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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일본의 생활공간 건국대학교 아시아콘텐츠연구소 동아시아 모더니티 4
조던 샌드 지음, 박삼헌 외 옮김 / 소명출판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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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샌드의 <<제국일본의 생활공간>>은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가 제국의 회로라고 할 수 있는 태평양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받고(서로 맞물려) 있는 점을 제국일본의 생활공간 속 양관, 아지노모토, 몽타주로 그린 환태평양의 사람과 이동, 문화주택, 등나무 의자, 관광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조던 샌드의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제국적 근대가 글로벌한 근대와 서로 맞물려 있다고 해도 도달할 수 없는/분리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불안'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레오 칭의 표현을 빌려, 일본의 입장은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쌍방에 동시에 놓였기 때문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불안은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의 근본적인 차이 때문이라고 하며, 그 근본적인 원인은 제국적 근대가 민족적 히에라르키, 즉 불평등을 전제하고 강제적인 동화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등나무 의자에 관한 논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글로벌한 근대로 나아가기 위해 좌식 문화에서 의자식 문화로 바꿔 동남아시아에서 군림하고자 한 일본인들의 제국적 근대는 외형적으로 의자식 문화를 통한 민족적/인종적 히에라르키를 보여주긴 하지만 가정에서는 여전히 좌식문화가 유지됨으로써 의자식의 타이완 한족과의 대면에서 오히려 역전된 형태(가역적 주장)에 직면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에로틱 그로테스크 넨센스>>에 인용된 "외부의 '야만인'을 발견함으로써 내부의 '문명'이 발견 된다"는 가와무라 미나토의 통찰을 "대단히 가역적인 주장"이라고 한 미리엄 실버버그의 인용을 가져와 "식민지의 일본인 가족이 때로는 서양 제복을 착용하고 때로는 도우미도 보여주며 등나무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향해 착실히 자세를 취했을 때, 그것은 문명화된 상태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연출에 의해 자신 스스로 그 상태에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자식 생활을 하는 한족의 문명과 조우했을 때, 기념할 일이 아닌 일상의 시간에서는 좌식을 계속했던 일본인 식민자는 또한 당당히 자신들 특유의 '원시성'을 연출하고 인식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언급하는 대목이다. 이른바 가역적이라는 것은 역으로 "외부의 '문명'을 발견함으로써 내부의 '야만'이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조던 샌즈는 제도 도쿄의 관광 코스를 통해 제국의 근대는 노골적 불평등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과 동시에 문명화와 통합의 사명이 있었다는 것이 합쳐져서 해결불가능한 딜레마와 불화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즉, 평등 없이 피지배 민족을 어떻게 동화시킬 것인가라는 식민지 지배자의 불안과 동화에 의한 복종과 문화 소멸 없이 어떻게 평등을 얻어 낼 것인가라는 피식민지 민족의 불안이 식민지 경영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며 이러한 역설이 제국의 다양한 일상적 만남 속에서도 전개되었고 동화와 문화적 히에라르키에 대한 일상의 불안이 제국 안을 돌아다닌 유학생들의 기록에서 줄곧 나타났다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 그 자체는 착취의 구조임과 동시에 문화적 불안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장치이며, 권력의 스펙터클, 만남의 장, 일본 제국의 근대를 형성했던 사람과 지식과 상품이 흐르는 네트워크의 중심적 연결점으로서 제도 도쿄는 이런 '불안을 응축하고 재생산했던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조던 샌즈의 이 책은 제국 일본의 근대를 '제국적 근대'로 개념화하면서 그 모순과 불안의 이유를 다양한 일본제국의 생활문화사를 통해 밝히고 있는 점에서 시사적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조던 샌즈는 기존의 '식민지적 근대'에는 식민본국의 근대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포함시킨 새로운 개념으로 '제국적 근대'를 사용한다. 하지만 '식민지적 근대'가 '제국적 근대'에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인지는 의문스럽다. 오히려 구분을 통해 이 시대와 공간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심화되면 좋지 않을까.

둘째, 글로벌한 근대와 제국적 근대가 서로 맞물려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 또는 포스트 식민주의에 의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을 불평등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물론 글로벌한 근대도 그의 표현을 밀리자면 '항상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자기결정권이나 '문명의 이기'가 가능하게 만든 쾌락과 표현 수단 등의 평등한 기회라는 약속을 제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글로벌한 근대는 서구 중심주의적인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글로벌한 근대 자체도 이미 식민적일 수밖에 없음은 서발턴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불안'과 '가역적 주장'은 제국적 근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한 근대에도 해당되어야 하지 않을까.

