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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웅적인 평범한 그들은 온갖 종류의 타협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식민주의자들에게 심리적으로 압도되거나 흡수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대응은 패배가 재앙이라면 승자가 강요한 방식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더 나쁜 쪽은 '영혼'을 상실하고 승자를 내면화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승자의 가치에 따라 그들의 저항 모델 속에서 그들과 싸우게 되기 때문이다.  
 
강력하고 진지하지만 용인되는 적수보다는 희극적인 반대자가 되는 편이 낫고, 계속해서 체제에 '주된 적응'을 하는 적수다운 적수보다는 그 어떤 측면에서도 존중받기 어렵다고 선언됐지만 미움받는 적이 되는 편이 나은 것이다. 
 
자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폭력적이고 문화적으로 황폐하며 정치적으로 파산한 오늘날의 세계가 언젠가는 돌아가게 될  '약함'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친밀한 적, 208~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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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저항으로서의 반근대성

근대성 내부의 권력과 저항

근대성은 이성, 계몽주의, 전통과의 단절, 세속주의 등의 관점에서 묘사되기 이전에 지배와 저항, 주권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하나의 권력관계이다. 그렇기에 근대성은 식민성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월터 미뇰료). 바꿔 말하면, 식민성은 근대성의 심장부에 놓여 있는 위계를 나타내는 한에서 근대성을 구성한다. 이미 역사가들은 유럽의 팽창을 정복이 아니라 식민적 마주침으로 사고했고, 반근대성이 근대성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염두에 뒀다. 따라서 근대성은 위계관계이며 마주침이라는 지배와 저항의 투쟁관계는 지속적인 상호변형의 과정(멕시코의 나우아족, 미합중국의 예)을 역사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역사가들의 주장은 근대성의 폭력과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강조하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부인은 일종의 정신적 억압이라기보다는 근대성 안에 내재된 것을 부인하는 측면에서 정신분석학적 의미의 배제의 한 사례로 간주된다. 따라서 근대성을 권력관계로, 즉 식민성으로 정의하면 근대성을 끝나지 않은 기획으로 생각하게 하는 모든 관념의 토대를 허문다. , 근대성을 완성한다는 것은 단지 같은 것을 지속하는 것, 지배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오히려 반근대성의 힘들, 즉 근대적 지배 내부에 있는 저항을 탐구하는 것이다.

 

근대 공화국에서의 노예 소유

근대성의 역사는 공화주의의 역사와 밀접한데, 특히 소유관계가 근대성을 구성하는 권력관계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소유 공화국과 매우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근대 노예제의 역사는 공화국, 소유, 근대성 간의 밀접한 관계를 탐구하는 유용한 장이다. 왜냐하면 역설적이게도 노예제는 공화국의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인 평등과 자유라는 원리를 침범할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노동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침범하는 공화국의 치부임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18세기 내내 그리고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왕성했고 심지어 공화주의적 정부들의 핵심적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유 공화국은 노예들의 존재를 숨기거나 부인한다. 그럴 수 없을 때는 외부로 몰아내어 전근대적 경제관계의 단순한 잔여물로, 공화국이나 근대성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유럽 밖을 보면, 노예제가 적어도 18세기와 19세기 상당 기간 동안 자본주의적 생산에 전적으로 통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예와 프롤레타리아는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적 분업에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대서양 동서의 거대한 분리 구도를 통해 서로 지탱했다.

더 나아가 근대 노예제의 본질은 인종적 위계이다. 그런데 소유 공화국에서 노예제가 하나의 일탈로 간주되듯이 인종주의도 근대성 외부에 있는 요소이자 근대성의 왜곡으로, 또다시 미완성 가설로 이어진다. 하지만 소유 공화국과 흑인 노예제의 내적인 긴밀한 관계를 인식하면 근대성 안의 인종주의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만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제도적인 관행들의 체계로서, 즉 노예제 훨씬 너머까지 확장된 권력구조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종도 식민성과 유사하게 근대성을 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근대성, 식민성, 인종주의라는 세 개의 항이 각각 서로에게 필수적인 지지대로 복무하면서 하나의 복합체로 함께 기능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제는 소유 공화국이 지닌 정신병의 상징으로 역시 부인의 태도(침묵) 혹은 배제의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근대 역사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공화주의 이데올로기에 그 어떤 혁명들보다 충실한 아이티혁명이 철저하게 무시된 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한편 노예제와 근대 공화국 간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노예들과 그들이 저항이 갖는 힘을 부각시킬 수 있다. , 권력은 오직 자유로운 주체들에 대해서만 행사된다는 푸코의 말에 따라 실로 권력은 오직 저항하는 주체들, 심지어는 권력이 움직이기 전에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주체들에 대해서만 행사된다는 의미를 통해 노예들은 자신들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에 저항할 때 가장 자유롭다. 따라서 노예제는 노예들 자신들의 저항에 의해 파괴되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두보이즈). 그렇다면 저항 즉 반근대성의 힘이 근대 역사의 운동들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 위계(권력)뿐만 아니라 적대(저항) 역시 근대성의 이중적 본성이다. 반근대성은 근대성 자체에 내재적이며 근대성과 분리 불가능하다.

