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크리스티 지만지 드라마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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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오닐의 희곡 <애나 크리스티>에는 새로운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다른 문학 작품에 견주어 보면 그다지 새로운 캐릭터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유진 오닐의 다른 희곡에서는 볼 수 없는 당찬 여성 인물이 등장하기는 한다. 애초에 이 작품은 오닐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었다. 그런데 개작을 거쳐 <애나 크리스티>로 브로드웨이에 올려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은 <지평선 너머>(1920)에 이어 1922년, 그에게 두 번째 퓰리처상을 안겨준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서 <애나 크리스티>로 제목이 달라진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비슷한 듯, 다른 두 제목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늙은 선장으로 젊은 시절에는 세계 곳곳을 항해하고 다녔으나 이제는 낡은 석탄 바지선에서 ‘마티’라는 여자와 초라하게 살아가는 신세이다. 스웨덴이 고향인 그는 그곳에 아내와 딸도 있었으나 떠도는 선원의 삶이다 보니 가정에 정착할 수 없었고, 딸이 다섯 살일 때 스웨덴에서 마지막으로 본 후로는 15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다. 그의 딸 이름이 바로 ‘애나 크리스토퍼슨’, 줄여서 ‘애나 크리스티’이다. 즉 유진 오닐은 이 희곡을 처음에는 아버지 크리스에 맞춰서 썼다면 개작 때는 딸인 애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고 볼 수 있다.

어느 날, 뉴욕시 근처 ‘자니 더 프리스트’ 술집에 간 크리스는 오래전 미네소타 농장에 두고 온 딸에게서 편지가 온 것을 알게 된다. 편지를 뜯어본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데, 딸이 그를 만나러 곧 이곳으로 온다는 것이다.  15년만의 재회이다. 그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은 물론 ‘마티’라는 여인과 함께 바지선에서 살아가는 것을 딸에게 숨기고만 싶지만, 한편으로는 딸을 만난다는 기쁨을 감출 수 가 없다. 이래저래 들 뜬 마음으로 일단 술을 깨러 잠시 자리를 비우는 크리스. 그 사이 딸 애나가 술집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술을 마시던 ‘마티’와 허물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신세타령을 늘어놓게 된다.

크리스의 아내, 그러니까 애나의 엄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애나가 어릴 때 돛배의 갑판장이던 그는 1년에 집을 며칠 밖에 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 딸을 홀로 둘 수 없었던 그는 미국으로 애나를 데려와 미네소타에서 농장을 하는 사촌의 집에 맡긴다. 차라리 사촌들이 애나를 돌보는 게 더 좋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간간이 오는 소식을 통해 애나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독자는 애나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만 보고도 그녀의 삶이 순탄치 않음을 예상할 수 있다. 아니, 부모 없이 먼 친척의 농장에서 여자아이 홀로 자라난다고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는 온갖 불행이 그녀에게도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20세에 키가 크고 금발인 장성한 아가씨’인 애나는 ‘거구에  바이킹의 딸 풍의 미인’이지만 ‘지금은 건강이 무너지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군에 종사한다는 모든 표시를 분명히 보이고 있다.’(26쪽)고 오닐은 묘사한다. ‘그녀의 젊은 얼굴은 메이크업 밑에 깔린 강퍅하고 냉소적인 표정을 벌써’부터 보이고 ‘시골뜨기 출신 매춘부의 값싸고 번지르르한 의상’이 그녀의 모든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준다. 크리스의 애인인 마티는 애나의 모습을 보고 한눈에 그녀가 자신과 같은 부류임을 알아챈다. 마티 그녀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애나처럼 살다 이제 늙어서는 크리스 같은 남자에게 정착해 그와 함께 바지선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으리라. 애나는 마티가 아버지의 애인인 줄도 모르고 술 한 잔에 지나간 사연을 줄줄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믿고 맡긴 농장에서 친척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는 농장을 떠나 몸을 팔며 살아가던 그녀는 모든 불행이 남자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병들고 지친 애나는 아버지에게 의지하고자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평생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아버지이지만 자신이 푹 쉴 때까지 방을 하나 얻어서 먹고 지내도록 해 줄 수는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게 아주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내가 넘어졌을 때 거기다 발길질을 하죠. 남자들, 남자라면 다 미워요. 아버지라고 다른 남자들보다 나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아요.”(31쪽) 말한다. 실제로 늙은 아버지는 돈도 없고 번듯하게 머물 집도 없다. 석탄 바지선에서 살아간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기가 막힌 애나. 그럼에도 갈 곳이 없어 아버지와 함께 바지선을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삶을 시작한다.