셋째, 제국적 근대가 불평등을 전제하고 동화를 주장하기 때문에 불안을 내포할 수밖에 없고 샌즈의 언급은 없지만 식민지적 근대도 글로벌한 근대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면 글로벌한 근대는 불안이 없는 것인가. 오히려 근대 자체가 태생적으로 불안을 내재하고 있으며(평등을 주장하지만 평등하지 않는 현실, 항상 미뤄지는 평등) 이러한 점이야 말로 근대성은 식민성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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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아시아 도시 - 공간과 도시 형태의 3차원 허구들 심산출판사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8
진이 김 왓슨 지음, 태혜숙 옮김 / 심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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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김 왓슨의 <<새로운 아시아 도시>>는 이른바 아시아의 호랑이, 한때 세계적 주목을 받았던 NICs국가의 도시들(싱가포르, 서울, 타이베이)에 관한 책이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이 새로운 아시아의 도시들은 눈부신 경제 성장과 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현재 논쟁은 답보상태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녀의 주장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서있지 않다. 식민의 경험이 포스트식민의 경험으로 연결되었지만 이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식민, 반식민, 신식민, 포스트식민 모두)의 구조 속에서 아시아의 호랑이들은 근대화라는 '발전 민족주의' 형태로 전개된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그 반대편의 이른바 민중, 계급, 젠더 등의 소외가 공간 변화와 함께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진이 김 왓슨의 논의가 새로운 것은 아시아의 호랑이 국가, 특히 싱가포르, 서울, 타인완의 경제 성장과 발전의 비밀을 식민 및 포스트식민 공간의 변화와 문학 텍스트의 비교 검토를 통해 포스트식민 도시들의 근대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 텍스트를 통해 공간을 검토하는 작업은 그다지 새로운 방법론은 아니다. 하지만 진이 김 왓슨은 역으로 공간 변화가 어떻게 문학 텍스트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고 해석해냄으로써 기존 작업과 차별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가 공간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세상을 연결하면서도 차별화하는 공유된 역사적 과정들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들 중 하나가 지구화하는 자본하에 국가에 의해 내부적으로 생산되는 공간의 차별화를 추적하는 것'(28~29)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공간 변화를 문학 텍스트로 읽는 것은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에서 기인한다.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에서 공간의 생산을 크게 세 가지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 첫 번째가 공간적 실천(실재)이며, 두 번째가 공간의 재현들(상징), 그리고 세 번째가 재현적 공간(상상)이다. 여기서 진이 김 왓슨은 이른바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기획가들의 추상적이고 관료적인 공간으로써의 공간의 재현들과 '공간과 연루된 이미지들과 상징들을 통해 직접 살아지는 것을 묘사하는 이들과 일부 예술가들의 공간'인 재현적 공간을 중심으로 새로운 아시아 도시를 파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식민도시에서 포스트식민도시로, 그리고 산업화된 경관들이라는 시계열적 구성을 토대로 그 시기 식민권력, 포스트식민권력의 공간 재현 양상과 그에 대한 재현된 공간으로써의 문학 텍스트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포스트식민도시들의 근대성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미덕인 공간 변화를 문학 텍스트와 비교하는 작업은 르페브르의 공간 이론을 가져오면서도 세 공간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설정하는 르페브르와 달리 두 공간의 관계로만 분석하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가 문학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그렇겠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르페브로의 공간 이론에 가장 중요한 공간의 실천(역사)이 빠져 있음으로써 추상적인 관료적 공간과 재현적 공간의 경합, 또는 결합만을 보고 실재의 더 다종다양한 도시의 의미를 추적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르페브르의 공간적 실천은 공간의 재현과 재현된 공간에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를 파악하지 않으면 공간의 재현과 재현된 공간을 단지 추상적인 담론 상태로밖에 파악할 수 없다. 