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자연철학, 수사학의 장소

 

공허를 둘러싸고

그리스 고대 철학에서 본격적인 장소론은 공허를 둘러싸고 논의되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 자체를 하나이자 전부이고 충만한 것으로 이해하며 장소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레우키포스나 데모크리토스 등의 원자론자들은 공허 속에서 충실한 미소립자들이 운동해 존재가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원자론자들의 공허에 이어서 나타나는 것이 플라톤의 코라였다. 플라톤은 우주론에서 세 가지 원리, 즉 조형자로서의 신 데미우르고스(이성), 존재자의 원형으로서의 이데아(규정 원리), 존재자의 질료 혹은 장으로서의 코라(무한정한 것)를 설정하고 이들의 관계를 통해 우주의 생성을 주장했다. 이때 데미우르고스의 질서 짓는 힘에 의해 나타난 우주를 코스모스’, 즉 아름다운 것으로 파악하는데 그런 점에서 코라는 다른 한편, 데미우르고스에 저항하는 무질서를 낳는 원리가 된다. 이처럼 플라톤이 주장하는 코라는 온갖 생성의 수용자로서 결코 멸망하는 일 없이 모든 생성하는 것에 그 위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플라톤은 우주 속에 공허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코라를 질료와 장을 동일시한 것이라며 비판했다.

 

2. 질적 자연관과 자연적 위치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포스론은 보통 장소론이 아니라 弁証論이라 번역되는 토피카Topica’를 가리키지만 그는 애초 공간적인 장소로부터 출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초에 카오스()가 생겼다라는 헤시오도스의 전제로부터 존재자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근원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장소를 자신을 직접 감싸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시작했다. 그런데 장소는 사물로부터 분리될 수 있고 사물을 감싸기 때문에 사물과 분리될 수 없는 형상과 분리도 감싸지도 못하는 질료와는 다르다. 따라서 장소는 감싸는 물체의 내측의 경계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또한 장소의 부동성이라는 관점을 도입하는 것으로, 그것은 포괄하는 것의 원초적 부동의 경계가 장소라고 환언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 공통의 장소(코이노스 토포스)전 존재자를 포괄하는 우주의 가장 바깥둘레의 테두리가 바로 부동의 참된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부동의 참된 장소 내부에 동심원상의 부동의 몇 개의 경계(, , 공기, )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자연적인 위치(불은 위쪽, 흙은 아래쪽)’를 향해 운동하는 것(여러 원소의 동류성과 차이성으로 인한 동화와 전화)이라고 했다. 이처럼 운동은 공허에 의해 가능케 되는 것이 아니라 충실한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고, 사물을 움직이고 있는 이 충실한 것의 힘이 토포스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소는 일종의 힘의 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을 파악한 방식은 상징론적으로서만 아니라 생태학적으로도 적극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포스론에는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수사학의 흐름에 속하는 토피카로서의 측면이다.

 

3. 토피카와 토포스

레토릭의 일부를 이루는 토피카란 개별적인 문제나 테마에 관한 구체적인 고찰법=논의법인데 이것이 장소론 또는 토포스의 학(토피카)으로 불린 이유는 논거나 논점의 소재를 아는 것이 논의의 기초를 이룬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고찰법=논의법에서는 기억(개인적 및 집단적인 기억)속에 축적된 다수의 논점, 논제가 중요한 작용을 하고, 그 논점과 논제들이 축적되기 위해서는 각자 특정의 장소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그 논점들이나 논제들도 토포스(라틴어로는 로쿠스Locus)라 불리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토피카를 논의에 임하여 그 논의가 얼마나 많은 사항에, 또 어떤 종류의 사항에 관계되는가, 또한 어떤 화제로부터 시작하면 좋은가를 결정하는 것이라 간주한다. 그래서 토피카의 상징으로 변증술적 추론을 주장하며 그 실천은 발견, 배열, 설문이라는 단계를 좇아 행해진다고 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토피카를 발견을 중심으로 혹은 출발점으로 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발견, 배열, 설문3단계는 고전 레토릭의 발견, 배열, 조사[미사여구], 기억, 진술5단계로서 완성되었고 키케로는 토피카를 장소의 기억과 확실히 결부시켰다. 시모니데스의 유명한 에피소드를 통해 키케로는 장소의 기억을 통해 장소의 배열이 사물의 배열을 유지하고, 사물의 이미지가 사물 자신을 나타내게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중세 유럽에서 널리 읽힌 <<헤렌니우스 수사학>>에서도 기억술을 형태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장소와 이미지라고 주장하며, 장소(로키)란 기억함에서 유력한 실마리가 되는 장소(예컨대 가옥, 주거 공간, 구석, 아치 등), 그것에 비해 이미지란 우리들이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의 형상, 징표, 상 등이라고 했다. 이처럼 고전 레토릭에서 말하는 토피카에 장소(토포스)의 문제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기억술에 관한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의 기억은 단지 수단이나 오늘날의 방법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인식에 대립하고 필적하는 또 하나의 인식인 현려(賢慮:프로네시스)’와 결부된다. 따라서 고전 레토릭에서 토피카는 장소와 기억과 현려, 이 세 가지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 토포스의 상실과 방법

