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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지음, 심영길 외 옮김 / 생각정원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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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보에시가 16세기 18세에 쓴 글이라는 <<자발적 복종>>은 권력과 복종의 관계를 권력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복종자의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다. 한 마디로 권력은 폭력을 행사하는 공권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종하는 자들에 의해 자리매김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점은 지배의 법칙인 복종의 연쇄라고 생각된다. 군주에 복종하는 상급 관료, 상급 관료에 복종하는 하급 관료 등 계속해서 줄세워지는 복종의 연쇄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발적으로 복종할까? 복종해야만 복종받을 수 있다는 이 복종의 연쇄야말로 지배의 법칙이지 않을까?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우월한 열등자들의 연쇄 또한 이와 같은 복종의 연쇄를 지탱하는 중요한 논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월한 사람에게 머리 숙이며 열등한 사람에게 당당한 그런 우월한 열등자들말이다. 이 연쇄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라 보에시는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강조했지만 내가 보기에 복종하는 것을 그만두기 이전에 복종받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건 아닐까? 자유의지는 나와 같은 타자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건 아닐까? 그래야만 나도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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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분석 - 공간, 시간, 그리고 도시의 일상생활 카이로스총서 25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 갈무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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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는 주인공 오스카어의 북소리가 나치의 군대행진곡을 왈츠로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 오스카어의 개인적이며 타자화된 리듬이 획일적이고 동일한 국가적 리듬(나치즘)을 변주하는 리듬의 다리듬성과 또 다른 의미에서 조화리듬성을 보여준 기가막힌 예라고 할 수 있다.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장면이었다. 당연히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분석은 이러한 제한된 예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이 책은 시론적 분석이기에 수많은 예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도 향후 그러한 작업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 시도의 예가 이 책의 후반부에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작업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앙리 르페브르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의해 식민화된 근대의 몸과 공간을 일상이라는 시간을 통해 분석하며 그 해방의 중요한 요소로 리듬에 주목한다. 일상이 국가권력과 미디어의 '현재'라는 이미지에 식민화되어 진부한 것으로 무화되었다면, 르페브르는 일상을 리듬으로 '현존'시킨다. 따라서 리듬분석은 몸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몸안과 몸밖의 상호관계를 사유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리듬의 속성을 다리듬성과 조화리듬성으로 정의하며 식민화된 근대의 리듬 자체를 동일리듬성과 부정리듬성으로 비판한다. 근대의 몸과 공간이 식민화된 이유는 국가권력과 미디어가 발산하는 진부한 반복의 '현재(표상)'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성 개념이 진부한 것으로 오염되었다. 그렇기에 앙리 르페브르는 국가권력과 미디어가 지속적으로 발산하여 현실을 오염시키는 진부한 '현재'의 이미지가 아니라. 체험과 감각적인 것을 통해 현실을 '현전'시키는 리듬에 주목한다. 일상성을 반복과 차이의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저항과 사건은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아가 리듬은 기계적인 것과 유기적인 것, 발견과 창조, 순환적인 것과 선형적인 것, 영속적인 것과 불연속적인 것,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등을 이분법적으로 분리,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본다. 이처럼 리듬분석은 헤겔의 '정-반-합', 맑스의 '경제-사회-정치'와 같이 '시간-공간-에너지', 즉 '멜로디-하모니-리듬'의 변증법적인 방법론에 기반한다. 결국 리듬분석은 식민화되어 있는 시공간의 동일리듬성과 부정리듬성을 다리듬성과 조화리듬성으로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리듬에 의한 몸의 회복과 식민화된 공간의 해방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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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유동하는 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한상석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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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는 말그대로 '삶의 방식'이다. 즉, 개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세계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인지를 지속적으로 강요한다. 교육을 통해서 매체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세계가 구성한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그런 삶의 방식이 누가 만든 방식이고 누가 작동시키는지를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그런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우리의 삶을 '인간쓰레기(잉여인간)'로, '벌거벗은 목숨'으로 '생존'만을 영위하는 삶이라고 문제제기한다. 결국 이 책은 근대 자본권력의 권력유지를 위한 '유동하는 근대'로의 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부딪치게 되고 그렇게 불확실한 사회에 맞게 살도록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해결책은 전혀 없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스스로 "질문은 던지지만 명쾌한 답변은커녕 답변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답변이 독단적이고 시기상조이며, 사람들을 호도할 여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요컨대, 앞에서 말한 변화들로 인해 사람들은 불확실성이 만연한 상황에서 예상 손익을 계산하고 결과를 평가하면서 계획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런 불확실성의 원인을 탐구하는 일, 그리고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그런 장애물들을 통제하려 할 때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도전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단적으로) 대처할 우리의 능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드러내는 일, 이것이 내가 이제껏 노력해 왔고 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될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이처럼 바우만은 불확실성이 만연한 유동하는 근대에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의 구축이 지닌 문제들을 아주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거시적인 것까지 망라하여 제시하고 있다. 인간쓰레기의 탄생과 확대도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사안이다. 어떻게 보면 바우만의 문제제기는 지나친 감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를 아예 잠재적 쓰레기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점을 다시 확인해야한다. 인간쓰레기 또는 벌거벗은 생명을 명명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자본권력이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존중과 자기 비판의 계기를 찾아야 한다. 더불어 우리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바우만은 이 점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에서 얘기하고 있다. 나아가 삶의 방식도 그들이 만드는 것에 개별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인간들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야한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를 쓰레기로 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쓰레기가 아니다. 우리들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한에서 말이다. 이건 가난과도 관련이 있다. 부유해 지려고 하는 삶은 어쩌면 자본권력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런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하면 이미 쓰레기가 되는 삶이 되는 거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만든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면 전혀 쓰레기가 될 이유가 없다. 그런 잣대로 이웃과 세상을 보는 건 이미 스스로 인간쓰레기가 된 삶을 나타내는 것이니 오히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NGO 등이 실행하는 각종 사회 개혁프로그램 또는 이른바 약자 또는 타자에 대한 긍적적이고 실천적 활동에 대한 바우만의 비판은 한편으로 우리가 하는 작은 실천이 의미없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실천으로 만족하거나 안주하는 삶의 방식 또한 자본권력이 만든 것이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조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런 작은 실천이 자본권력의 삶의 방식을 거스르는 또는 빗나가게 하는 행위이면 오히려 자본권력을 문제삼을 수 있는 행위라는 것도 바우만의 숨은 얘기기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우만의 말은 작고 큰 실천적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실천적 행위 또한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방식일 때 더욱 암울한 현재를 형성한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고민은 오히려 작은 실천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실천이 자본에 포섭 또는 활용되지 않을까 더 고민하고 깊이 생각하고 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행위를 중단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작은 실천적 행위가 실은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니까.