담론 밖의 상상은 재현된 공간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한편, 제목과 같이 아시아 호랑이 국가들의 현재적 의미에서인지 모르지만 식민 도시에 대한 분석보다는 포스트식민 도시에 대한 분석에 치중하고 있다(3부 중 2부가 포스트식민시기).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식민 도시에 더 흥미가 있는데 세 도시의 식민지 경험을 분석하며 제시하는 1부의 경우, 물론 포스트식민 도시와도 연결되지만 해석상의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카스텔스의 도시 이론에 도움을 받아 식민 도시의 형태를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하며 '무엇보다 행적인 기능을 특징으로 갖는' 식민 유형의 정착지인 행정도시와 산업 중심지 혹은 고국과 직접 연결되는 '통로, 수문 도시'인 무역도시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서울과 타이베이를 행정도시로, 싱가포르와 홍콩을 무역도시로 구분한다. 그런데 이런 분류는 포스트식민과 연결하여 도시와 국가를 혼용하고 있다. 즉 싱가포르나 홍콩은 도시이면서 국가이기에 새로운 아시아 도시로 파악할 수 있지만 서울과 타이베이는 남한과 타이완으로 확대 상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 이럴 경우 스스로도 밝히듯이 남한의 부산과 인천, 타이완의 가오슝 등은 무역도시에 속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에 대한 부분을 삭제함으로써 남한과 타이완을 상징하는 도시로 서울과 타이베이에 국한하며 둘 다 행정도시로 파악한다. 이는 상징불가능한 부분에 대한 삭제가 전제된 것으로, 그렇다면 그녀의 주장은 포스트식민으로 곧장 연속적으로 연결하기 어렵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세 도시를 비교분석하는 것보다 한 국가의 다양한 식민 도시들을 비교분석하는 것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이 김 왓슨은 그런 한계를 넘어 세 도시를 통해 세 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스피박의 <<서로 다른 아시아>>의 개념을 받아들여 아시아의 복수성까지 염두에 두고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아시아 도시는 아시아의 복수성과 함께 도시의 복수성까지 염두에 둔 용어라는 것이다. 앞으로의 연구를 촉구하는 측면은 한계를 무릅쓰고 일반화하고 있는 것은 이 점에 기인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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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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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공간 형성은 도시 공유재 혹은 그 그림자인 공공 공간과 공공재를 영속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인 동시에 사적 이익집단이 도시 공유재를 끊임없이 영유하고 파괴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도시는 자본과 대안운동이 도시권을 둘러싸고 경쟁해야할 이 시대의 핵심 장소라고 할수있다.
"누구의 집단적 기억, 누구의 미학, 누구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온갖 문제가 제기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결국 도시는 그리고 도시권의 요구는 진정한 민주적 실천의 장을 열며 정치적 사고와 행동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자본을 넘어선 대안을 실천에 옮길 장소이자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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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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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 경제적 식민성의 모습을 제3세계의 도시화와 슬럼이라는 공간과 거주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물론 제3세계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전 세계의 도시에는 어느 곳이든 슬럼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와 세계은행, IMF 등의 구조조정과 그 구조조정을 자신들의 치부수단으로 만들려는 '민족주의자(이런 걸 민족주의자들이라 해야할까? 어쨌든 현상은 그렇다)'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조조정이 세상을 또한 한 국가를 '진보'시킬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환상이며 그러한 환상을 조장한 저 신자유주의도 이제는 그러한 환상실현을 포기하고 슬럼 도시를 적으로 돌리며 전쟁으로 응수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슬럼이 지구를 뒤덮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는 시가전이 전개되며 곧 인류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파국적 '예언서;다. 