기억술과 결부된 고전 레토릭의 토피카는 르네상스 이후의 서구세계에서는 점차 지식의 전면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역사나 전통이 무거운 짐이 되어 공동체가 붕괴해 가는 추세 속에서 인간은 전통이나 역사의 중압에서 벗어나고 또 공동체로부터 개인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과거와의 연결을 끊을 필요가, 결국은 기억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토포스(장소, 기억의 집적)는 부정되어 상실되어 갔고 고전 레토릭적 기억술은 룰루스의 결합술을 거쳐 전통적인 기억술도, 룰루스의 (기억)술도 아닌 참된 기억술로서 논리의 사슬을 더듬어 사물을 그 원인으로 환원해 가는 방법’,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사고와 표리를 이루는 지점의 데카르트적인 방법으로 전화했다. 그러한 까닭에 근대란 확실히 방법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원리화해서 그 지배가 진행 관철되어 사람들은 그 생존 혹은 존재 기반의 상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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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주권, 즉 전지구적 통제 사회의 관리 
 

자본과 주권은 모순적인 결합으로 보일 수 있음. 주권은 주권자의 초월성에 근거하며 특히 근대 주권은 영토, 주민, 사회적 기능 등등의 사이에 고정된 경계들을 만들고 유지함으로써 작동함. 즉, 주권은 사회적 장의 홈패임을 통해 작동함.
이에 반해, 자본은 초월적 권력 중심에 의거하지 않고 지배 관계의 연계와 네트워크를 통해 내재성의 구도 위에서 작동함. 자본은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사회적 경계들을 파괴하고, 영토를 가로질러 확장하고, 그러한 과정들 안에서 새로운 주민들을 감싸 안는 경향이 있음. 즉, 자본은 탈코드화된 흐름들, 유연성, 계속적인 조율, 균등화 경향에 의해 규정되는 매끄러운 공간을 향하는 경향이 있음.
따라서 근대적 주권의 초월성은 자본의 내재성과 충돌하며, 역사적으로 근대적 주권 패러다임들은 특정한 역사 시기 동안 자본의 작동을 지지하지만, 결국은 극복해야 할 자본 발전의 장애물들임.
한편 시민사회는 어떤 역사 시기 동안 자본의 내재적인 힘들과 근대적 주권의 초월적 권력 사이의 매개자로 복무함. 그러나 현재 시민사회는 더 이상 이러한 매개지점에 복무하지 않음(노동조합의 예). 이러한 시민사회의 소멸은 또한 훈육 사회에서 통제 사회로의 이행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음. 이처럼 제도들의 붕괴, 시민사회의 소멸, 훈육 사회의 쇠퇴는 모두 근대적인 사회적 공간의 홈패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을 포함함. 여기서 통제 사회의 네트워크들이 발생.
훈육 사회 및 시민사회와 관련하여 볼 때, 통제 사회는 내재성의 구도를 향해 더 나아감. 먼저 훈육 제도는 그 자체가 주권이 아니라, 주체성 생산의 사회적 장으로부터의 훈육 제도의 추상화나 그 장을 넘어선 훈육 제도의 초월성이 훈육 사회의 주권 실행에서 핵심 요소를 구성. 따라서 주권은 가상적이고 현실적임. 언제 어디서나 훈육의 실행을 통해 실현됨. 통제 사회는 훈육의 내재적인 실행을 더 일반적으로 확장시킴. 즉 통제 사회로의 이행에서 훈육 사회의 초월적인 요소들이 쇠퇴하는 반면, 내재적인 측면들은 강조되고 일반화됨.
통제 사회에서 주체성의 내재적 생산은 공리계적인 자본의 논리와 일치하고, 그것들의 유사성은 주권과 자본 사이의 새롭고 보다 완벽한 양립 가능성을 가리킴. 통제 사회로의 이행은 정체성에 고정되지 않는, 잡종적이고 변화하는 주체성 생산을 포함하며, 이러한 잡종적 주체성은 어떤 정체성에도 속하지 않고 모든 정체성에 속하여 제도 바깥에 있지만 제도들의 훈육 논리에 훨씬 더 강하게 지배당함. 바로 제국적 주권처럼, 통제 사회의 주체성들은 혼합된 구성을 지님.

