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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은 최근 번역된 그의 책 <<리퀴드 러브>>(새물결, 2013)의 <'네 이웃을 사랑하기'는 왜 그렇게 어려울까?>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기'는 문명화된 삶의 기본 수칙 중 하나인데 자기 이익과 행복의 추구라는 논리에 가장 반하는 말이기 때문에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로 오히려 자기애와 타자애는 떨어질 수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의미있는 글귀가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하나하나의 인간 존재의 인간-임에서 기인하는 삶의 존엄함과 그에 대한 존중은 다른 가치들 - 그것이 얼마나 양적으로 많고 엄청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 에 의해서도 능가되거나 보상될 수 없는 지고의 가치와 결합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가치들 또한 오직 인간의 존엄성에 기여하고 그러한 대의를 진작시킬 때만 가치일 수 있다...다른 인간 존재 속에 들어 있는 인간성을 죽이고 생존하려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죽이고 살아남으려는 것이다."(195쪽)

 

바우만이 위와 같이 주장하는 이유는 단 한 사람을 굶겨 죽이거나 죽도록 만드는 것은, 아무리 그러한 대가를 치르게 할 합리적이고 심지어 고상한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 합당하게 치를 만한 대가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인간임/됨의 삶이란 존엄성이지 숨쉬는 것은 아니라고 어린이를 가장 사랑했다고 하는 유대계 교육자 헨릭 골드슈미트(코작)의 예를 들어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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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지음, 오트리망 옮김, <<안전, 영토, 인구>>, 2012, 난장

 

9. 영혼의 사목에서 인간의 정치적 통치로의 이동

9장에서 푸코는 영혼의 사목에서 인간의 정치적 통치로 이동한다. 먼저, 영혼의 사목제도에서 인간의 정치적 통치로의 이행의 일반적 맥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 번째, 16세기 사목의 위기와 품행상의 저항, 반란, 봉기라는 거대한 일반적 풍토가 있었다. 두 번째, 종교적 사목제도의 재조직화로서 상이한 개신교공동체의 형태로 이뤄진 재조직화와 반종교개혁이라는 형태로 이뤄진 가톨릭의 재조직화가 있었다. 이들은 대항품행의 전형적 요소를 상당수 재통합한 셈이다. 세 번째, 사목에 대한 봉기를 활성화하고, 지지하고, 연장시킨 거대한 사회적 투쟁인 농민전쟁이 있었다. 네 번째, 봉건적 구조가 이제 더 이상 충분하고 유효한 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새로운 경제적 관계들, 따라서 정치적이기도 한 관계들이 존재했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종교적 주권의 거대한 두 극(제국과 교회)이 소멸했다.

그러나 사목은 16세기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에 푸코는 주목한다. 우선, 영적 차원과 세속적 외연(물질적 일상적 세속적 삶)에서의 종교적 사목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또한 교회의 권위 바깥에서도 인간을 인도하는 일이 발전했다. , 사적인 영역에서도 철학적 실천의 범주이자 형식인 인도와 자기 인도의 문제가 재등장할 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훗날 정치적 영역)에서도 인도의 문제(영혼의 인도라는 주권자의 임무)가 등장한다. 이렇듯 16세기와 더불어 인간은 품행의 시대, 인도의 시대, 통치의 시대로 접어든다. 그리고 품행 문제가 폭증함으로써 과도하게 부과되고 규정된 문제가 이 시기 아동교육의 문제이며 이 문제는 인도의 문제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근본적인 유토피아, 결정, 프리즘이다.(아동의 탄생?)

