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하반기 결산 페이퍼를 써달라는 요청을 지난 12월 마지막 날에 은곰탱이로부터 받았으나, 그날은 연차라 작업실에 출근하지 않았고, 1월 1일은 빨간 날이라서 집에서는 노트북을 켜지 않는 관계로 작업실에 출근한 오늘 이 페이퍼를 정리해본다. 2024년에는 이런저런 일로 책을 많이 못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게 무슨 일이죠? 상반기에 90권 조금 넘게 읽고 하반기에는 100자평 남긴 책 위주로 대충 세어보니 80권쯤 읽었더라. 그래서 모두 170권쯤 읽은 한 해. 아마도 ‘밀리의서재’ 때문에 출퇴근길에도 책을 읽게 되어서 권 수가 조금 늘어난 듯.
2024년 하반기에 좋았던 책들....(되도록 2024년에 출간된 책에서 골라보려고 애썼다) 상반기 리스트를 보고 싶은 분은 클릭.
문학
2023년에 이어 여전히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다. 읽어도 크게 감흥이 남은 작품이 많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중에서 골라보자면.
사강, <엎드리는 개>어떤 이들(프랑스식 연애 안 좋아하는 다락방 같은 ㅋ)에게는 그다지 공감가지 않을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나는 이 사랑이야기가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다. 2024년에 출간된 책은 아니고 2023년 11월에 나온 책. ‘밀리의서재’에서 읽었는데 종이책이 갖고 싶어서 나중에 종이책으로도 구매했다. 엎드려서 복종하는 개의 자세와 떨쳐내려고 해도 끝끝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인간의 심리를 비교해 탁월하게 묘사했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중년 여성과 젊은 남성의 사랑이야기로, 최근에 읽은 <셰리>와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다만..... 솔직히 콜레트보다는 사강이 훨씬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강 책은 웬만해서는 읽고 되파는 편인데, <엎드리는 개>와 <패배의 신호>는 갖고 있다. 누군가 사강의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그 유명한 <브람스....>보다는 나는 이 두 책을 권할 것 같다. 이 작품 읽을 때 여주/남주 이미지를 상상해서 읽었는데 루이 말 감독의 <도깨비불 Le Feu Follet>(1963)의 ‘잔느 모로’와 ‘모리스 로네’가 정말 딱 어울릴 것 같았다.
마리아 역할에는 잔느 모로를... 물론 이때의 잔느 모로보다는 좀 더 늙고 약간 더 살집이 있어야 할듯하고.
게레 역할에는 ‘모리스 로네’ 딱 어울려!
이 책, 읽은 분들은 공감할 것 같은데... 아닌가효?
스콧 피츠제럴드, <바질 이야기>우앙. 너무 낭만적이야. 너무 재밌어 >_< 내가 스콧 피츠제럴드 작품에 기대하는 모든 게 이 한 권에 담겨 있다.
마틴 맥도나, <필로우 맨>마틴 맥도나를 올해의 발견이라고 부르겠다. 이 작품 때문에 그가 만든 영화들도 다 찾아보고 싶어졌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최근에 나는 또 한 번 ‘이야기의 힘’을 느끼고 극장에서 주책맞게(?) 전혀 울 장면이 아닌데도....(아닌가?) 울컥해서 울어버린 영화가 있는데 바로 <더 폴: 디렉터스 컷>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06년에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개봉했었는데 최근에 재개봉했다(예전보다 감독 추가 장면이 많다고). 비주얼도 비주얼이지만, 병원에 입원한 꼬마에게 들려주는 그 이야기가..... ㅠㅠ
크리스토프 하인, <호른의 죽음>국내에는 처음 소개된 작가 같다. 이대로 묻히기는 좀 많이 아깝다. 책값이 무지막지하게 비싼데도 내가 지만지 출간 목록을 계속 훑는 이유는 이런 작품을 종종 소개해주기 때문. 호른이라는 이름의 한 사나이의 죽음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어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좌절된 욕망, 이루지 못하는 사랑 등등 모두가 운명에 굴복당하고 살아가는, 그 하나하나의 쓸쓸한 사연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클레어 키건, <푸른 들판을 걷다>우리나라에서도 압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키건. 이 책 역시 좋았는데, 단편 모음집이라 더 좋았다(키건의 그간 국내 소개 작품들은 대부분 너무 짧지 않았는가). 아일랜드 특유의 감성이 뚝뚝 묻어나는 단편들. 2024년 상반기의 베스트 단편 모음집으로 앤드루 포터, <사라진 것들>을 꼽는다면 하반기에는 이 책을.
