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왓빠 이야기에 대해 별달리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장애인을 다룬 영화이기에 의미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장애인과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문제제기하는 정말 좋은 영화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또는 드러내줘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말 소중한 영화라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문이 아니 제 자신에 대한 질문이 자꾸만 생겨나 나름의 고민을 여기에 올립니다.

이 고민과 질문이 왓빠 이야기에 대한 저의 소감입니다.

 

왓빠 이야기는 곰곰히 곱씹어보면 볼수록 녹녹치 않은 영화일 뿐만 아니라 주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왓빠이야기 포토 보기

일단 왓빠 이야기는 제가 본 바에 의하면 비장애인을 위한 장애인 영화라고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면 장애인들의 아니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사는 일상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만 상당히 계몽적인 영화였다고 생각됩니다.

비장애인으로서 장애인을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장애인과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인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였지요. 

그래서인 장애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은 카메라로 맘미암아 아주 사랑스러운 장애인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질문에서도 다른 분들의 개인적인 생각에서도 밥먹는 장면(클로즈업된 장면)이 아름답다거나 사랑스럽게 보였다는 것은 감독이 품고 있었던 마음이 렌즈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저도 물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평온했습니다.

 

하지만 그 틈새로 (불)편함이 밀려들어왔습니다.

 

편했다는 건 클로즈업된 사랑스런 장면(아니 오히려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장면은 아닌가요?) 인해 나도 장애인를 인간으로 존재자로 그래서 나와 같은 인간존재로 보구나하는 점에서 그렇구요. 더 나아가 순수한 그 표정이 인간의 표정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순수한 인간상에 대한 때묻지 않은 인간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근대적인 얼굴인지 생각해봐야 할 지점입니다.

불편한 점은 그 클로즈업된 장면(얼굴)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보여주는 그래서 내가 보는 장애인은 혹시나 내가 보고 싶어하는 그런 장애인은 아닌가? 순수한 인간?

질문에서도 나왔지요? 영화에서 그려지는 장애인은 결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고...편하면서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어쩌면 균형감각을 위해 감독은(의도적이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셨지만) 아름다운 장면을 찍었다고 생각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 아름답지 않은 장면으로 인하여 장애인을 인간으로 존재로 보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맘(무의식)이 그런 장면을 회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불어 장애인 영화는 어떤 것일까라는 의문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장애인들의 말이 존재하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 장애인들은 어떻게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이 영화에서?

아니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영화에서 참고할만한 두 장면이 생각납니다.

장면1) 빵을 팔러 나온 할머니가 감독과 동행하기 위해 잠시 대기했다가 걸어가는데 감독이 따라오지 않자 몇 차례 뒤돌아보며 멈춰 함께 가자고 하는 듯한 장면

장면2) 생활공동체 안에서 감독에게 어머니가 있는지 반찬을 만드는지 질문을 하는 장면

 

이 영화에서 위 두 장면은 자신들의 목소리(몸,말)을 통해 우리에게(카메라와 카메라를 통해 구현된 영상을 볼 우리) 말하는 드문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서 카메라는 머뭇거리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듯 보였습니다.

애정넘치는 카메라도 갑자기 객관적인 시선으로 돌아서며 묵묵히 지켜보거나 똑같은 질문으로 돌려주거나 했죠.

 

여기서 장애인들의 말, 표현, 행동이 비장애인의 세상에 불현듯 쏟아올랐을때 낯설어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보인 것은 과장일까요. 오히려 장애인을 그렸지만 비장애인의 말, 표현, 행동이 이 영화에 더 많았지 않았나 생각하면 과잉일까요.

이 영화는 과연 그런 점에서 장애인을 잘 표현한 영화일까? 표현의 불가능성이 바로 이런 것일까? 내내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장애인들을 대신 표현해주는 영화가 과연 어느 부분까지 장애인의 말일까?

이게 과연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들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에 대한 인상정도에 그치면서 또 두서없고 갈팡질팡하는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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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 2012-05-3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퍼가요~ ^^

이주아 2015-04-06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혹시 이영화 구하거나 파일 받을수 있는방법 없을까요??ㅠㅠ 아시면 꼭좀 부탁 드립니다.