이제 인간의 통치로 넘어가 보자. 주권자의 인간 통치는 사목적 합리성과 다른 통치합리성인 통치이성에 의해 근거해야 하는데 이에 관해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 푸코는 살펴본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군주의 통치는 주권의 행사에 비해 특유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통치의 유비를 통해 왕은 신, 자연, 목자 및 가부장과의 유비와 연속(우주론적-신학적 연속체)체라고 한다. , 주권자가 자신의 주권을 확대하고 중단 없이 행사하면서 통치할 수 있고, 통치해야 한다면, 그것은 왕이 신에서부터 시작해 자연이나 목자를 거쳐 가부장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연속체의 일부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16세기에는 이 거대한 연속체는 깨지고 일종의 교착, 일종의 근본적 교차가 일어난다. , 새로운 앎의 배치가 가져온 효과 중 하나로 근본적으로 신이 총체적 법, 불변적 법, 보편적 법, 단순하고 인지가능한 법, 계측과 수학적 분석의 형태로, 박물학의 경우에는 분류적 분석의 형태로, 일반문법의 경우에는 논리적 분석의 형태로 접근가능한 법을 통해서만 지배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은 사목의 방식(구원의 체계, 복종의 체계, 진실의 체계)으로 세계를 통치하지 않고 여러 원칙을 통해서 세계에 주권적으로 군림한다는 것(우주 또는 세계의 탈통치화)이다.

그렇다면 주권자에게 신이나 자연에서 그 모델을 찾을 수 없는 주권과 관련해 일종의 보충물, 사목과 관련해 차별성과 이타성이 요청되는데 통치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주권 이상의 것, 주권과 관련한 보충물, 사목과는 다른 것, 모델을 갖지 않는 어떤 것, 모델을 스스로 찾아야 하는 어떤 것이 통치술이다. 그렇다면 통치술이란 한편에는 자연이 통치적 주제로부터 단절된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성의 지배만을 받아들이는 자연, 즉 자연원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에 대한 주권(통치이성, 즉 국가이성)이 있다. 그리고 조반니 보테로에 와서 자연원칙과 국가이성, 자연과 국가라는 근대 서구인에게 부여됐던 지식과 기술의 두 거대한 참조물이 결국 구성되거나 결국 분리됐다.

이어서 국가이성에 대해 살펴보자. 국가이성은 16세기 말~17세기 초의 모든 사람이 뭔가 완전히 새로운 현실, 혹은 완전히 새로운 무엇,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있다고 받아들였다. 심지어 일종의 혁신이자 추문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고 푸코는 국가이성을 둘러싼 논쟁의 요점을 마키아벨리, 정치, 국가를 통해 확인한다. 먼저 마키아벨리이다. 이미 4강에서 푸코는 마키아벨리가 구출하고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국가가 아니라 군주가 자신의 지배력을 행사하는 대상과 군주의 관계였고, 군주가 구해야 했던 것은 자신의 영토, 인구와 자신이 맺는 권력관계로서의 공국이었기 때문에 통치술은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도 마키아벨리는 다양한 가치, 때로는 부정적이고 때로는 거꾸로 긍정적이었던 가치를 지니며 논쟁의 핵심에 있었다. , 통치술을 정의한 것은 마키아벨리가 아니지만, 그가 말한 바를 통해 통치술이 탐구된 것이다. 국가이성의 반대자들은 마키아벨리를 통해 합리적이고, 만인의 선을 위한 것이고, 신의 법이나 자연의 법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통치술은 실상 존재하지 않고 근거도 없으며 기껏해야 찾는다면 군주의 변덕과 이해관계(이익)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대 국가이성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은 마키아벨리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마키아벨리주의자를 거부한다고 강변한다. 이렇듯 마키아벨리는 양쪽 모두에게서 거부당한다. 그러나 국가이성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논고>>의 마키아벨리를 통해 적어도 통치하는 자와 통치받는 자의 관계라는 불가피성, [도시]국가에 본질적인 이 내재적 불가피성을 일체의 자연적 모델과 신학적 토대 밖에서 포착하려고 한다.