에드나 오브라이언, <8월은 악마의 달>에드나 오브라이언 또한 아일랜드 작가이다. 여성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낸 작품들로 보수적인 아일랜드 사회에서는 일찌감치 금서 처분을 여러 번 당했다는데, 작품 수위는 사실 그렇게까지 적나라(?)한 것 같지는 않은데 작품들이 발표된 시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격적인(?) 내용보다는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문체가 기억에 남는다. <소녀들>도 얼른 읽어봐야지.
안톤 체호프, <낯선 여인의 키스>2024년은 체호프 타계 120주기라서 이런저런 체호프 책이 새롭게 소개되었다. 그 덕분에 다시 읽어본 체호프 단편모음집. 이 책은 만듦새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 처음 읽는 ‘낯선 여인의 키스’가 인상 깊었고 다른 단편들도 역시 체호프! 를 외치게 했다. 그리고 역자가 ‘승주연’인데 이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빅토리아 토카레바 <티끌같은 나>를 번역한 이다. 그때부터 이 이름을 눈여겨보는 중이었는데 읽으면서 으음 역시 좋구나...! 했던.비문학
이브 앤슬러,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이 책의 추천사 중 “아무 데나 펴서 읽어도 모든 페이지가 다 강력하고 아름다운 책이다.”라는 문장에 격하게 공감한다. 믿고 읽어보시라, 아름답다. 그런데 주의하시라. 참혹하다.
아리안 샤비시,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이 책 좀 많이들 읽어보시라. 일단 재미있다. 통쾌하다, 지적으로 명민하다. 그래서 읽는 내내 짜릿짜릿하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주제에 이성적으로 차분히 조근조근 따지면서 반박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만 저는 워낙 화가 나면 비논리적으로 구는 인간이라 실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지만 이성적인 당신은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밀리의서재’에도 있습니다)
울리케 헤르만, <경제학 천재들의 자본주의 워크숍>이 책도 일단 재밌다. 경제학! 어려울 거 같아! 머리 뜯지 마시라- 경제학하고 담 쌓고 사는 나 같은 이도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책은 도끼”라는 역할에도 충실한 책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을 와장창 깨뜨려주기도 하는데 ‘아담 스미스’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았다.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사회가 아담 스미스를 오독하거나 자기들 입맛에 맞는 부분만 이용하는 것 같기도.
알랭 드 보통, <현대 사회 생존법>내가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불안> 때문이었는데 그 이후 읽은 여러 권의 책은 실패를 거듭하다가(주로 연애 관련 글들), 이 책으로 다시 보통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글들이 많은데 그래서 더 좋았다. 그리고 이 책은 어떤 분이 말씀하셨듯이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으로 읽기를 권함! 비싸지만 비싼 값을 함!
캐스린 슐츠, <상실과 발견>“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여덟 달 전, 결혼하게 될 여자를 만났다.”라는 문장에서부터 사로잡혔다. 이 문장을 쓴 작가의 젠더가 여성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저 문장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사랑하고, 결국은 어떤 식으로든 떠나보내는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 그런 생의 기록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어진다. 캐스린 슐츠의 글이 더 읽고 싶다.
슈테판 츠바이크,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이 책은 분량에 비해 가격이 매우 쎄다...! 그럼에도 ‘밀리의서재’에서 읽고 난 뒤 종이책을 사려고 몇 번이나 고심했다. 소장각. 필사각. 츠바이크만세각. 이 책을 읽고 나서 ‘안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으나... 참 나는 비루한 인간이라 그러지 못하는구나.