매끄러운 공간
국민 국가 경계의 홈패임을 매끄럽게 하는 전지구적 통제 사회의 확립은 세계 시장의 실현과 자본 아래 전지국적 사회의 실질적 포섭과 함께 진행됨.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제국주의는 자본의 생존과 팽창에 기여하였지만 효과적으로 자본, 노동, 상품의 자유로운 흐름과 세계 시장의 완전한 실현을 막으면서 내외부의 경직된 관념들을 만들어 내고 강화시킨 전지구적인 홈패임 기계임. 그러나 세계 시장은 코드화되지 않고 탈영토화된 흐름으로 이루어진 매끄러운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극복되지 않으면 자본의 죽음일 것’이며, 따라서 세계 시장의 완전한 실현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의 종말임.
국민 국가 권력의 쇠퇴와 국제 질서의 해체는 “제3세계”라는 용어의 효과도 결정적으로 제거함. 제3세계는 자본의 측면에서 제1세계의 잠재적 자본확대와 자본의 미래정복의 가능성을 가진 지형, 즉 열린 공간이었으며, 이러한 잠재적 포섭이라는 입장에서 제3세계는 실제로 하나였음.
또한 자본주의 영역 안에서 중심, 주변 그리고 반주변 국가들을 구별하는 이론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국제적 대립의 잠재적 통일성, 즉 반자본주의 국가들과 세력들의 잠재적 합류를 지칭함.
그러나 국민 국가들 사이의 혹은 심지어 국민 국가들의 중심과 주변, 북과 남 사이의 지리적 구분은 더 이상 생산, 축적, 그리고 사회적 형태들의 전지구적 분할과 배분을 파악하는데 충분치 않으며, 생산의 탈중심화와 세계 시장의 공고화를 통해 노동과 자본의 국제적 분업과 흐름은 깨지고 다양화하여서, 거대한 지리적 지대들을 중심과 주변, 북과 남으로 구분할 수 없음. 또한 차이가 있더라도 분성의 차이는 없고 오직 정도의 차이만 존재.
물론, 국제 질서의 보증자였으며 제국주의적 정복과 제국주의 주권에 핵심이었던 국민 국가는 반제국주의 세력의 성장과 조직화 시기 내내 국제 질서를 가장 위협하였음. 그러나 국민 국가의 쇠퇴는 구조적이고 불가역적임. 국민의 사법적-경제적 구조를 대체하는 GATT, WTO, IMF 등 전지구적인 사법적-경제적 기구들의 진화현상과 좀 더 중요하게는, 비록 국민이 여전히 효과적인 무기일 수 있을지라도, 국민은 완전하게 억압적인 구조들과 이데올로기들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국민에 의거하는 모든 전략을 거부해야 함.

새로운 분할
시민사회의 소멸과 국가 경계의 쇠퇴 속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분할은 더욱 심해져 제국은 이를 특징짓고, 이 때문에 영구적인 사회적 위험 상황을 만들어 내며, 분리를 유지하고 사회적 공간의 새로운 관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통제 사회의 강력한 장치들을 필요로 함. 새로운 분리와 분할은 컴퓨터 및 정보혁명을 통한 노동자들의 사이의 격렬하고 무제한적인 경쟁이라는 노동의 정치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정의됨. 이곳이 제국의 행정 행위론의 중심. 제국의 노동 정치는 사실상 본원적 축적 과정, 재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을 더욱 분화시키고 분할시킴. 또한 화폐 정책은 노동 정책이 명령한 분할을 강화함.
소통 정치를 통한 폭력, 빈곤 그리고 실업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분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힘이며,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노동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고 제국적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갈등을 유지하는 데 핵심 열쇠이며, 새로운 분할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임.