2015-04-06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아 2017-08-3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영화를 구하고싶은데 꼭좀 가르쳐주세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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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여공 - 시다에서 언니되다>는 감독의 연출의도처럼 여공이었던 여성들의 말과 표정을 통해 부산의 신발공장 여공들의 삶을 1960년대부터 1990년대(현재진행형)까지 확인할 수 있어서 그 무엇보다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간 흔히 노동자 또는 여공에 대한 영화 또는 다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대표적 산업인 신발공장 여공에 대한 영화는 전무했다. 아니 영화는 물론이고 그녀들의 목소리를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연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노조운동 가운데서도 여성의 목소리는 남성노동자의 목소리에 압도당하여 드러나지 못했다. 이 영화에서도 노조활동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주로 남성노동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더군다나 부산은 해방이후 임해공업단지의 조성과 함께 신발산업의 메카이며 여전히 신발산업의 메카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신발산업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제반 노동조건에 대한 이해는 관은 물론이고 시민 또한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무심했다. 그런 점에서 부산의 현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구성원인 신발공장 여공들의 이야기를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점만으로도 이 다큐의 성과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다큐의 선구적인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다큐가 풀지 못한 또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 문제점도 여전히 많이 지니고 있다. 그 원인은 감독도 말하고 있지만 인터뷰 시간이 그다지 길지 못했다는 점, 인터뷰어의 수가 제한적이었던 점, 그리고 개별 인터뷰와 집단 인터뷰의 병행하는 등 심도깊은 인터뷰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시간적 순서에 따라 4부분으로 나눠 일관된 주제 하에 인터뷰하여 다큐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 다큐는 기존의 노동영화 또는 다큐가 지니고 있는 노동문제에 대한 묵직한 현실을 애써 피하기 위해(함께 본 분들 중에서는 이를 식상하다고까지 표현했고 그런 작품이었으면 보러 오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노동문제가 과연 식상할 정도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그 현장에 있는 분들의 목소리를 귀기울이고 있는지 의아했으며 당황스러웠다) 그녀들의 일상을 사랑과 결혼이야기로 부각한 점에서 상당히 희극적이며 영화적인 요소가 두드러졌다. 공장 출근부터 공장 안에서의 일상이 주는 에피소드는 당시에 그녀들이 어떻게 느꼈든지간에 회상과 함께 그렇듯 유쾌하고 즐겁게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당시의 현실문제에 대한 그녀들의 이해와 목소리는 더욱 어렵게 되었으며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인 여공들의 문제에 대한 접근 또한 어렵게 만들었다. 분명히 가장 어린(?) 여공, 다큐에서는 1980년대 후반에 여공이 되어 현재도 여공인 그녀가 1980년대와 현재 여공 임금은 크게 차이나지 않고 있다고 한 목소리는 스쳐지나가듯 묻혀버렸다. 이러한 점은 4부분으로 나눠져 있는 여공의 목소리 중 유독 가장 먼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많은 수의 목소리로 지닌 것 때문인지 다큐에서 권위를 획득하여 전면에 포진한 그녀들이 지금도 여전이 과거의 기억을 '즐거운 또는 유쾌한' 추억으로만 회수한 지점에서 두드러졌다. 시간은 과거를 아름답게도 포장한다. 포장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언어로 변질되었음을 일컸는다. 이런 점에서 그녀들의 목소리는 과거의 기억을 추억으로 말했지만 그런 그녀들의 말은 과연 그녀들의 언어인지 의문이다. 지배받는 자들에 대한 서발턴 연구에서 제기된 문제처럼 과연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스피박의 질문이 이 다큐에도 어느 정도 제기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스피박은 서발턴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우리가 '대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는데 그녀들의 목소리를 다큐라는 틀을 통해 '대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그녀들의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는 화면을 통해 재현된다. 이 지점에서 '대변'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렇다면 그녀들의 말을 빌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말로 그녀들의 말인가? 우리는 어떤 목소리로 그녀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할지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의문이다.

 

물론 이 다큐는 서발턴인 여성 타자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장을 열었으며 부분적이지만 그녀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측면에서 여전히 소중하다. 좀더 다양한 그녀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그녀들의 언어와 표정을 대변하고 싶다. 덧붙여 참고로 김원의 <<여공 1970, 그녀들의 반역사>>와 함께 읽으며 감상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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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 경관에 선정되었다고 여기 저기서 축하하는 사이 그 이면에서 자행되고 있는 자연과 인간의 파괴는 까마득하게 잊었지고 있다. 화려한 환상 속에 살도록 부추기는 매체의 노예가 되어, 관광객 유치로 이어지는 자본의 노예가 되어 말이다. 환상을 넘어 실재의 모습은 세계 7대 자연 경관이라는 거창한 표어와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항공카메라로 잡는 그 프레임 너머에 존재한다. 구럼비(강정마을 앞 바위)의 파괴가 그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먼 곳의 일이기 때문에 관심 또한 그 거리만큼 멀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남의 일이라고 기꺼이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강정'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 앞에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부안처럼 용산처럼 또 다른 무엇처럼 그렇게 또 그렇게 말이다. 사건은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우연히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사건의 촉발에 즉각 반응하는 신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안팎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의 정치에 귀기울이고 그 끈을 놓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안팎의 경계에 설정하고 밖이라고 안심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 경계를 허물 수 있을까? 너무 늦게 반응하면 그만큼 고통은 크고 아픈데도 말이다.