 

삶권력의 식민성

근대성의 권력관계에서 반근대성은 외재적 형태의 지배(채찍질과 칼에서 경찰과 감옥까지)뿐만 아니라 내재적인 주체화 메커니즘(근대성-식민성-인종주의라는 세 요소가 부르는 수법과 도구들의 삼투성)을 통해 통제된다. 이는 근대성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통제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 내부에서 태어나는 저항들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렇다면 근대 권력의 삼투성은 반근대성의 내적 기원과 상응한다. 그간 탈식민주의 연구의 일부는 식민권력의 삼투성을 재현양식 및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이 가진 효력(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연구,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주장과 사티 연구)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런 재현과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을 비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한계는 명백하다. 이데올로기는 설령 어디에나 스며든다 해도 예속적 주체들의 외부에 있거나 적어도 그들로부터 분리가능하다고 상정한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식민성과 함께 인종주의는 근대성에 내재적일 뿐 아니라 근대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이데올로기적 층위를 훨씬 넘어서 제도적이며 관행의 체제들로 강조점을 옮기게 한다. 따라서 인종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통치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근대성-식민성-인종주의 복합체를 규정하는 권력관계는 기본적으로 앎의 문제가 아니라 함의 문제이기에 정치적이고 존재론적인 것, 즉 삶권력으로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이 권력이 외부에서 주체성에 가해지는 금지와 억압의 힘일 뿐만 아니라 주체 내부에서 주체를 생성하는 힘이기도 하다는 생산적인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덧붙여 관점의 역전이 필요한데, 이른바 권력이 우선적이고 저항이 그것에 반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이 권력에 우선한다. 주체들의 자유가 권력의 행사보다 우선하며, 주체들의 저항은 단지 이 자유를 증진하고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다. 이에 기반을 둔 이론적 기획은 교차대구법으로, 첫 번째 운동은 근대성-식민성-인종주의 복합체에 대한 연구를 이데올로기라는 외적 위치로부터 삶권력이라는 내적 위치로 이동시킨다. 두 번째 운동은 반대로 반근대적 저항들의 내부로부터 단절과 대안의 구축을 감당해낼 수 있는 삶정치적 투쟁들로 나아간다.


2.2 근대성의 양면성

마르크스주의와 양면성

근대성에 관해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양면적이며 때로는 모순적이기도 하다. , 근대성을 진보로 찬양하고 모든 반근대성의 힘들을 미신과 후진성으로 비하하는 강력한 흐름을 포함한다. 반대로 자본주의적 통제 하에 모든 이들이 벌이는 자본에 대한 저항 및 이와 긴밀히 결부된 이론적 정치적 입장들에서 반근대성의 노선도 포함한다.

근대성과 진보를 동일하게 여기는 견해는 우선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기초한다. 경제결정론, 유럽 외부 사람들을 역사 없는 사람들로 간주한 경향, 그리고 식민화를 진보를 위한 요소로 본 것이 그것이다. 마르크스의 초기 주장은 당대의 막스 베버를 비롯하여 이후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대표적인 것인 미완의 근대성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관념이며 최근의 세계체제론이다. 세계체제론은 자본이 주기적 순환과 리듬을 거쳐 지리적으로 세계 전체를 자신 내부로 흡수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세계체제론은 반체제운동 등 반근대성의 힘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이 노동의 힘과 지배를 한데 모아 잘라서 분리하는 하나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주체들의 저항을 적절히 고려하지 못한다. 그저 순차적 단계들을 통한 발전이라는 관점에 의존할 뿐이다. 결국 마르크스주의와 근대성의 연결 관계를 재생산할 뿐이다.