 

하지만 저자는 파국을 얘기한다고 해서 미래를 비관과 냉소로 뒤덮지는 않는다. 파국은 경고이며 조건부이다. 그는 이런 파국을 막기 위한 저항의 힘을 또 다시 슬럼이라고 하는 공간과 그 주민에게서 찾는다.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런 의미에서 슬럼을 낭만적으로 사유하는 포스트이론들과 대결하는 지점은 흥미롭고 그의 다음 저작을 기대케 한다. 개인적으로 <<뉴욕열전>>과 함께 읽으면 두 책의 차이와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현실을 두텁게 묘사하며 직시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뉴욕열전>>은 슬럼 속의 인간들이 어떻게 희망을 만들고 있는지를 여러 형태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한가지 첨언하면, 우리가 빈곤과 슬럼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은 다른 빈곤과 슬럼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어쩌면 우리도 경제적 식민자의 입장에서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자신의 행복이 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고 자신의 행복과 더불어 이웃의 행복도 생각해야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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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장시 연구 - 5일장의 변동과 지역주민 역비한국학연구총서 31
허영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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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시기 경제사 연구는 단순하게 정리할 수는 없지만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성립을 둘러싸고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이라고 하는 양분된 입장으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현재 그러한 대립은 각각의 입장만 확인한 후 다시 각자의 역사관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실증적인 연구로 침잠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식민지 조선을 바라보는 기존의 두 가지 입장을 모두 근대 ‘긍정론’으로 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탈민족/탈식민주의적인 주장도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가운데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식민지기 조선의 사회와 문화를 ‘식민지적 근대’라는 입장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도 지속적으로 제출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 근현대사 안팎의 연구사적 분위기 속에서 본서인 『일제시기 장시 연구』가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서의 문제의식도 이러한 연구사적 대립과 한계를 저자 나름대로의 역사의식과 역사인식 속에서 극복하고자 한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제시기 장시 연구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5일장의 변동을 지역주민이라고 하는 창으로 살펴본 글이다. 즉, 일제시기 장시의 증가, 변용, 존속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두고 그러한 장시의 변화상을 크게 식민 권력, 지역, 주민이라는 입장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수집․활용하여 분석하였다. 따라서 일제시기 장시 연구는 교역 및 유통 공간으로써의 장시에 관한 연구이지만 상품을 둘러싼 경제적 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장시의 변화상 및 장시의 운영과 활용이라는 공간 활용의 측면에서 식민 권력, 지역, 주민에 초점을 맞춘 ‘장시의 사회사’ 또는 ‘장시의 정치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존의 경제사 연구에서처럼 장시를 돈과 상품이 오고 가는 교역과 유통의 장으로 파악하지 않고 식민 권력과 피식민자, 지역과 주민, 장시민과 농민이라는 관계에 중점을 두는 장시의 사회사 또는 정치사로 파악한 이유는 본서의 장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본서의 근원적인 물음은 서구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발전과정과 달리 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 장시는 일제시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존속, 확산, 유지되었는가라는 점이다. 서구적 경로를 자본주의 발전 경로의 척도, 표준으로 보는 한, 당연히 사라져야할 ‘구시대의 유산’인 장시가 일제시기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꾸준히 존속, 유지되고 있었던 이유를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근현대 한국 사회의 특징을 밝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역사 이론적 고찰에서 등안시해 온 이른바 ‘전통적인 것’ 또는 ‘한국적 특수성’을 어떻게 보편의 이름으로 자리매김할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듯 보인다.
이 지점에서는 현재 두 가지 이론적 참조점이 주목된다. 즉, 하나는 철저하게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이를 극한으로 밀고 가서 보편을 해체하고 보편이라는 형태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보편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인데 최근 들어 보편(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또는 근대와 관련하여 보편(성) 담론은 서구의 이론적 논의 속에서 전개되었고 그 결과 보편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폭력에 대한 반성과 비판적 검토가 또한 서구 학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몇몇 논의를 살펴보면, 기존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를 차별을 확대재생산하는 척도였다고 부정하고 기준이 되어 차별을 생산하는 보편이 아니라 보편의 틀을 ‘텅 빈’ 것으로 간주하거나 ‘부정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와 유사한 이론적 지평에서 보편을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범주 자체를 무한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세계는 ‘보편적인 것들’로 존재하며, 또한 이러한 보편은 ‘모호한 보편성’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볼 때 보편을 부정하든 부정하지 않든 기존의 획일적인 줄 세우기와 그에 따른 차별의 폭력적인 보편을 문제 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장시 또한 서구적 보편의 길을 걷지 않았다고 해서 없어져야할 것은 아니며 한국만의 특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장시의 역사는 한국 사회를 구조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그런 점에서 본서의 문제의식과 문제의식에 따른 장시의 변동에 관한 연구는 시의적절하며 유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 서구 ‘비주류 경제학’에서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급자족 경제에서 물물교환 경제로 그리고 상품화폐경제로 이어지는 일률적이고 획일적인 경제 발전 이론은 자유주의 경제학(주류 경제학)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며 오히려 비역사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시 문제도 이제 역사 이론적 고찰로부터 역사 사실적 고찰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적 사실이 어떠한 메커니즘 속에서 드러났는지를 심도 깊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역사학의 본연의 임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임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충실하고 두터운 묘사’가 이 때문에 가능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2.
