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소풍을 간 적이 있다. 거창한 소풍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치원 근처 동네에 있던 ‘밤나무골’이라는 이름의, 그 시절 흔하디흔한 밤나무가 많던 숲으로 그냥 하루 야외 학습을 간 것이다. 그래도 소풍은 소풍이었다. 어린 마음에 소풍이라는 말은 늘 설레지 않은가. 소풍이니까 집에서는 당연히 김밥을 싸 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소풍날,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신이 나 도시락을 열었다. 당연히 다들 김밥이 담긴 도시락이었다. 아마 나도 들떠서 도시락을 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 도시락엔 그냥 맨밥과 총각무김치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지? 하는 심정. 어쩐지 창피하기도 했다. 가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 같아 싫었다. 엄마가 미웠던 것 같기도 하다. 우습게도 그때 그 장면을 찍은 사진 한 장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유치원에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남기고 싶었으리라. 사진 속에서도 내 도시락은 총각무와 밥뿐이다. 그 사진 속에서 난 다른 아이의 도시락을 힐끗 쳐다보고 있다.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저 총각무만 덜렁 들어 있던 도시락. 그 도시락 같다고… 인생이….
엄마는 무슨 무대뽀로 그런 도시락을 싸준 거야? 아니, 대여섯 살밖에 안 된 애가 소풍을 가는데 그렇게 성의 없는 도시락을 싸준 건 진짜 심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선명하지 않은 나인데도 이날의 기억만큼은 너무나 강렬했는지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날은 엄마에게 따지듯 묻기도 했다. 나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라 그런 엄마의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고 대충 고양이 여섯을 돌보는 심정으로 유추해보아도 그날의 엄마처럼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막내가 고양이 유치원에서 소풍을 가, 잔뜩 들떴어! 집사가 도시락에 맛난 캔하고 츄르하고 과자(아니 6호가 좋아하는 보족세트)를 잔뜩 넣어줬으리라 기대했는데 도시락을 열었더니 건사료만 덜렁 들어있다고 생각해 보라. 하, 나는 그때 6호 표정이 그려져서 도저히 못 그럴 거 같다.
“엄마가 그땐 사는 게 너무 힘이 들어서…. 너네 아빠하고 사이도 안 좋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 얼마나 정신이 없었냐면 내가 너 소풍 따라간 날 쓰레빠를 신고 갔더라.”
엄마는 총각무 도시락을 싸준 소풍날과 다른 소풍날을 같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다른 날인데, 여튼 그랬다. 엄마와 내가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보면 우리 엄마는 분명히 쓰레빠를 신고 있다. 소풍날 총각무나 쓰레빠나 그게 그거다. 엄마는 미안하고 머쓱해하면서도 미안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하긴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는가 어쩌면 엄마는 자기 인생한테 미안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런 남자를 왜 만났느냐고.....엄마 인생 최대 실수다.”
“그럼 너네가 없었잖아....”
“아유, 됐어.
“아아, 내겐 운이 없었어.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었어. 운명이 일생 동안 악착같이 괴롭혔지.”
