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아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9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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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쓰려면 그전에 먼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 젊음이 꽃필 무렵 고약한 마음의 병에 걸렸던 나는 그 삼 년 동안 내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상처 입은 것이 나 혼자뿐이라면 굳이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들을 위해 쓰련다. (<세기아의 고백>, 9쪽)


뮈세의 <세기아의 고백>은 첫 문장부터 심금을 울린다. 재능 넘치는 시인이자 진정한 낭만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단 하나의 소설 <세기아의 고백>에서 열정적이면서도 때로는 광기 어린 사랑을 시적 언어로 절절히 고백한다. 뮈세의 소설을 ‘고백’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작품은 뮈세 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서두에서 ‘내가 쓰는 것은 내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기아의 고백>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때 사람들은 모두 뮈세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더욱이 그 절절한 애정의 대상은 조르주 상드임을.

<세기아의 고백>은 알프레드 뮈세와 조르주 상드, 이탈리아인 의사 파젤로와의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 낭만주의 4대 시인으로 꼽히는 뮈세는 십대 시절부터 당대 최고 문인들과 어울리며 천재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열렬한 사랑을 꿈꾸던 그는 1833년 여름, 만찬 자리에서 상드를 처음 만난다. 뮈세는 스물세 살이 되기 전이었고, 서른의 상드는 이혼 뒤 두 아이와 함께 파리에서 문필 생활을 시작,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지고 함께 베네치아로 떠난다. 그러나 기대로 가득했던 여행에서 뮈세와 상드는 번갈아 병석에 눕게 된다. 먼저 상드가 몸져누워 베네치아의 젊은 의사 파젤로의 간호를 받는다. 상드가 회복한 뒤에는 뮈세가 병이 나고 그사이 상드는 파젤로의 연인이 되고 만다. 절망과 질투에 빠진 뮈세는 홀로 귀국해, 거의 4개월 동안 온종일 방에 들어앉아 울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두 사람은 화해하려는 노력에도 결국 영원히 헤어지고 만다. 뮈세는 <세기아의 고백>으로 이 사랑의 내막을 폭로했고, 상드는 <그 여자와 그 남자>라는 책으로 자신을 옹호했다. 그렇다고 <세기아의 고백>이 뮈세와 상드의 사랑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조르주 상드를 모델로 한 ‘브리지트 피에르송’은 상드와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

19세기 초. 프랑스혁명에서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사회 변동은, 붕괴하는 구세대에게는 환멸과 비애감을, 앞날을 모색하는 신세대에게는 불안과 초조감을 드리웠다. 이 무렵 청년들을 괴롭힌 우울증과 염세적 고독감을 뮈세는 이른바 세기병(世紀病)이라 말한다. <세기아의 고백>의 주인공 옥타브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즉 ‘세기아’이다. 이제 막 꽃피어나기 시작한 청춘인 그는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친구와 연인 사이가 아닌가! 믿었던 애인이 배신,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심지어 애인이 또 있다! 심하게 마음을 다친 옥타브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듯 방황하고 타락한다.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던 여인이었기에, 단 한순간도 그녀의 배신을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배신은 더없이 치명적이다. 더는 ‘그녀를 사랑할 수도,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고 살 수도’ 없는 그는 차라리 인간 사회를 믿지 않고 ‘그 안의 모든 사람이 내 연인과 흡사한, 악과 위선의 소굴’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거기서 떨어져 나와 완전히 고립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실연에 빠져 상심한 채 사회와 담쌓고 지내는 옥타브를 보다 못한 데주네는 선배로서 그에게 온갖 사랑의 충고를 한다. 그가 보기에 옥타브는 소설가들과 시인들이 그려낸 사랑, 이 세상에서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사랑이 아닌,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것 같다. 그런 옥타브에게 데주네는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사랑’을 믿더라도 실제로 이루려고는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절도 있는 사람이 술을 마시듯 사랑을 마시게, 주정뱅이가 되지는 말게. 연인이 진실하고 충실하다면 그 이유로 사랑하게. 충실하진 않지만 젊고 아름답다면, 젊고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게. 상냥하고 재기발랄하다면, 더 사랑하게. 만일 그녀가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했지만 오직 자네만 사랑한다면, 그녀를 더 사랑하게. 사람이 밤마다 사랑받는 것은 아니라네. (<세기아의 고백>, 56쪽)


옥타브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과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그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온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파리 근교 시골에 머물던 옥타브는 그곳에서 바로 운명의 여인, ‘브리지트 피에르송’을 만난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일찍 남편을 잃은 여인, 고결한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의 칭송받는 순수함의 결정체인 브리지트, 그녀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고 사랑하게 된다. 이때부터 옥타브와 브리지트로 변형되어 뮈세와 상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했던 상드와 달리 브리지트는 더없이 순수하고 고결한 여인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뮈세가 상드에게 바랐던 여인상일까? 어쨌든 옥타브는 그녀와 단둘이서 걷는 순간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외친다. “신을 찬양하라! 너는 아직 젊고, 살아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

