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럽게도) 내가 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태어나 살아온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은 늘 있어왔다. 전쟁에 ‘크고 작은’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전쟁은 비극이다. 그 비극이 지금도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지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터덜터덜 걸어서, 부모 없이 홀로 국경을 넘는 한 우크라이나 소년의 모습을 보았다. 누가 이 아이에게 비극을 안겨 준 것일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해져서 동영상을 보다가도 전쟁이 이렇게 하나의 감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고 마는 것에 나도 한몫 거드는 것 같아 재빨리 영상을 닫는다. 내가 알렉산더 클루게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의 이런 상황,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일 것이다. 폭격으로 민간 시설이 파괴되고 그 아래서 전쟁과는 상관없는 민간인들이 연일 목숨을 잃고 있다. 이 전쟁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들은 어떤 면에서는 스펙터클한 죽음의 이미지들을 소비할 뿐이지만, 직접 그곳에서 참상을 겪는 이들은 어떠할까?

알렉산더 클루게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겨우 4주 전, 당시 열세 살이던 클루게가 살던 독일의 소도시 할버슈타트에서 벌어진 무차별 폭격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담아낸다. 1945년 4월 8일, 전세가 이미 독일의 패전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 놓인 이 도시 위로 연합군의 폭격기 215대가 날아와 대량의 폭탄을 떨어뜨린다. 단 몇 십 분의 공격으로 도시는 완전히 초토화된다. 이 책은 그 일요일, 한 영화관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영화관 관리인이자 매표소 직원 슈라더 씨는 그날 아침 10시 갑자기 내동댕이쳐진 채 발코니석의 열이 오른쪽 천장과 만나는 곳에서 연기가 나는 하늘 한 조각을 막 보게 되는데, 거기로 고폭탄 하나가 이 건물을 뚫고 지하실까지 관통해 있었다. 슈라더 씨는 공습경보가 울리고 난 후 홀과 화장실에 관람객들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려던 참이었다. 이윽고 슈라더 씨는 상영작 안내판이 “배추인지 무인지 모를 정도로” 엉망진창이 된 것을 본다. 이제 막 일어난 일은 슈라더 씨가 관리하는 이 영화관이 경험한 ‘전율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율, 어떤 최고의 영화가 야기한 것과도 비교하지 못할 전율’이다. 하지만 경험 많은 영화관 관리인인 슈라더 씨는 오후에 있을 정기 상영 네 번이 변경될 수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전율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이 11시 55분부터 도시에 폭탄이 쏟아지고 슈라더 씨는 지하실 입구 사이 구석에 숨는다. 파묻히고 싶지 않았으므로 지하실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일요일이었으므로 결혼식을 준비하던 이들도 있다. 11시 20분에 공습경보가 울리자 여성웨이터가 무조건 지하실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결혼식에 온 손님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재잘대며 복도를 따라서 지하실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신부, 신랑, 신부 어머니, 신랑 어머니, 신부 어머니 자매들과 신부의 자매, 그녀들의 오빠…. 꽃을 뿌리러 신부 측 사람들이 데려온 아이들 네 명도 있었다. 12분 후 그들은 모두 생매장당하고 만다. 공습 보초를 서는 의무 때문에 지하실 입구 까지만 같이 가주었다가 금방 다시 나온 신부의 오빠는 나중에 산더미 같은 잔해를 이리저리 뒤지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들이 질식해서 곧바로 죽었기를 바랍니다.”(31쪽)- 불타는 도시를, 재앙에 휩싸인 자신의 고향을 기록으로 남기려던 어느 무명의 사진가는 헌병대에 붙잡혀 첩자로 몰리고, 증거 여부에 따라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묘지 관리인, 탑 망원보초, 버터 상인, 신문사 편집부, 국민학교 교사, 등등 할버슈타트의 여러 인물들의 관점으로 이 폭격을 묘사한다. 할버슈타트 출산 기자와 미 제8공군 여단장 앤더슨과의 인터뷰, 취리히 신문 통신원과 고위 참모 장교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한다. 전쟁과 직접 관련이 있는 이들은 자신의 임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완수하는 것, 즉 도시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폭탄을 떨어뜨리는 노하우와 체계적 과정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민간인들은 그야 말로 생지옥이다. 그들은 큰 충격을 받는데도 ‘복수를 할 만한 대상을 찾을 수 없음’(37쪽)에 당혹해 한다. ‘단 20분 만에 이루어진 1945년 4월 8일의 피해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임이 점차 사람들의 마음 앞까지 파고든다.’(133쪽)