크리스는 딸의 과거(상처)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딸이 그저 고된 노동으로 지쳤으리라 여기고는 바다 생활이 그녀를 건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바다는 ‘사방에 물, 태양, 신선한 공기’, 애나를 ‘강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좋은 음식뿐’이다. 밤에는 달빛과 증기선이 지나가는 것도, 범선이 돛을 달고 항해하는 것도 볼 수 있으며, 예쁜 건 모두 볼 수 있는 환상적인 공간이다. 처음에 애나는 이런 아버지의 말에 콧방귀를 뀌지만 피는 속일 수가 없는지, 서서히 바다 위를 떠도는 삶에 만족하며 건강을 되찾는다. 애나는 크리스에게 “배에서 사는 게 육지와 이렇게 다를 줄을 몰랐어요. 내가 남자라면 배에서 일하는 걸 너무 좋아할 것 같아요. 아빠가 왜 이제까지 선원 일을 했는지 잘 알겠어요.” 말하면서 점점 밝고 건강해진다. 그런데 크리스는 이런 딸의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애나가 보는 바다의 모습은 진짜 바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애나는 그저 바다의 좋은 부분만 보고 있다.



크리스: 안개 속에서 이렇게 밖에 나와 있는 건 네게 좋지 않아.
애나: 왜요? (이상한 환희를 느끼며) 저는 이 안개가 좋아요! 정말이에요. 이건 너무 (적절한 단어를 찾으려고 머뭇거리다가) 우습고 조용해요. 마치 제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 같아요.
크리스: (역겹다는 듯이 침을 뱉으며) 안개는 바다가 부리는 가장 더러운 속임수야! (<애나 크리스티>, 50쪽)


그리던 어느 날 밤, 폭풍우가 일어나고 두 사람은 조난당한 선원들을 구출한다. 그들 중 젊고 잘생긴 맷은 처음에 애나를 크리스의 정부로 오인하지만 결국 그녀가 크리스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애나가 밝고 건강하고 정숙한 여인이라 생각한 그는 애나에게 구애하기 시작한다. 이 둘 사이가 차츰 가까워지자 크리스는 불안해하면서 ‘이번에도 바다가 못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며 맷이 애나와 가까워지는 것을 온갖 수를 써서 막으려고 한다. 크리스는 바다의 술수, 그러니까 맷이라는 젊은 남자가 딸을 꾀려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그리고 맷은 이 늙은이로부터 애나를 빼앗을 수 있을까? 두 남자가 애나를 놓고 바다 위에서 실랑이를 벌인다. 그런데 이 두 어리석은 남자들의 갈등을 지켜보던 애나는 참다못해 이렇게 소리 지른다.