그러나 어렵사리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이지만, 그 진행은 순탄하지만은 않다. 첫 번째 사랑에서 실패한 옥타브이기에, 그 사랑의 그림자가 쉽사리 걷어지지 않는다. 의심과 질투, 불안이 그의 마음속에 도사린다. 첫사랑 연인을 완벽하게 믿었으나 그 신뢰가 깨져버리자 두 번째 사랑에서는 연인을 100% 믿는다는 게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녀를 믿다가도, 때때로 질투와 의심이라는 망상이 그의 뇌리를 파고든다. 심지어 이 어리석은 남자는 브리지트가 자기에게 몸을 허락한 사실을 갖고도 자신을 괴롭힌다. 의심에 빠진 모든 사람들처럼 그 또한 ‘감정과 생각을 따로 떼어놓고는 사실과 다투고, 의미 없는 말에 집착’하면서 ‘사랑의 대상을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브리지트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책을 읽을수록 정말 이 여자가 그토록 순수하고 칭송받아 마땅한 여인일까?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물론 철저히 옥타브 관점에서 그려졌으므로 <세기아의 고백>에서 묘사된 브리지트의 모습을 100% 믿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끝부분에 이르러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는 그녀는 대체 왜 그런 걸까, 왜 이런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

브리지트의 말처럼 ‘사랑은 행복이거나 고통’이다. ‘사랑이 행복이라면 사랑을 믿어야’한다. 그러나 의심과 질투와 망상으로 깨져버린 이 사랑은 두 사람이 아무리 애정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더는 지속하기 어려우리라. 그들, 아니 옥타브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행복’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다. ‘신뢰로써 사랑하는’ 그 행복을. 브리지트의 예언처럼 이 어리석은 청년은 이제 영원히 누군가를 완벽하게 믿고 사랑하는 순수한 사랑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저 ‘눈에 보이고 손가락으로 만져지는 사랑만’이 그에게 남겨지리라. 그런데, 이 모습은 오늘날 누군가를 사랑하고, 연인이 되고 연애를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의 모습과 닮았다. 100% 완벽하게 연인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데주네의 충고처럼 ‘완벽함’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세기아의 고백>은 ‘아름답긴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꿈꾸며 오늘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이들에게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인간에게 사랑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사랑은 또 어떠한지.


사는 것, 그렇다. 존재하고,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임을 강하게, 깊이 느끼는 것, 그것이 사랑의 첫 번째 혜택, 가장 커다란 혜택이다.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다. 어떤 사슬로, 어떤 불행으로, 그리고 나는 세상이 어떤 혐오감으로까지 사랑을 둘러싸고 있다고 말할 것인데, 사랑은 그것을 변질시키고 타락시키는 편견의 산 아래 푹 파묻혀 있어, 사람들이 모든 추악함 너머로 이끄는데도 불구하고 사랑, 강인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하늘에 태양을 매달아 놓는 것만큼이나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하늘의 법칙이다. (<세기아의 고백>,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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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8
앙리 드 몽테를랑 지음, 유정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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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표지 이미지와 <소년들>이라는 제목에서 처음에는 짐작 가능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몇 쪽 넘겼을 때는 살짝 수다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젠체하는 느낌이랄까, 기존 소설과는 색다른 시도들도 어쩐지 잘난척하는 것 같고. 어쨌든 처음에는 썩 좋지는 않았다. 가톨릭 학교 파르크 콜레주, 우리나라로 치면 중고등학교를 합친 콜레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역시 예상대로 흘러간다. 때로는 악마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천사 같기도 한 열네 살에서 열여섯 살 소년들. 그들의 당돌하고도 열정적인, 순진무구하지만 어느 땐 지나치게 약삭빠르기도 한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니 슬쩍 웃음이 나온다. 첫인상이 딱히 좋지 않았던 사람과 몇 시간을 함께 지내다보니 좀 더 대화를 나눠도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소년들>을 3분의 1쯤 읽었을 때의 심정이다. 그러다가 나는 중반 이후부터 완전히 이 책에 빠져들었다. 아, 이런 작품이 이제야 찾아왔다니 안타까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 이 나이에 읽을 수 있어서 어쩌면 이 작품을 이렇게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안도했다. 사랑, 그렇다 사랑.


파르크 콜레주 철학반 우등생인 알방은 학교를 대표하는 기구인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뽑힌다. 이 아카데미 소속 엘리트 학생들은 선배가 자신이 점찍은 후배를 돌보는 ‘보호 그룹’이라는 활동을 시작한다. 알방은 몇 년 전부터 좋아하던 두 살 아래인 세르주를 자신이 보호할 후배로 점찍는다. <소년들>은 알방과 세르주의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 즉 콜레주 학생들, 콜레주를 이끄는 원장 신부, 세르주와 남다른 관계인 드 프라츠 신부, 알방의 어머니 등을 중심으로 좀처럼 잊기 어려운 강렬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알방과 세르주의 관계는 작가인 몽테를랑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알방처럼 콜레주 철학반 학생이던 몽테를랑은 후배인 필리프 지켈과 특별한 우정을 나눴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바 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곱씹으면서 무려 50여 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니 <소년들>은 몽테를랑 필생의 역작이자 얼마쯤은 자서전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작가는 ‘자전적 요소는 거의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나이 열다섯 살 반쯤 되면 사랑에 빠지는 덴 이골이 붙는다.’ 이런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소년들>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랑’이다. 이 작품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온다. 심지어 파르크 콜레주의 원장 신부가 학교에 세운 규칙은 ‘많이 사랑하기, 많이 포옹하기, 많이 기도하기’일 정도이다. 그는 진정한 애정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 ‘사랑받는 자는 어디서든 사랑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그게 인간 감정의 움직임이라고 여긴다. 원장 신부의 이런 가르침(?)을 떠받들기라도 하듯이 이 학교 학생들, 특히 ‘보호 그룹’에 속한 소년들은 하나같이 선후배 커플을 이뤄 서로 열렬히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 주인공인 알방과 세르주는 좀 더 특별하다. 