어느 무명 사진가가 찍은 폭격 직후 할버슈타트 -출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제발트는 <공중전과 문학>에서 “이차대전 막바지 몇 해 동안 독일 도시들이 겪은 초토화 규모를 그 절반만이라도 제대로 떠올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초토화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공중전과 문학>, 14쪽)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례없이 벌어진 공중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이어 “역사상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 파괴 행위는 새로 건설된 국가 연감에 일반론으로 얼버무려 기록되었을 뿐 집단의식에 전혀 상흔을 남기지 않은 양 치부되었고, 당사자의 회고에서도 거의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그간 독일의 내적 상태에 관해 진전된 논의에서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훗날 알렉산더 클루게가 확인해주었듯이 그 어떤 것도 공적으로 의미 있는 기호가 되지 못했다.”(같은 책, 22~23쪽) 말한다. 제발트는 “사람들 수백만 명을 강제수용소에서 살해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혹사한 민족이, 독일 도시들을 파괴하도록 명령한 군사 정책적 논리에 대해서 승전국들에 조사를 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같은 책, 21쪽)며 2차 세계대전 끝 무렵에 벌어진 독일을 향한 무차별적 공중전이 이제껏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음을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제발트의 지적처럼 독일이 전쟁 당사자이기 때문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들의 죽음마저 계속 외면 받아 마땅한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중전은 독일은 물론 영국, 미국 모두에게 중요한 군사 수단이었다. 연합군의 공격은 독일 도시들을 더 강력하게 겨누었다. 군사적이거나 경제적인 목표물만이 폭격당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 또한 폭격 대상이었다. 그것이 독일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1942년 2월 14일 영국 내각 공중전 담당부의 지역 폭격 지침에는 공습은 무엇보다 적국 주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책에서도 미 제8공군에 부임, B-17기를 통한 폭격을 주도한 로버트 B. 윌리엄스 준장은 <노이에 취리혀 차이퉁>의 한 통신원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시를 파괴함으로써 거기 사는 주민들의 저항 정신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87쪽) 폭격을 맞은 민간인들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 정신은 말살당해 마땅하다는 명목 아래 무시무시한 폭격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30여분 남짓한 시간 동안 고폭탄 504톤과 소이탄 50톤이 할버슈타트에 떨어졌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도심의 대략 80퍼센트는 파괴되었다. 희생자 수는 1,600명에서 2,000명 사이였다(당시 대략 65,000명이 이 도시에 살았다).
 