이상의 문제의식 속에 본서는 일제시기 이래 1980년대까지 장시가 존속되고 도리어 확산된 구조적, 주체적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문제 삼고, 그러한 실마리를 일제시기 장시의 변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시기 장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경제체제이기는 하지만 조선 사회가 자본주의사회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당연히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도 장시에 대해서는 ‘시장규칙’을 만들어 규제적 통제권을 확보하는 이외에 그다지 적극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시는 원시적 시장제도이고 이는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당연히 자연적으로 축소․소멸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시는 폐지되지 않고 줄곧 존속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오히려 원래의 생각과는 달리 이를 식민 정책의 선전장으로 적극 활용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일제시기라는 현실 속에서 장시는 그 내부적인 변동은 상당히 컸지만 없어지지 않고 꾸준히 확대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제시기 장시의 변동과 관련하여 1940년대 초까지 존속, 확대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본서는 그 원인을 장시의 존속, 확대 이면에 드러나는 다종다양한 갈등과 그러한 갈등의 배후와 갈등의 한 가운데 서 있었던 사람들에서 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식과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인가를 문제 삼고 있다. 이에 따라 본서는 장시의 변동을 둘러싼 힘의 역학을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내부적 요인 즉 장시를 둘러싼 지역사회와 장시를 활용하고 있는 주민에서 찾고 있다. 물론 외부적인 요인으로 식민지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 권력(의사국가)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식민 권력은 장시에 대해 소극적이었으며 자연적인 축소․소멸을 예측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렇다 할 역할은 하지 못하고 도리어 이를 정책 선전의 장으로 활용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다면 결국 장시의 변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은 장시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변동과 장시 문제에 개입하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본서는 지역사회가 장시의 변동에 미치는 영향(제2부 장시변동과 지역사회)과 장시를 삶의 터전을 삼고 있는 ‘시민’과 농민을 중심으로 장시의 변동을 둘러싼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제3부 장시갈등과 ‘시민’, 제4부 장시와 농민). 장시의 변동에 영향을 끼친 객관적 요인으로는 교통, 운수체계의 변화를 들고 이러한 교통, 운수체계의 변화는 지역사회의 이해관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장시의 변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파악하였다. 또한 지역사회의 이해관계에 따라 장시가 변동하기는 하였지만 역으로 장시의 변동이 지역사회의 이해관계를 재편하고 변화를 추동한 경우도 존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장시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였다. 이 점 때문에 장시는 경제적 공간인 동시에 정치, 문화적 공간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장시가 정치적 공간이 될 때 이를 둘러싸고 정치적 주체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치적 주체를 본서에서는 장시민과 농민으로 파악하고 있다. 실제 이들은 장시 변동을 둘러싼 갈등과 분규과정에 적극 개입하여 정치적 활동을 통해 이러한 갈등과 분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지역주민에 의한 각종 집합 행위들이 정치적 활동의 사례들인데, 이 사례들을 통하여 본서는 장시가 그 변동의 폭은 컸지만 결과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으며 해방이후까지 지속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상의 관점에서 본서는 ‘민중’에 기반을 둔 ‘지방정치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장시를 둘러싼 갈등과 그에 따른 장시의 존폐는 지역과 장시라고 하는 삶의 공간을 둘러싼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지역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공론장이 장시의 변동이라는 문제를 통해 그리고 둘러싸고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정치적 주체들이 탄생되고 그에 의한 정치적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장시 변동에 가장 큰 힘을 장시라는 공간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변동과 장시를 드나들면 삶을 영위해 가는 ‘장시민’, 즉 ‘시민’으로 상정함으로써 근대적 정치 주체로서의 ‘시민’과 연결시키는 듯 보인다. 물론 본서에서는 지속적으로 ‘시민’을 ‘장시민’으로 한정하며 구분하고 있다. 해석의 과잉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 암흑기로 묘사된 일제시기에 장시를 둘러싼 정치적 주체로서 장시민과 농민을 자리매김하고 있는 점에서 그 이면에는 근대적 정치 주체로서의 시민의 모습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본서는 문제의식과 내용을 통해 드러나듯이 조선 경제의 정체성론에 기반한 식민사관이나 그것의 극복인 ‘민족주의 역사학’의 이론적 한계와 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사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그를 통해 유의미한 점들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시를 교역과 유통이라는 경제의 장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사회의 장 및 문화의 장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 책의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더불어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 대문자 역사가 아니라 소문자 역사를 지역과 민중에 기반하여 ‘두텁게’ 서술하고 있는 점에서 그 가치는 빛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민중에 기반한 역사적 서술을 중앙이 아니라 지역, 즉 민중들의 실제적인 삶의 공간, 경험의 장을 중심으로 파악함으로써 기존의 근대 국민 국가가 주도하는 내부적 위계화와 차별에 대응할 수 있는 역사학의 실천적 기여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본서의 빛나는 의의에도 불구하고 아래에서는 몇 가지 논쟁점과 아쉬움을 제시하며 본서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3.
