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마다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어떤 사람은 명예를, 어떤 사람은 성공이나 권력, 지위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며 또 어떤 이는 건강, 사랑, 애정 같은 가치를 높이 사기도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인생을 최고의 삶으로 여기기도 할 것이다. <면도날>에도 이렇게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 다양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작품의 시작은 최근 읽었던 몸의 또 다른 작품  <케이크와 맥주>와 비슷하다. <케이크와 맥주>처럼 작가가 대단히 속물적인 한 인물을 만나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단 <면도날>의 화자로, 직업이 작가인 ‘나’는 서머싯 몸 그 자신이다(이 작품의 재미 중 하나는 이렇게 서머싯 몸이 작품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다).

‘나’(그러니까 서머싯 몸 그 자신)는 우연한 기회에 ‘엘리엇 템플턴’이라는 남자를 알게 된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 사회적 신분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인물로, 상류사회는 그에게 인생 전부이며 파티는 숨구멍과도 같다. 사교계의 명성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엘리엇에게 사실 일개 작가인 ‘나’는 처음에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나’ 또한 그의 속물스러움에 때로는 진저리를 치기도 하지만 사람을 잘 챙기고 베풀기 잘 하고 배려심이 깊은 그를 종종 만나며 친분을 쌓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작품이 엘리엇 템플과 화자인 ‘나’의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이윽고 새로운 인물들-래리, 이사벨, 그레이 같은-이 등장하고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미국인인 엘리엇은 사교계의 명성을 좇아 이곳 유럽으로 건너와, 파리와 런던을 오가는 생활을 즐기는데 거기에 그의 조카딸인 이사벨 가족이 함께 하게 된다. 이제 막 스물 청춘인 이사벨과 래리는 약혼한 사이로, 아름다운 외모와 상냥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주변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인물들이다. ‘나’ 또한 래리와 이사벨에게 호감을 느끼고 그들을 종종 만나면서 그들의 인생을 지켜보게 된다. 엘리엇은 조카딸을 사랑하는데 비해 그녀의 약혼자인 래리에게는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데, 알고 보니 래리는 번듯한 외모와는 달리 빈둥빈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한량이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 고향에 돌아와 전쟁 영웅 대접을 받은 뒤 성공가도를 달릴만한 일에 뛰어들고도 남을 텐데 이 청년은 여기저기서 제안하는 좋은 일자리를 다 마다하고 벌써 꽤 오래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  래리가 보란 듯이 일자리를 얻어 예전처럼 활기차고 의욕적인 삶으로 뛰어들 것이 분명하리라 기대하던 이사벨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래리와 단 둘이 이야기할 기회를 통해 그가 전쟁터에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로 인생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이후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래리- 그는 정신적인 삶에 몰두하면서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답을 찾아 나선다.



“난 증권 같은 걸 만지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어.”
“알았어. 그럼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의학 공부를 하는 건 어때?”
“아니, 그런 건 싫어.”
“그럼 뭘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면도날>, 80쪽)

“그런데 왜 취직을 안 하겠다는 거야?”
“왜냐고 난 돈에 관심이 없어.”
이사벨은 웃었다.
“래리,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사람은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어.”
“난 조금은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을 만큼은 있다구.”
“빈둥거리는 거?”
“그래.” (<면도날>, 82쪽)



래리가 예전의 모습대로 돌아오기만을 바라던 이사벨은 급기야 툭 터놓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돈에 관심이 없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고 싶다는 래리의 말에 충격을 받는다. 위의 짧은 대화만으로도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래리는 하루 여덟 시간에서 열 시간 가까이 책을 읽고, 소르본 대학에서 하는 강의도 듣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사벨은 도무지 그런 약혼자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을 배워서 뭐하려고 그래?” “현실적으로 별로 쓸모없는 것들 같은데.” 말할 뿐이다. 정신적인 삶에 만족하는 래리를 ‘너는 미국인’이라고 다그치며 이제까지 없던 번영의 시기를 누리는 미국의 발전에 참여하고 이바지하는 삶을 살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래리는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이사벨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기만 하다. 데카르트를 읽고 평온함과, 품격, 명석함에 전율하는 사람과 ‘커다란 쇼윈도가 줄줄이 이어진 콘크리트 보도를 걸으면서 모자나 모피코트, 다이아몬드 팔찌, 금장 화장품 케이스 등을 구경할 수 없으면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결혼해 삶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은 어쩐지 불가능해 보인다. 그들은 그래서 결국 각자의 길을 걷기로 선택한다.

