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 - 셰르파, 히말라야 원정대, 두 문화의 조우
셰리 B. 오트너 지음, 노상미 옮김 / 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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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때는 ‘어차피 내려올 것을 왜 힘들여 올라가나’ 생각하기도 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산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물론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는 한다). 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남다른 성취감이나 뿌듯함을 말하는 이도 있고, 산에서 느끼는 고양된 마음과 심신이 정화되는 듯한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한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인도나 티베트, 네팔 같은 곳을 다녀오거나 그러기를 꿈꾸며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주로 ‘영적인 구원’ 같은 것들-을 운운한다. 나는 이런 지역, 그러니까 네팔이나 티베트, 인도 같은 곳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안락하고 깨끗한 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도 갠지스 강을 간다고, 네팔이나 티베트를 다녀온다고 내 영혼에 뭔가 기적적인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기대를 품는 것 또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인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이런 모든 것들이 깃들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세계의 지붕이자 하늘의 이마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지구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인간의 두 발로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이곳은 네팔과 티베트(중국) 국경에 자리하고 있어 많은 서구인들이 영적인 구원을 꿈꾸며 떠나는 장소가 되었다. 쉽사리 등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남성성을 과시하는 경쟁’의 장이 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에서의 삶과 죽음>은 등반가들이 어떤 동기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인종과 계급, 종교, 젠더 차원에서 다룬다. 기존의 히말라야 관련 책들이 주로 등반에 성공한 서구 등반가들의 관점에서 쓰였다면, 이 책은 등반가의 보이지 않는 조력자(그러나 이들이 없으면 거의 등반은 성공하지 못할 만큼 중요한 존재)인 ‘셰르파’에 주목하여 그들 또한 나름의 복잡한 인생과 의도가 있음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산이라든가 등반에 관심이 없던 나였기에 ‘셰르파’는 단순히 히말라야에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현지 가이드나 포터쯤으로 생각했다. 물론 셰르파들은 그런 역할을 한다, 다만 셰르파란 네팔 북동쪽 에베레스트 대산괴 주변의 산과 계곡에 사는 ‘소수민족’ 자체를 지칭한다. 이들은 애초부터 고산지역에서 나고 자랐기에 뛰어난 적응력으로 히말라야 원정대에게 엄청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떤 등반가도 셰르파의 도움 없이 정상에 오른 경우는 없기 때문에 셰르파는 히말라야 등반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서구 원정대나 일본 또는 우리나라 원정대가 히말라야 등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들 위주로 구성된 원정대’의 모습이 대서특필될 뿐이지 함께 등반한 셰르파가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실제로는 앞서 말했듯, 셰르파 없이 히말라야 등반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산소통만큼 중요한 존재라고나 할까. 셰르파들은 높은 보수, 개인적인 출세 가능성 등을 이유로 등반에 참여하면서, 물품 운반, 요리와 청소, 루트 개설 등을 담당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셰르파들이 ‘높은 보수’, 즉 돈 때문에 등반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초창기 서구 원정대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말라야에 오르는 데 드는 비용은 어마어마하다. 네팔 당국에 지불해야 하는 돈을 비롯해서 원정대를 꾸리고 셰르파를 고용하는 등의 비용까지 헤아리면 최고 9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이 책에서는 1996년 등반대의 경우 에베레스트산 정상까지 전문가의 안내를 받는 대가로 각자 6만 5천 달러 정도 지불했다고). 이렇게 많은 돈을 지불할 경제적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히말라야 등반은 애초부터 계급과 인종 문제를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부터 시작된 국제 등반가의 대다수는 비교적 교육 수준이 높고 부유한 중상류층 출신들이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해서 비단 서구 원정대만이 아니라 아시아 원정대도 일본 및 한국 등 히말라야에 ‘입장’할만한 경제력을 갖춘 이들로 구성된다(이 엄청난 비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금 활동을 벌이거나 스폰서를 등에 업는다). 한쪽에서는 돈을 들여서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등반에 몸을 던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을 도우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목숨까지 걸고 에베레스트에 오는 ‘사히브’(힌두어로 ‘보스’나 ‘주인'을 뜻함. 등반가를 지칭)들을 셰르파는 신기하게 생각했다. 1976년 미국 200주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릭 리지웨이(Rick Ridgeway)와 셰르파의 대화를 보면 극명하게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니마, 셰르파들은 원정대 일을 좋아하나, 아니면 구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일을 더 좋아하나?”
“아, 셰르파가 돈이 있다면 집에서 마누라와 자식들이랑 있겠죠. 원정대 일은 매우 위험해요. 하지만 그 덕분에 돈을 많이 받으니까요.”
“니마, 등반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우리는 왜 하고 싶어 할까?”
“저야 모르지요. 아시겠지만 셰르파들도 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아마 당신네는 돈이 너무 많아 어찌 써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휴가를, 그리고 많은 돈을 써가면서 몹시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나?”
니마는 웃었다. “글쎄요. 정 우리 생각을 알고 싶다면야, 우리는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네들은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7쪽)


이 차이는 사히브나 멤사히브(여성 사히브들을 지칭)로 구성된 서구 원정대와 셰르파 사이에 권력 및 계급 차이를 비롯해 문화차이까지 유발한다. 초창기 등반가들이(현재도 물론) 셰르파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했다. 1920~30년대 서구의 등반가들은 그 무렵 천박한 물질주의에 결여된 ‘영성을 구현’한다는 생각으로 산에 올랐고, 이들은 금욕주의, 신비주의, 도덕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때문에 셰르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산에 오른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셰르파들은 그들의 ‘영성적인 고급 스포츠 게임’의 훌륭한 조력자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근대가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라면 등반은 숭고하고 초월적’이며, ‘근대가 시끄럽고 산만하다면 등반은 평화롭고 성찰적’이다. 또한 ‘근대가 편하고 지루하다면 등반은 어렵고 도전적이며 스릴이’ 있다. 에베레스트의 ‘거기’는 근대의 ‘여기’와 대조되는 지점이었고, 서구 등반가들에게 반근대를 상징하는 히말라야와 ‘거기’에 있는 셰르파들은 에베레스트와 마찬가지로 때 묻지 않은 자연, 순수한 자연, 그렇기 때문에 물질과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때문에 서구 등반가들은 셰르파를 ‘아이들처럼 걱정 근심이 없다’ 라던가 ‘극동의 외딴 곳에 살고 있는 이 맨발의 천사들’로 표현하며 그들을 순진무구한 존재로 타자화했다.


