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제아무리 맛난 사과라도 상자째 사지 않는다. 하나씩 손으로 직접 고른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 상자 윗부분에는 보기 좋고 먹음직스러운 사과들이 번듯하게 놓여 있지만 아랫부분은 곯거나 문드러지거나 알이 더 작은 것들이 담겨 있기가 일쑤이다. 명절이라고 특별히 만든 과일 세트의 사과들도 실상 맛을 보면 푸석푸석한 경우가 많다. 어디 사과만 그러할까. 위아래 두 줄로 배열된 딸기도 위쪽에 비하면 아래쪽에 놓인 것들은 문드러졌거나 위쪽의 그것들보다 볼품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겉보기에는 번듯하지만 실상 그 아래는 곯은 사과가 담긴 그럴듯한 사과 상자, 과일 선물 세트.
<마음의 심연>의 크레송 일가가 사는 대저택 ‘라 크레소나드’는 바로 그런 허울 좋은 사과 상자를 떠올리게 한다. 사업에 성공한 지방 재력가인 앙리 크레송과 그의 아내 상도르, 그들의 잘생긴 아들 뤼도빅 크레송과 그의 아내 마리로르- 이 네 사람은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가장인 앙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위도식하면서 권태에 찌든 삶을 어쩔 줄 몰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여기에 상도르의 남동생이자, 앙리 크레송의 처남인 필립이 찾아오는데, 그 또한 앙리의 눈에는 ‘멍청한 식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품은 사랑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젊은 부부, 뤼도빅과 마리로르의 무심하기 짝이 없는 대화로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의 문제는 무엇일까 궁금한데, 곧 앙리의 아들이자 이 대저택의 유일한 상속자인 뤼도빅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이 년 전 겪은 자동차 사고로 거의 죽음 직전에 내몰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런데, 그 이후 정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주변인들이) 판단했는지 정신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다 얼마 전 집으로 돌아온 터였다. 마리로르는 이런 남편의 존재가 참을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뤼도빅이 아니다. 하루 종일 몽롱한 얼굴로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멍청이’일 뿐이다.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기도 쉽지 않다. 뤼도빅은 그녀와 달리 아직도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기에.
어쩌면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부터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뤼도빅은 애초부터 마리로르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주인공처럼 사랑을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문제로 여긴’ 그에게 마리로르는 그가 온 생을 걸어 사랑할만한 여자였고, 그렇게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그녀와의 진정한 애정을 주고받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마리로르는 그런 그와 달리 뤼도빅으로부터 사랑 대신 돈을 보았다. 그가 가진 배경과 재산이 그녀에게는 사랑보다 더 큰 의미였다. 사랑을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처럼 생각하는 뤼도빅의 순진함은 마리로르에게는 그저 ‘결정적이고 순전한 경멸만을 이끌어 낼 뿐’이다.
그가 불행해진 것은 얼마 후 마리로르를 만나면서였다. 그는 사랑에 빠졌고 자신보다 상대의 삶이 더 중요해졌고 그래서 불행해졌다. 사랑하는 이와 삶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덜 불행했으리라. (40쪽)
뤼도빅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마리로르에게는 재난과도 같았다. 그는 죽었어야 하는데,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쯤에서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야 하는데, 살아 돌아오다니! 재앙의 시작이다. 마리로르는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과부 역할은 멋지게 해낼 수 있지만 그 멍청이의 아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역할을 얼마 하지 않았는데도 짜증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이 권태로운 삶이 지긋지긋해 죽을 지경이다. 아들과 며느리를 지켜보는 앙리 크레송의 심경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들은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고 며느리는 속물에다 어리석다. 설상가상 못생기고 우둔한 아내 상드라에, 멍청한 객식구 처남까지 찾아와서 기생한다. 그런데다가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자꾸만 자기 아들이 이상해졌다고 수군거리는 것 같다.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그는 기막힌 생각을 해낸다. 아들이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되지 않겠는가!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 파티를 위해서는 대단한 솜씨를 가진 사람이 안주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 상드라는 외모부터 하는 짓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니 우아한 안주인 역할로서는 불합격. 어디 좋은 사람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는 과부가 된 자신의 사돈, 마리로르의 엄마이자 뤼도빅의 장모인 ‘파니 크롤리’를 초대한다. 파티 주최자로 그녀를 점찍은 것이다. 그리고 파니의 등장은 이 대저택에 뜻하지 않은 파란을 몰고 온다.
어쩌면 이 파란은 예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앙리가 파니를 떠올린 것은 그녀가 순전히 그의 아들을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린 ‘유일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이 눈물의 의미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의문에 쌓인 교통사고, 그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뤼도빅.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주위 사람들, 가장 가까운 가족마저 그를 얼빠진 놈,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사람 취급을 한다. 특히 가족들의 냉대는 더 심하다. 그들은 사고 이후 뤼도빅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진짜 뤼도빅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그들은 뤼도빅을 부를 때 이름이 아니라, ‘그’라고 칭했고, 그가 눈앞에 있는데도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그런데 파니는 요양원에 있는 사위를 보고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가 진정으로 멀쩡하다는 것을 믿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가 보기에 오히려 이상한 건 이 대저택의 별난 부르주아들이다. 그들의 성격은 정상을 벗어나는 무언가가 있으며, 자신의 딸 마리로르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더 심하다고나 할까. 파니는 아주 오래전부터 뤼도빅만큼 불행의 중심에 접근한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파니의 눈에 이 번듯한 사과 상자에서 그나마 건질 수 있는 사과는 뤼도빅이 유일했을지도 모르다. 뤼도빅 또한 이 허울 좋은 사과 상자 안에서 자신을 꺼내줄 수 있는 유일한 손길은 파니뿐임을 알아본 게 아닐까. 슈만의 음악에 감응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대저택에 파니와 뤼도빅뿐 아닌가.
<마음의 심연>은 모든 면에서 독자의 예상을 벗어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오히려 사강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참 묘한 작품이다. 애초에 이 작품이 세상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모든 독자의 예상을 벗어났으리라. 뤼도빅과 마리로르 사이의 영원히 소통 불가능한 고독한 사랑의 이야기일까 싶을 때 뜻밖의 전개가 펼쳐져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그 섬세한 문체와 서정적인 분위기는 역시 사강 작품이구나 싶어 읽는 이의 마음을 뒤흔들고 완벽하게 훔치며, 비록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그럼에도, 바로 그렇게 미완성으로 남았기에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무엇보다 사랑의 권태와 소통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안에서 사랑의 강렬한 속성들-유혹과 열정, 매혹과 질투, 욕망, 시기-을 너무나 섬세하고 투명한 언어로 그려나간다. 그리하여 이 쓸쓸한 늦가을에 비록 그 끝을 알 수 없을지라도 그런 사랑에 빠져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끔 한다. 사강의 대다수 작품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