제국적 행정
제국적 행정을 규정하는 첫 번째 원리는 제국적 행정 안에서 정치적 목적의 관리가 관료적 수단의 관리와 분리되는 경향이 있음. 행정 문제는 통일성의 문제가 아니라 도구적인 다기능성의 문제. 제국 체제에서 근본적인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행위들이 지닌 특이성과 적합성임.
두 번째 원리는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는 대신 제국적 행정은 오히려 분산시키고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의 역할을 함. 각자를 다르게 다루는 절차들의 차별화와 특이화가 모든 것을 동등하게 다루는 보편성이라는 낡은 행정 원리를 대체하는 것임.
세 번째 원리는 행정 행위는 근본적으로 비전략적이므로, 이질적이고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정당화함. 행정 행위의 자율성과 통일성은 경찰과 군대의 논리, 경제 논리,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이고 소통적인 논리와 같은 제국을 구성하는 데 능동적인 구조적 논리들에 순응함으로써 만들어짐. 이상이 제국적 행정 행위에 관한 세 가지 “소극적인” 원리들(도구적인 특성, 절차적인 자율성, 그리고 이질성)임.
폭력적인 사회적 적대를 지속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제국적 행정 행위를 기능하게 하는 제국적 행정이 지닌 “적극적인” 특징인 네 번째 원리는 국지적 효율성임. 중세 봉건적인 영토 조직과 군주 권력 구조 사이의 예와 근대 마피아 조직과 국가 구조 사이의 예에서처럼, 국지화된 행정 기구들이 지닌 자율성은 제국적 행정과 모순되지 않고 반대로, 전지국적 효율성을 돕고 확대함. 따라서 제국 체제의 발전에 국지적 자율성은 필수 조건임. 또한 제국 체제에 대한 동의는 체제의 국지적 효율성을 통해 형성됨.
하지만 제국 행정은 최후의 위협, 폭동, 전복, 봉기에 맞서, 또한 심지어 행정의 국지적 분파들 사이에서의 정상적인 갈등에 맞서 체계를 지킬 수 없음. 우리는 여기서 행정문제가 명령 문제로 변형됨.

제국적 명령
제국적 명령은 근대 국가와 달리 생체 정치적 통제의 양태들을 통해서 실행됨. 그리고 명령 체계의 조직된 주체는 인민이 아니라 대중이 지닌 이동성, 유연성 그리고 영구적 분화에 의해 대체됨. 대중은 탈근대적 자본주의 체계의 도구로 지배되고, 실질적으로 포섭된 사회관계 안에서 지배됨. 그러나 대중은 자신의 탈영토화된 자율성 속에서 생체 정치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자율적인 많은 지적 생산성으로, 절대적 민주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지배의 전복도 가능함. 결국 제국 정부[통치]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임무가 이를 막는 것임. 하지만 제국의 구성은 또한 이런 위협을 제기하는 생산적 협동을 하는 자율적 세력들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들의 역능은 통제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됨.
제국적 통제는 세 가지 전지구적이고 절대적인 수단들, 즉 폭탄, 화폐 그리고 에테르를 통해서 작동. 제국의 꼭대기에 있는 수소 폭탄 무기는 삶 자체를 지속적으로 파괴할 가능성을 나타냄. 핵 기술의 발전과 제국적 집중이 주권에 대한 전통적 정의의 주요한 요소인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결정권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제거하는 한, 이것은 그러한 나라들의 주권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전쟁을 제한된 갈등, 내전, 추한 전쟁 등으로 축소하며, 모든 전쟁을 행정력과 경찰력의 독점하는 영역으로 만듦.
화폐는 두 번째 전지구적인 절대적 통제 수단임. 세계 시장은 구축은 무엇보다 먼저 국내 시장의 화폐적 파괴, 일국적 그리고/또는 지역적 화폐 조절 체제의 해체, 그리고 국내 시장들의 금융 권력의 욕구에의 종속으로 이루어짐. 화폐 메카니즘은 시장을 통제하는 제1의 수단임.
에테르는 제국적 통제의 세 번째이자 최종적인 근본적 매개체. 소통의 관리, 교육 체계의 구조화 그리고 문화의 조절은 오늘날에는 전보다 더 최고 대권으로 나타남.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에테르 속에 용해됨. 소통 공간은 완전히 탈영토화됨, 소통 공간은 잔여의 문제가 아니라 변형의 문제임. 소통은 자본이 자신의 체제에 사회를 전체적으로, 전지구적으로 복종하게 하여 모든 대안적인 길을 억압하는 데 성공한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임. 따라서 대안은 실질적 포섭사회 안에서 생겨나며, 실질적 포섭 사회의 핵심에 있는 모든 모순을 드러내야 할 것임.
이런 세 가지 통제 수단을 제국적 권력 피라미드의 세 층을 참고하여 보면, 이런 메커니즘들이 통제력을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모든 영토적인 제국 공간 개념은 제국 장치의 핵심에서의 근본적인 유연성, 이동성 그리고 탈영토화에 의해 지속적으로 동요함.