알방은 그야말로 세르주에게 미쳐있다. 똑똑하고 집안 좋은 그에 비해 세르주는 학교의 문제아다. “아,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세르주에게 늘 붙어 다니는 말이다. 이상야릇한 작은 괴물, 학교의 말썽꾸러기 세르주는 끊임없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짓을 찾아다니고, 교사들과 자습 감독이 싫어하는 골칫덩이이다. 품행 점수가 이십 점 만점에 오 점인 학생이자, 학교에서 모두가 견딜 수 없어하는 아이. 알방이 사랑해마지 않는 세르주 수플리에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알방은 왜 이런 세르주를 사랑할까? 알방은 ‘선을 향해서든 악을 향해서든 무차별적으로 치우치는 어떤 막연할 열정’을 지닌 소유자로 정의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그가 보기에 세르주에 대한 이런 평가와 대우는 정당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연약하고 가난한 소년에게 그는 한없는 사랑과 연민을 느끼고 그를 좋은 길로 이끌고 싶어 한다. 사랑에 빠진 알방에게 세르주는 완전히 특별한 존재다. 세르주에게는 특별한 냄새가 났다. ‘어디서 나는 건지 알방이 평생 궁금해 한 일종의 향기’. 세르주를 사랑하는 알방은 오후 다섯 시 무렵이면 어스름한 저녁 시간의 도움을 받아 그를 더 잘 떠올리기 위해 일부러 램프를 약간 기다렸다 켜곤 한다. 이렇게 사랑에 빠진 소년들의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는데,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야 만다. 


사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으리라. 가톨릭 학교에서 동성 친구 사이의 ‘사랑’을 용인하고 허락한다고? 공공연하게 소년들끼리 사랑한다고? 하는 생각들. 물론, 원장 신부가 ‘더 많이 사랑하기’를 학교 규칙으로 세웠듯이 선후배끼리 서로 보호하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일은 어느 정도는 허용된 일이었다. 단 그것은 서로 영혼의 성장을 돕는 사랑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보호 그룹’ 학생들은 신부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에서 육체적 사랑의 쾌락도 마다하지 않는다. 알방과 세르주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낭만적’이라는 말로 파르크에서 일어나는 이탈을 관대하게 보아주던 학교 지도자들도 알방과 세르주의 어떤 사건 앞에서는 더는 그 일탈을 너그러이 넘어가주지 않는다. 그리고 알방은 세르주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학교를 떠난다. 아니, 퇴학당한다. 그렇게 한 시절이 간다.


그런데 알방의 사랑이 벼랑으로 내몰리게 되는 데는 ‘그저, 무얼 하든지 간에 항상 청소년기와 유년 시절을 망쳐버리는 어른들의 속성’이 큰 역할을 한다. 늘 사랑하라고 사랑을 권하던 원장 신부의 비겁함, 세르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알방에게만 유독 가혹한 처벌을 내린 드 프라츠 신부 등은 처음부터 ‘특별한 우정’은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고 줄곧 눈감아주다가 자기들이 마음 내키는 때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알방과 세르주가 며칠 동안 달고 다닌 황금 단추 배지가 어른들에게는 일종의 ‘약혼반지’처럼 보인다. 알방의 어머니 또한 아들과 세르주와의 관계를 불편하게 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른들로 인해 망가진 세계, 내몰린 사랑. 알방과 세르주는 이대로 영영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알방이 퇴학당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이 책 중반까지에 해당한다. 이때 나는 분노와 함께 가슴이 아파왔다. 귀여운 녀석들, 하면서 내내 웃다가 어느 순간 분노하고 있던 것이다.


그 뒤의 이야기부터는 거의 비통함과 서글픔 같은 것들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알방은 어머니가 바라던 남자가 된다. ‘보호받는 후배들’의 명단은 곧 다른 명단,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같이 춤을 추었거나 또는 (사회적 이유로) 반드시 춤을 추어야 할 ‘여자들의 명단’으로 대체된다. 원장 신부의 경박함도, 드 프라츠 신부의 배신도, 어머니의 훔쳐보기도 모두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이 한마디로 무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고 그런 인생. 인생이 다 그렇지! 더더군다나 알방은 남자가 남자를 욕망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젠 비상식적이고 괴상망측하고 혐오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어린 소년들에게서 여자로 옮겨가기, ‘많은 사춘기 소년들이 경험하는 이 통과의례’는 일종의 성숙을 의미했고, 알방 또한 그렇게 그 시기를 지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정말, 그럴까?