두 번째, ‘정치라는 단어다. 국가이성을 공격하는 모든 문헌에서 정치라는 단어는 늘 부정적인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어떤 사람, 정치가들을 지칭한다. 이처럼 16~17세기 서구에 먼저 등장한 것으로 영역으로서의 정치도, 특정한 목적/의도의 집합으로서의 정치도, 직업이나 소명으로서의 정치도 아닌 바로 정치가들이었다. 정치라는 것, 즉 영역이나 행동 유형으로서 이해되는 정치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이다. 이제 정치는 제도, 실천, 행동방식의 수준에서 프랑스 절대왕정의 주권체계 내부에 확실히 통합되고, 실질적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영역이 된다. 이처럼 특수성을 갖는 국가이성을 주권의 일반 형식(주권과 통치의 봉합) 속으로 집어넣은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14세였다. 그런데 이때 정치는 성서에서 이끌어내진 셈(보쉬에). 결국 종교적 사목과의 화해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종교적 사목과의 일정한 관계양상이 확립됐다. 이를 통해 국가이성이 교회에 대항해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마지막은 국가이다(10장 참고). 간략하게 정리하면, 국가라는 제도의 총체는 1580~1650년경에 생겼다. 거대한 군대와 재정과 사법부 등 국가에 필요한/국가를 이루는 모든 기구가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 기억해야할 것, 실질적이고 특수하고 억누를 수 있는 역사적 현상은 국가라는 이 무엇이 인간의 숙고된 실천 속으로 확실히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다. 요컨대 다시 파악해야 하는 것은 국가가 인간의 실천과 사유 속에 들어왔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리고 국가는 시민사회를 위로부터 위협하는 일종의 생명체처럼 역사 속에서 부단히 계속 자라나고 발전해온 냉혹한 괴물 같은 것이 아니기에 시민사회, 혹은 차라리 통치화된 사회일 뿐인 것이 어떻게 16세기부터 이른바 국가라고 불리는 허약한 듯하면서도 집요하기도 한 무엇인가를 구축해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나 국가는 통치의 돌발사건에 불과하다. 국가의 도구가 통치인 것이 아니라 국가가 통치성의 돌발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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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2)

 

5강, 통치의 기원 사목권력

통치한다는 것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 개념이 포괄하는 유형의 권력이 어떤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통치성을 왜 연구해야하는가? 이는 곧 국가와 인구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다(168). 하지만 국가와 인구라는 개념도 모호한 영역인데 이를 연구하기 위해 왜 통치성이라는 또 다른 모호한 개념을 통해 접근해야하는가? 이는 규율을 언급할 때 제기 했던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외부로 나가려고 시도했던 것을 상기하면 될 것 같다. 먼저 제도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테크놀로지의 각도에서 분석하고(정신병원의 예), 기능으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전략적 분석 안에서 재검토하는 관점을 취하며(감옥의 예), 대상의 특권으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지식의 영업·분야·대상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그 위치를 재설정했다(172). 외부로의 이동이라는 이 삼중의 운동이 규율과 관련해 진행됐다면, 좀 더 근본적으로 그 가능성을 국가와 연관시켜 탐구하면, 당연히 국가로 귀결된다. , 규율메커니즘은 그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감옥, 작업장, 군대 같은 장소로부터 추출될 수 있다. 그러니 규율메커니즘을 전반적이거나 국부적으로 적용하는 책임은 최종심급에서 결국 국가에 있는 것이다. 결국 제도외적, 비기능적, 비대상적인 일반성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전체화하는 제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173). 그렇다면 정신의학에서의 격리기술, 형벌체계에서의 규율기술, 의학제도에서의 생명관리정치처럼 국가와 통치성의 관계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가 이 강의 논점이다(175).

이제 다시 통치 개념을 돌아가서 16세기 이후 완전히 정치적인 의미를 갖게 되기 전까지 통치하다라는 말은 자신이나 타인, 타인의 신체, 더 나아가 그 영혼이나 행동방식에 행사될 수 있는 지배를 지칭하기도 하고 교류, 개인들끼리의 순환과정이나 교환과정도 지칭한다. 이 모든 의미에는 국가와 영토, 그리고 정치구조가 통치된다는 의미는 없고 인간만이 통치의 대상이 된다(178). 그런데 인간이 통치된다는 관념은 그리스·로마적인 것(배로 은유되는 도시국가가 통치대상)은 아니다. 그런 관념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이전과 이후의 동방에서 찾아봐야 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통치는 두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목적 유형의 권력이라는 관념과 조직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양심지도나 영혼지도라는 형태이다.