 

또한 이런 점에서 바우만은 중요한 점을 언급한다. 근대 자본권력이 만든 삶의 방식은 이미 전제된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그 잣대에 맞춰 살아가야만 하는 개별존재로 파편화시킨다는 점이다. 즉, 혼자서 고군분투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 자본권력이 만들고 작동시키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답도 어느 순간 나와 있는 듯하다. 그가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연결을 의미하는 '연대'와 '공동체적인 삶'이 그것이다. 연대와 공동체적인 삶만이 우리가 쓰레기가 되지 않는 법이다. 더 나아가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공간이다. 각각의 역할과 각각의 생각과 각각의 고민과 각각의 행위가 어울어져 갈등하고 불화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그런 연대야말로 인간쓰레기를 양산하며 권력을 향유하고 하는 근대 자본권력의 힘을 중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타 존중과 자기 비판의 공간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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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 우리시대의 새로운 지적 대안담론 프런티어21 20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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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정치를 둘러싼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가지 선언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정치, 민주주의, 정치적인 등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다.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현재 제출되고 있는 가지 그릇된 선언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개념에 의해 야기되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정치는 공동체의 삶을 지도하는 기술 , 민주주의가 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삶의 방식이라면 정치는 민주주의적 다자의 법을 공동체적 삶의 원리로 전환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정치개념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크게 가지 대별되는 지점에서 이해하며 정치에 대해 선언하고 있는데 번째가 정치의 종말이다. 이미 형식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고 그에 따라 다자의 합의에 따른 정치는 이상 필요 없기에 정치는 종말을 구했다는 것이다. 번째는 다자의 합의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는 완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며 이로 인해 수많은 소수자들이 배제되고 억압되고 있다는 논거 속에서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는 순수한 고대 정치로의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논의가 그것이다. 랑시에르는 모두를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를 교정할 쓰려고 상상하는 술책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삶의 방식으로 보는 플라톤의 이론으로 비판한다.

