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8
앙리 드 몽테를랑 지음, 유정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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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표지 이미지와 <소년들>이라는 제목에서 처음에는 짐작 가능한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몇 쪽 넘겼을 때는 살짝 수다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젠체하는 느낌이랄까, 기존 소설과는 색다른 시도들도 어쩐지 잘난척하는 것 같고. 어쨌든 처음에는 썩 좋지는 않았다. 가톨릭 학교 파르크 콜레주, 우리나라로 치면 중고등학교를 합친 콜레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는 역시 예상대로 흘러간다. 때로는 악마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천사 같기도 한 열네 살에서 열여섯 살 소년들. 그들의 당돌하고도 열정적인, 순진무구하지만 어느 땐 지나치게 약삭빠르기도 한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니 슬쩍 웃음이 나온다. 첫인상이 딱히 좋지 않았던 사람과 몇 시간을 함께 지내다보니 좀 더 대화를 나눠도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소년들>을 3분의 1쯤 읽었을 때의 심정이다. 그러다가 나는 중반 이후부터 완전히 이 책에 빠져들었다. 아, 이런 작품이 이제야 찾아왔다니 안타까웠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지금 이 나이에 읽을 수 있어서 어쩌면 이 작품을 이렇게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안도했다. 사랑, 그렇다 사랑.


파르크 콜레주 철학반 우등생인 알방은 학교를 대표하는 기구인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뽑힌다. 이 아카데미 소속 엘리트 학생들은 선배가 자신이 점찍은 후배를 돌보는 ‘보호 그룹’이라는 활동을 시작한다. 알방은 몇 년 전부터 좋아하던 두 살 아래인 세르주를 자신이 보호할 후배로 점찍는다. <소년들>은 알방과 세르주의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 즉 콜레주 학생들, 콜레주를 이끄는 원장 신부, 세르주와 남다른 관계인 드 프라츠 신부, 알방의 어머니 등을 중심으로 좀처럼 잊기 어려운 강렬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알방과 세르주의 관계는 작가인 몽테를랑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알방처럼 콜레주 철학반 학생이던 몽테를랑은 후배인 필리프 지켈과 특별한 우정을 나눴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바 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곱씹으면서 무려 50여 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니 <소년들>은 몽테를랑 필생의 역작이자 얼마쯤은 자서전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작가는 ‘자전적 요소는 거의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나이 열다섯 살 반쯤 되면 사랑에 빠지는 덴 이골이 붙는다.’ 이런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소년들>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랑’이다. 이 작품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온다. 심지어 파르크 콜레주의 원장 신부가 학교에 세운 규칙은 ‘많이 사랑하기, 많이 포옹하기, 많이 기도하기’일 정도이다. 그는 진정한 애정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 ‘사랑받는 자는 어디서든 사랑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그게 인간 감정의 움직임이라고 여긴다. 원장 신부의 이런 가르침(?)을 떠받들기라도 하듯이 이 학교 학생들, 특히 ‘보호 그룹’에 속한 소년들은 하나같이 선후배 커플을 이뤄 서로 열렬히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 주인공인 알방과 세르주는 좀 더 특별하다. 


알방은 그야말로 세르주에게 미쳐있다. 똑똑하고 집안 좋은 그에 비해 세르주는 학교의 문제아다. “아,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세르주에게 늘 붙어 다니는 말이다. 이상야릇한 작은 괴물, 학교의 말썽꾸러기 세르주는 끊임없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짓을 찾아다니고, 교사들과 자습 감독이 싫어하는 골칫덩이이다. 품행 점수가 이십 점 만점에 오 점인 학생이자, 학교에서 모두가 견딜 수 없어하는 아이. 알방이 사랑해마지 않는 세르주 수플리에는 그런 존재다. 그런데 알방은 왜 이런 세르주를 사랑할까? 알방은 ‘선을 향해서든 악을 향해서든 무차별적으로 치우치는 어떤 막연할 열정’을 지닌 소유자로 정의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그가 보기에 세르주에 대한 이런 평가와 대우는 정당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연약하고 가난한 소년에게 그는 한없는 사랑과 연민을 느끼고 그를 좋은 길로 이끌고 싶어 한다. 사랑에 빠진 알방에게 세르주는 완전히 특별한 존재다. 세르주에게는 특별한 냄새가 났다. ‘어디서 나는 건지 알방이 평생 궁금해 한 일종의 향기’. 세르주를 사랑하는 알방은 오후 다섯 시 무렵이면 어스름한 저녁 시간의 도움을 받아 그를 더 잘 떠올리기 위해 일부러 램프를 약간 기다렸다 켜곤 한다. 이렇게 사랑에 빠진 소년들의 모습을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는데, 마침내 일은 벌어지고야 만다. 