애나: 우선, 두 사람에게 말할 게 있어, 당신들 두 사람 중 하나가 나를 소유해야 할 것처럼 말했지. 그런데 아무도 나를 소유할 수 없어. 알겠어? 나 자신 말고는,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고, 어떤 남자도, 그게 누구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 두 사람 어느 누구에게도 나를 먹여 살리라고 부탁하지 않을 거야. 나 혼자 살아갈 수 있어. 이렇든 저렇든, 내가 내 주인이야. 그러니 허황된 꿈은 버려! 당신, 그리고 당신의 명령 같은 거! (110~111쪽)


맷을 반대하는 크리스의 모습에서는 자신의 딸(우나 오닐)이 채플린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던 유진 오닐 그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크리스는 선원 생활을 오래했기에 맷이 어떤 생활을 했을지 눈에 뻔하다. 항구마다 여자가 있을 것이며 지금은 애나에게 반했지만 다른 항구에 가면 곧 또 다른 여자를 만날 것이다. 행여 애나와 결혼한다 한들 자신처럼 정착하지 못한 채 아내를, 자식을 외롭게 만들 것이다. 애나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랑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왜 젊은 시절에는 딸을 방치해놓고, 딸이 육지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그는 여전히 딸의 과거가 어떤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딸이 육지의 좋은 남자를 만나 육지에서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란다. 폭풍과 풍랑이 이는 바다의 불안정한 삶을 딸에게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육지에서 애나는 행복했던가?

맷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애나가 ‘정숙하고 건강하고 기품 있어 보여서’ 반했다. 그 또한 그녀의 과거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그가 이 항구 저 항구에서 만났던 여자들과 애나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면서 애나를 칭송하고 떠받든다. 그러나 애나는 사실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그녀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두 남자 모두 ‘안개’에 가려 삶에서, 애나에게서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만 보는 것이다. 애나는 그런 그들을 비웃지만 한편으로는 연민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랑한다.

이 작품은 유진 오닐 희곡 중에서는 드물게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데, 과연 그 결말이 해피 엔딩일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애나의 과거를 알고 미치광이처럼 돌변하는 두 남자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두 남자를 끌어안고 포용하는 애나는 “내가 내 주인!”이라 외치는 당찬 캐릭터로 그려졌을지언정, 어리석은 두 남자를 구원해주는 착한 창녀, 성스러운 창녀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진 오닐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서 <애나 크리스티>로 개작하면서 자신의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 인물을 창조하고도 한계를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애나와 크리스, 맷 이 세 인물이 보여주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은 그곳이 육지이든 바다이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인간의 모습과 닮았다. 결국 바다, 삶이라는 바다가 부리는 ‘안개’에 눈이 멀고 마는 가여운 인물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또 그 ‘안개’를 헤치고 어떻게든 나아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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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5-10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요 인물의 시점을 바꿈으로써 완전히 다른 소설을 만드는것도 괜찮은 시도인듯하네요. 두남자의 말도 안되는 소유욕에 대한 애나의 일침 맘이 드네요. ㅎㅎ

잠자냥 2022-05-10 16:31   좋아요 2 | URL
그러게 말이에요, 아버지는 그렇다치고 맷은 언제 봤다고 애나가 자기 소유인 것처럼 구는지 원!

다락방 2022-05-10 16:3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유진 오닐은 <밤으로의 긴 여로>만 읽어봤는데, 이 작품 꼭 읽어보고 싶네요. 장바구니로 넣습니다. 슝-

잠자냥 2022-05-10 18:16   좋아요 2 | URL
사악한 가격이지만 꼭 한 번 읽어보셈~~

coolcat329 2022-05-10 1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잠자냥님 덕분에 유진 오닐에 더욱 관심이 갑니다. <밤으로의 긴 여로>로 출발해보겠습니다.

잠자냥 2022-05-10 18:17   좋아요 3 | URL
<밤으로의 긴 여로> 강추입니다~!

새파랑 2022-05-10 1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희곡 작가출신 잠자냥님의 희곡이군요~!! 요새 희곡에 대한 감이 떨어졌는데 ㅋ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잠자냥 2022-05-10 21:04   좋아요 4 | URL
아이고 작가는요 무슨, ㅎㅎ 요즘 새파랑 님 희곡 좀 뜸하시던데, 이걸로 다시 발동 걸아보세요~

햇살과함께 2022-05-10 2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찜!

mini74 2022-06-10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냥님! 꽃분홍이 어울리는 분 ㅎㅎ ㅎ축하드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