할버슈타트 위로 떨어진 폭탄- 출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전쟁은 문학 작품에서 늘 다뤄온 주제이다. 그러나 클루게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처럼 폭격 그 자체에 중점을 둔 책은 드물다. 더욱이 제발트의 지적처럼 전쟁을 야기한 독일에서 폭격당한 경험을 묘사한다는 것은 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자칫 위험할 수 있다. 때문에 커트 보니것은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삼으면서도 전쟁의 참극을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시간과 공간을 어지럽게 넘나드는 이야기 안에서 드레스덴을 오히려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묘사하지 않았던가. 거기서 주인공 빌리가 겪은 드레스덴 폭격 또한 덤덤하기 짝이 없다. 어떤 순간은 도리어 유쾌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에 비해 클루게는 폭격을 직시한다. 열세 살 소년으로 겪었던 일, 공습으로 파괴된 부모님의 집을 건조하게 묘사한다. 여러 사람의 평범한 목소리를 싣는다. 그런 면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200여 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클루게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런 목소리들에 삽화, 폭격 사진 도시 지도, 공격하는 폭격기의 비행경로, 폭격기 배치의 측면과 후면도, 조감도, 폭탄의 유형별 도해와 사양, 상황 보고서, 실제 문서 인용문, 각주, 전문가 토론, 인터뷰 등등 많은 다양한 형식 요소를 모아 재구성한다. 이 건조한 기록들을 지켜보노라면 이것이 정녕 소설일까? 문학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자료들과 가공한 자료들이 뒤섞인 각각의 일화들을 쫓아가다 보면 거기에는 결국 인간의 마음을 파괴한 파국의 참상을 보여주는 진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전쟁에서의 폭격은 “그저 폭탄이 터지거나 도시가 다 타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폭탄이고 그것이 현실을 태워버린다.”(139쪽)는 것을, 우리는 종종 전쟁을 폭풍우에 비유하지만, “번개, 폭우, 구름, 천둥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절멸 효과에 비하면 가장 중요하지 않은 표지일 뿐”(130쪽)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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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3-21 1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였다는
알렉산더 클루게 감독의 다른 소설집
도 사두긴 했는데 읽다가 말았네요...

이번 책도 사려고 했다가 너무 얇고
비싸서리 - 그냥 도서관 희망도서로
만나야지 싶습니다.

최근 역전다방에서 전략폭격의 원흉
이었던 영국의 바머 해리스의 전략에
대해 본 적이 있는데, 적국의 전쟁수행
의지 분쇄보다도 복수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말이 기억에 남네요.

잠자냥 2022-03-21 11:29   좋아요 3 | URL
문지 이 채석장 시리즈 얇은데 좀 가격이 쌔긴 하지요. 허나 흥미로운 목록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도 형식이 참 독특한데, 읽고 나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클루게의 <이력서들>도 읽어보려고요.
매냐 님도 나중에 꼭 한번 읽어보세요~

coolcat329 2022-03-21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폭격도 있었군요.ㅠ
우리편 적군 이런 이분법적인 시선을 버리고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모든 반인륜적인 행위는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참상은 직접 겪어보기 전엔 아무도 모를겁니다.ㅠ

잠자냥 2022-03-21 14:15   좋아요 1 | URL
네, 드레스덴 폭격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편인데 이런 폭격도 있더라고요.
이런 참상은 겪고 싶지 않은데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 중이라는 무시무시한 사실이 퍼뜩 떠오르기도 합니다.

blanca 2022-03-21 1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사려다 말았는데...사실 읽고 마음이 더 무거워질까 봐 일부러 안 샀어요. 전쟁이 막연이 추상으로만 느껴지다 실제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니 갑자기 사는게 무서워졌어요. 하기사 2차 세계대전도 나기 직전까지 그렇게 전쟁이 나리라고 생각 못했다고 하니...왜 최악은 항상 현실이 되고 최선은 꿈 속에만 있는 건지...잘 읽고 갑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채석장 시리즈 좋더라고요.

잠자냥 2022-03-21 14:17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전쟁 관련 책은 마음이 무거워져서 쉽게 손이 가지는 않는데, 채석장 시리즈가 매력적이라서 이번에는 한번 구매해 봤습니다.
이 책은 사건의 나열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그때의 증언(목소리)들과 기록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감상적인 기분이 쉽사리 들지는 않는데, 다 읽고 나면 그래서 오히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mini74 2022-03-22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폭격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6.25때 우리나라도 그렇게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민간인들 희생이 컸고 ㅠㅠ 자냥님 글 읽으니 그 책이 떠오르네요. ㅠㅠ

잠자냥 2022-03-23 10:32   좋아요 1 | URL
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몇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근데 요즘 당선된 그 사람은 막 벙커도 알려주고 그러더라고요?

서니데이 2022-04-09 0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꼬마요정 2022-04-09 0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은 너무 참혹하죠ㅠㅠ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다지만 전쟁은 인간이 일으키는 거니 너무 끔찍합니다.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2-04-09 0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골 당선 잠쟈냥님 축하드립니다~!! 아직도 적립금이 쌓여 있으실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