초기 사히브들은 셰르파들이 주로 자신들에 대한 충성심에서 등반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고 믿었던 반면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사히브들은 셰르파들도 자신들처럼 낭만적이고 모험적인 등반 욕구를 가져서 등반을 하는 거라고 믿었다. 이들은 모두 돈에 대한 셰르파의 관심을 최소화하거나 셰르파에게 돈이 가질 수 있는 의미를 의문시했다. 그들과 달리 셰르파에게 돈이 중요한 의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아무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0쪽)

셰르파가 등반 관련 일에 뛰어든 주된 이유가 그 일이 지불하는 돈과 그 돈이 수반하는 물질적 만족, 의존관계로부터의 자유, 보다 넓고 보다 국제적인 세계에의 참여 때문이라는 점이 금세 분명해졌다(...) 대부분의 사히브와 셰르파에게 공통되게 돈은 안전, 자유, 평안, 지위, 권력, 너그러움 등을 의미한다. 아마 역사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그리고 현 논의와 가장 밀접한 차이는 많은 셰르파에게 돈이 자유라는 근대성을 사는 수단으로서 대체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던 반면, 보다 낭만적인 혹은 보다 반근대적인 많은 사히브에게 돈은 양가적이기는 하지만 타락한 근대성의 일부라는 부정적 의미를 지녔다는 점이다.(<에베레스트의 삶과 죽음>, 252~255쪽)


여성 등반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1970년대까지 히말라야 등반은 압도적으로 남성의 스포츠였다. 거의 배타적으로 셰르파들과 부유한 선진국 남자들만 참여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와서야 페미니즘 운동의 등장으로 상당수 여성들이 등반이라는 스포츠에 발을 들였고, 셰르파 여자들, 즉 ‘셰르파니’가 등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의 등장에 남성 등반가들의 반응은 반대하고 적의를 품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등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저자는 이 스포츠가 지닌 남성적인 성격을 감안할 때 히말라야 등반에 참여한 여자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급진적 젠더’라고 말한다. 등반에 참여한 여자들 대부분은 전형적인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장벽을 부수는 일에 어떤 형태로든 의식이나 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혼성 원정대의 유일한 여자로 등반을 하는 사례도 있으며, 여성들로만 구성된 폴란드 K2 원정대도 있었다. 이들은 성차별주의와 가부장주의에 맞섰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등반에서도 남자들은 장악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저항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여자들이 혼성 원정대에 반대했고, 등반에서 리더십과 독립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예 남자와 등반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최초의 미국 여성 스테이시 앨리슨(Stacy Allis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남성 친구, 남성 교사, 남성 등반 동료가 있었다. 우리는 남성들과 등반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함께한 등반은 그들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전에는 남성들만 올랐던 곳을 등반하는 우리의 힘이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서구 여성 산악인이 등장하면서 히말라야 등반에는 성적 모험, 성적 정화, 금욕주의라는 복잡한 역학이 만들어졌고 사히브와 셰르파 두 남성 집단의 만남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욕망관을 빚어내기도 했으며 ‘가부장적 위계’는 서구 남성 등반가나 셰르파 남성 모두가 공유한 권력 질서였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이런 사례들을 통해 여성 등반가들이 혼성 원정대에서 저항하고자 했던 대상은 성적 파트너, 연인, 혹은 남편으로서의 남자들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으로 ‘가부장’ 스타일의 남자들, ‘아버지’로서의 남자들, 여자들은 장악하려 하고 어린애처럼 느끼게 만들려 하는 남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말라야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원정대는 물론 셰르파와 포터 등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히말라야에서 목숨을 잃는다. 눈 폭풍에 휩쓸리기도 하고 고산병으로 죽기도 하며, 잠깐 졸다가 그대로 동사하기도 한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은 어쨌든 위험 상황이므로 죽은 동료를 그냥 둔 채로 남은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와야 한다. 나중에 시체를 수습하는 일 또한 위험하며 많은 비용이 든다. 그래서 히말라야에는 아직도 수습되지 않은 시체들이 산을 오르는 등반가들을 맞이한다. 그런데도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위험한 활동에 돈을 지불하고 참여하는 ‘모험 여행’의 폭발적 증가와 여피족의 출현과 함께 등반은 더 이상 서구 부르주아 ‘근대’ 문화 내의 반문화적인 흐름의 일부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아닌, 다양한 국적의 아시아 등반대와 여행자가 참여하는 거대한 관광지가 되었다. 저자는 셰르파를 폄하하고, 종속시키고, 착취하는 일부 기업형 등반대의 급증으로 에베레스트의 질서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우려한다. 어떤 이들은 산에 사람이 꾀기 시작하면서 에베레스트는 변질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에베레스트는 언제나 ‘거기’에, 산으로 우뚝 서 있었을 뿐이다. 사히브나 멤사히브나 셰르파나 산에 오르는 인간의 동기와 욕망, 그들 사이의 관계가 ‘산’을 변하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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