먼저, 장시가 기반하고 있는 경제체제의 변화에 대한 상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 주지하다시피 지역공동체적 호혜주의가 작동하는 장시는 전근대적 장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장시의 이와 같은 기능은 근대 이후에도 줄곧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규칙’이라는 근대 법 체제 속에 장시가 포섭됨으로써 경제제도로서의 근대적 ‘공공재’ 또는 ‘집합재’로 변모하였다. 여기서 ‘공공’ 또는 ‘집합’은 공동체의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그것과는 구별된다. 즉, 표지로서의 ‘公’과 내용으로서의 ‘共’이 결합된 개념으로 공동체적 모습은 항상 재현되는(Representation) 표지에 의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시의 변동과 관련하여 장시민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정치적 활동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경제적 이해관계의 틀인 자본 및 지역 또는 식민 권력이라는 장 속에 제한된다. 그렇다면 장시의 변동은 식민 권력과 지역이 맺는 관계를 자본의 입장(경제체제의 변화)에서 보다 더 집중적으로 파악해야하지 않을까?
둘째, 근대적 공공재를 둘러싼 경합의 의미가 능동적 정치활동 또는 주체적 정치활동으로 긍정할 수 있는 점도 있다. 그 속에서 특히 식민 권력의 분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식민 권력의 분열을 야기하는 경합의 장 자체가 식민 권력에 의해 다시 봉합되는 것으로 진행될 경우 이는 근대 국가(또는 식민지)를 유지하는 또 다른 고도의 정치 기술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즉 지역민들의 정치적 활동이 근대 권력의 정치 테크놀로지에 장악되어 있다는 암울한 생각이지만 지역주민들의 정치적 활동 또한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에 의해 줄곧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수동적 활동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근대적 공공재 또는 집합재는 그 생성에서 소멸까지 이를 둘러싸고 언제나 경합하는 공공영역이 된다. 이러한 경합하는 공공영역에서는 공공성을 대리․대표하는 자를 두는 데, 이때 대리․대표는 항상 개인의 사적 이익에 이끌릴 수 있는 여지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표면적인 공공성과 달리 근대 국민 국가는 자본주의적 이해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이면에는 자본가의 사적 이익이 항상 존재하고 그 사적 이익이 공적 이익으로 대리․대표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서에서 파악하고 있는 ‘시민’의 존재 또한 면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일차적으로 장시의 변동을 이끄는 ‘장시민’은 시민에 대한 구별과 함께 제시하고는 있지만 은연중에 근대적 시민계급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160~162쪽). 하지만 시민계급의 집합재 또는 공공재에 대한 운동이 호혜적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운동인가는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한 작업인 것 같다. 오히려 일제시기 자료에서 드물게 등장하지만 ‘시민유지’라고 하는 사람들에 집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지수걸의 논의처럼 지방의 유지정치가 식민 권력과의 ‘야합’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호혜적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책무(225쪽)인지도 의문이다. 그런 점이 없지는 않지만 일차적으로는 장시의 변동이 자신의 이해관계와 결부되어 있는 이상 자신들의 사적 이익 획득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점에서 1920년대부터 장시가 조합과 조합의 대표에 의해 경영 또는 유지되는 점은 중요하다. 본서도 이런 문제제기를 염두에 두고 시민, 행상인, 농민을 구별하고는 있다. 하지만 계급, 계층적 위계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하다.
넷째, 본서의 의미가 장시를 경제적인 장으로 보지 않고 사회, 정치적 장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오히려 정치적 주체의 내부적 차이를 드러내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 이러한 정치적 주체의 내부적 차이는 장시를 둘러싼 경제적 장에서 파악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서에서는 장시와 농민에 관한 장에서만 경제적인 측면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다른 부분에서는 거의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농민들이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공간에서 그 매개가 되는 상품과 유통에 대한 논의가 없는 것은 다소 아쉬운 점이다. 또한 장시는 지역의 문화적 공간이었다. 장시의 변동은 시민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한 영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삶과도 결부되어 있는데도 농민들의 실질적인 문화적 공간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는 것 같아 이 점 또한 아쉽다. 농민에게는 유통공간으로서의 장시뿐만 아니라 문화적 공간으로서의 장시 또한 삶과 경험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은 사소한 것으로 본서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문제의식과 의의를 크게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원문은 <<지역과역사>>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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