그러나 로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마님, 그런 말씀 마시라고요. 마님은 결혼을 잘못하셨어요. 그뿐이죠. 구혼자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혼인하는 게 아닌데요.” 모파상, <여자의 일생>, 302쪽
“그런 말씀 마세요. 마님, 그런 말씀 마시라고요. 마님은 결혼을 잘못하셨어요. 그뿐이죠.”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여자의 일생>- 오래전 엄마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전집, 새로쓰기로 된 그 전집 중에서 보았던 제목의 책이다. 엄마는 소싯적 그 책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인공 잔느의 인생에 얼마나 자기 자신을 대입하면서 읽었을까? 잔느도, 나의 엄마도 운이 없었던 게 아니다. 운명이 일생 동안 악착같이 괴롭혔던 것도 아니다. 단지 그저 아주 신중했어야 할 순간, 결혼하는 그 순간 잘못된 남자를 선택한 그 잘못 때문에 인생이, 소풍날의 김밥 도시락 대신 총각무 도시락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시절 엄마의 책꽂이에서 이 책을 꺼내 읽었던가? <여자의 일생>이라는 제목, 상투적인 내용이 딱히 와 닿지는 않아서 조금 읽다가 내려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문득 읽고 싶어진 이 책- 어떤 인생(Une Vie) 그대로 번역했어도 좋았겠으나 ‘여자의 일생’이라 옮긴 그 제목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듯하다. 잔느, 그 꿈 많던 소녀의 망가져가는 일생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담담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잔느의 인생도 처음부터 총각무 도시락 같지는 않았다. 부유한 집안에서 외동딸로 태어났고 부모님의 사랑을 담뿍 받았으며 잘생긴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꿈도 꾸었고 바로 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기도 한다. 하, 그러나 그 결혼은 서로 잘 알지도 못한 채 이루어진 결합이었으니, 설레던 소풍날, 도시락 뚜껑 열었더니 총각무만 덜렁 들어있던 바로 그 순간이 이윽고 잔느를 덮친다. 사랑하는 사이에 이뤄지는 결합이니 당연히 좋아야하는데 이게 무슨 곳통이란 말인가. 짐승같이 덤벼드는 저 남자! 그놈에게 몸을 내주고 밀려드는 것은 환멸, 환멸뿐이다. 그런데도 제 욕심만 채우고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든 저 동물 같은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싫다는데도 그놈은 계속 육욕만 채우려 덤빈다. 하, 엄빠에게로 나 돌아갈래! 계속 그렇게 산다면 인생이 얼마나 엿 같으랴. 그래도 다행이랄까 간혹 좋은 순간도 찾아온다. 맛없는 총각무 도시락 낼름 먹어치우고 보물찾기 놀이를 하던 그 순간처럼 잔느에게도 생의 희열과 기쁨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그러니까 거듭된 섹스 끝에 마침내 찾아온 오르가슴의 기쁨 뭐 이런 것이랄까. 그런데 잔느는 몰랐을 것이다. 잔느여, 그건 다른 놈에게서도 아니 다른 놈한테서 더 잘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그런 종류의 하찮은 기쁨이란다.
잔느, 그녀에게 얄팍한 오르가슴과 함께 얄팍한 사랑의 기쁨을 선사했던 그놈 쥘리앵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언제 내가 너의 육체를 탐했냐는 듯이 흥미가 짜게 식어 아내로부터 멀어져간다. 당연히 그럴 것이, 그에겐 이미 다른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그런 놈은 지 버릇 남 주는 일 없듯이 잔느와의 결혼 생활 내내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판다. 어디 그뿐이랴, 인색하기 비할 데 없는 구두쇠라 내 돈은 내 돈 아내 돈도 내 돈, 처가 돈도 내 돈- 후안무치가 따로 없다. 이런 남편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잔느에게는 어느덧 남편을 생각할 때면 환멸과 경멸이라는 감정만이 자리하고, 남편에게 가야 할 애정은 하나뿐인 자식, 아들 폴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또 이 여자 잔느는 어리석었으니 이 주체할 길 없는 애정 또는 집착은 아들 폴을 그릇된 길로 이끌고 이 아들은 지 애비와 마찬가지로 잔느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잔느는 환멸과 고통, 비애만 남은 삶 속에서도 내일은 좀 다르리라, 내일은 아들이 좀 달라지리라 기대하면서 삶을 향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다. “인생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닙니다.” 잔느의 마지막 말에서 어차피 죽음으로 향하는 인생, 그럼에도 내일은 조금 다르리라는 희망을, 소풍날의 김밥 도시락을 꿈꾸던 어린 아이의 심정으로 기대하며 살아가는 이 어리석은 인간들, 그들 모두의 비루한 삶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