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최근에 <북회귀선/남회귀선>을 읽은 까닭은 케이트 밀렛의 <성 정치학>을 읽기 전에 밀렛이 대차게 까고 있는 영미권의 주요 남작가들-D, 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의 작품을 먼저 접해보기 위해서였다. D, H. 로렌스 작품은 이미 여럿 읽었기도 했고 그의 작품은 나머지 저 여혐 작가 두 사람과 동일선상에 놓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기에 헨리 밀러 작품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랬는데........와 진짜 문장마다, 구절마다 욕이 쳐 나온다.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미친놈” “지는...” “지는 창남 아닌가” 몇 번이나 투덜거렸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을 보자.
*정신 건강을 위해 피하고 싶은 분들은 인용 구절은 건너뛰시라.
제르멘은 ‘요람’ 속에서부터 창녀였다. 그녀는 위가 아프다든가 구두가 닳아 버렸다든가 하는 사소하고 표면적인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말고는, 완전히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고 실제로 그것을 즐기고 있다. (대체 원문으로 뭐라고 써댔는지 궁금해서 찾아봤다.... Germaine, on the other hand, was a whore from the cradle; she was thoroughly satisfied with her role, enjoyed it in fact, except when her stomach pinched or her shoes gave out, little surface things of no account, nothing that ate into her soul, nothing that created torment.)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자’이다. 남자! 제르멘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그녀를 간질이고, 그녀를 황홀하게 몸부림치도록 만들 수 있는 존재, 그녀의 장미 숲을 양손으로 잡고 기쁜 듯이 자랑스레 뽐내며, 결합된 느낌, 생명의 느낌을 맛보면서 비빌 수 있는 것을 가랑이 사이에 갖고 있는 남자. 자신의 양손으로 잡을 수 있는 아래쪽 부분—그것만이 제르멘이 인생을 경험하는 유일한 장소인 것이다. (But the principal thing was a man. A man! That was what she craved. A man with something between his legs that could tickle her, that could make her writhe in ecstasy, make her grab that bushy twat of hers with both hands and rub it joyfully, boastfully, proudly, with a sense of connection, a sense of life. That was the only place where she experienced any life -- down there where she clutched herself with both hands.)
.............. 영문이나 한글이나...... 이런 썩을........ 자 계속 읽어보자.
“그따위 창녀를 상대로 쿵쾅거릴 바에야, 가게 앞의 테라스에 금방 뜨거워지는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단 말이지. 정말이야. 모두들 안아 달라고 이리로 찾아온다고. 그러면서도 그걸 큰 죄라도 짓는 일처럼 여기고 있어…… 가엾은 바보들이야! 서부 지역에서 오는 학교 여교사들 가운데는 정말로 처녀가 있어……정말이야! 온종일 변소에 웅크리고 앉아 그것만을 생각하는 치들이지. 그런 여자들을 설득하는 일은 그다지 수고롭지 않아. 하고 싶어 못 견디는 여자들인걸. 지난번에 나는 유부녀를 데리고 잤는데, 그 여자는 반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털어놓더군. 그런 걸 생각이나 할 수 있나. 거 참, 대단한 정도가 아냐…… 뜯겨나가는 줄 알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미치광이처럼 계속 신음하는 거야. 그런데 그 계집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 줄 알아? 이리로 이사를 오고 싶다는 거야. 그리고 생각해 봐, ‘날 사랑해요?’ 하고 묻는 거야. 나는 그치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데 말이야. 대체로 나는 여자들의 이름 따위는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남편 있는 여자들 따위! 내가 이리로 데리고 오는 유부녀들을 보면 자네는 틀림없이 환멸을 느낄 거야. 이치들은 처녀보다 더 지독해. 유부녀들은 말이야, 남자가 안아주기를 기다리지 않아—자기들이 먼저 조르지. 그리고 끝난 다음에 사랑이니 연애니 지껄이는 거야.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정말 여자가 싫어졌어!” (헨리 밀러, <북회귀선/남회귀선> p.114)
반 노든은 프랑스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프랑스 여자는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치들은 돈을 원하거나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 프랑스 여자들은 본질적으로 다 창녀야. 나는 오히려 처녀를 상대하는 편이 낫더군.” 그는 말한다. “처녀는 어느 정도 환상을 안겨 주니까. 적어도 투지를 일깨워 주지.” (같은 책, pp.115~116)
읽다 보면 헨리 밀러의 말대가리를 계속 쳐다보면서 째려보게 되고 한 대 패주고 싶다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뭐 이런 작품이 다 있나? 여자들은 왜 이런 놈을 사랑했지? (헨리 밀러 결혼 다섯 번 함!!!!!!) 싶어진다. 페니스와 그로 인한 매독과 임질 같은 바이러스 덩어리가 뇌를 가득 채운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생각만 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머릿속에는 섹스만이 가득할 뿐이고 심지어 그 섹스는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기보다는 단지 욕정, 욕망, 배설, 배설, 배설, 배설일 뿐이다. 그리고 여자는 배설하는 그릇으로만 존재한다.