거대 정부는 끝났다!
“거대 정부는 끝났다”는 제국 전역에 있는 보수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의 전투 구호임. 그러나 탈근대적인 정보 혁명의 발전이 자신의 노력을 지지하기 위해 거대 정부를 매우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에, 보수 진영의 대표자들이 거대 정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는 것은 최종적이고 잔인한 아이러니였음. 소련의 붕괴 이후 바로 이 시기에 미국정부가 직면한 제국적 임무는 매우 긴급했고, 거대 정부가 매우 필요했음.
이제 우리가 “거대 정부는 끝났다!”라고 외칠 차례임. 제국적 탈근대에서 거대 정부는 단지 전제적 지배 수단이며 전체주의적 주체성을 생산할 뿐이며 욕망의 한계를 규정함. 그러나 욕망은 한계가 없고 누구나 삶을 지속적으로, 자유롭게, 동등하게 즐길 수 있고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투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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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된 구성 

생산 패러다임의 네트워크 모델로의 전환은 국민 국가의 전통적 경계를 넘어 초국적 기업의 권력을 증대시킴. 이러한 새로운 관계는 자본가와 국가 간의 오랜 권력 투쟁의 측면에서 인식되어야 하는데, 즉 국가는 자본의 집합적 이해 속에서 개별 자본가들의 이해를 증대․조절하는 신중함을 요구받고, 자본가는 국가가 자신들의 집합적 이해를 위해 행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울 것임. 이러한 갈등은 실제 사회적 총자본의 관점에서는 행복하고 효력 있는 변증법임.

거인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
국가와 자본 간의 변증법은 자본주의 발전의 서로 다른 국면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임.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의 개별 자본가들은 유럽 국민 국가들 안에서는 큰 갈등 없이 식민지를 지배하였고, 식민지 영토들에서는 실제로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 확장하는 특정한 산업들 및 일단의 산업들을 지배하는 준독점체들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침식에 의한 자본주의 번영에 직접적 위협을 가하는 한편 국가의 관리 능력도 훼손시킴. 따라서 산업에 대한 국가 규제의 확장과 기업에 대한 자신의 지배[명령]의 확립이라는 일련의 투쟁이 발생함. 또한 식민지 영토들에서도 행정 기관들과 사법권 아래에서 식민지의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효율적으로 회수[포획]하여 사회적 총자본의 이해를 보장함.
오늘날은 거대 초국적 기업이 국민 국가의 사법권과 권위를 효율적으로 넘어선 것을 보고 ‘국가는 패배했고 기업들이 이제 지구를 지배한다!’라고 파악할 수 있음. 그러나 국가 없이 사회적 자본은 자신의 집합적 이해를 계획하고 실현시킬 수 없음. 초국적 기업과 생산 및 유통의 전지구적 네트워크가 국민 국가의 역능을 침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기능과 헌법적 요소는 효율적으로 다른 수준들 및 차원들로 대체되어 옴.
먼저 정치적 관계의 위기로 국민 주권이라는 개념이 효율성을 잃어 가고 있는 만큼 정치적인 것(정부와 정치, 정치적 매개 메커니즘)의 자율성도 효율성을 잃어 가고 있음. 모든 자율적 정치 국면의 쇠퇴는 혁명의 장소인 모든 독립 공간의 쇠퇴를 나타내는 전조가 되어, 전통적인 대항 권력과 근대 주권 일반에 대항하는 저항이라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져 다시 한 번 새로운 저항형태를 발명해야 함. 또한 민주 국가의 기능은 전통적인 정치 및 저항 국면의 쇠퇴를 보완하는 측면으로 변형. 일련의 독립 기구들(전통적인 독립 기구들 외에 은행, 국제적 계획 기관들 등)이 정당성을 권력의 초국적 수준에서 찾음.
그러나 국민 국가의 입헌적 메커니즘과 통제가 쇠퇴해 왔고, 국민 국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초국적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스스로를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 따라서 어떻게 권력이 초국가적 수준으로 이루어지는가를 탐색해야 함