서머싯 몸은 이 두 청춘, 이사벨과 래리를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켜보며 그들이,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이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지, 원하는 바를 얻는지 재치 있는 입담으로 풀어나간다.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래리는 그가 찾는 인생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고자 안정적인 직장과 보장된 미래, 사랑하는 약혼녀도 모두 버리고 유럽 곳곳- 프랑스의 탄광과 수도원, 독일의 농장,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등지를 방랑하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영향 받기도 하고 또 때로는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여정은 인도의 아슈라마에까지 이른다. 사실 이 작품을 흥미롭게 읽다가 래리가 인도로 갔다는 부분, 래리가 갠지스강을 바라보면서 정신적으로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는 장면에서는 조금 실소가 터져 나왔다. 별 다섯에서 갑자기 별 넷으로 하락하는 시점…. 결국 서양인의 방랑의 끝, 방황의 끝은 인도인가, 갠지스강인가 싶어 그놈의 오리엔탈리즘은 입담꾼 서머싯 몸도 어쩔 수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그래서 래리는 자신이 바라는 걸 정말 얻었을까?

물질적인 풍요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삶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처음에는 래리의 선택에 사뭇 공감이 갔다. 하루 8~10시간 가까이 도서관에 틀어박혀 빈둥빈둥 책을 읽고 배우고 싶은 언어를 마음껏 배우고 여기저기 떠도는(여행하는) 삶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그런 삶이 가능하도록 뒷받침해 주는 부유한 환경이 있었다. 그는 비록 어려서 부모를 잃었지만, 유복한 후견인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고 현재도 빈둥빈둥 놀면서 지내도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돈이 들어온다. 래리처럼 해마다 3천만 원 가까운 돈이 들어온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책 읽고 언어 공부하겠다는 사람들이 알라딘 서재에는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래리의 정신적인 삶을 찾아 떠나는 방랑에는 얼마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부(富)가 뒷받침되었기에 조금은 배부른 투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물론 그는 어느 순간 그 돈마저도 굴레라고 말하면서 그 굴레를 벗어난다. ‘나’, 즉 서머싯 몸은 그런 래리를 어리석다며 뜯어 말리는데 이런 작가의 어느 정도 속물적인 모습은 참 인간적으로 다가와 슬며시 웃음이 나기도 한다.


돈과 명예, 화려한 삶을 좇는 이사벨도 내가 좋아할 만한 인간 유형은 아니지만 나쁜 여자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사벨뿐만이 아니라 래리를 스쳐지나가는 또 다른 여인들, 수잔이나 소피도 그들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삶에 어떤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나름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아 그려간다. 이 여성인물들은 대부분 자기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밝히고 그것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케이크와 맥주>의 ‘로지’와 닮았다. 물론 소피가 애초에 선택한 삶은 자기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지만 “천국 같은 생활을 하다가 그것을 잃게 되니까 보통 사람들이 사는 보통 세상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해서 지옥으로 곤두박질친” 것처럼 “신들이 마시는 넥타를 마실 수 없다면 차라리 밀주를 마셔도 상관없다고 생각”(328쪽)하고 자기를 내던지듯 살아가는 그녀의 선택도 선택이라면 선택이 아닐까. 진짜 천국이 아니면 차라리 지옥을 선택하겠다는, 그 극단적이리만치 성스러움을 고집한 그녀의 모습에서 래리가 ‘결혼을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던 게 아닐까.


“어쨌든 사는 게 엿 같잖아요. 그걸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당연히 누려야죠.” (<면도날>, 370쪽)


소피는 이렇게 말했다. 고단한 삶에서 그걸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그 ‘무언가’- 그것이 결국 여기 등장한 모든 인물들이 추구했던, 저마다 높이 샀던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엘리엇은 사교계의 명성을, 이사벨은 부와 성공을, 그레이는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직장과 사무실을, 수잔은 다정하고 안정적인 삶을, 소피는 지옥이 된 현실을 벗어나기를, 그리고 래리는 정신과 영혼이 충만한 삶을…. 인생은 여전히 진행 중이기에 그들은 그 ‘무언가’를 찾아 계속 방랑할 것이고, 그러다가 정말 운이 좋은 그 누군가는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2-02-08 17: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래리랑 저랑도 왠지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저도 물질이나 이런거 보다는 심리적인 안정을 중요시 하거든요. 다만 차이는 래리는 돈이 많고 저는 돈이 없다는거? 😅