첫 번째 사목권력의 관념과 조직을 살펴보면, ··수장이 인간과 관련해 목자이고, 인간은 목자와 관련해 무리라는 것은 지중해의 동방 전역에서 매우 빈번히 발견되는 주제이다. 이집트,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당연히 히브리인들에게도 이 주제가 발견된다(180,181). 이런 관계는 종교적 관계이기에 본질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이것이 그리스와 다른 특수한 것이다(183). 그럼 이 목자의 권력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목자의 권력은 영토에 행사되는 권력이 아니라 정의상 무리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거나 운동하고 있는 무리에게 행사되는 권력이다(184). 둘째, 근본적으로 사목권력은 善行하는 권력이다. 선행을 자신의 기능, 목적, 정당화로 삼지 않는 권력은 없다. 그러나 사목권력은 전적으로 선행하는 즉, 선행을 위해 선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목권력의 핵심목표는 무리의 구제이다. 구제를 위해 식량 등 부양의 의무와 책무에 열정, 헌신, 부단한 전념을 기울인다. 더불어 불침번을 서는 등 모두 타인을 위해 배려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목권력이 그 자체로는 언제나 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185~188). 셋째, 사목권력은 개인화하는 권력이다. 다시 말해 목자는 모든 가축 무리와 한 마리의 양을 동시에 보살핀다. , 전체와 각자를 동시에 주시하는데 전체적인 동시에 개별적이라고 하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사목과 관련된 권력기술, 그리고 푸코가 언급한 인구테크놀로지에서 재정비되는 이른바 근대의 권력기술 모두가 맞닥뜨리게 될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가축 무리와의 관계에서 목자가 희생한다는 문제, 즉 가축 무리 전체를 위해 목자가 희생하고 각각의 양을 위해 가축 무리 전체가 희생한다는 문제 속에서 목동의 역설이 더욱 강렬해지는 두 번째 형태가 있다(모세의 예). 결국 전체를 위해 하나를 희생하고 하나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기, 바로 이 역설이 사목의 그리스도교적 문제계에서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사목권력의 관념은 그리스-로마의 사유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어쨌든 매우 이질적인 사목권력 관념이 서구 세계에 도입된 것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매개로 해서였다. 모든 문명 가운데서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은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정복욕이 강하며, 가장 오만하고, 가장 잔인한 문명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서구의 인간은 그리스인이라면 용납하지 않았을 것, 즉 자기 자신을 양떼 속의 한 마리 양으로 여기는 법을 수천 년 동안 배워왔고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줄 목자의 구원을 갈구하도록 수천 년 동안이나 배워온 것이 푸코가 강조하고 싶은 역설이며 이런 가장 독특한 권력형태는 다시 말하면 양떼치기 문제로 간주된 정치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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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유동하는 시간, 불확실한 시대의 삶(지그문트 바우만)>

 

유체는 이른바, 공간을 붙들거나 시간을 묶어두지 않는다. 고체는 분명한 공간적 차원을 지니면서도 그 충격을 중화시킴으로써 시간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반면, 유체는 일정한 형태를 오래 유지하는 일이 없이 지속적으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액체는 자신이 어쩌다 차지하게 될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 액체는 공간을 차지하긴 하되 오직 한순간채운 것일 뿐이다. 어떤 의미로 고체는 시간을 무효화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액체는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유체는 쉽게 이동한다. (……) 이러한 특출한 이동성 때문에 유체는 가벼움이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 ‘가벼움이나 무게 없음에서 이동성과 무일관성을 연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험상 가볍게 여행할수록 더 쉽게 빠르게 이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액체근대>> 중에서).

 

 

유동하는 근대

 

중단, 불일치, 놀라운 일은 우리 삶의 일상적인 조건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이러한 조건들을 꼭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정신은 갑작스런 변화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자극 (……) 이외의 것들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이든 오래 지속되는 것들을 참지 못한다. 무료함 속에서 결실을 일구는 법을 우리는 이제 모른다(폴 발레리).

 

 

바우만은 우리 시대를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하고 그 변화를 5가지로 정리한다. 그 변화는 크게 사회형태들, 국민국가, 공동체, 사회구조, 개인에서 조장된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우리 시대는 견고한 것(고체)에서 유동적인 것(액체)로 변화하여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는 구조나, 일상적인 일들과 용인될 만한 행동 양식이 반복될 수 있도록 지켜 주는 제도들과 같은 사회형태들은 형성될 때는 오래 걸리지만 이제는 더 빠른 속도로 해체된다(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원형감옥의 종말은 상호 결속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전투를 수행중인 감독관과 감독받는 자들 간, 자본과 노동 간, 지도자들과 추종자들 간 결속의 종말. 이제 으뜸가는 힘의 기술은 도망가기, 미끄러지기, 생략하고 피하기의 기술, 또한 지리적으로 갇혀 있게 됨으로써 떠안게 되는, 부담스럽기만 한 질서 확립, 질서 유지, 그리고 그 대가를 감당할 필요와 더불어 파생된 모든 결과들을 떠맡아야 하는 책임을 효과적으로 거부하는 기술이다(<<액체근대>> 중에서).