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반근대성의 힘을 긍정한다. 20세기 초에 나타난 반제국주의 이론과 정치 기획들은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적 코뮤니즘에서 반근대성의 중요한 사례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자국 및 외부세계로의 확대의 경계지대에서 반근대성의 힘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보다 극적으로 자본주의 위기(금융자본의 위기)의 주체적 양상(“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10억 명의 사람들“‘문명국가의 자본주의 임금노예들과 결합시키는 공통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마오쩌둥은 청조 후기부터 이어진 중국 사상의 특성과 혁명적 코뮤니즘 전통의 반근대성을 결합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마르크스도 후기 혁명적 코뮤니즘 사유 속에 존재하는 반근대적 흐름을 강조했다. , 경제법칙이 역사적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작동한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고, 러시아에서 혁명의 과제는 러시아적 코뮌을 위협하는 자본의 진본적 발전을 저지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반근대성의 힘에 대한 이러한 긍정과 발리바르가 마르크스의 반진화론적가설이라고 부른 것이 그에게 존재하는 모순이다. 이는 건강한 모순이며 그의 사유를 풍부하게 해주는 모순이다. 그렇다면 반근대성의 혁명적 형태들은 공통적인 것에 확고하게 뿌리내고 있고 유럽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반근대성은 우선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표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적 발전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천은 근대성과 더 명확한 방식으로 연결되었다. ‘위대한세 번의 러시아, 중국,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들은 강력한 반근대성의 힘이 그것들을 낳은 혁명적 투쟁을 가로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확고히 근대화 기획을 추구했다. 이는 발전이라는 관념에 몰두함으로써 제국주의 비판이 발전주의 정치경제학의 진흥과 병행되어 전지구적인 근대성-식민성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그 결과 위대한 희망은 무너졌고 모두 공통적인 위기에 휘말렸다. 소련은 붕괴되었고 중국은 붕괴로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중국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했으며, 쿠바는 소련과 중국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더불어 동일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저개발국 또는 개발도상국에서도 돌아다녀, 자본주의적 발전이론과 사회주의적 종속이론 사이에 강한 연속성을 드러냈다. 도리어 반근대성의 힘을 통제하고 억압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근대화와 발전단계의 관점에서는 해방투쟁을 사고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사회주의 혁명들은 전세계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해방운동들에 도움과 영감을 주었다. 오히려 이러한 반근대성의 힘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갇혀 있었던 발전주의 이데올로기는 새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우리 시대의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전면에 등장해야 한다. 체 게바라의 행동과 말처럼 코뮤니즘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질적 토재와 더불어 새로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캘리밴, 변증법에서 탈출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대()과 함께 등장하는 괴물들에 주목해야한다. 근대적 합리성은 괴물의 비범한 창조적 힘을 담기에는 너무 좁기 때문이다. 이런 반근대성의 괴물들에 주목한 것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다. 이들은 괴물(야만)과 계몽을 변증법적인 관계로 파악하여 나치 체제를 합리성과 야만의 혼합으로 시작하여 변증법적 포섭으로 결론지으며 새로운 야만 속에 빠져들었다. 이들 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목적론적 근대화 노선과 결별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근대성과 반근대성의 관계를 속류변증법으로 설정함으로써, 첫째 반근대성의 힘들을 동질화했으며, 둘째 반근대성을 근대성에 반대되는 것, 심지어는 모순되는 것으로 제한하여 반근대성의 형상들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여기서 근대성과 반근대성의 관계를 거울 또는 부정으로가 아니라 斜線(또는 視差)으로, 다시 괴물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폭풍>>에 등장하는 캘리밴(식인종의 철자변환)을 마법사 프로스페로가 아니라 노예 캘리밴의 입장에서 반식민투쟁의 저항인 괴물이 지닌 힘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때 캘리밴을 노예로 만들고 자신의 언어를 가르쳤지만 바로 그 언어를 사용해서 프로스페로를 저주하고, 그에게 역병이 덮치기를 기도하는 것 말고 캘리밴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레타마르의 언어에 대한 해석은 주목된다. , 캘리밴의 문화(언어)는 식민 지배의 무기를 바로 그 지배를 향해 돌려세우는 저항의 문화(언어)인 것이다. 이처럼 반식민적 캘리밴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변증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유럽 식민지배자의 관점에서 괴물은 이성과 광기, 진보와 야만, 근대성과 반근대성이 벌이는 변증법적 투쟁에 갇혀 있지만, 피식민지인의 관점에서 식민지배자와 맞먹거나 그보다 더 뛰어난 이성과 문명을 부여받은 캘리밴의 괴물스러움은 오직 그의 자유에 대한 욕구가 식민적인 삶권력 관계의 한계를 초과하여 변증법의 사슬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스피노자도 자신의 환각 사례(검은 피부의 딱지투성이 브라질인)를 통해 상상력의 힘을 드러낸다. 그에게 상상력이란 환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물질적 힘이며, 하나의 몸과 다른 몸, 하나의 생각과 다른 생각 간의 공통적인 것을 인식하는 장이다. 그 결과 형성된 공통관념은 이성의 구성요소이며 사유하고 행동하는 힘의 증가를 위한 지속적인 기획의 도구이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상상력은 언제나 초과적이어서, 기존 지식과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며 변형과 해방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보았던 반동적 근대성, 즉 근대성의 핵심에 있는 관계를 파괴해서 피지배자와 대면해야 하는 과제로부터 지배자를 해방시키려는 모든 노력과 구분해야 한다.


