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관 을유세계문학전집 115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 지음, 이경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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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출두요!” 소리와 함께 산해진미를 갖춰놓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있던 탐관오리들이 허둥지둥 일어나 요리조리 숨느라 정신이 없다. <춘향전> 같은 우리의 옛 고전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풍경이라 꽤 익숙한 모습이다. 고골의 <감찰관>을 읽으니 이런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감찰관>은 딱,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데에만 혈안이 된 탐관오리 ‘안톤 안토노비치 스크보즈니크’ 시장(市長)은 어느 날 자신이 다스리는 소도시에 감찰관이 출두할 것이라는 통지를 받고 화들짝 놀라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자기의 부정부패는 감추고 자신이 얼마나 이 도시를 잘 운영하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교육감, 병원장, 판사, 경찰서장, 우체국장 등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작당모의를 한다. 그러니까, 감찰관이 오면 교육은 이렇게, 아픈 환자들은 이렇게, 범죄자들은 이렇게 관리를 잘~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도록 모두가 입을 맞추는 것이다. 이 마을의 관리들은 대개 시장만큼이나 부정부패로 얼룩져있기 때문에 그의 이런 제안이 불쾌할 까닭이 없다. 불쾌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게으름과 부패를 덮을 수 있는 묘안이라며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감찰관의 매의 눈을 피하고자 머리를 맞댄다. 마치 장학사가 온다는 소리에 며칠 전부터 온 학교가 때 빼고 광내느라 부산하기 짝이 없던 어린 시절의 그 교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온다던 감찰관은 보이지 않고 마을의 두 지주 봅친스키와 돕친스키가 헐레벌떡 나타나서는 한다는 소리가, 허우대 멀쩡한 한 젊은이가 저 여관에서 떠날 줄 모르고 기거한다는데, 하는 행동이 영락없이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높으신 나리, 관리, 그러니까 감찰관 같다는 게 아닌가. 사라토프현으로 간다고는 하는데,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벌써 두 주일째 그 여관에 머물면서 무엇이든 다 외상으로 먹고, 한 푼도 계산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아, 이건 영락없이 감찰관이다! 돈도 내지 않고 먹고 마시면서 떠나지도 않다니! 감찰관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 이때부터 마을의 시장, 경찰서장, 판사, 의사 너 나 할 것 없이 난리가 난다. 누구보다 똥줄이 타는 사람은 시장이다. 어서 감찰관을 모셔서, 그를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난 사람이 바로 문제의 인물 ‘홀레스타코프’로, 스물셋의 이 새파란 청년은 사실 감찰관은커녕 하급 관리로 무위도식하면서 돈을 날리고는 고향으로 갈 돈마저 떨어져 여관에서 무작정 기거하는 중이었다. 헌데 이 마을의 시장이며 유지들이 무슨 이유인지 자기를 융숭하게 대접하면서 떠받들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이 사람 저 사람 돈까지 찔러주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 그는 한바탕 이 소동을 철저히 즐기기로 한다.

《감찰관》에 실린 세 편의 희곡 <감찰관>, <결혼>, <도박꾼>을 아주 재미나게 읽었다. 어떤 장면에서는 낄낄 웃음이 터지기도 했는데 읽다가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예전에도 고골이 이렇게 재미있었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가만히 책장을 보니 나, 원, 참, 이것 보게. 펭귄클래식에서 나온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이 보란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 나는 몇 년 전에 펭귄클래식 버전으로 <감찰관>을 읽었다. 고골의 <코>와 <외투>는 너무나 유명해서 아직까지도 그 내용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데 어찌하여 <감찰관>은 기억에서 깡그리 잊혔을꼬? 어처구니가 없다. 아마도 그 몇 년 전에는 내가 이 <감찰관>을 재미나게 읽지는 못했나 보다. 아니, 어쩌면 <코>와 <외투>가 너무 강렬해서 상대적으로 <감찰관>의 기억은 희미했던 게 아닐까......

아무튼 그때 그 시절 나는 고골을 단지 ‘풍자’ 작가로만 생각했다. 그러고는 풍자만 잘하는 작가의 작품은 그다지 재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고골을 더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귀가 얇은 나는, 이번에 나보코프가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고골을 극찬하는 것을 보고 고골을 다시 읽어보리라 마음먹고는, 가장 먼저 눈에 띈 이 책 《감찰관》을 읽었는데, 어라라라? 정말 재미있네? 단순히 풍자만 잘하는 작가가 아니었네? 물론 풍자는 기본이지만 거기에 뭔가가 더 있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 아마도 이것은 모두 귀 얇은 독자인 나에게 나보코프 선생이 속닥속닥 “이 고골 한번 잡숴봐~절대 후회 안 해.” 속삭인 탓이 컸던 게 아닐까 싶다.
 