 

또한 견고한 근대를 구조와 제도로서 뒷받침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국민국가는 자신의 권력을 전지구적 공간으로 점점 이전시키고 있으며 자신들의 일을 '보조금' 또는 '하청'으로 다른 사적 기업(자본)에게 빼앗기거나 스스로 넘겨준다(권력과 정치의 이혼, 1%의 전지구적 권력).

 

천년을 지속한 전통에 대한 놀랄 만한 뒤집기 속에서, 오래가는 것들을 혐오하고 피하며 순간적인 것들을 아끼는 이들이 오늘날 높은 신분과 권력을 갖게 되었고, 온갖 어려움에 맞서 자기 수중에 있는 보잘것없고 하찮은 일시적인 소유물들이 조금만 더 오래가고 좀더 역할을 하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억지를 부리는 이들은 저 밑바닥에 있다(<<액체근대>> 중에서).

 

더불어 안전과 관련하여 공동체를 보호해주던 국가장치가 점차 해체되면서 항시 위험에 노출된 파편화되고 개체화된 개인을 조장하며 그 개인들은 공동체에 의지하지 못하게 되자 특정한 문제(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네트워크에 잠시 몸을 맞기고 있다(경쟁의 장려와 협력과 팀워크의 폐기).

 

따라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며 행동하던 유형이 무너지고 오랫동안 이런 유형을 유지해 주던 틀인 사회구조들도 사라지거나 약해진다(파편화된 삶). 미래의 성공에 중요한 것은 과거의 움직임을 기억하거나 이전의 학습을 통해 마련된 토대를 기반으로 전략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정보와 경직된 낡은 습관을 신속하게 그리고 철저히 잊는 것이 중요하다.

 

또 왔구나 나쁜 놈, 이 참견꾼 자식, 우리를 들볶고 못살게 굴고 싶어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심신이 고달픈 결정을 매번 하라고? 난 정말 행복했는데. 진흙탕에 뒹굴며 빛을 쬐고 꿀꿀 꽥꽥 내 멋대로 하면서 이걸 해야 하나, 저걸 해야 하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따위의 생각과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왜 왔어? 예전에 살았던 그 끔직한 삶으로 나를 다시 처박으려고?(<<오디세이>> 중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되었다가 오디세우스가 구출해준 엘페노르의 말 중에서)

 

결국 끊임없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당혹스러운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책임을 이제 개인이 떠맡게 된다. 이제 개인의 이해관계에서 가장 도움이 된다고 선언하는 덕목은 규칙에 순응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런 규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다. '선택하는 자유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하는 자유인'은 자신 스스로도 선택되지 않으면 곧 폐기처분당하는 입장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2. 유동하는 공포(유령) - 불확실성

 

더 무서운 사실은 공포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공포는 어디서나 새어든다. 우리의 가정에, 전 세계에, 구석구석마다, 틈마다 흠마다 스며든다.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반대로 밝게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다. 침실에도 있고, 부엌에도 있다. 우리의 일터에는 공포가 기다리고, 그곳을 오가기 위한 지하철에도 공포가 도사린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혹은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서도, 우리가 소화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들에도, 공포가 숨어 있다. ‘자연인간도 우리를 공포에 빠뜨린다(<<유동하는 공포>> 중에서).

