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난 고전은 주로 10대 때 읽었던 터라 세월이 흘러 다시 읽으면 그 어린 날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도 그랬다. 나는 이 책을 어린 시절에(기억으로는 열다섯 살 아래 때) 엄마의 세로쓰기 책으로 몰래 읽었는데, 몰래 읽은 까닭은 거기서 뭔가 그 나이 때 읽으면 안 될 것 같은 단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단어는 ‘창녀’라든가 ‘몸을 판다’와 같은 것들로 읽으면서 뭐랄까 의식적으로 아, 몰래 읽어야겠다! 싶어진 것이었다. 그때로부터 세월이 흘러 나는 이 작품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그리고 그 시절 나를 괴롭히던(?) 단어는 또 다른 의미로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창녀 ‘소냐’- 가족을 위해 몸을 파는 소냐, 자기보다 힘없고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두 여인을 잔혹하게 도끼로 살해한 죄인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하는 소냐-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녀는 창녀인가? 우리의 위대한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도끼선생조차도 여자란 창녀 아니면 성녀, 창녀 아니면 엄마, 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구나! 안타깝기 짝이 없어졌다. 그렇다, 그 어린 날엔 죄를 지은 라스콜리니코프, 그러니까 로쟈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벌을 받게 되는 구도에 집중해 읽었다면 이제는 다른 것들이 보인 것이다. 책 읽기의 힘이자 세월의 힘이라고나 할까.
<죄와 벌>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라 줄거리를 소개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이다. 가난으로 대학을 중퇴한 스물세 살의 청년 라스콜니코프가 평소 드나들던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그녀의 동생마저 우연히 살해하고), 신경증에 시달리던 중 가난한 주정뱅이의 딸인 소냐를 만나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구원받는다는 아주 통속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통속성을 넘어서게 하는 힘은 라스콜리니코프, 즉 로쟈가 살인을 하는 동기에 있다. 그는 평소 사람은 자연 법칙에 따라 대체로 두 가지 부류- ‘열등한(평범한) 부류’와 ‘재능이나 능력을 소유한 사람’으로 나뉜다고 생각하고 있다(1권, 404쪽). 열등한 부류는 ‘오직 자신과 유사한 종을 생산하는 데만 쓰이는, 재료가 되는 사람’이며 그와 달리 비범한 자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새로운 말을 할 수 있는 재능이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 비범한 부류를 대표하는 사람은 리쿠르고스, 솔론, 마호메트, 나폴레옹 등 인류의 입법자들로 그들은 라스콜리니코프가 보기에 “모두 하나같이 범죄자”이다. “왜냐면 새로운 법을 내놓음으로써 사회에서 신성하게 존중되고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오래된 법을 파괴했기 때문”이다(1권 403쪽). 그러므로 뭔가 새로운 걸 말할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성상 반드시 범죄자일 수밖에 없다. 그는 이런 주장을 펼친 논문을 쓴 바 있으며(이 논문은 예심판사가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 사실을 밝히는 데 주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런 주장, 생각에 따라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오히려 인류에 해악만 끼치고 있는 ‘한낱 질병 같은’(1권, 426쪽) 노파를 죽이려는 욕망을 품는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우연히 들른 한 선술집에서 어느 대학생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자신의 주의/주장이 더 옳다고 확신하게 된다. 그 대학생들은 관리의 미망인으로 전당포를 하면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수전노 같은 노파를 헐뜯으면서 이런 논리를 펼친다. “수도원으로 가게 될 노파의 돈으로 도모하고 개선할 수 있는 좋은 일이나 사업이 백 개, 천개는 돼! 수백 수천의 존재가 자기 길을 찾게 되지. 수십 개의 가정이 극빈과 붕괴와 파멸과 타락과 성병진료소에서 구원될 수 있어. 이 모든 게 그 할멈 돈으로 가능하다고. 노파를 죽이고 돈을 취한 다음, 그 돈의 도움으로 온 인류와 공공을 위한 일에 봉사하면서 헌신하는 거야. [...] 하나의 작은 범죄가 수천 가지 선행으로 씻길 수는 없을까? 하나의 죽음과 백 개의 생명을 맞바꾸는 것, 이게 진짜 산술 아니겠어!”(1권, 104쪽)