2.3 대안근대성

어떻게 반근대성에 갇히지 않을 것인가

근대성에 내재하는 저항의 형태로 탐구한 반근대성은 근대 권력관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 지리적으로 근대성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성과 동일한 외연을 가지며, 반근대성이 우선적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도 근대성의 다음(‘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근대성이 결코 반근대성과의 관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과 같이, 반근대성도 궁극적으로는 근대성에 묶여 있다. 따라서 저항에서 대안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지구화 항의운동에서 발견된 반지구화딱지가 아니라 대안지구화또는 대안세계주의라는 단서에 기반을 둔 대안근대성개념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때 대안근대성은 근대성과 그리고 근대성을 규정하는 권력관계와의 결정적 단절이다. 물론 대안근대성은 반근대성의 전통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근대성과의 대립과 저항 너머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실마리는 프란츠 파농의 주장, 식민지 지식인의 식민주의자와 반식민주의자의 대결 단계를 넘어 반식민주의자의 토대였던 정체성 역시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혁명적 생성으로 변형되어야 하며 혁명 과정의 궁극적 결과는 새로운 인간의 창조에 있다고 하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그런데 반근대성과 대안근대성의 경계의 모호함은 고전적인 반근대성의 지형에서 진행되는 토착성 운동과 담론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980년대 초 기예르모 본필 바타야 등의 인디오성의 기획이 실제로 겨냥한 것은 인디오의 소멸이라는 설명과 정체성 소멸이후의 두 가지 선택항이 그렇다. 첫 번째 선택항은 본래의정체성으로 회복하는 것이고 다른 선택항은 종족적 정체성은...영원불변의 원리가 아니다라는 열림으로 나아간다. 또한 소설가 레슬리 마몬 실코도 정체성과 전통의 반근대적 구도를 무너뜨리는 혼합·운동·변형의 과정을 그린다. 더 명확한 정치적 사례는 사파티스타 운동으로 이들 대부분의 정치화되는 과정은 이미 멕시코 국가와의 충돌과 원주민 공동체의 전통적 권위구조에 대한 거부 모두를 수반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일 수 있는권리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는권리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근대성의 사고는 사회주의와 코뮤니즘을 구별하는데, 사회주의는 근대성과 반근대성에 양면적으로 다리를 걸치고 있는 반면, 코뮤니즘은 공통적인 것과의 직접적 관계를 제시하여 대안근대성의 길을 발전시킴으로써 근대성과 반근대성 모두와 결별한다.

 

코차밤바의 다중

대안근대성은 문화와 문명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노동과 생산의 문제이다. 그런데 근대 내내 이 영역들은 코뮤니즘운동, 민족해방운동, 반제국주의운동에서 종종 분리되어 있거나 심지어 서로 적대적이었다. 반면 반근대성에서 대안근대성으로의 이행은 이 투쟁 영역들을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새롭게 정렬(평행하게 놓인 진로를 따라 각 영역이 자율적으로 나란히 전진한다는 의미)시키는 중요한 변화를 수반한다. 그 강력한 사례가 볼리비아 코차밤바와 주변 계곡의 수자원 통제권을 둘러싼 2000년 투쟁과 엘알토와 고지대의 천연가스자원 통제권을 둘러싼 2003년 투쟁이다. 두 투쟁 모두 세계은행의 권고에 따라 외국 투자자들에게 사업을 매각하고 공공사업에 필요한 보조금을 폐지하는 것에 대한 투쟁이었는데, 이들은 무척이나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요구들을 수평적 네트워크로 연계해내는 방식으로 주목된다. 볼리비아 투쟁의 이 다양성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며 인종 문화 문명의 문제이기만 한 것도 아닌 이 모든 것이 동시에 걸려 있으며, 각각의 영역마다 사발레타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전근대적특성으로 포착한 1970년대 볼리비아의 소시에다드 아비가라다(다색사회, 다채로운 사회, 잡색사회; 36개의 공식적 원주민 종족과 주 노동자층인 광부계급의 이동 등)’와 이후 이 투쟁들을 대안근대성의 투쟁으로 명명하기 위한 다중형태라고 할 수 있다. 다중형태가 만능은 아니지만 평행한 경로를 따라 수평적 네트워크의 형태로 자신들의 행위를 마디마디 결합함으로써 함께 사회를 변형시킬 수 있는 자율적이고 평등한 사회적 특이성들의 개방적 집단을 상정한다. 따라서 다중은 평행론을 응용한 개념이며, 이 개념은 엄청나게 다양한 특이성들의 자율 평등 상호의존의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 대안근대적 투쟁의 특수성을 포착할 수 있다. 한편, 볼리비아의 투쟁은 대안근대성의 또 다른 본질적인 특성인 공통적인 것에 기초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먼저, 투쟁들의 중심적인 요구는 소유공화국과 대립하는 물과 가스라는 자원의 사유화 방지이다. 둘째, 다중의 투쟁이 공통적인 조직구조(‘수자원 방어를 위한 공동행동’, ‘천연가스 방어를 위한 위원회’)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이러한 다중의 형상에도 여전히 대안근대성의 한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누락되었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변신(모자이크가 아니라 만화경!!!), 즉 혼합과 운동이다.