파르크, 버릇없고 비겁하고 도벽이 있고 속물근성에 불경스럽고 무절제하고 위선적인 소년들이 있는 파르크는 창부의 집인 동시에 천사들이 옮겨온 집이었다. 이후 어디에서도 파르크에서 경험했던 관대함과 강렬함과 장점을 그는 보질 못했다. 자신에게서도, 주변에서도 다른 존재를 ‘더 훌륭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을, 다른 존재를 위해 자기 인생의 가장 귀한 보물을 희생하려 하는 욕망을 단 한 번도 다시 보지 못했다. (<소년들>, 439쪽)


알방이 학교를 떠날 무렵 드 파르츠 신부는 그에게 ‘스무 살쯤 되면 이 모든 일을 비웃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곧 스무 살을 앞둔 알방의 삶은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알방은 그럼에도 종종 세르주의 그 ‘과일 같은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어떤 날에는 약간 상한 과일 같고, 저녁나절 거리의 어둠 속에서는 환하거나 반쯤 밝아지는 과일 같은 얼굴’을……. 전적으로 순수한 애정을 바쳤던 대상, 절교가 눈물 너머의 것이기 때문에 결코 헤어지던 순간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대상. 그 ‘강렬한 추억을 남긴’ 자는 바람조차 건드릴 수 없는 서늘한 저 깊은 곳에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파르크 콜레주는 알방에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잃어버린 낙원이자 청춘이며 순수였고, 어떤 존재를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공간이다. 그러므로 알방이 세르주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서도 울컥 치솟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잃어버린 낙원과도 같은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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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기질
유진 오닐 지음, 백승진 옮김 / 지앤유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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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을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 그로 말미암은 정신적 몰락과 붕괴 등을 그리는 데 탁월한 유진 오닐은 <시인의 기질>에서도 또 한 번 그 재능을 발휘한다. <시인의 기질>에도 한 가족이 등장한다. 이제 마흔 다섯 살인 ‘코닐리어스 멜로디’와 그의 아내 ‘노라’, 그들의 딸 ‘사라’가 이 희곡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말처럼 이 가정의 문제는 무엇일까? 물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단란한 가정일 수도 있지만 어찌 유진 오닐의 작품에서 그러기를 바라겠는가. 그리고 이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1828년 7월, 보스턴에서 몇 마일 떨어져 있는 어느 마을,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해온 코닐리어스 멜로디는 여관 및 술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때 이 여관은 역마차들이 지나다니며 번창했으나 노선이 끊기면서 몇 년 동안 방치된 상태이다. 손님도 거의 없는 이 퇴락한 여관 식당에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면서 이 작품은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보건대 여관 주인인 멜로디에게는 문제가 좀 있어 보인다. 술을 좀 좋아하는 것 같고, 지나간 세월에 얽매여 사는 인물인 듯하다. 이게 뭐 그리 큰 문제인가 싶을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게 곧 드러난다. 


두 사람의 대화에 이어 멜로디가 모습을 나타낸다. 그는 한때는 아주 잘생겼지만 이제는 피폐해진 얼굴이 그의 방탕한 생활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유진 오닐은 멜로디를 ‘적의를 품은 바이런류 영웅의 얼굴로 입은 오만하고 관능적이며 코는 조각을 해 놓은 듯’하다고 묘사한다. 또한 그의 매너는 과장돼 있어서 실제 그의 모습이 아니라 어떤 역할을 과장해서 연기하고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특별하고 인상적인 뭔가가 있는데, 반도전쟁 당시에 영국 귀족이 입었던 스타일의 고가의 우아한 맞춤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는 입만 열면 장교와 신사의 품격을 운운하면서 바이런의 시를 낭독한다. 퇴락한 여관에서 아침부터 술기운을 풍기며 영국 귀족 옷을 입고 바이런 시를 읊는 사나이라니,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신사와 귀족의 품격을 운운하는 이 기묘한 사나이의 비밀(?) 아닌 비밀은 그의 아내 노라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벗겨진다. 마흔인 노라는 세월의 흔적으로 빛바랬지만 젊었을 때는 꽤 아름다웠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그녀는 신사병에 걸린 변덕쟁이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 아침부터 전전긍긍이다. 남편은 술이 들어가면 너그러워졌다가 불현듯 노라에게 화를 낸다. 그런데도 노라는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고, 또 그를 어떻게 달래는지 아는 것 같다. 멜로디의 지나간 과거를 화려하게 부추겨주고 조금씩 술을 마시게 해주면 되는 것이다. 비록 멜로디로부터 머리에서 스튜 냄새가 난다고 무자비하게 구박을 받을지언정, 허름한 옷차림에 종일 여관 일을 돌보고 오늘은 또 어떻게 외상을 얻을까 고심할지언정 노라는 남편을 받들어 모신다. 마치 멜로디가 자신의 지나간 시절과 바이런의 시를 받들어 모시듯이.


사라는 이런 부모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특히 경제적으로 무능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귀족놀이에 빠져 순종 말을 타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리기만 하는 아빠에 대한 반감은 상당하다. 멜로디가 순종 말을 타고 다닐 때 노라와 사라는 아빠의 축하연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 열기 속에서 땀 흘리며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데도 멜로디는 딸이 귀족적이지 못하다고, 천하고 탐욕스럽다면서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사라가 아일랜드 사투리를 쓰면 무섭게 화를 낸다. 그러다가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흠칫 놀라 진정하고는 한다. 그런 천박한 말을 하면서 사라를 몰아세우는 것은 결코 ‘신사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귀족적이고 신사다워 ‘보일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라는 그런 멜로디를 간파하고도 남는다.

