은 세월이 한 번도 없었어요.”(203쪽), “그 천당의 세월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줘요.”(424쪽). 이 절규는 아마도 옌롄커가 중국에 묻고 싶은 말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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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04 1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치인들은 어디에서나 천당 같은
시절을 약속하지만 지상에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덤으로 알려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레닌의 키스> 제목만 보고 대뜸
샀는데 이거이 분량이 제법인지라
어딘가에 내팽겨쳐 두었네요 이론.

발저의 <산책자>처럼 당장 찾아내서
주말 내내 읽고 싶다는 고런 생각이
잠시 동안 들었습니다.

역시 책은 사거나 빌려서 읽는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책을 읽는 거군요.

잠자냥 2020-12-04 17:31   좋아요 2 | URL
ㅎㅎㅎ 맞습니다. 이 지상에 어디 천당 같은 세월이 존재하겠습니까. ㅎㅎ

책 잘 찾아서 주말에 읽으실 수 있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