 

단절과 구성

대안근대성은 초근대성 및 탈근대성에 관한 담론들과 몇 가지 속성을 공유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초근대성은 제2의 근대, 성찰적 근대 등의 개념으로 이야기되는데, 이들 개념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근대적 원리들과의 어떠한 단절도 나타내지 않으며 오히려 근대의 주요 제도 일부의 변형을 제안한다. , 저항이 아니라 개혁을 신뢰함으로써 근대성의 중심적인 위계를 지속시킬 뿐만 아니라 자본이 사회를 자신의 내부로 실질적으로 포섭하는 새로운 형태들을 인식할 때조차 자본주의적 지배에 도전하지 않는다. 탈근대성은 근대성의 핵심 요소들의 종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한층 더 실질적인 단절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는 이미 끝난 것에 주로 초점을 맞추는 부정적인 지칭 방식으로 부정적 사유그리고/또는 <<위기>>가 대표하는 철학의 전통과 연결된다. 게몽주의적 사유의 지배적 노선과 그 유럽중심주의의 확고한 몰락을 정확히 포착하지만, 계몽주의 비판이라는 무덤을 관할하는 가운데 허약한 사고와 유미주의만을 제시할 뿐이다. 나아가 자연스럽게도 그 무덤 주변에서 신학을 말하기 시작한다. 반면 대안근대성은 반근대성의 투쟁과 저항에 근거하며 나아가 반근대성과 단절하며, 변증법적 대립을 거부하고 대안의 제안으로 향해간다. 요컨대 대안근대성은 주체성 생산을 위한 장치를 구성한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연구 노선이 제기되는데, 첫째 유럽 계몽주의 노선, 더 정확하게는 절대적 민주주의를 향한 모색을 수행한 유럽 계몽주의 내의 대안적 노선이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회주의적 실천 모두에서 자주 물 밑으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된 대안적 노선(마르크스 초기 기획과 후기 비판, 레닌과 마오의 일련의 저항 전통 등, 2절 참조)이다. 세 번째는 공통적인 것(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회관계, 삶형태들의 네트워크)이 투쟁의 기초이자 목표였던 식민성, 제국주의 그리고 수많은 인종차별적 지배의 변형태들에 저항하는 반근대성의 힘들을 한데 연결하는 노선이다. 이들 세 노선들은 대안근대성이 요구하는 변신, 인간학적 변형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한데 엮여져야 한다. 이를 위해 지식인은 비판에 의한 과거와의 단절에 머물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는 오직 투사로서 역사의 운동 ’(전위의 도 비판의 도 아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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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역사, 시점과 연속성에 대한 비판

 

역사개념은 항상 특정한 시간 경험과 결합되어 있고 이 경험은 역사 안에 함축되어 있는 동시에 역사를 주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의 정치적 사유는 역사에 주목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시간개념을 고안하지 못했고, 수천 년에 걸쳐 서구문화를 지배해온 시간개념인 점들로 형성된 동질한 연속체로 표상하는 통념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개념을 무력화시켰고 역사 유물론에 균열을 가했으며 이데올로기에 침투할 공간을 내주었다. 이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시간개념을 상술해야할 순간이 도래했다.

 

고대의 순환적이고 연속적인 시간개념

플라톤은 천계의 순환적 운동에 따라 측정되는 시간을 움직이는 영원성의 이미지로 규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규정한 시간의 순환적 속성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는데 즉, ‘시점을 통해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때 시점은 시간의 연속성에 다름 아니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하는 동시에 분리시키는 순수한 경계이다. 달리 말하면 시점은 시간을 무한히 쪼갤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자신과는 다른(‘타자성파괴적성격)인 한편, 미래와 과거를 하나로 합쳐서 이 둘 사이에 연속성을 보장해주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중성(시작과 끝)으로 인해 시간을 지배하지 못한 서구인들의 무능력과 이로부터 유래한 결과로서 시간을 획득하거나시간을 소모하려는강박의 가장 깊은 뿌리는 흘러가는 시점들로 이루어진, 무한한 양적 연속체로 시간을 이해한 그리스인들의 시간관에서 의해 생겨 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시간관을 가진 문화는 고유한 역사성의 경험을 가질 수가 없다.