 


사라: 세상에, 오직 환상만이 아빠에겐 현실이야. 그런 동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굉장해. 그런데 내 일을 걱정하면서 아빠의 환상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간섭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술이나 마시고 내 일에는 신경 쓰지 마. 아빠! 아빠는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도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해? 제정신이 아니야. 뭐가 거짓이고 환상이고, 뭐가 사실인지 전혀 분간이 안 돼? (<시인의 기질>, 59쪽)


사라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자 희망이 있는데, 바로 여관 2층에 머물고 있는 사이먼과 결혼해서 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는 것이다. 사이먼은 하버드대를 졸업한 몽상가로 하포드 가(家)의 상속자이다. 오두막에서 홀로 살면서 자연과 하나가 된 삶을 꿈꾸던 그는 사라를 사랑하게 되었고, 몸이 좋지 않아 사라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여관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사이먼의 배경을 아는 사라는 물질과 신분 상승을 꿈꾸며 어떻게든 그와 결혼하려고 애를 쓴다. 사실 사이먼의 집안인 ‘하포드 가(家)’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진 오닐은 1755년부터 1932년까지 거의 200년 동안 하포드 가(家)의 역사를 추적하는 11편의 드라마를 썼다. 하포드 집안 이야기를 통해 그는 미국 자본주의 정신이 타락해 가는 과정과 물질적 탐욕으로 인해 인간성이 어떻게 상실됐는지를 비판하고자 했다. 한 집안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와 얽힌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그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1편의 작품 중 대부분은 유진 오닐이 죽기 전에 불태워 버렸고, 지금은 <시인의 기질> 등 단 세 편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 <시인의 기질>은 하포드 가와 얽힌 멜로디 집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하포드 집안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멜로디 집안은 위기를 맞는다. 사이먼과 사라의 관계를 떼어놓으려고 하포드 가에서 손을 쓰게 되는데, 그로 인해 ‘멜로디’의 환상이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환상이 무너지고 난 뒤의 멜로디는 더없이 처참하다. 더 이상 신사이기를 포기한 그는 딸에게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폭언을 퍼붓는다. 사이먼이 아니라 여관에서 일하는 말로이가 사라의 상대로 적합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너와 말로이는 잘 통할 거야. 사투리도 잘 어울리고. 그는 건장한 동물이지. 너희 둘은 가축우리 같은 집의 진흙 바닥 위에서 소리 지르면서 돼지들과 싸울 무식쟁이 애들을 많이 나을 수 있을 거야.’ 집안에 감도는 이상 기운 때문인지, 멜로디에게 한없이 순종적이기만 했던 노라마저도 남편에 대한 진짜 자기 생각을 사라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노라: 자기 자신하고 자기 자존심 말고는 누군가를 생각해 본 사람이 아니야. 맞아. 빌어먹을 영국의 빨간 군복을 입고 있는 위대한 신사인 네 아빠가 나를 생각한 적은 없었어. 자존심 하나는 대단해! 그런데 그게 허상 아닌가? 더러운 술집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을 잘 속여 먹는 네드 멜로디의 핏줄 아닌가? 아니야! 이런 말 하면 안 돼! 결코 안 돼! 네 아빠는 자신의 환상을 결코 비웃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시인의 기질>,164쪽)


이 가정에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하포드 가와 어떤 일이 있었기에 고고한 ‘신사’였던 멜로디는 그렇게 한순간에 무너졌으며, 또 노라는 왜 그토록 멜로디에 대한 신랄한 발언을 딸에게 하기에 이르렀을까? 멜로디가 보기에 ‘체면을 차릴 줄 알고 몽상가이면서 어수룩’한, ‘시인의 기질이 있는’ 사이먼은 탐욕스러운 사라에게는 ‘식은 죽 먹기’와도 같은 제물이다. 사라는 정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을까? 멜로디가 바이런을 읊으며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그러나 끝내 가질 수 없었던 ‘시인의 기질’을 하포드 집안의 장남인 사이먼은 정말 갖고 있을까? 이 모든 궁금증은 <시인의 기질>을 직접 읽는 독자들만이 알 수 있으리라. 