 

바우만에 의하면 공포는 프로이트의 논의를 끌어들여 우월한 자연의 힘, 우리 육체의 연약함, 그리고 가족, 국가, 사회에서 인간의 상호 관계를 조정하는 규칙들의 불완전함 때문에 발생한다고 한다. 앞의 두 공포는 어쩔 수 없다고 궁극적인 한계를 감수한다면 마지막 것은 그렇지 않다. 이 때문에 국가는 공포 관리라는 힘겨운 과제에 직면하며 추구하는 목표는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보호(사회보장)였다. 그런데 공포는 '열린사회'라는 긍정적인 개방성을 부정적으로 전유한 지구화(전지구적 자본주의, 탈규제 겸 개인화)에 의해 활짝 열렸다. 그 열린 문틈으로 비집고 공포(무역과 자본, 감시와 정보, 폭력과 무기, 범죄와 테러 등)가 들어와 영구운동기관(21)과 같이 스스로 확대재생산(증폭)을 하는 과정을 바우만은 공포에 대한 우리들의 대응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암의 일곱 가지 증세’, ‘우울증의 다섯 가지 증상을 찾아내거나 고혈압,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스트레스, 비만 등의 원인을 없애는데 몰두한다. 다시 말하면 자연스러운 배출구가 없이 남아도는 실존적인 공포를 덜어 줄 대리 표적을 찾고자 한다. 그래서 임시변통으로 누군가 피운 담배 연기를 들어마시는 일, 기름진 음식이나 해로운박테리아를 섭치하는 일, 안전하지 못한 성관계나 태양에 노출되는 경우를 조심스럽게 예방하는 일 등을 표적으로 삼는다. 우리들 중에서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주거지를 감시 카메라로 도배하고, 무장 경호원을 고용하고, 장갑차량을 타고 다니며, 방어 장비를 착용하거나 호신술을 배움으로써 자신을 요새로 만든다(<<모두스 비벤디>> 23~24).

 

공포는 자본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이를 바우만은 자본으로 대체한다. 부정적 지구화가 전지구적 자본주의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자본은 공포와 동일시되며 공포의 확대재생산은 자본의 확대재생산으로 유비될 수 있다. 따라서 공포라는 자본은 안전을 보장한다고 하는 정치적 캠페인은 물론 상품 마케팅에서 적극 활용(25)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인간들의 '더 큰 유연'한 신체를 조장한다. 실존적 안보가 보장되지 않는 국가, 사회, 공동체에서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활동(담장, 감시카메라, 무장경비원, SUV )에 결부되도록 재촉(20, 24)하고 있다는 진단과 함께 말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타자에 대한 근원적 불신과 함께 모든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다뤄야하고 이 때문에 외로움과 무기력함이 더 커져서 정말로 더 불확실한 미래가 펼쳐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28)을 내놓는다. 문제의 악순환은 파편화된 개인을 지속적으로 양산하여 집단적인 토대에 뿌리를 둔 실존적 안보가 발붙일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면서, 결속력 있는 행동을 취할 유인책은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28)이다. 대신에 '각자 알아서, 빠른 자가 승리다!'라는 식으로 개인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라고 독려하여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단편화되고 원자화되어 잎으로 점점 더욱 불확실해지고 예측할 수 없게 될 세상(28)을 만든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리얼리티 서바이벌 TV는 경쟁을 생존으로 연결시켜 결국 추방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한편, 바우만은 시민들을 사회적 지위의 하락이라는 공포(유령)으로부터 책임지고 보호해 주겠다던 '사회국가'는 점차 그 공포가 어린이를 성애의 대상으로 삼으며 도피행각을 벌이는 소아 성애자, 연쇄 살인범, 적선을 강요하는 거지, 노상강도, 스토커, 독극물 살포자, 테러리스트 등의 위협이라고 하는 '개인 안전 국가'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특히 최근에는 앞의 수많은 위협들을 불법 체류자(더불어 이주노동자)라는 인물로 한데 뭉쳐 그로부터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고 지적한다(29~30). 하지만 그러한 공포의 실체는 왜곡된 '환상'이며 '환각'인 단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바우만은 '테러와의 전쟁'을 들고 있는데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범죄와의 전쟁'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캠페인이야말로 도리어 공포를 끝장내지 못하면서 조장하며 빠른 속도로 우리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34) '불안정한 분위기'(32)를 조성한다고 바우만은 강조한다. 게다가 이러한 사태는 개인의 자유가 광범위하게 제한되는 현실을 낳는다(41). 그리고 극단적인 예로써 쿠바 관타나모 강제수용소나 이라크 아부 그라이드 교도소에서 자행되는 악랄한 가혹 행위가 우리 앞에 엄습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외진 장소에 출몰하는 예외적인 또는 한시적인 괴물들로만 치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괴물은 "바로 여기 우리 집의 다락이나 지하에 출몰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이를 좀처럼 겉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는다"(42)고 바우만은 강조한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의 삶의 변화는 우리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 다시 말하면 개인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각 개인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방치하는 세상이 바로 그런 괴물들이 출몰하는 곳이다."(42)라고 주장한다. 바우만의 주장은 곱씹어 봐야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관타나모 수용소와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 출몰하는 도저히 인간으로서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괴물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타자들)의 삶의 변화에 관심없이 오직 자신의 성공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만 사용하는 그런 사회에서 항상 출몰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괴물들이 만연하고 있음에도 애써 문제 삼지 않고 그저 예외적인 나와 다른 일이라고 자조하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바우만은 권력과 정치의 문제를 제기한다. 먼저 "부정적으로 지구화된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모두 전지구적인 것이며, 따라서 지역적인 해결책을 용납하지 않는다"(45)고 바우만은 강조한다. 이는 아무리 지역단위에서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 때문에 일시적으로 문제가 해소된다고 해도 근원적인 해결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불어 "권력과 정치가 다시 결합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 권력과 정치의 결합이 중요한데, 이때의 결합은 더 이상 국민국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유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의 미래는 전지구적인 차원에서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3. 쓰레기가 되는 삶