전지구적 구성의 피라미드
전지구적 권력의 모습을 그 권력의 다양한 기구들과 조직들 속에서 분석할 때, 각각 몇 가지 수준을 지닌, 점점 더 넓어지는 세 층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구조를 인식할 수 있음.
피라미드의 좁은 정점에는 전지구적 무력 사용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최강 권력인 미국이 위치. 그 정점의 두 번째 수준으로, 전지구적 통화 수단을 통제하며 국제 거래의 조절능력을 가진 일련의 조직체들(G7, 파리와 런던클럽, 다보스 등)이 존재. 다음 세 번째 수준으로, 문화권력과 생체 정치권력을 전개하는 군사적, 재정적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발휘하는 다소 동일한 능력의 이질적인 단체들이 위치.
다음 두 번째 층에는 세계 시장을 통해 확장해온 초국적인 자본주의 기업들의 네트워크들(자본 흐름, 기술 흐름, 인구 흐름의 네트워크들 등)이 구축되어 있음. 또한 초국적 기업들의 힘에 종속되는 수준에서 국민 국가들의 일반적 틀도 존재. 이 국민 국가들은 전지구적 권력으로부터 부의 흐름을 포획하여 전지구적 권력에 부의 흐름을 분배하며, 가능한 많은 주민들을 훈육시킴.
마지막 세 번째 층에는 전지국적 권력의 배치에서 인민의 이해를 대표하는 집단들로 구성. 대중[다중]은 전지구적 권력의 구조들 속에 직접적으로 편입될 수 없고, 대의제를 통한 국민 국가로, 매체로, 종교 조직으로, 그리고 전지구적 시민사회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중요한 세력인 비정부기구(NGO)로 걸려져 제국의 토대가 됨.

폴리비우스와 제국적 통치
폴리비우스가 분석한 로마제국의 세 가지 “좋은” 권력 형태(황제, 원로 회의, 그리고 인민적 의회의 이름들로 구현된 군주제, 귀족제, 민주주의)는 오늘날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제국과 사회․정치 세력과 매우 다르다 할지라도, 형식적으로 양립 가능한 관계임. 그러나 폴리비우스의 해석의 계보학에 서있지만 마키아벨리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통해 이어진 해석에서는 폴리비우스의 고전적인 삼자 모델을 삼기능적인 헌법 구축 모델로 변형시킴.
어떤 점에서는 당초의 폴리비우스의 고대적인 제국 구성 모델이 근대 자유주의적 전통이 변형시킨 모델보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에 더 가까운 것 같음.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한 제국의 (형태상) 구성은 실제로 전통이 내세우는 “좋은” 정부[통치] 형태들보다는 “나쁜” 정부[통치] 형태들의 전개와 공존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임.