멜로디가 그토록 아낀 순종 말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환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환상은 살아갈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바이런의 시와 순종 말 한 마리, 잘 다려진 군복. 이런 것들만을 좇던 멜로디의 허세는 한심스러웠지만,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의 모습은 어쩐지 가엾기도 하다. 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환상이 필요한 건 아닐까 싶어지기도 한다. 사람을 살게도 하고 또 때로는 죽게도 하는 환상의 실체가 <시인의 기질>에서는 생생하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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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 - 셰르파, 히말라야 원정대, 두 문화의 조우
셰리 B. 오트너 지음, 노상미 옮김 / 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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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는 ‘어차피 내려올 것을 왜 힘들여 올라가나’ 생각하기도 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물론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는 한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남다른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말하는 이도 있고, 산에서 느끼는 고양된 마음과 심신이 정화되는 듯한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인도나 티베트, 네팔 같은 곳을 다녀오거나 그러기를 꿈꾸며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주로 ‘영적인 구원’ 같은 것들-을 운운한다. 나는 이런 지역, 그러니까 네팔이나 티베트, 인도 같은 곳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안락하고 깨끗한 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도 갠지스 강을 간다고, 네팔이나 티베트를 다녀온다고 내 영혼에 뭔가 기적적인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기대를 품는 것 또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이런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세계의 지붕이자 하늘의 이마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지구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인간의 두 발로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이곳은 네팔과 티베트(중국) 국경에 자리하고 있어 많은 서구인들이 영적인 구원을 꿈꾸며 떠나는 장소가 되었다. 쉽사리 등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남성성을 과시하는 경쟁’의 장이 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은 등반가들이 어떤 동기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인종과 계급, 종교, 젠더 차원에서 다룬다. 기존의 히말라야 관련 책들이 주로 등반에 성공한 서구 등반가들의 관점에서 쓰였다면, 이 책은 등반가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거의 등반은 성공하지 못할 만큼 중요한 존재)인 ‘셰르파’에 주목하여 그들 또한 나름의 복잡한 인생과 의도가 있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산이라든가 등반에 관심이 없던 나였기에 ‘셰르파’는 단순히 히말라야에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현지 가이드나 포터쯤으로 생각했다. 물론 셰르파들은 그런 역할을 한다, 다만 셰르파란 네팔 북동쪽 에베레스트 대산괴 주변의 산과 계곡에 사는 ‘소수민족’ 자체를 지칭한다. 이들은 애초부터 고산지역에서 나고 자랐기에 뛰어난 적응력으로 히말라야 원정대에게 엄청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떤 등반가도 셰르파의 도움 없이 정상에 오른 경우는 없기 때문에 셰르파는 히말라야 등반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서구 원정대나 일본 또는 우리나라 원정대가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들 위주로 구성된 원정대’의 모습이 대서특필될 뿐이지 함께 등반한 셰르파가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실제로는 앞서 말했듯, 셰르파 없이 히말라야 등반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산소통만큼 중요한 존재라고나 할까. 셰르파들은 높은 보수, 개인적인 출세 가능성 등을 이유로 등반에 참여하면서, 물품 운반, 요리와 청소, 루트 개설 등을 담당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셰르파들이 ‘높은 보수’, 즉 돈 때문에 등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초창기 서구 원정대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네팔 당국에 지불해야 하는 돈을 비롯해서 원정대를 꾸리고 셰르파를 고용하는 등의 비용까지 헤아리면 최고 9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이 책에서는 1996년 등반대의 경우 에베레스트산 정상까지 전문가의 안내를 받는 대가로 각자 6만 5천 달러 정도 지불했다고). 이렇게 많은 돈을 지불할 경제적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히말라야 등반은 애초부터 계급과 인종 문제를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부터 시작된 국제 등반가의 대다수는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중상류층 출신들이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해서 비단 서구 원정대만이 아니라 아시아 원정대도 일본 및 한국 등 히말라야에 ‘입장’할만한 경제력을 갖춘 이들로 구성된다(이 엄청난 비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금 활동을 벌이거나 스폰서를 등에 업는다). 한쪽에서는 돈을 들여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등반에 몸을 던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을 도우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목숨까지 걸고 에베레스트에 오는 ‘사히브’(힌두어로 ‘보스’나 ‘주인'을 뜻함. 등반가를 지칭)들을 셰르파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1976년 미국 200주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릭 리지웨이(Rick Ridgeway)와 셰르파의 대화를 보면 극명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니마, 셰르파들은 원정대 일을 좋아하나, 아니면 구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일을 더 좋아하나?”
“아, 셰르파가 돈이 있다면 집에서 마누라와 자식들이랑 있겠죠. 원정대 일은 매우 위험해요. 하지만 그 덕분에 돈을 많이 받으니까요.”
“니마, 등반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우리는 왜 하고 싶어 할까?”
“저야 모르지요. 아시겠지만 셰르파들도 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마 당신네는 돈이 너무 많아 어찌 써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휴가를, 그리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몹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나?”
니마는 웃었다. “글쎄요. 정 우리 생각을 알고 싶다면야, 우리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네들은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7쪽)


이 차이는 사히브나 멤사히브(여성 사히브들을 지칭)로 구성된 서구 원정대와 셰르파 사이에 권력 및 계급 차이를 비롯해 문화차이까지 유발한다. 초창기 등반가들이(현재도 물론) 셰르파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했다. 1920~30년대 서구의 등반가들은 그 무렵 천박한 물질주의에 결여된 ‘영성을 구현’한다는 생각으로 산에 올랐고, 이들은 금욕주의, 신비주의, 도덕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때문에 셰르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셰르파들은 그들의 ‘영성적인 고급 스포츠 게임’의 훌륭한 조력자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근대가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라면 등반은 숭고하고 초월적’이며, ‘근대가 시끄럽고 산만하다면 등반은 평화롭고 성찰적’이다. 또한 ‘근대가 편하고 지루하다면 등반은 어렵고 도전적이며 스릴이’ 있다. 에베레스트의 ‘거기’는 근대의 ‘여기’와 대조되는 지점이었고, 서구 등반가들에게 반근대를 상징하는 히말라야와 ‘거기’에 있는 셰르파들은 에베레스트와 마찬가지로 때 묻지 않은 자연, 순수한 자연, 그렇기 때문에 물질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때문에 서구 등반가들은 셰르파를 ‘아이들처럼 걱정 근심이 없다’ 라던가 ‘극동의 외딴 곳에 살고 있는 이 맨발의 천사들’로 표현하며 그들을 순진무구한 존재로 타자화했다.