케이트 밀렛은 이 인간을 어떻게 깠는지 살펴보자. <성 정치학> 헨리 밀러 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줄곧 자신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있다. 헨리 밀러(1891~1980)는 오늘날 미국 문학계에서 분명 주요한 생존 작가지만, 학계의 현학자들은 여전히 그를 학문적 관심 대상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 시대의 글쓰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임이 틀림없으나 공식 비평은 계속해서 그의 작품을 계획적으로 지독하게 무시하고 있다. 밀러가 지난 2, 30년 동안에 찬양된 ‘성적 자유’를 대변하는 작가라는 점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어서 밀렛은 헨리 밀러를 예찬한 자들의 인용을 열거한다. 밀렛이 인용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밀러의 성취는 참으로 놀랍다. 그의 작품은 섹스를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우스우며 (…) 고도로 시적이고 용의주도하다. 그의 글에서는 아니꼬운 웃음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밀러의 작품들이 동시대 작가들과는 달리 “청교도적 충격에 기인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 번쯤 청교도와 이교도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하고 경탄했다는 로렌스 더럴의 평가도 인용한다(로렌스 더럴 실망이다!!). 밀렛은 이런 세간의 평가에 반박한다. 그녀의 이런 문장에는 포복절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해방된 남성 헨리 밀러라는 대중적인 이미지가 아무리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이는 애석하게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어지는 지적에서 케이트 밀렛은 밀러의 작품이 미국인의 성적 신경증을 보여주는 해석서라 볼 수 있으나 밀러의 가치가 우리를 그러한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극화했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보기에 밀러의 글에는 문화적 카타르시스 같은 해방감이 있지만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에 처음으로 목소리를 부여한 결과”일 뿐이다. 단지 외설적인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 아니다. “밀러가 실제로 표현해낸 것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의 문화와 특히 남성적 감수성이 느끼는 역겨움, 경멸, 적대감, 폭력성, 불결함”이며 여기서는 “여성 또한 마찬가지다. 섹슈얼리티가 성가신 짐을 지우는 대상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헨리 밀러는 스스로를 로렌스의 제자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밀렛은 이렇게 통쾌히 응수한다. “그 선생이 살아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몹시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로렌스의 웅장한 종교적 분위기는 밀러의 단호한 신성 모독의 분위기와 전혀 닮지 않았다. 로렌스의 주인공은 악명 높은 엄숙함으로 자신의 임무에 착수하며 정교한 정치적 조약으로서 ‘성행위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중한 흥정술과 전문가적 심리 조작으로 문제의 여성을 예속시킨다. 그러나 밀러와 그의 공범자들(밀러는 깡패이므로)은 그저 여성과 ‘성교fuck’한 뒤 그녀를 크리넥스 티슈나 화장실의 휴지 버리듯 가뿐하게 내다버릴 뿐이다. 밀러는 냉정한 방식을 통해 ‘사랑이라는 사기’(에로티시즘이라는 가면을 쓴 일종의 권력 놀음)가 강도질만큼이나 단순한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밀러의 수법은 매우 단순하다. 여자를 만나고 속여서 ‘그 섹시한 궁둥이’와 성교하고 그런 다음 그녀를 떠난다. 밀러의 사냥은 원시적 방식인 사냥감의 발견, 성교, 망각의 과정으로 진행된다.”