라스콜리니코프는 나폴레옹처럼 영웅이 되고 싶다. 인류에 해악을 끼치는 저 한낱 질병 같은 존재를 없앰으로써 그 노파의 돈으로 다른 인류를 구하고 싶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망상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이른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원칙’을 죽인 셈이다. 살인 후 그는 소냐에게 항변한다. “난 단지 이[蝨]를 죽였을 뿐이야, 무익하고 혐오스럽고 해악을 끼치는 이 말이야.”(2권, 226쪽)- 이렇게 소리치면서 자신의 범죄를, 그것도 살인이라는 잔혹한 행위를 변명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모습에서는 절로 반감이 든다. 아무리 사회에 해로운 존재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그 존재를 살해할 권리가 있는가? 심지어 전당포를 하며 살아가는 그 노파가 죽여야 할 만큼 이 사회에 해를 끼친 게 무엇인가? 게다가 우연히 그 살인 장소를 찾았다가 목숨을 잃고 마는 가엾은 리자베타는 죽은 노파보다도 더 무해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보다 선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평범하기에, 비범하지 못하고 열등하기에 ‘오직 자신과 유사한 종을 생산하는 데만 쓰이는, 재료가 되는 사람’이기에 죽어 마땅한가? 나는 이런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정신이상자 라스콜리니코프가 도리어 해롭기 짝이 없는 ‘이[蝨]’로 보인다.
<죄와 벌>에는 라스콜리니코프 말고도 이[蝨]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한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인물로, 도스토옙스키가 성녀처럼 그린 창녀 ‘소냐’와 대척점에 선다. 로쟈 외에도 로쟈의 여동생 ‘두냐’와 결혼을 꾀하다 실패한 ‘루진’ 그리고 루진보다 먼저 두냐를 탐했던 남자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들이다. 로쟈, 루진, 스비드리가일로프 이 세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망상에 빠져 있고 그 망상을 정의라고 믿는 부류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여성형이라고나 할까? 그와 닮았으면서도 그의 단점은 제거한 인물이 동생 두냐인데, 그런 면에서 두냐는 소냐의 평범한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냐는 궁핍한 환경 속에서도 가정교사로 돈을 벌며 가족을 부양한다. 못난 오라비 로쟈의 학비까지 대주면서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한다(소냐가 몸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것과 달리 두냐는 지식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다). 소냐보다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족을 부양하기에, 일탈의 끝을 가지 않았기에 두냐는 소냐에 비해 평범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로쟈 같은 인물을 애초에 구원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인물이다. 성녀도 창녀도 어머니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성!
두냐를 탐냈던 그 두 남자, 루진과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실패가 그것을 증명한다. 로쟈는 소냐로 인해 구원받고 새 삶의 희망을 꿈꾼다. 그러나 루진은 어떠한가? 그는 이 작품에서 가장 비열한 족속이다. 졸부처럼 벼락출세(?)를 하고는 자기 신분을 높일 요량으로 귀족인 두냐를 꿈꾼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두냐인가? 두냐의 가족은 귀족 신분인데도 돈이 없다. 몰락한 귀족 집안의 가난한 딸! 돈이 없는 장모와 아내는 분명 그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것이다! 루진은 그런 점을 노리고 두냐와 약혼하고,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점을 간파한다. 게다가 루진은 두냐에게 거절당하고도 끝까지 그녀를 포기 못하고 두냐를 손에 넣을 궁리를 하던 중 소냐에게까지 간계를 부린다. 로쟈가 만일 죽여 마땅한 이[蝨] 를 찾아 헤맸다면 가장 먼저 이 루진을 죽였어야 하지 않을까?