사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으리라. 가톨릭 학교에서 동성 친구 사이의 ‘사랑’을 용인하고 허락한다고? 공공연하게 소년들끼리 사랑한다고? 하는 생각들. 물론, 원장 신부가 ‘더 많이 사랑하기’를 학교 규칙으로 세웠듯이 선후배끼리 서로 보호하고 아낌없이 사랑하는 일은 어느 정도는 허용된 일이었다. 단 그것은 서로 영혼의 성장을 돕는 사랑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보호 그룹’ 학생들은 신부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곳에서 육체적 사랑의 쾌락도 마다하지 않는다. 알방과 세르주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낭만적’이라는 말로 파르크에서 일어나는 이탈을 관대하게 보아주던 학교 지도자들도 알방과 세르주의 어떤 사건 앞에서는 더는 그 일탈을 너그러이 넘어가주지 않는다. 그리고 알방은 세르주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학교를 떠난다. 아니, 퇴학당한다. 그렇게 한 시절이 간다.


그런데 알방의 사랑이 벼랑으로 내몰리게 되는 데는 ‘그저, 무얼 하든지 간에 항상 청소년기와 유년 시절을 망쳐버리는 어른들의 속성’이 큰 역할을 한다. 늘 사랑하라고 사랑을 권하던 원장 신부의 비겁함, 세르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심에 눈이 멀어 알방에게만 유독 가혹한 처벌을 내린 드 프라츠 신부 등은 처음부터 ‘특별한 우정’은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고 줄곧 눈감아주다가 자기들이 마음 내키는 때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알방과 세르주가 며칠 동안 달고 다닌 황금 단추 배지가 어른들에게는 일종의 ‘약혼반지’처럼 보인다. 알방의 어머니 또한 아들과 세르주와의 관계를 불편하게 보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른들로 인해 망가진 세계, 내몰린 사랑. 알방과 세르주는 이대로 영영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알방이 퇴학당하기까지의 이야기는 이 책 중반까지에 해당한다. 이때 나는 분노와 함께 가슴이 아파왔다. 귀여운 녀석들, 하면서 내내 웃다가 어느 순간 분노하고 있던 것이다.


그 뒤의 이야기부터는 거의 비통함과 서글픔 같은 것들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알방은 어머니가 바라던 남자가 된다. ‘보호받는 후배들’의 명단은 곧 다른 명단, 그러니까 사교계에서 같이 춤을 추었거나 또는 (사회적 이유로) 반드시 춤을 추어야 할 ‘여자들의 명단’으로 대체된다. 원장 신부의 경박함도, 드 프라츠 신부의 배신도, 어머니의 훔쳐보기도 모두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이 한마디로 무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고 그런 인생. 인생이 다 그렇지! 더더군다나 알방은 남자가 남자를 욕망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젠 비상식적이고 괴상망측하고 혐오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어린 소년들에게서 여자로 옮겨가기, ‘많은 사춘기 소년들이 경험하는 이 통과의례’는 일종의 성숙을 의미했고, 알방 또한 그렇게 그 시기를 지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정말, 그럴까?


파르크, 버릇없고 비겁하고 도벽이 있고 속물근성에 불경스럽고 무절제하고 위선적인 소년들이 있는 파르크는 창부의 집인 동시에 천사들이 옮겨온 집이었다. 이후 어디에서도 파르크에서 경험했던 관대함과 강렬함과 장점을 그는 보질 못했다. 자신에게서도, 주변에서도 다른 존재를 ‘더 훌륭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욕망을, 다른 존재를 위해 자기 인생의 가장 귀한 보물을 희생하려 하는 욕망을 단 한 번도 다시 보지 못했다. (<소년들>, 439쪽)


알방이 학교를 떠날 무렵 드 파르츠 신부는 그에게 ‘스무 살쯤 되면 이 모든 일을 비웃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곧 스무 살을 앞둔 알방의 삶은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알방은 그럼에도 종종 세르주의 그 ‘과일 같은 얼굴’을 다시 떠올린다. ‘어떤 날에는 약간 상한 과일 같고, 저녁나절 거리의 어둠 속에서는 환하거나 반쯤 밝아지는 과일 같은 얼굴’을……. 전적으로 순수한 애정을 바쳤던 대상, 절교가 눈물 너머의 것이기 때문에 결코 헤어지던 순간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대상. 그 ‘강렬한 추억을 남긴’ 자는 바람조차 건드릴 수 없는 서늘한 저 깊은 곳에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파르크 콜레주는 알방에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잃어버린 낙원이자 청춘이며 순수였고, 어떤 존재를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공간이다. 그러므로 알방이 세르주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서도 울컥 치솟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잃어버린 낙원과도 같은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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