잠자냥 2022-02-08 17:32   좋아요 4 | URL
알라딘 서재 분들은 대부분 래리에게 공감할 거예요. 다만 다들 래리처럼 후원자도 없고 돈도 없다능 ㅋㅋㅋㅋ

mini74 2022-02-08 17: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문장이 와 ! 넥타를 마실 수 없다면 밀주를 마셔도 상관없는 ㅎㅎ 문장들이 넘 좋아요. 그 무언가를 전 아직도 모르겠어요. ㅠ

잠자냥 2022-02-08 17:32   좋아요 4 | URL
진짜 재미나고 탁탁 치는 문장 역시 많습니다~ 역시 몸~~

Falstaff 2022-02-08 19: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오, 전 소피가 인상 깊었어요. 내용은 기억하는데 다른 등장인물은 서머싯 몸 말고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요!
(이래서 독후감을 써 놓아야 한다니까요. 썼으면 지우지 말고 버텨야 하고요. ㅠㅠ)

잠자냥 2022-02-08 20:36   좋아요 3 | URL
네 소피 인상 깊죠. 저도 몇 년 지나면 소피만 기억날까요? ㅋㅋㅋ 리뷰 강제 삭제당한 골드문트여~

- 2022-02-08 2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면도날은 뭘까요? 전 이번에 알겠어요. 고독하고 조용한 환경이요… (시골에서 티비소리때문에 지쳐가는 중..) 아 내가 그 상태를 너무 사랑하는 구나…(망했다 망했어!) 자냥님이 물어봐서 저 선택지 중에서 그나마 제일 원하는 건.. 전 돈입니다 돈…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하는 방법은 이제 좀 알겠으니까 그를 위해 귀찮은 것들을 제거할 용처로서 돈 돈 돈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래리에 공감하고 부러워서 짜증난다!!

잠자냥 2022-02-08 21:39   좋아요 2 | URL
ㅋㅋㅋ집에 오래 가 있으니까 당근 고독을 그리워할 거 같았습니다. 래리의 그 삶 저도 증말 부러워요. 하지만 나는 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돈을 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능(인도 왠지 씻는 거 불편하대서 여행도 안 가는 나란 사람…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2-08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의 면도날은?
돈!!!! 명예!!!!! 권력!!!!!
전부 다 원합니다.^^
또 뭐없나? 찾아봐야겠어요🧐🧐
면도칼의 칼날을 넘어서야죠!!ㅋㅋㅋ
욕망 덩어리!!
그나저나 저도 래리처럼 한 번 살아보고 싶군요ㅋㅋㅋ

잠자냥 2022-02-08 22:24   좋아요 2 | URL
ㅋㅋㅋ 근데 래리처럼 살아보려면 탄광에서 일도 해봐야 하고 농가에서 막일도 해야 하고 부랑자처럼 떠돌기도 해야 합니다! ㅋㅋㅋ

초란공 2022-02-08 23: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빈둥거리기!!! (원하면 이루어지나요? ㅋㅋ)

잠자냥 2022-02-08 23:48   좋아요 2 | URL
ㅎㅎㅎ 다들 그 꿈이 이뤄지면 좋을 텐데요!

독서괭 2022-02-09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국 뭔가 뒷받침이 되니까 마음껏 마음의 풍요를 위해 떠돌 수 있는 것이군요.. 영혼의 고향, 그곳은 인도..갠지스..ㅋㅋ 그것 땜에 별 하나 깎으셨단 얘기에 으하하 웃었습니다^^ 전쟁을 겪고 나서 인생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부분에서 <댈러웨이 부인>의 셉티무스가 떠올랐는데 삶의 향방은 많이 다르네요.
전 근데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으면 진짜 너무 아무것도 안 할 것 같아서.. 적당히 일하고 쉬면서 살면 좋겠어요.

잠자냥 2022-02-09 14:08   좋아요 2 | URL
저도 인도나 갠지스 한 번 다녀오면 이 물욕(책욕심)이 좀 사라질까요? ㅎㅎㅎ
전쟁의 참상을 겪으면 인생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질 것 같기는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