밀렛이 보기에 그의 작품이 지닌 주요한 결점-즉 ‘헨리 밀러’라는 등장인물과 너무 동일시가 잘 된다는 점 때문에, 밀러라는 남자는 그가 창조한 등장인물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리고 이 현명하지 못한 등장인물들, 그러니까 밀러의 생각이 대변하는 유형은 사회학적으로 볼 때 잔인한 사춘기 소년의 유형이다. 그러나 밀러가 이끌어내는 공감대는 그런 유형의 집단에 한정되지 않고 모든 계급과 연령대의 남자들에게 적용된다. 이는 섹슈얼리티와 여성에 대한 비공식적인 남성의 시각이다. 이런 밀러의 작품에는 남성 공동체의 분위기가 있다. 작품 내내 그와 유년기를 보낸 패거리들은 청년기와 장년기, 심지어 노년기에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남자들 사이의 기묘한 의사소통 도구로 창녀가 이용된다. “창녀의 질은 형제애적 생명력이 임의로 흐르는 도관(導管)”이다. 밀러의 작품에서 보이는 성적 유머는 남성 공동체의 유머이자 더욱 정확하게는 남자 공중변소의 유머이다. 그의 작품에서 섹스의 목적은 리비도보다는 자아를 만족시키는 데 있다. 희생자(여성)를 조롱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과정에서 감각적 즐거움은 잊히기 때문이다. 앞서 <북회귀선>의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밀러가 생각하는 이상적 여성이란 창녀다. 밀러에게 섹슈얼리티의 상업화는 남자에게 만족을 주는 편리한 일(설득보다 돈을 지불하는 게 더 쉬우므로)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존재를 완성시켜주기도 한다. 즉 여성을 절대적 음부라는 기능으로 효과적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밀러는 미국 관광객에게는 전형적 매춘부로 보이는 프랑스 여자 제르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녀는 타고난 창녀”이다. “음부”가 그녀의 “영광”이자 “결합된 느낌”, “생명의 느낌”이다. 게다가 “그것은 그녀가 삶을 경험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제르멘은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데, 그녀는 무지했고 음란했으며 “그 일에만 온 정신을 쏟”는 “존재 전체가 창녀”인 여자이고 그것이 그녀의 미덕이다.헨리 밀러의 작품을 읽다 보면 이 세계는 두 개의 성기- 여성과 남성의 성기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케이트 밀렛도 이를 지적한다. 그녀가 보기에 헨리 밀러는 여성을 단순한 ‘음부cunt’, 즉 물건, 상품, 물질로 바꾸어놓았다. 로렌스와 밀러 모두 환상성을 성 정치학에 이바지하게 했으나 로렌스의 방식은 실리적이고 정치적이었으며 그는 실제 여성(상당한 힘과 지성을 소유한 여성)을 감정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헨리 밀러에게 (수음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미분화된 생식기만큼 도전적인 것은 없었다. 음부 그 자체인 밀러의 작품 속 여성들은 그렇기 때문에 매번 등장하는 섹스 에피소드에서 “인격과 성행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 이들을 굳이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해도 전혀 상관없을” 듯하다. 영화 <북회귀선>을 볼 때도 그러했지만 <북회귀선>을 읽을 때도 에로틱하다기보다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는데 케이트 밀렛은 이 까닭을 이렇게 본다. “열렬한 ‘성교’가 부지기수로 묘사됨에도 실제로 섹슈얼리티의 많은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헨리 밀러의 작품 속에서는 육체적 친밀함도 없고 알몸의 심미적 쾌락도 없다. ‘거대한 젖꼭지’나 ‘궁둥이’ 같은 부분은 여성의 잃어버린 에로틱한 형태를 대체하는 빈약하고 희귀한 예비품으로 설정될 뿐이며 ‘생식기(남근과 불알이라는 스타 연기자)’를 제외하고는 남자의 육체를 묘사하는 데 그 어떤 단어도 소모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성교를 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며 사람은 더욱 아니다. 밀러의 환상적 드라마는 음부와 남근이라는 모험에만 엄밀하게 제한된다. 밀렛에 따르면 밀러는 “몸이 따로 놀도록” 생명이 남녀를 갈라놓았다는 것을 보여준 뒤 “몸은 여자의 것이지만 음부는 네 것이야. 음부와 남근이 결혼한 거지”라고 설교한다.