초기 사히브들은 셰르파들이 주로 자신들에 대한 충성심에서 등반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고 믿었던 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사히브들은 셰르파들도 자신들처럼 낭만적이고 모험적인 등반 욕구를 가져서 등반을 하는 거라고 믿었다. 이들은 모두 돈에 대한 셰르파의 관심을 최소화하거나 셰르파에게 돈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의문시했다. 그들과 달리 셰르파에게 돈이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0쪽)

셰르파가 등반 관련 일에 뛰어든 주된 이유가 그 일이 지불하는 돈과 그 돈이 수반하는 물질적 만족, 의존관계로부터의 자유, 보다 넓고 보다 국제적인 세계에의 참여 때문이라는 점이 금세 분명해졌다(...) 대부분의 사히브와 셰르파에게 공통되게 돈은 안전, 자유, 평안, 지위, 권력, 너그러움 등을 의미한다. 아마 역사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그리고 현 논의와 가장 밀접한 차이는 많은 셰르파에게 돈이 자유라는 근대성을 사는 수단으로서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반면, 보다 낭만적인 혹은 보다 반근대적인 많은 사히브에게 돈은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타락한 근대성의 일부라는 부정적 의미를 지녔다는 점이다.(<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2~255쪽)


여성 등반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1970년대까지 히말라야 등반은 압도적으로 남성의 스포츠였다. 거의 배타적으로 셰르파들과 부유한 선진국 남자들만 참여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와서야 페미니즘 운동의 등장으로 상당수 여성들이 등반이라는 스포츠에 발을 들였고, 셰르파 여자들, 즉 ‘셰르파니’가 등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의 등장에 남성 등반가들의 반응은 반대하고 적의를 품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등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저자는 이 스포츠가 지닌 남성적인 성격을 감안할 때 히말라야 등반에 참여한 여자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급진적 젠더’라고 말한다. 등반에 참여한 여자들 대부분은 전형적인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장벽을 부수는 일에 어떤 형태로든 의식이나 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혼성 원정대의 유일한 여자로 등반을 하는 사례도 있으며, 여성들로만 구성된 폴란드 K2 원정대도 있었다. 이들은 성차별주의와 가부장주의에 맞섰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등반에서도 남자들은 장악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여자들이 혼성 원정대에 반대했고, 등반에서 리더십과 독립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예 남자와 등반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미국 여성 스테이시 앨리슨(Stacy Allis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남성 친구, 남성 교사, 남성 등반 동료가 있었다. 우리는 남성들과 등반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함께한 등반은 그들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전에는 남성들만 올랐던 곳을 등반하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서구 여성 산악인이 등장하면서 히말라야 등반에는 성적 모험, 성적 정화, 금욕주의라는 복잡한 역학이 만들어졌고 사히브와 셰르파 두 남성 집단의 만남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욕망관을 빚어내기도 했으며 ‘가부장적 위계’는 서구 남성 등반가나 셰르파 남성 모두가 공유한 권력 질서였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런 사례들을 통해 여성 등반가들이 혼성 원정대에서 저항하고자 했던 대상은 성적 파트너, 연인, 혹은 남편으로서의 남자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가부장’ 스타일의 남자들, ‘아버지’로서의 남자들, 여자들은 장악하려 하고 어린애처럼 느끼게 만들려 하는 남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말라야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원정대는 물론 셰르파와 포터 등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에서 목숨을 잃는다. 눈 폭풍에 휩쓸리기도 하고 고산병으로 죽기도 하며, 잠깐 졸다가 그대로 동사하기도 한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은 어쨌든 위험 상황이므로 죽은 동료를 그냥 둔 채로 남은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와야 한다. 나중에 시체를 수습하는 일 또한 위험하며 많은 비용이 든다. 그래서 히말라야에는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시체들이 산을 오르는 등반가들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위험한 활동에 돈을 지불하고 참여하는 ‘모험 여행’의 폭발적 증가와 여피족의 출현과 함께 등반은 더 이상 서구 부르주아 ‘근대’ 문화 내의 반문화적인 흐름의 일부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아닌, 다양한 국적의 아시아 등반대와 여행자가 참여하는 거대한 관광지가 되었다. 저자는 셰르파를 폄하하고, 종속시키고, 착취하는 일부 기업형 등반대의 급증으로 에베레스트의 질서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우려한다. 어떤 이들은 산에 사람이 꾀기 시작하면서 에베레스트는 변질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베레스트는 언제나 ‘거기’에, 산으로 우뚝 서 있었을 뿐이다. 사히브나 멤사히브나 셰르파나 산에 오르는 인간의 동기와 욕망, 그들 사이의 관계가 ‘산’을 변하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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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문지 스펙트럼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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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관련하여 이달에 들려온 소식 중 ‘문지스펙트럼’이 새 옷을 입고 다시 선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반가웠다. 오래전부터 이 시리즈를 무척 좋아했다. 작고 가벼운 판형에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 그러면서도 목록을 보면 읽을 만한 작품이 무척 많은, 알찬 시리즈라고나 할까. 작품 목록이 문학에만 한정되었던 것도 아니어서 더 좋았다. 예를 들면 <록 음악의 아홉 가지 갈래들> 또는 <재즈를 찾아서> 같은 책들이 있던 이 시리즈. 이번에 새로운 모습으로 몇 권 먼저 나왔는데, 그중 단연코 눈에 띈 책은 오에 겐자부로의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이다. 이 작품은 원래 문지스펙트럼 시리즈에 속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 시리즈로, 예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으니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오에 겐자부로인데 말이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라는 제목만 봤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처음에 나는 제목만 보고는 오에의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을 떠올렸다. 이 작품은 개를 도살하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도 뭐랄까 싹을 뽑거나 짐승을 쏘아 죽이는 아르바이트에 관한 내용인가?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어쨌든 이 제목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꽤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책을 받아들고 몇 장 넘기니,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이들이 나온다. 이제 막 10대에 접어들었거나 한참 눈부시게 그 시절을 누릴 열여섯 열일곱 즈음의 소년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그 아름다운 청춘을 박탈당한 것 같다. 소년들의 인솔자도, 아이들이 인솔자에 이끌려 도착한 어느 마을에서도 그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 않다. 경멸과 조롱, 혐오 가득한 눈길이랄까. 알고 보니 이 아이들은 모두 감화원 출신이다.