 

레오니아 시는 매일 스스로를 새롭게 바꿔갑니다. 아침마다 주민들은 깨끗한 시트에서 눈을 뜨며 포장지를 금방 벗긴 비누로 세수를 하고 새 가운을 입고 최신형 냉장고에서 아직 뚜껑을 따지 않은 캔들을 꺼내며 최신 모델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최근 소식을 듣습니다.

보도 위에서는, 레오니아에서 나온 어제의 쓰레기들이 깨끗한 비닐봉지에 싸여 쓰레기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눌러 짠 치약, 터져버린 전등, 신문, 그릇, 포장 재료 같은 것들만이 아니라 보일러, 백과사전, 피아노, 도자기 세트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레오니아의 풍요로움은 매일 생산되고 판매되고 구매되는 것보다, 매일 새로운 것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버려지는 물건들로 측정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오니아가 가장 열광하는 일이 정말 소문처럼 새롭게 다양한 물건들을 즐기는 것인지 혹은 오히려 되풀이되는 불순함을 쫒아버려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것인지 자문해 보게 됩니다. 당연히 청소부들은 천사처럼 환영을 받습니다. 어제의 잔재를 치우는 그들의 임무는, 신심에 영향을 주는 의식처럼 말 없는 존경을 받습니다. 혹은 그저 아무도 한번 버린 물건은 다시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지도 모릅니다.

청소부들이 매일 쓰레기를 어디로 가져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도시 밖으로 가져갑니다. 하지만 매년 도시가 확장되기 때문에 쓰레기장은 점점 더 멀리 물러나야 합니다. 버려지는 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쓰레기 더미는 점점 더 높아지고 겹겹이 쌓이고 반경을 넓혀갑니다. 게다가 새로운 물건들을 만드는 레오니아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쓰레기의 질도 더 좋아져서 시간과 악천후와 부패와 연소에 저항력을 키워갑니다. 레오니아를 에워싼, 파괴되지 않는 쓰레기 요새가 산맥처럼 사방에서 도시를 압도합니다.

결과는 이렇습니다. 레오니아에서 물건들을 내버리면 버릴수록 쓰레기는 더 많이 쌓입니다. 과거의 파편들이 벗을수 없는 갑옷으로 단단하게 굳습니다. 도시는 매일 새로워지면서 단 하나의 결정적인 형태로 스스로를 완전히 보존해 갑니다. 바로 그저께의, 그리고 매달, 매년, 십년 전의 쓰레기들 위에 쌓이는 어제의 쓰레기 더미의 형태로 말입니다.

