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참 좋아하게 된 이 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는 내내 이 말이 떠올랐다. 출퇴근길, 전철을 타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거나 듣고 있다. 조그만 스마트폰에 온 정신을 쏟아 붓느라 주변을 돌아볼 새가 없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길을 걸을 때도 그 작은 화면이 전달하는 내용에 푹 빠져서 그 조그만 창을 제외하고 다른 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화면에 심취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보에 몰두하고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한 스마트폰은 계속해서 비슷한 카테고리의 정보들만 실어다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정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어떤 콘텐츠나 그것을 생산한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지할 틈도 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정보로 자신이 무언가를 ‘알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그 모래알 같은 정보로 마치 이 세상의 거대한 진실을 깨우친 것 마냥 타인에게 자기의 주장이나 주의를 강화하고 강요하며 전파하는 데 이용한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정녕 알게 된 것일까? 그 어느 때보다 정보는 넘쳐나고, 정보를 손에 넣기도 쉬어진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은 나날이 더 서로를, 자기와 생각이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일에는 인색해지는 것일까? 도리어 한줌 모래알 같은 정보로, 그 정보가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퍼 나르고, 확산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내가 오늘도 이렇게나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그런데 이런 정보를 모르는 바보멍텅구리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고 더 굳게 믿게 되는 것일까? 이런 때의 ‘앎’은 자기를 일깨우는 ‘상처’가 되기는커녕 타인을 해치는 앎, 또는 무지의 영역에 있을 때가 오히려 나을 수도 있을 그런 앎이 되고 만다.
벵하민 라바투트의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는 내내 저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 나를 괴롭힌다. 이 책의 여러 과학자들-아인슈타인부터, 슈바르츠실트, 프리츠 하버, 모치즈키 신이치,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슈뢰딩거, 드 브로이, 하이젠베르크 등등은 자기 나름으로, 자신이 아는 ‘정보’, 자기의 ‘창’을 이용해 세상을 알고자, 이 세계의 구조를 알고자 애쓴다. 때로 그 노력은 자기의 주장이 옳음을, 그것이 선(善)이고 유일한 진실임을 밝히기 위해 상대를 짓밟는 형태로 일그러지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세계를 이해한 그들의 방식, 그 발견이 때로는 거대한 폭풍처럼 자신의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인류를 덮쳐버리기도 한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으로 우리에겐 너무나 아름다운 푸른색이 되어버린 프러시안 블루의 부산물인 시안화물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사용한 독가스 치클론B의 시원이기도 하며 공기 중에서 질소를 추출해 ‘공기에서 빵을 끄집어낸 사람’이라 불렸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인류를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그 재능을 지나치게 활용하는 바람에 온갖 치명적인 독가스들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이 연금술사의 지식, ‘앎’은 혁명이면서도 상처인 것이다. 이런 지식의 ‘얼룩’은 슈바르츠실트의 특이점으로 이어진다. ‘빛은 특이점에서 결코 탈출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눈은 특이점을 볼 수’ 없으며 ‘우리의 정신 또한 특이점을 이해할 수 없다.’(71쪽)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으며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 만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음을 그는 깨닫는다. 슈바르츠실트는 그런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의 조국 독일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슈바르츠실트처럼 인류의 앎이, 몇몇 특별히 뛰어난 천재들의 지식이 인류를 블랙홀로 이끌고 갈 수도 있음을 인지한 사람은 또 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학자로 알려진 ‘알렉산더 그로텐디크’가 바로 그이다. 그는 아버지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하고 어머니와 프랑스 난민 수용소를 전전하는 등 나고 자란 환경 탓인지 수학 천재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68혁명 시기를 전후로 사회운동에 전념하며 모든 학문적 활동을 접고 은둔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 대전 중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말미암아 평생 아나키즘적·평화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보였던 그는 ‘과학계의 윤리’를 운운하며 크라포르드상을 거절하기도 했다. 이것은 어쩌면 슈뢰딩거와 논쟁할 수밖에 없었던 하이젠베르크의 ‘앎’-실존의 고독과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슈뢰딩거의 재주가 아무리 모든 사람을 매혹시켰더라도 이것이 막힌 길임을, 참된 이해로부터 멀어지는 막다른 골목임’(201쪽)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의 오류를 밝히려 할수록, 증명을 위한 증명을 할수록 자신들의 찾아낸 공식의 숲에서 떠도는 허상들만 존재할 뿐, 어떤 새로운 발견을 했다는 환희와 기쁨은 잠시, 그 이후의 깊은 고독이 그로텐디크나 하이젠베르크와 같은 이들을 사로잡는다. 그들은 어쩌면 세계를 알려고(know) 애쓸수록 세상을 이해(understand)하는 것에서는 멀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은 이 거대한 자연 앞에서 그저 ‘불안한 확률로서 존재할 뿐’인 그런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그 깊은 고독을 이해한 이들은 아니었을까. ‘벌목되지 않거나 가뭄, 질병, 무수한 해충, 균류, 역병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늙은 나무’는 결국 ‘열매를 너무 많이 맺는 바람에 쓰러진다.’(198쪽) 너무 많은 지식과 정보, 앎이 오히려 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조용히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