두냐가 가정교사로 있던 집안의 가장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여러 면에서 로쟈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방탕한 데다가 악한 짓을 자행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선함이 깃들어 있어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기꺼이 도와주는 이중적인 인물이다(그런 면도 로쟈와 비슷하다). 아내가 있으면서도 두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두냐를 평생 흠모한다. 그 또한 두냐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루진과는 또 다른 비열한 방법으로 그녀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 간계 또한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결국 끝끝내 두냐의 마음을, 그러니까 구원을 얻지 못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점에서 일말의 갱생의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으나 루진, 이 인물은 끝까지 자기변명과 함께 슬며시 사라진다는 점에서 진정한 이[蝨], 이 사회의 이[蝨], 그러나 대다수를 이루는 이[蝨]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두냐는 자신의 이성과 직감을 따라 이런 비열한 두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다. 가난에 시달리며 늙은 어머니와 철없는 오빠를 부양하는 환경 속에서도 결국 돈을 무기로 자신의 마음을 사보려던 두 남자, 루진과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는 심지어 오빠 로쟈만큼 똑똑해서 그와 논쟁을 벌일 정도이다. 이런 그녀의 참된 가치를 알아보는 인물은 이 작품에서 라주미힌 정도이다(하지만 라주미힌도 두냐의 아리따운 외모에 꽂힌 부분이 많아 한계가 있다). 그에 비해 소냐는 두냐보다 훨씬 나약하고 천진한 어린아이와 같다. 지적으로 두냐보다 뒤처지며 오직 순종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면모로 로쟈의 마음을 여는 인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추악한 진실을 듣고도 그에게 자기의 죄를 외면하지 말고 당당히 죗값을 치르라고 말하고 그를 정죄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끌어안는다. 그가 유형을 떠나고도 그 뒤를 따라가 매일같이 면회를 가고, 그가 아플 때는 헌신적으로 간호해 다른 죄수들로부터 ‘우리의 어머니’라는 칭송까지 듣는다. 이런 소냐의 모습은 예수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아, 도끼선생이여, 어찌 당신에게조차 여자란 창녀 아니면 성녀 아니면 어머니뿐인 것이란 말인가! 게다가 소냐의 이름 ‘소피야’는 그리스어로 ‘지혜’를 뜻한다. 이 무렵 여자의 지혜란 두냐가 갖추고 있는 지식과 당당함이 아니라 소냐의 헌신과 순종 믿음이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런 소냐로부터 감화받아 죄를 뉘우치게 된다. 비록 끝까지 자기가 나폴레옹이 되지 못한 것을 억울해하고 그 사실에 분노하지만, 자기가 ‘겁쟁이에 비열한 놈’(2권, 223쪽)이라는 것도, 뚜렷한 대의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과감히 감행한다는 것’(2권, 228쪽), 그것 하나 때문에,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도 아니고 “돈과 권력을 얻어 인류에게 선행을 베풀고 싶어서 죽인 것도 아니”고 단지 그냥 “나 하나만을 위해서 죽인”(2권, 230쪽)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다른 모두와 똑같이 이[蝨]에 불과”(2권, 231쪽)하다고 절규한다. 이런 못난 인간도 결국에는 소냐로 인해 구원받고 마음의 평온함을 얻어 감옥에 있으면서도 도리어 자유로워진다. 게다가 앞으로의 삶, 형기를 마치기까지 아직 긴 시간이 남았으나 “무한한 행복” 드리워질 그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 그 두 사람의 미래만을 생각한다면 <죄와 벌>은 나름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역시 의구심은 남는다. 자기의 지혜로 이[蝨]를 거부하고 이[蝨]가 아닌 사람을 선택한 두냐는 한낱 필부(匹婦)로서 그치고 말지만 이[蝨]가 이[蝨]임을 알면서도 온몸으로 그 이[蝨]를 끌어안은 소냐는 창녀에서 어머니가, 어머니에서 성녀가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