내가 읽은 부분 중에 가장 통쾌했고 실제로 헨리 밀러가 읽었다면 분노했을 내용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아닐까. “밀러는 구두쇠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도 섹스는 기이한 방식으로 돈과 연결되어 있었다. 미국의 경제적 도덕성이라는 풍조에서 보면 밀러는 40세까지 완전히 ‘실패자’였다. 즉 돈을 벌지 못하고 버림받아 초라하게 살아가는 사람, 직장도 없이 신문에 기고하는 일에 생계를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작가였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 돈 걱정에서 해방되기 전까지 밀러는 자신이 예술적이고 지적인 작업을 경멸하는 속물적 환경에 구속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환경에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남성적 성취는 돈이나 섹스에 한정되었다. 물론 밀러는 이단아이자 반항아였다. 하지만 그는 돈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을 그토록 증오하는 만큼 그것에 뿌리 깊게 물들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밀러는 돈을 섹스와 바꿀 수 있었다. 이는 물욕 본능의 전이轉移이다. 여성을 상품으로 바꿈으로써 그는 또한 ‘성공’이라는 평판을 누릴 수도 있었다. 돈은 벌 수 없다 해도 여자는 벌 수는 있었다. 필요하다면 현찰을 빌려서라도 여자를 공짜로 얻어 성공을 거두려 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나은 ‘순응하는’ 동시대 사람들이 돈거래로 남의 돈을 빼앗았지만, 밀러는 여성의 ‘음부’를 빼앗아 ‘남성성’을 유지하려 했다.”
케이트 밀렛은 헨리 밀러라는 인간 자체를 얼마나 측은하게 생각하는지 혀를 끌끌 차며 글을 마무리한다. “그가 성적 태도에 독창적으로 공헌한 바는 성에 대한 케케묵은 경멸감을 최초로 충실하게 표현했다는 데 제한된다. 나머지 성적 에토스는 대단히 관습적이다. (....) 밀러는 남성 문화가 오랫동안 경험했으나 항상 조심스럽게 억눌러왔던 특성과 감상에 목소리를 부여했다. 즉 여성을 음부로 완전히 탈인격화하는 열망, 값싸게 착취하는 게임과 같은 섹슈얼리티, 실제 인간이라는 현실성이나 동료 인간을 다루는 복잡함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권력에 대한 유치한 환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격상 항문 배설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는 유치한 배출에 대한 열망 등의 감상을 말한다. 아무리 해롭다 하더라도 그러한 금지된 감정의 해방은 의심의 여지없이 편리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밀러가 폭발시키고 유행시켰던 그 수많은 경멸과 역겨움의 표현은 결국 해로운 것으로, 심지어 악의적인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밀러는 우리에게 몹시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그의 독살스러운 성차별주의는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경증적 적개심과 노골적 욕지거리를 건전함과 혼동하는 점은 참으로 측은할 따름이다. 그것을 자유와 혼동하는 것 또한 그다지 슬프지는 않다 하더라도 매우 고약하기 그지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