에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이 책을 읽음으로써 레비나스 철학의 세계에 매료되었고 앞으로의 10년은 레비나스를 파고들어보기로 결심했다.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존중하는 레비나스의 사상. 전 세계적으로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현시대에 그의 이 철학은 더 필요하지 않은가.올해의 배신상
제이슨 베일, <
술의 배신>지금 생각해보니, 이 작가 혹시.... 알코올 몰래 몰래 먹으면서 쓴 글 아닐까?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이거 주정뱅이 특유의 증상인데?!올해의 밉상
<편지 교실>의 미시마 유키오,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의 윌리엄 해즐릿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인간적으로 좋아지거나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좀 정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미시마 유키오는 인간적으로 좋아한 적은 없지만 작품은 그래도 그놈의 문장 때문에 외면하지 못하고 읽어왔는데, <편지 교실>의 미시마 유키오는 정말이지 적나라하게 자기의 밉살스러운 면을 다 보여주는 것 같다. 남자 캐릭터고 여자 캐릭터고 하나같이 밉상 미시마 유키오의 대변자 같다. <혐오의 즐거움>은 잘 쓴 에세이가 여럿 실려 있다. 윌리엄 해즐릿이 왜 뒤늦게 조명받고 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런데 이런 사람 곁에 두면 왠지 피곤할 것 같다. 뒤돌아서서 신랄하게 내 욕할 거 같달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올해의 늙은이상
작가들에게는 분명 그런 판타지가 있는 것 같다. 늙은 자기가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는 그런 판타지.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일이 잦을 것 같기도 하다. 콜레트도 사강도 그랬을 거야. 그런 경험을 통해서 작품을 쓰기도 하겠지. 안드레아 애치먼 <파인드 미>, 콜레트 <셰리> 둘 다 중년 이상의 남녀들이 한참 어린 젊은이들과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다.... 대단한 이 늙은이들에게 올해의 늙은이 상을..........수여합니다.
올해의 굿즈상
<세일러와 페카 삼부작>유아/어린이/청소년 책 사면 주는 고양이 후드 담요가 탐이 나서 이 책을 샀는데!! 내가 읽고 나서 조카 줘야지! 했다가 책 그림이 너무 예뻐서 내가 갖기로 했다. 게다가 이 책 굿즈로 주는 에코백도 예뻐! >_< 크하하....
후드 담요는 이렇습니다.....
에코백은 이렇구요......... >_<
그나저나 이 고양이 담요 정말 따뜻하고 귀엽습니다. 노랑고양이 네 마리나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특히 내 사랑 3호하고 막냉이가 노랑고양이니까 나도 노랑고양이가 되어야지! 하는 마음에 노란색 후드 담요로 받았따.... 이걸 쓰고 고양이들 앞에서! “밤비야!(막냉이 이름) 나도 드디어 고양이 됐어! 이거 봐 나도 귀 달렸어!!!!” 했더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극혐 표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고양이 귀가 저렇게 마징가 귀가 되면 싫어하는 거라능...)3호는 이미 도망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렇지만 너무나 귀엽습니다. 이걸 쓴 저는 제가 봐도 귀엽습니다. (자기가 자기보고 귀엽다고 하는 거 극혐인 거 알지만 내가 봐도 내가 귀여운 걸 어떡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오늘 아침에 이걸 뒤집어쓰고 커피를 내리고 있으려니 집사2가 귀엽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냐웅냐웅냐웅.......” (번역: 고양이가 커피 내려주는 카페입니다. 커피에 털 떠다녀도 몰라요)집사2가 귀엽다고 좋아하면서도 자기도 탐나는 거 같아서 회색 담요도 또 주문했다........ 집사2랑 나랑 둘 다 이거 뒤집어쓰고 있으면 우리 집은 이제 고양이 여덟마리......................................
올해의 원픽
샹탈 자케,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상반기에도 이 책을 꼽았는데, 이 책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책을 하반기에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정도가 견줄만...?! 두 권 모두 다른 의미로 저마다 아름답다. 그리고 이런 책들을 읽고 있노라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기도 한다. 모두 그런 기쁨을 느껴보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