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은 각각 지능과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지능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지능을 연결시켜 우월한 자의 '설명'을 통해 지능의 진보를 추구하는 방식은 바보만들기다. 오로지 해방된 무지한 스승의 의지와 해방할 학생의 의지, 학생의 지능과 책의 지능이 연결되어야만 앎의 해방을 통한 삶의 해방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해방의 방식은 가정에서만 가능하며 무분별한 그래서 질서 그 자체인 사회에 적용한다면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해방은 오로지 인간(개인)의 해방만이 존재하며 결국 개인을 넘어선 해방은 없다?!
그렇다면 앎의 평등은 유토피아나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뿐이다. 진보를 말하는 자들은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하며 지도만이 그래서 더욱 세련된 설명만이 사회의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사회의 평등을 위해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한다. 그리고 사회의 불평등은 평등으로 진보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지도를 자신들의 합리적 교육을 받을 것을 강제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의 이러한 고리야 말로 구식의 새로운 버전(구식의 승리)이며 평등을 무한 지연시키고 불평등을 무한 증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은 인간의 평등에서 기초"한다. 그 불평등인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평등이 가정되어야 한다. 물론 협약에 의해 평등이 사라졌다 해도 그 흔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를 모방, 흉내내야 하며 이것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한편, 평등은 '의견'이며 '진리'일 수는 없다. 그래서 평등을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 말하고 번역하고 소통하여야 한다. 따라서 평등의 입증은 상대방의 지능의 평등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자유를 평등의 기술로, 지능의 존중으로, 타자의 인정이다. 그래서 이 기술을 전유하고 이 이성을 정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
5장에서 랑시에르는 진보와 진보주의자들이 승리한 구식에 대한 승리는 "제도화된 불평등의 절대적 승리"이며 "이 제도의 본보기가 되는 합리화라는 것"이며, "거기서 오래 지속되는 구식의 권력이 세워지는 견고한 토대가 있다"(227~228)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문자 그대로 정의하면 "진보적 인간이란 걷는 자, 다시 말해 보고, 실험하고, 자신의 습관을 바꾸고, 자신의 앎을 검증하고 이렇게 끝없이 가는 인간"(222)이지만 이제 진보적 인간은 또한 다른 것으로 "진보의 의견에서 출발해서 생각하는 인간, 이 의견을 사회 질서에 대한 지배적 설명의 서열로 승격시키는 인간"(222)이다.
그래서 진보는 "새로운 설명"이며 "새로운 불평등화의 상승하는 힘"(225)이다. 이제 "사회는 스스로를 개선한다. 사회가 자신의 질서를 개선의 징표 아래 생각한다. 사회가 진보한다. 사회는 사회적으로만, 다시 말해 모두 다함께 그리고 질서 있게 진보할 수 있다. 진보는 불평등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이다."(225)
그렇다면 "모든 교육학은 자동으로 진보주의적"(225)이며 "진보, 그것은 사회 전체의 허구로 승격된 교육학의 허구"이며 "교육학의 허구의 핵심은 불평등을 지연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열등함은 그저 지연일 뿐"이며 "우리는 그 지연을 메우려 그 지연 속에 직접 있어야"하며 "틀림없이 우리는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할 것"(226)이다. 그래서 "학생은 결코 스승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인민은 결코 깨인 엘리트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나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좋은 길로, 즉 개선된 설명들의 길로 나아가게 해준다. 진보의 세기는 승리한 설명자들의 세기, 애 취급된 인류의 세기"(227)이다.
결국 진보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은 무언인가? "설명을 개선함으로써 바보 만들기를 개선하는 것"(228)이다. 그것이 "진보론자들의 고리"(229)다. 또한 "설명하는 체계는 시간처럼 자기 새끼들을 낳는 족족 그들을 먹어 치움으로써 영양분을 섭취한다. 새로운 설명, 새로운 개선은 생겨나자마자 곧 수천 개의 다른 설명과 개선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죽는다." "설명하는 체계는 그렇게 갱신"(242)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성이나 평등을 실제 개인들에게 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개인들의 허구적 모임에 귀속시킬 것인지 선택"해야 하며 "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250).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한 인간들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해방된다는 말이 뜻하는 바"라면 진보가 말하는 '지도'를 통한 '평등'은 "불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하는 것"(251)일 뿐만 아니라 "재현된, 사회화된, 불평등해진, 개선되기에 좋은, 다시 말해 위원회에서 위원회로, 보고서에서 보고서로, 개혁에서 개혁으로 지연되어 결국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지연된 평등"(252)이다.
한편 "평등은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 단지 '의견'일 뿐이며 '진리'가 아니기에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 평등의 입증은 "상대자들의 지능의 평등을 인정 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257). 더불어 "자유는 적대적 입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편이 다른 편을 번역하는 평등한 기술"에 있으며, "수사적 무분별 안에서도 멈추지 않고 발휘되는 지능의 힘에 대한 비교로부터 나오는 존중"에 있으며, "이성을 가졌다는 자만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대가로 진리를 말한다는 자만을 그만두는 자에게 있어서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 수 있는지를 인정"하는 데 있으며 "이 기술을 전유하고, 이 이성을 정복하는 것이 중요한 것"(258)이다.
그러나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것"(261)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