가족에게까지 버림받다시피 한 그들은 산골 외진마을에 떠맡겨진다. 이곳에서 보호감찰을 받으며 ‘노동’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형편없는 음식과 잠자리, 마을 사람들의 냉대 속에 그들에게 첫 번째 일이 주어진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일하러 가는 길에 죽은 고양이나 개와 같은 동물 사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일’ 앞에서 당혹해한다. 그곳에는 개와 고양이는 물론 토끼, 소, 돼지 등 죽은 동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이 마을 대장장이는 아이들에게 그걸 몽땅 파묻으라고 한다. 절대 손으로 만지지 말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은 영리했다. 곧 사태를 파악한다. 전염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염병으로 사람까지 죽어나가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소년들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전염병을 피해 마을을 봉쇄한 채, 그들끼리만 야반도주 한다.

그들을 늘 감시하고, 윽박지르고, 폭력을 쓰던 어른들이 사라졌다! 마을은 이제 아이들만의 세상이다. 해방감을 느낄 만도 한데, 소년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왜 아니겠는가.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그들만 남겨진, 아니 버려졌는데 말이다. 마을을 벗어나 달아날 궁리도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 아이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저 멀리에 총을 든 감시자를 남겨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천덕꾸러기였기 때문에 생명력도 강한 소년들은 이내 절망이나 당혹감에서 벗어나 자기들만의 삶의 터전을 꾸린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어른들이 사라진 마을은 오히려 평화롭다. 폭력이 사라지고, 돌봄과 배려, 믿음을 바탕으로 우정과 애정이 자연스럽게 소년들 사이에서 싹튼다. 아이들은 채소죽을 만들어 나눠먹고, 새 사냥에 나서기도 하며, 포획한 새들을 함께 구워먹으면서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그들만의 왕국에서 아이들답게 즐거이 놀 줄도 안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애 첫사랑을 만나기도 한다. 이런 장면들을 읽다 보면 이 아이들이 어른들이 떠난 이 마을에서 자기들만의 순수한 왕국을 만들고, 누구 하나 전염병에 걸리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기를 나도 모르게 바라게 된다. 그 바람은 과연 이루어질까.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소년들 가운데 감화원에 갈 정도로 죄질이 나쁜 아이는 없음을 알게 된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를 비롯해 그의 동생은 말할 것도 없고, ‘미나미’ 또한 그렇다. 그들 대부분은 ‘대수롭잖은 악행을 저지’르거나 ‘그중에 비행소년이 될 경향을 지녔다고 판정되었을 뿐’이다. 전쟁 뒤 ‘거리에서 미치광이 어른들이 광분하고 있던 그 시대’에, ‘온몸의 피부가 매끌매끌하고 밤색으로 빛나는 솜털밖에 없는’ 이들은 오히려 때 묻지 않은 순수함마저 느껴진다. 아무리 감화원 출신 아이들이라고는 하지만 전염병이 돈다는 사실조차 감춘 채 자신들만의 안위를 생각하면서 야반도주해버린 어른들이 더 끔찍하고 ‘감화’해야 할 대상은 아닐까? 어른들의 비열함과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을 이들을 위해 그 내용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들의 온갖 만행을 지켜보노라면 분노에 치를 떨게 되고 이 소년들이, ‘나’가 끝까지 그들에게 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게 된다. ‘새싹’이 절대 뽑히지 않기를, 어른들이 쏘는 무자비한 화살에 이 ‘어린 짐승’들이 부디 한 사람도 상처입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외딴 마을에 아이들만 남겨졌다는 점에서 얼핏 이 작품은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파리대왕>이 그랬듯이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또한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어른과 아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안과 밖, 약자와 강자, 갇힌 자와 감시하는 자, 순수와 기만, 부당한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 등 읽는 내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흥미진진하다. 소년들이 어디론가 떠나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마을의 비밀이 벗겨지는 장면까지는 미스터리를 읽는 듯하다가, 소년들만 남겨진 뒤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한편의 성장 소설과도 같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오에 겐자부로 특유의 사회비판 소설을 읽는 것 같아, 완벽한 독서의 즐거움을 전한다. 오에 겐자부로가 스물세 살에 발표한 첫 장편이자, 그 자신이 가장 ‘행복한 작품’이었다고 밝히는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나 또한 그의 작품 중, 이 책을 가장 좋아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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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23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리즈 좋아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새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걸 보니 더 마음에 드는 시리즈로 자리매김했네요. ^^
현대문학 단편선에서 읽은 오에의 초기 작품들은 정말 마음에 쏙 들었는데.. 저 작품도 읽어보고 싶네요.~

잠자냥 2018-11-23 16:05   좋아요 0 | URL
네 새로 나온 시리즈도 요즘 같은 날씨에 코트 주머니에 쏙 넣고 다니기 좋더라고요! 표지는 더 예뻐진 것 같고요. ㅎㅎ 이 작품 정말 재미나요. 꼭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