 

그렇다면 랑시에르가 제기하는 정치, 민주주의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공동체를 지도하는 기술이 아니라, 불일치하는 인간 행동 형태이며 인간 집단의 결집과 명령을 작동시키는 규칙들에 대한 예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통치 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 거치는 주체화 양식이다.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이중의 -명제는 정치적인 것의 본질 하나가 공통-되게-있음이라는 생각과 단절할 것을 전제한다. -명제는 정치의 사유와 권력의 사유를 분리할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치안과 정치(평등)라는 원리가 충돌하는 장소이며,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맺어지는 형태들의 체계인 것이다.

더불어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사실 정치의 특정한 주체의 본성과 행위들을 사유하는 것이지, 그것들을 언제나 권력 주체의 문제로 가져가는 일반적 주체 이론으로부터 연역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주체화는 불가능한 동일시를 발명하는 것이며 대규모의 탈정체화의 경험이다. 이는 논쟁적이고 계쟁적인 주체들을 발명하고, 중심과 주변, 보편과 특수 사이의 치안적 나눔을 다시 쪼갬으로써 가능해진다.

나아가 평등은 도달해야 목표가 아니라 전제하고 입증해야 하는 출발점이다. 해방하는 행위는 약속된 평등으로 향하는 수단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불평등주의적 전제들을 거부하고, 평등과 불평등이 대결하는 모든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전제들을 논박하는 몰두하는 실천들의 집합이다.

결국, 정치는 항상 치안 질서를 불안정한 방식으로 자리 옮기는 것이었다. 치안 질서는 출생, , 능력이 통치하기 위해 가리키는 방향에 따라 각자에게 각자의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정치는 틈에 존재한다. 틈은 모두의 평등한 능력을 긍정하며, 지배를 위한 어떤 토대도 존재하지 않음을 긍정한다. 틈은 과거의 추억 속에 정리해야 환영이 아니라, 하물며 도래할 평등에 대한 약속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계속해서 발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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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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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각각 지능과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지능과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지능을 연결시켜 우월한 자의 '설명' 통해 지능의 진보를 추구하는 방식은 바보만들기다. 오로지 해방된 무지한 스승의 의지와 해방할 학생의 의지, 학생의 지능과 책의 지능이 연결되어야만 앎의 해방을 통한 삶의 해방이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해방의 방식은 가정에서만 가능하며 무분별한 그래서 질서 자체인 사회에 적용한다면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해방은 오로지 인간(개인) 해방만이 존재하며 결국 개인을 넘어선 해방은 없다?!

그렇다면 앎의 평등은 유토피아나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뿐이다. 진보를 말하는 자들은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하며 지도만이 그래서 더욱 세련된 설명만이 사회의 평등을 이룰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평등을 위해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한다. 그리고 사회의 불평등은 평등으로 진보할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지도를 자신들의 합리적 교육을 받을 것을 강제한다. 그러나 진보주의의 이러한 고리야 말로 구식의 새로운 버전(구식의 승리)이며 평등을 무한 지연시키고 불평등을 무한 증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은 인간의 평등에서 기초"한다. 불평등인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평등이 가정되어야 한다. 물론 협약에 의해 평등이 사라졌다 해도 흔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를 모방, 흉내내야 하며 이것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유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한편, 평등은 '의견'이며 '진리' 수는 없다. 그래서 평등을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 말하고 번역하고 소통하여야 한다. 따라서 평등의 입증은 상대방의 지능의 평등을 인정할 가능하다. 그리고 자유를 평등의 기술로, 지능의 존중으로, 타자의 인정이다. 그래서 기술을 전유하고 이성을 정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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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에서 랑시에르는 진보와 진보주의자들이 승리한 구식에 대한 승리는 "제도화된 불평등의 절대적 승리"이며 " 제도의 본보기가 되는 합리화라는 "이며, "거기서 오래 지속되는 구식의 권력이 세워지는 견고한 토대가 있다"(227~228)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문자 그대로 정의하면 "진보적 인간이란 걷는 , 다시 말해 보고, 실험하고, 자신의 습관을 바꾸고, 자신의 앎을 검증하고 이렇게 끝없이 가는 인간"(222)이지만 이제 진보적 인간은 또한 다른 것으로 "진보의 의견에서 출발해서 생각하는 인간, 의견을 사회 질서에 대한 지배적 설명의 서열 승격시키는 인간"(222)이다.