<감찰관>의 가장 큰 매력은 ‘홀레스타프’라는 천진한(?) 인물의 말과 행동에 있다. 그는 놀고 마시고 농땡이 부리기 좋아하는 철부지이다. 탐관오리인 시장을 비롯해 마을의 유지들을 속이는 일에 악의나 고의성은 없다. 단지 그들이 그를 감찰관이라 오해하고, 모든 판을 벌여준 것이다. 그들 스스로 잔칫상을 거하게 차려줬는데 배불리 먹고 즐기면 그만이지 누가 마다할까. 홀레스타프는 이 눈먼 환대를 마음껏 누린 뒤 이제 그만 발을 빼야 할 때라는, 영특한 하인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난장판 무대에서 퇴장한다. 홀레스타프가 내뺀 뒤에야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그들은 그제야 한탄하면서 발을 구르지만 이미 늦었다. 설상가상, 가짜 감찰관은 떠나고 진짜 감찰관이 나타날 일만 남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진짜 감찰관은 진짜로 진짜 감찰관일까? 조금만 눈을 뜨고 이성적으로 판단했다면 홀레스타프가 한낱 무위도식하는 청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도 남았을 텐데, 자기들이 욕망에 눈이 멀어 제 스스로 속고 만 그들 앞에 또 다른 ‘가짜’ 감찰관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이렇게 속고 속이는 기만의 세계, 자기 욕망에 눈이 멀어 자기 스스로 제풀에 걸려 넘어지는 이야기는 <결혼>과 <도박꾼>에서도 이어진다. <결혼>도 재미가 대단한데, 이 극 안에서 펼쳐지는 결혼 또는 중매 대소동은 어찌 보면 오늘날의 결혼정보회사 듀오 매칭 시스템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요즘 흔히들 집도 마차도 약속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깃털 이불과 요만 주니까.”(183쪽)과 같은 대사를 읽노라면  예나 지금이나 결혼이란 참, 사랑의 결실은커녕 사랑을 빙자한 자본과 자본의 교환 관계가 아닌가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난다. 이 작품에서는 한 여성을 두고 다섯 명의 구애자들이 저마다 달려들어 그 여성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찾고자 안달복달하는데 그 남자들 대부분은 여성이 젊은 데다가 지참금으로 많은 재산을 갖고 오리라는 말에 혹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 그런 중에도 자기가 꼭 바라는 조건만큼은 다들 가지각색이다. 신붓감은 꼭 프랑스어를 해야 한다느니, 교양이 넘쳐야 한다느니, 지참금이 무조건 많아야 한다느니, 외모가 어때야 한다느니…. 그런 조건에만 눈이 멀어서 마침내는 눈앞의 여성이 자기의 이상형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모두가 스스로 기만당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또 재미난 인물은 ‘코치카료프’인데 그는 어떤 면에서는 <감찰관>의 ‘홀레스타코프’와 비슷하다. 기만당하기 쉬운 인물들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갖고 놀면서 낄낄 대는 유형으로, 이미 결혼한 몸인데도 친구 ‘포드콜료신’을 결혼시키려고 안달이 나서 누구보다 이 중매에 열심이다. 7등 문관인 포드콜료신은 ‘이제껏 가만있다가 결혼한다는 게 어색’하다며 몸을 사릴 정도로 어딘가 아이 같고 우유부단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알지 못해 주변 사람 말에 쉽게 휘둘리는 인물인데 그러다 보니 코치카료프가 부추기는 말에 넘어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에게 반했다고 착각하고, 그 여자가 자기에게 딱 알맞은 상대라고 확신하고 결혼하기에 이른다. 포드콜료신을 지켜보노라면 정말 그렇게 결혼해도 되는 거야? 싶을 정도로 걱정스러운데, 고골의 희곡이 조금 과장되었을 뿐, 이런 식으로 주변의 부추김에 넘어가서 남들이 다 하니까, 휩쓸리듯이 결혼이라는 중대한 일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가. <결혼>에서 벌어지는 소동이 저 먼 나라 먼 시대에서만 일어났던 일은 아닌 것 같다. 헌데 문득 이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이, 코치카료프는 자기 결혼 생활이 불만스러운 것 같은데 친구를 왜 그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 못해 안달일까? 과연 그의 속셈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자기 혼자서만 지옥에 빠져 사는 게 억울해서 남들도 그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소시민의 전형은 아닌가 싶어진다. 이런 모습도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과 닮지 않았는가. 자기 결혼 생활도 그닥 행복하지 않으면서 “결혼해라, 결혼해라.”를 입에 달고 사는 그런 이들 말이다.