 

중세 기독교의 직선적이고 연속적이지만 끝(종말)이 있는 시간개념

고대 그리스의 시간표상이 원환이라면 기독교에서 그려지는 시간이미지는 직선이다. 고대의 시간이 방향성이 없다면 기독교의 시간은 하나의 방향(원죄-타락-구원)을 갖는다. 또한 고대의 시간이 별들의 운동이라는 자연 현상과 결합되었다면 기독교의 시간은 이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되고 이를 통해 시간을 본질적으로 인간적이고 세계 내적인 형상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의 시간과 기독교의 시간은 똑같은 시점의 연속체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고대 그리스 형이상학의 순환적 시간상 자체가, 즉 신성의 척도로서 영원성이 회귀하여 시간에 대한 인간 경험을 무화하는 데까지 나아가 버렸다.

 

근대의 직선적이고 동질하며 공허한 과정으로써의 역사주의 시간개념

근대의 시간은 기독교의 시간을 세속화했는데, 종말에 대한 표상에서 분리되었고 이전과 이후의 과정에 의해 구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허한 시간이다. 이러한 공허한 시간표상은 공장 노동이라는 경험에 의해 생겨났으며 순환적 운동보다는 직선적이고 동질한 운동을 위에 두는 근대의 역학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제 이전과 이후(‘과정’)는 그 자체로 그리고 대자적으로도 의미(방향)가 되었다. , 의미는 과정의 전체성과 관련해서만 존재할 뿐 시점으로 이루어진 주재할 수 없는 지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실제로는 이전과 이후의 질서를 따르는 지금들의 단순한 연속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이로 인해 이제 구원사가 순수한 연대기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의미의 외관은 연속적이고 무한한 과정의 표상(자연과학의 영향에 의해 표상되어 재현된 발전진보의 역사인식)을 도입함으로써만 구제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이해와 역사이해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자신의 본래 영역으로부터 추방하며 참된 역사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한다.

 

국가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점 모델(‘지금’)에 따라 시간을 사유했다. 따라서 시간을 시점들의 연속적 계열로 규정하고 변증법을 통해 시간을 부정의 부정으로 정의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경험의 무화로 나아갔다. 순수한 부정을 본질로 하는 시간이 그렇듯이 역사 또한 결코 시점에 의해서는 주재할 수 없고 오직 전체과정으로서만 다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역사는 개개인이 삶에서 겪는 경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이상은 행복이기 때문이다. 헤겔에게 역사의 참된 주체는 국가다.

이에 반해 맑스에게 역사는 단순히 인간정신의 시간--존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類的 존재인 인간의 근원적 차원을 묘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에게 역사는 헤겔과 그로부터 유래한 역사주의의 생각과는 달리 부정의 부정인 선형적 시간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근원()인 구체적 활동성, 실천(제일의 역사적 행위)’에 의해 규정된다. 결국 인간은 시간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때문에 역사적 존재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오직 그가 역사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시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신을 시간화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맑스는 이런 역사개념에 들어맞는 시간 이론을 구축하지 못했다.

 

연속적이고 양적인 시간에 대한 벤야민과 하이데거의 급진적 비판

벤야민은 알다시피 공허한 양적 시점에 대한 지금-시간’, 인류 전체의 역사를 지극히 간단한 약어 속에 응축시키는 사건들의 메시아적 정지 상태를 대립시켰다. 그러나 시점들로 이루어진 연속적 시간표상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은 하이데거의 파괴적 반복이라는 관점이었다. 하이데거는 역사성을 위한 정초 작업에 새로운 시간 경험을 주장했는데, 이 경험의 중심에는 더 이상 점들로 이루어진 주재할 수 없는 휘발적 시점이 아니라 참된 결단의 순간이 놓여 있다. , 인간은 스스로를 마음씀, 즉 시간성 안으로 기투함으로써 자유의지에 따라 본래적인 역사성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역사성의 토대를 마음씀(결단?)이라는 인간 존재 안에 놓음으로써 하이데거의 작업은 마르크스의 작업과도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카이로스의 시간

서구의 모든 시간 구상이 새겨놓은 무늬는 시점성의 무늬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르게 사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불가피하게 이 시점 개념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으며, 나아가 시점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시간 경험을 위한 논리적 조건이다. 다른 시간 경험은 파편적이지만 그노시즘과 스토아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노시즘은 그리스적 시간과 기독교적 시간에 반대하는 끊어진 선이라는 공간적 모델을 따라 시간을 이해함으로써 신의 섭리는 시간을 중단시키는 쪽으로 임하며 부활도 벌써 일어났고 또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사건으로 본다. 또한 스토아철학자들이 주장하는 해방적인 시간 경험은 인간의 행위와 결단으로부터 생겨하는 것이며, 결정이 기회를 붙잡아서 한순간 삶을 가득 채우는 직접적이고 돌발적인 일치의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자기 안에 이질적이고 상이한 시간들을 촘촘히 그러모은다. 그리고 카이로스 안에 있는 현자는 양적 시간의 노예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완벽한 주인이 된다.