그래서 진보는 "새로운 설명"이며 "새로운 불평등화의 상승하는 "(225)이다. 이제 "사회는 스스로를 개선한다. 사회가 자신의 질서를 개선의 징표 아래 생각한다. 사회가 진보한다. 사회는 사회적으로만, 다시 말해 모두 다함께 그리고 질서 있게 진보할 있다. 진보는 불평등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이다."(225)

그렇다면 "모든 교육학은 자동으로 진보주의적"(225)이며 "진보, 그것은 사회 전체의 허구로 승격된 교육학의 허구"이며 "교육학의 허구의 핵심은 불평등을 지연으로 표상하는 "이다. "열등함은 그저 지연 "이며 "우리는 지연을 메우려 지연 속에 직접 있어야"하며 "틀림없이 우리는 결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할 "(226)이다. 그래서 "학생은 결코 스승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인민은 결코 깨인 엘리트를 따라잡지 못할 "이나 "거기에 도달할 있다는 희망 그들로 하여금 좋은 길로, 개선된 설명들의 길로 나아가게 해준다. 진보의 세기는 승리한 설명자들의 세기, 취급된 인류의 세기"(227)이다.

결국 진보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은 무언인가? "설명을 개선함으로써 바보 만들기를 개선하는 "(228)이다. 그것이 "진보론자들의 고리"(229). 또한 "설명하는 체계는 시간처럼 자기 새끼들을 낳는 족족 그들을 먹어 치움으로써 영양분을 섭취한다. 새로운 설명, 새로운 개선은 생겨나자마자 수천 개의 다른 설명과 개선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죽는다." "설명하는 체계는 그렇게 갱신"(242) 뿐이다.

이제 우리는 "이성이나 평등을 실제 개인들에게 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개인들의 허구적 모임에 귀속시킬 것인지 선택"해야 하며 "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불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250).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한 인간들이 되는 것을 배우는 "이야말로 "해방된다는 말이 뜻하는 "라면 진보가 말하는 '지도' 통한 '평등' "불평등한 인간들을 가지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 불평등을 무한정 축소하는 "(251) 뿐만 아니라 "재현된, 사회화된, 불평등해진, 개선되기에 좋은, 다시 말해 위원회에서 위원회로, 보고서에서 보고서로, 개혁에서 개혁으로 지연되어 결국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지연된 평등"(252)이다.

한편 "평등은 주어지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되고 입증되는 "이다. 단지 '의견' 뿐이며 '진리' 아니기에 실천되고 입증되는 것이다. 평등의 입증은 "상대자들의 지능의 평등을 인정 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257). 더불어 "자유는 적대적 입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편이 다른 편을 번역하는 평등한 기술" 있으며, "수사적 무분별 안에서도 멈추지 않고 발휘되는 지능의 힘에 대한 비교로부터 나오는 존중" 있으며, "이성을 가졌다는 자만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대가로 진리를 말한다는 자만을 그만두는 자에게 있어서 말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할 있는지를 인정"하는 있으며 " 기술을 전유하고, 이성을 정복하는 것이 중요한 "(258)이다.

그러나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이다. 하지만 "보편적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을 "(26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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