정말, 생각해 보니, 몇 분 후면 결혼한 몸이 되는 거야. 정말 동화에나 나오고 말로 표현할 수도, 표현할 말을 찾을 수도 없는 그런 행복을 갑자기 맛보게 되겠지. (약간 침묵한 후) 그런데 이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니, 왠지 무서워지는군. 평생을, 영원토록 어떻게든 자신을 얽어매고, 그다음엔 물릴 수도, 후회할 수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모든 게 결정되고, 모든 게 끝나는 거야. (237쪽)


포드콜료신은 그렇게 이끌려 결혼식을 바로 코앞에 둔다. 그는 이대로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고 말 것인가? 바로 이때 문득 위와 같은 의혹이 떠오른다. 동화에나 나올법한 그런 행복을 갑자기 맛 볼 (수도 있겠지만.... 아니야 아니야), ‘평생을, 영원토록 어떻게든 자신을 얽어매고, 그다음엔 물릴 수도, 후회할 수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구렁텅이가 결혼이 아닐까? 아, 이거 큰일났다!  남들의 욕망을 자기의 욕망이라고 착각하고, 남들도 다 그러니까 나도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제 스스로 올가미에 걸려들려는 그 순간에 그래도 잠깐 눈이 떠지는 순간이 찾아오긴 한 것이다.  포드콜료신의 최후의 선택은 어처구니없고 엉뚱하기 짝이 없지만 고골은 그래도 이렇게라도 사람들이 눈을 떠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속고 속이는 기만의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사기꾼에게 낚이지 말고 부디 눈을 뜨라는, 고골의 당부가 어쩐지 희미한 웃음과 함께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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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6-29 15: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거 정말이지 너무나 재미있겠는데요. 2022년 남은 날들은 책을 안살거지만 일단 장바구니엔 담아둡니다.

잠자냥 2022-06-29 15:43   좋아요 1 | URL
*동공지진* 진짜요? 앞으로 점심에 한 가지 메뉴만 먹겠다는 말보다 안 믿겨짐....!

독서괭 2022-06-29 16:18   좋아요 1 | URL
아무도 안 믿을 선언을 왜 자꾸.. ㅋㅋ

바람돌이 2022-06-29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재밌을듯요. 세상에 읽고싶은 작가들이 너무 많아서 고민입니다. 지금 다 읽으려고 하는 작가들은 뜌 언제 끝낼지..... 감찰관 쏙 넣어놓고 고골 시작 작품으로 기억하겠습니다

잠자냥 2022-06-29 15:43   좋아요 0 | URL
자매품 <외투/코>도 꼭 읽어보세요~ 전 조만간 <죽은 혼>을 만나보겠습니다.

유부만두 2022-06-2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로씨아 문학에 빠지시는 겁니까??!!

잠자냥 2022-06-29 16:12   좋아요 0 | URL
원래도 좋아했지만 더 빠져보렵니다요!

유부만두 2022-06-29 17:34   좋아요 1 | URL
우라!!!

독서괭 2022-06-29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봅친스키 돕친스키 왜 이렇게 웃기죠 ㅋㅋㅋㅋㅋㅋ
전 <외투>를 쏜살문고인가.. 읽었는데 외투, 코,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여기 실린 감찰관, 결혼도 넘 재밌겠네요!

잠자냥 2022-06-29 16:46   좋아요 2 | URL
봅친스키 돕친스키 하는 짓도 웃깁니다. 연극으로 봐도 왠지 재미날 거 같아요.
<감찰관>도 감찰관이지만 전 이번에 <결혼>이라는 희곡의 발견. 이거 부제가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2막극‘인데 이 말도 뭔가 웃겨요. ㅋㅋㅋㅋㅋ

mini74 2022-07-08 18: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냥님 이 더위에 고양님들 잘 계신지 ㅎㅎ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2-07-08 1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2-07-08 19: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문학은 잠자냥님이죠. 축하드립니다~!! 전 감찰관만 읽어봤는데 살까말까 고민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