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EXPO)라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 선전장으로 1851년 런던의 하이든파크 수정궁에서 만국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나 제국주의시기의 만국박람회는 자국의 권력을 뽐내며 자국민에게 식민지 경영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선전하는 장일뿐만 아니라 식민지민에게조차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문명과 야만의 지배 이데올로기(식민주의)가 작동하는 동화의 장이기도 했죠. 그래서 반인종적이고 비인간적인 식민지민의 전시 또한 자행되었습니다. 조선인 또한 일본의 만국박람회 속에서 전시되는 수모까지 겪기도 했죠. 물론 이러한 반인종적이고 비인간적인 박람회는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행위자체가 문제시 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선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술력 경쟁장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런 공간으로 엑스포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기술력 경쟁장으로 바뀐 엑스포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경쟁의 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주체국의 기술적 우위를 국민에게 선전할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간의 기술의 우열을 가리며 선진국과 후진국을 위계열적으로 질서 지우려는 근대 정치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지요. 주제관 및 주체국관, 그리고 국제관이 바로 그런 위계열적인 질서를 배우고 습득하는 공간입니다. 여수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는데 물론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어긋남도 존재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려고 하지만 후진국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나라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엑스포이기에 어떤 선전의 장인지 궁금했던 저로써는 관심이 가는 건 당연했습니다. 물론 이미 엑스포가 지니고 있는 권력의 현전으로써의 전시 정치라는 점에서는 흥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어떤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그들의 질서 속에 끌어들이는지 관심이 갔죠. 그 질서를 알아야지 그 질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엑스포는 과연 뭘 보여주고자 하는지 너무나 단순해서 그러한 선전이 지금까지의 선전과 어떤 면에서 차별화되는지 또는 어떤 면에서 고도화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제 엑스포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유희 공간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또는 그러한 기대조차 미치는 못하는 장이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진단도 가능한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주체국의 기업들이 기업관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이점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하면, 해양 또는 바다라는 주제에 대한 주체국 및 참가국, 그리고 참가기업의 생각 자체가 너무도 천변일률적이고 안일할 뿐만 아니라 어쩌며 그렇게 상상력이 빈곤한지 뭐라고 말하기 너무 힘든 상태였다고나 할까요. 먼저 주체국을 보죠. 한국이 주체국이니 한국관과 주체측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주제관을 보면 단번에 그 내용의 빈곤함과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주제관의 내용은 듀공이라고 하는 멸종위기에 빠진 고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바다오염에 대한 이야기와 아이와 듀공과의 만남을 통해 바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죠. 그런데 이 여수 엑스포가 진행되는 동안 MB정부는 포경을 재개한다고 했죠. 한국 정부의 천박함이란...더 기막힌 것은 한국관입니다. 한국관의 내용은 2개의 영상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영상물은 내용은 역사를 통해 바다와 가까웠을 때는 부강한 나라였고 바다와 멀어졌을 때는 가난한 나라였다는 메시지이며 두 번째 영상물은 함께 앞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해양개발사업에 적극 뛰어들어야하고 또 뛰어들고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대표적인 산업으로 담수플랜드사업과 조선플랜드사업을 들고 있습니다. MB스러워 경악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바다오염을 말하며 듀공이라는 고래를 내세우면서 포경사업을 재추진하고 더불어 해양개발을 말하는 이 웃지못할 주체국과 주체 측의 전시가 과연 어떤 효과를 발휘할까요? 실소를 금치 못하는 전시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서 국제관의 각 개별 국가관은 또 어떤가요. 대표적으로 미국관을 보죠. 힐러리와 오바마의 파트너쉽을 강조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영상물과 바다를 둘러싼 미국인의 풍경을 통해 결국 나의 바다우리의 바다이니 이를 공동으로 탐사, 관리하고 경영해야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없어 함께 그런 아이디어를 내어 함께 관리하고 경영해야한다는 메시지이지요. 흔히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의 바다에 대한 인식이 이정도이니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겠죠. 그저 바다와 각 나라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소개가 모든 참관국의 전시 내용이었습니다. 그저 바다와 관련된 각 나라의 환경을 보여주고 바다오염을 말하며 함께 고민하자고 하는 것에 그치고 있죠. 정말 바다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해양이라는 이번 엑스포 주제에 대해 주체국은 물론이고 참가국 또한 전혀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 엑스포에 수많은 국민의 혈세와 그것도 모자라 관객으로 또 관람료를 내는 한국민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국가라는 하는 권력기구가 반국민적인지 또 한번 세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업관, 참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바다에 대해 진지하게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기업을 엑스포에 끌어들이려고 정부가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유언비어처럼 간혹 들려옵니다만 어이가 없긴 매 한가지입니다. 특히 가장 많은 관람객을 끌어 모으고 있던 삼성관을 보죠. 삼성관은 삼성호라는 파빌리온을 통해 바다(?)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천편일률적이게도 개발’(삼성이 이런 얘기도 하는 군요)에 의해 지구가 병들고 그 병든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삼성호가 노아의 방주처럼 나타나 그 속에 수많은 동물과 식물과 인간이 타게 됩니다. 그리고 삼성호에 탔던 어린 소녀가 지니고 왔던 장미꽃이 시들면서 빛과 물과 흙의 회복과 장미꽃의 다시 핌으로 이야기가 끝맺죠. 지구와 인간 멸망에 가장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업인 삼성이 개발의 문제를 지적하며 노아의 방주를 소재로 얘기를 진행하다니 이것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참 자본은 무섭군요. 돈이 된다면 자신을 팔아서라도 자본을 확대재생산하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삼성이라는 기업이 얼마나 바다와 관련하여 상상력이 부재한지를 또한 명확하게 드러내 주더군요. 이처럼 기업관도 주먹구구식으로 기업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는 도저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상의 몇 가지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수 엑스포는 만국박람회라는 그 태생부터 지금 전시되고 있는 내용까지 총체적 문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드네요. 위로 아닌 위로는 이제 엑스포는 더 이상 위계질서를 배우고 습득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전시의 정치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공간으로 변화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계의 정치적 장은 다른 장으로 이동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자동차 또는 전자제품 전시장이 그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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