한편, 고대로부터 인간의 본질적인 것으로 향유 개념이 제시되었다. 기쁨의 형식인 향유는 양적인 시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그렇다고 영원성 속에도 자리 잡을 수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시간관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차원인 향유를 역사로 만드는 시간관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적이고 연속적인 시간으로의 몰입이 아니라 바로 그 몰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 역사의 시간은 인간이 자유로운 결정의 순간에 적절한 기회를 거머쥘 수 있는 시간, 즉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우리는 통속적 역사주의의 공허하고 연속적이며 무한한 시간에 대해 충족되고 불연속적이며 유한한, 그리고 완성된 향유의 시간으로 맞서야 하며, 더 나아가 사이비 역사의 연대기적 시간에 대해서도 참된 역사의 카이로스적인 시간으로 맞서야 한다. 더불어 진정한 역사 유물론자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향은 향유라는 사실을 매순간 회상하면서 언제든 시간을 정지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자이다. 따라서 향유를 통한 정지 상태 속에서 자신의 근원적 고향인 역사를 늘 잊지 않고 있는 사람은 매순간 바로 지금,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임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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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만주라고 일컫는 중국의 동북지역, 즉 동북3(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세계사 속 소용돌이의 현장이었다. , 만주는 청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중국 정부가 추진한 한족의 대량 이주가 이루어졌던 곳이며, 근대 초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과 이후 서구화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요동이 일본에 할양되었다가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에 의해 도리어 러시아에 조차되었던 곳이다. 또한 제국주의 국가 간에 동아시아의 쟁패를 겨룬 러일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승리한 일본 제국주의가 러시아의 기득권을 양도받아 본격적으로 동북지역을 침략하기 위한 제반 기관과 시설을 설치하였던 곳이다.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과정에서 9·18사변과 괴뢰 만주국의 건국이 추진되었고, 7·7사변과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 그리고 만주국의 붕괴가 일어났던 역사적 공간이었다.

중국 동북지역은 제국주의 열강 간의 쟁패를 다투던 싸움터였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만주인, 몽고인, 러시아인 등 동북아시아의 다양한 민족들이 융합된 다민족 집합 공간이었다. 또한 일제의 점령과 더불어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였으며 식민 통치의 우위를 전 세계에 드러내기 위한 일제의 각종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실험실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각종 근대적 기획이 실험되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그 실험과 경험, 그리고 기억은 이후 일본 본국은 물론 중국, 한국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특히 만주국이라고 하는 신생국가는 왕도정치를 내세우며 민족협화’, ‘오족협화라는 테제 속에 동아시아 여러 민족을 융합하고자 실험하였기에 민족적 다양성과 복합성을 내재한 공간이었다. 또한 만주국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등장하는 이른바 위성국, 또는 꼭두각시 나라들의 원형이었다. 따라서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등이 그들의 우방에 영향을 주었던 본보기였기 때문에 세계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지역은, 현재의 동북지역은 물론 그와 연관되었던 중국, 일본, 한국, 러시아 등 동북아시아의 과거와 현재 및 냉전 시대를 이해하고 확인할 수 있는 블랙박스와 같은 공간인 것이다.