잡종적 구성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제국(사법적 형식화의 틀, 입헌적인 보증 메커니즘, 그리고 균형 도식)은 근대적 지형에서 탈근대적 지형으로 넘어가는 이행 속에서 두 가지 주요 축을 따라 변형됨.
변형의 첫 번째 축은 혼합된 구성(독립 기구들이나 기능들의 혼합이라는 고대적이면서 근대적인 모델)에서 현 상황에서의 통치[정부] 기능의 잡종적 구성(탈근대적 군주제와 귀족제, 그리고 민주주의적 기능들 자체의 잡종화)으로의 이행.
구성 이론의 대체와 구성 자체가 지닌 새로운 특성 둘 다를 드러내는 구성적 변형의 두 번째 축은, 현 국면에서 명령은 사회의 시간적 차원(주체성 차원)에 대해서 더욱더 커다란 정도로 실행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남. 이러한 변형의 핵심은 시간적 차원에서 대중과 관련한 민주주의적 계기에 존재. 이곳이 가장 중요한 질적 도약, 즉 통치의 훈육적 패러다임에서 통제적 패러다임으로의 도약을 인식해야만 하는 곳. 규칙[지배]은 생산적이고 협동하는 주체성들의 운동에 대해 직접 실행되고, 제도들은 이러한 운동의 리듬에 따라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재규정되며, 권력의 지형학은 더 이상 공간적인 관계와 일차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주체성들의 시간적 전위[대체] 속에 각인됨, 즉 제국의 잡종적 통제 기능은 무-장소(잡종적 공간)에서 실행됨.
이러한 제국적 무-장소(잡종적 공간)에서 구성 과정을 항상 규정하는,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정치적인 것 및 사법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이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며, 입헌과정에서 형식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사회 세력과 정치 세력 간의 호혜적인 관계가 등장하기 시작하며, 다양한 기능들은 자신들을 구성하고 자신들의 구성 과정의 단편들을 포획하려는 주체성들이 지닌 힘을 가늠함.

구성을 둘러싼 투쟁
제국의 구성을 둘러싼 투쟁은 모호하고 변화하는 영역에서 전개되어야 함. 이러한 투쟁을 규정할 세 가지 핵심 변수, 즉 공통적인 것과 특이한 것 사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변수, 명령의 공리계와 주체의 자기 동일시 사이에서 작동하는 변수, 권력에 의한 주체성 생산과 주체 자신의 자율적 저항 사이에서 작동하는 변수임.
이러한 변수에 따라 각각의 주체성은 일반적인 통제 네트워크 속에서 지배받는 주체가 되어야 하면서도, 동시에 또한 네트워크 안에서 독립적인 생산 및 소비의 대행자[담지자]이어야만 함. 여기서 정치적 주체는 덧없고 수동적이지만,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행자는 현존하며 능동적임을 알고 있고, 새로운 혼합된 구성의 형성은 기존 행위자들 간의 근본적인 불균형을 가져오고, 따라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를 정치적 메커니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새로운 사회적 원동력이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 여기가 바로 제1의 투쟁 장소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임. 주체성의 생산 및 조절의 영역에서 그리고 정치적 주체와 경제적 주체 간의 분리 속에서, 우리는 모든 구성 책략과 세력 균형을 재개할 수 있는 실제적인 투쟁의 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임.

구성의 스펙터클
그러나 이러한 열린 투쟁의 장도 스펙터클이라고 하는 공적담론과 여론을 생산하고 조절하는, 통합하고 확산적인 이미지 및 관념 장치에 의해 사라짐. 스펙터클은 모든 집합적인 사회성[사교] 형태를 파괴하며 동시에 새로운 대량 사회성, 행동과 사고의 새로운 획일성을 부여하여 구성을 둘러싼 전통적 투쟁 형태들을 상상할 수 없게 함. 스펙터클은 여론과 정치 행동에 대한 매체 조작을 통하여 마치 매체, 군대, 정부, 초국적 기업, 전지구적 금융 제도 등이 단일한 권력에 의해 의식적이고 분명하게 지도받는 것처럼 기능하며, 또한 구시대의 무기인 공포(구시대와 차이는 공포를 소통시키는 미신의 형태와 메커니즘)를 통하여 일차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며 공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욕망과 쾌락의 형태를 창조함.
탈근대적․잡종적 구성과 공적인 것 및 정치에 대한 매체 조작을 결합하는 공포의 스펙터클은 제국적 구성을 둘러싼 투쟁에서 그 근거를 빼앗음. 그러나 낡은 투쟁 장소들과 투쟁 형태들이 쇠퇴해감에 따라 새롭고 더욱 강력한 투쟁 장소들과 투쟁 형태들이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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