<잼 다큐 강정>은 안과 밖의 소통을 위해 10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8명의 감독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어쩌면 다급한 목소리임에 틀림없다. 물론 다큐이지만 기획된 프레임은 사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 속에서도 또 다른 환상(고통스럽고 안타까운 환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자본에 포섭된 화려한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은 이와 같은 또 다른 환상을 통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를 '환상의 부정성'이라고 하면 어떨까? 환상의 부정을 통해 결국 그 환상조차 넘어서야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런 부정을 말이다. 어쨌든 이 다큐는 자본에 포섭된 매체의 화려한 환상 너머 실재를 또 다른 환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 환상에 사로잡혀 함께 안타까워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환상 너머 실재를 우리가 직접 발견하고 꿋꿋히 확인해야할 것이다. 

어떻게든 경험하자. 실재(환상)를...그리고 그 너머를... 

그리고 변화하는 나의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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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의 기적 포토 보기  

엔리케 듀셀의 최근 책 <<1492년, 타자의 은폐>>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타자의 발견(discover)은 발견되는 즉시 은폐(cover)되는 주체의 동일화 전략이라고 한다. 즉, 타자를 발견하는 것은 예로 들어 내가 만든 틀 속에서 나 밑에 위치시키며 내가 만든 구조 속에서 강제적으로 따라 하게 만드는 그런 동일화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체의 동일화 전략 속에는 위계 서열화가 구조화되어 있고 그 위계 서열화를 특권화할 뿐만 아니라 공정한 경쟁관계라고 하는 수사를 통해 특권화를 숨기며 배제되는 타자를 지속적으로 은폐한다. 이런 타자의 은폐는 역사적으로 차별이며 배제이며 절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듀셀이 '긍정'하는 진정한 타자의 발견은 무엇인가? 이는 은폐(cover)된 타자를 발견하는 것이고 그 타자성을 나와 동일화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각각의 타자성을 간직한채 차별과 배제 없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로의 기적은 보는 주체의 입장에서 은폐된 타자의 발견이며 또한 말하는 타자의 입장에서는 은폐되었던 타자를 스스로 등장시키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동일화 전략에 온 몸을 맡기고 그 속에서 성장한 나의 몸 때문에 이러한 타자의 등장이 여전히 낯설고 거북하기도 하겠지만 그 몸을 변화시켜야 하며 또한 타자의 등장을 즐겁게 받아들일 몸으로의 전환을 기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더 많은 은폐된 타자의 발견 아니 타자의 등장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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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스토리, 당연한 결론, 한국의 스포츠 영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또는 국가/권력자의 다른 목적에 이용되어 척박한 토양에서 좌충우돌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서 우연찮게? 좋은 성적을 낸다. 그리고 가능하면 올림픽에서 메달까지 따며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감동을 주는 것이 스포츠 영화의 정식이 아니던가?! 

그래서 영화 '국가대표'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자고 보러갔다. 

또 종목이 스키점프이니 무더위를 시원하게 날려줄 것도 같았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조금은 근원적인 문제가 내게 다가왔다.  

근대의 작동원리인 우리같은 일반인들을 몽땅 정치로부터 무장해제시킨 원리. 

즉, 대표/대리/표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영화는 그렇게까지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너무도 일반적인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내게 감동을 조금이라도 줬다면 단순히 우리를 대표하는 국가대표가 열악한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그 가운데 국가대표로서 자긍심을 가지며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맨쉽을 발휘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런 뻔한 내용을 담보하고 있지만 한편으로 대표는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즉 자신을 대표/대리/표상하는 것임을 얘기하는 듯했다. 

자신을 버린 국가의 대표가 되기 위해 미국국적을 버리고 한국국적을 획득하는 하정우 역은 국가대표가 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 국가대표가 된 이유는 전부 각자의 개인적인 사정, 개인적인 일 때문이다.  

물론 현재 국가대표도 국가대표라는 상징적인 자리보다는 그 이후의 경제적 후원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국가대표는 상징정치에서 가장 잘 활용된다.

그래서 국가/권력은 그런 신화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창출된 신화를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더 상징화한다.  

그러나 꼭 결론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그 대표성을 담지한 개인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것만 같지는 않다.  

스스로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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