동북지역이 이와 같이 중요한 의미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동북지역과 만주에 대한 이해는 제한적이었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각각 새로운 근대 국민국가가 해당 지역 또는 인접한 지역에 들어서면서 각각의 국가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동북지역의 역사적 경험을 잊어야 할, 또는 은폐해야 할 것으로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해당 국가(민족)의 정체성 형성을 위해 부분적으로 이용되거나 부각되는 모순도 존재하였다. , 중국의 경우 동북지역은 일제에 의해 점령당해 억압받던 악몽의 시공간이었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건국된 만주국은 () 만주국으로 폄하되는 한편, 오랜 기간 전개되었던 중국 국공내전의 역사를 끝냈던 중국 공산당의 승리의 보루로만 기억되었다. 일본의 경우 제국주의적인 만행을 숨기고 피해국으로 표상화하기 위한 과정 속에 만주국의 기억과 그 관계는 끝내 침묵하는 한편,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만주국 건국의 이상개발에 맞추어 식민지 근대화론만을 거듭 강조하였다. 한국의 경우 북한이던 남한이던 만주는 철저하게 일본인에게도 중국인에게도 박해받는 조선인들의 민족의 수난처였으며 항일 독립 운동의 메카로만 이해되었다. 이러한 각국의 민족주의적 시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동북지역에서의 역사적 경험을 모두 다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부분적인 사실이 전체인 것처럼 호도되는 현실이 문제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불철저한 역사적 이해는 동아시아를 둘러싼 각국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조장하고 각각의 체제를 유지시키는 측면이 강하다. 현재 한국, 중국, 일본 사이에 불현듯 불거지는 역사적 갈등은 동북지역에 대한 각각의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그 과정에 역사 전쟁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동북지역에 대한 입체적이고 올바른 역사적 이해는 동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보장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동북지역의 역사적 경험을 연구하는 것과 연구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동아시아 국가의 현재가 20세기 전반 동북지역의 실험과 경험 및 그 기억 속에서 잉태된 것으로 이해하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동북지역의 경험과 실험이 이른바 전후 ‘1940년대 체제를 이끌었다는 전제 아래 현대 일본을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로 동북지역에 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 연구에서는 주로 전후 정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만주국의 관료 및 관동군에 대한 연구로부터 전후 일본 경제의 싱크탱크라고 할 수 있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그 조사부에 대한 연구 등이 이루어졌고 최근 들어 더욱 다각도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만주국이 단순한 괴뢰국이라기보다는 그 건국의 이상과 관련하여 민족적 다양성과 복합성을 유지하고자 한 동아시아적 근대로 이해하는 탈근대적 관점의 연구가 서구 학계에서 전개되었다. 한국에서도 기존의 연구 경향을 비판하며 탈민족적인 시각에서 만주와 재만 조선인에 대한 연구가 국문학계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국문학계의 연구가 주로 담론을 통한 연구들이 주류를 이루다보니 기존의 수난처와 독립 운동의 메카라는 일면적인 만주 인식에 비판적 이해는 불러왔지만, 동북지역의 현실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이해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학계에서도 만주학회를 중심으로 현대 한국의 존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재만 조선인 연구로부터 만주국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가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동북지역에 대한 연구는 시작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동북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연구사적 의의를 통해 볼 때 일본식민통치대련40년사는 세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동북지역의 역사적 이해로써 소개되지 않았던 중국 측의 연구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근대 동북아시아사에서 또 다른 주축인 중국의 경험과 기억을 접할 수 없다면 이 또한 이 지역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까지 한국에 소개된 동북지역의 연구는 대부분 일본과 미국 측의 연구였다. 물론 그것조차 최근의 일이며 많지 않지만 동북지역의 경험과 기억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측의 연구를 간과할 수 없다. 보다 입체적인 동북지역의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기존 연구는 동북지역 가운데서도 특히 만주국에 한정되어 있으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라고 하는 식민회사에 집중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일제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러시아가 조차한 여순과 대련 및 동청철도(남만주철도)를 그대로 인수받았고, 다시 1915년에는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9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조차하였다. 말 그대로 조차가 아니라 점령이고 영구 집권이었다. 그렇다면 일제의 만주 통치는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가 대체적으로 19319·18사변 이후 만주국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동북지역의 역사도 부분적인 이해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흔히 관동주라고 일컬어지는 대련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민통치대련40년사는 이러한 동북지역사의 전 기간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 또한 의미 있는 연구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일본의 중국 동북지역 식민지배는 이른바 삼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관동도독부(이후 관동청),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관동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기적 차이에 따라 힘의 역학관계에 차이는 있지만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배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삼두마차의 역할과 활동을 종합적으로 비교 검토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본 역서는 이 점을 충족시켜주는 몇 안 되는 의미 있는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전체적으로 역사서술 자체가 민족주의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간과할 수 없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중국 인민의 저항도 본 역서에서 구체적으로 조망하고 있으므로 중국 동북지역사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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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혁명하기에 대한 다섯 밤의 기록

 

책과 혁명, 뭔가 거창하지만 어쩌면 이때 혁명이라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에 대한 변혁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책에서는 그런 사회혁명에 기여한 사람들이 책과의 만남을 통해 어떻게 혁명에 나설 수 있었고 어떻게 혁명을 수행했는지를 보여주지만.

개인적으로 혁명이 필요하다면 아주 낮은(?) 단계로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자신의 변화가 혁명의 시작이 아닐까?

몸의 변화없는 혁명은 어떨까?

스스로의 변화 없이 사회만의 변화를 시도했을때 다시 변혁하기 전으로 돌아가버리는 경우를 역사를 통해 무수히 확인할 수 있으니까. 현실사회주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부조리하고 문제 투성이인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어쩌면 그 속에 빠져 있는 자신부터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런 변화에 두렵지만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이처럼 개인의 변화로부터 시작하여 사회의 변화(혁명)로까지 확장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임을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옮긴이가 정리한 이 책의 의미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그리고 '읽고 쓰는' 대상이 종이에 쓰는 것에 한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한정된 시공에서고 춤, 음악, 노래, 복식, 시, 회화, 영화 등 온갖 예술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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