만약 가장 멀리 있는 쓰레기 산 너머에서, 레오니아의 청소부들과 마찬가지로 쓰레기들의 산을 멀리 밀어붙여야만 하는 다른 도시의 청소부들이 쓰레기 더미를 밀고오지 않는다면, 레오니아의 쓰레기들이 서서히 세계를 침범하게될 겁니다. 어쩌면 레오니아의 경계선 너머 이 세계 전체가 쓰레기 분화구로 뒤덮여 있고, 각각의 분화구 한가운데에는 끊임없이 쓰레기를 분출하는 대도시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염된 성벽이 낯설고 적대적인 도시들 사이의 경계선이고, 각 성벽의 잔해들이 서로를 지탱해 주기도 하고 중첩되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합니다.

높이가 높아질수록 붕괴의 위험은 더욱 커집니다. 레오니아 쪽에서 깡통 하나, 낡은 타이어 하나, 상표가 떨어져 나간 포도주 병 하나만 굴러 와도 끝입니다. 그렇게 되면 떨어진 신발, 지난해의 달력, 마른 꽃 들이 산사태 나듯 무너져 내려, 도시는-그렇게 거부하려 애썼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자신의 과거 속에 잠겨버리고, 경계에 접한 도시들과 뒤섞여 마침내 깨끗해집니다. 이 재해는 더러운 산맥들을 평평하게 만들 것이고 언제나 새옷으로 갈아입던 대도시의 흔적들을 모조리 지워버릴 겁니다. 이미 옆도시에서는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새로운 지역으로 도시를 확장하고 새로운 쓰레기들을 더 멀리 보내기 위해 불도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중 지속되는 도시들1).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발전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주의화(산업화)를 기반으로 양산된 잉여 인간(인간쓰레기)’를 비자본주의적 토지에 버림(식민제국주의)으로써 성장했다. 그러한 시스템은 여러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더 이상 비자본주의적인 토지가 존재하지 않게 되자 문제에 봉착했다. 더불어 후발 자본주의 국가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화(산업화)를 통한 잉여 인간의 양산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되었고 인간쓰레기의 양산이 확대되면서 전지구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난민 발생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난민 발생의 역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과 이렇게 닮아 있을까? 결국 난민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 양산되는 인간쓰레기인 난민은 크게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비지로서 작동한 비자본주의적 토지의 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발생했으며 더불어 전개된 정치적, 경제적 내전을 비롯한 전쟁, 학살 등으로 인하여 대량으로 발생되었다. 이 내전, 전쟁 또한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측면이 강하다. 이에 대해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그들이 이용하며 활용하고 처리했던 쓰레기 재활용쓰레기 처리를 위한 정책을 점차 줄이는 대신 역류하는 인간쓰레기의 이동을 막기 위한 봉쇄 정책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이동하는 인류(난민)의 대부분은 돌아갈 수 없는 또는 돌아가지 못하는 자국의 경계 또는 선진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버려지거나 수용소 생활을 통해 인간쓰레기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난민인 인간쓰레기는 다행히 지역적 일국적 차원에서 재활용이 가능하게 된다면 노동 예비군(산업예비군)’으로서 인간쓰레기가 되는 삶은 잠시 보류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재활용 판정을 받지 못할 경우 인간쓰레기의 삶을 또 다시 영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항상 '잠재적' 인간쓰레기이다. 재활용 처리라도 받기 위해 일생을 여기에 투자한다. 엄청난 노력을 기우려 스펙을 늘리고 학벌을 쌓아도 재활용 처리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고 그 처리 기준 또한 자의적이기에 결국 재활용 처리를 받지 못하면 그마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바우만은 한번 난민은 영원한 난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난민은 법 바깥에 있으며 법 자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한다. , ‘벌거벗은 생활뿐이다. 더불어 이중 구속 상태(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른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에 있다. 따라서 이 지상에서는 설 곳을 잃은 채, 존재하지 않는 곳, “비공간”, “유령마을에 내던져졌거나 바보들의 배에 실려 황무지로 내팽개쳐진다. 그렇기에 그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육화된 비확정적 존재이며, 불가촉의 존재이며,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런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더불어 이들은 평범하게 사는 것 이상으로 살아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에 대한 잠재적 인간쓰레기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민과 증오 뿐이다. 그러나 이 모순적 행위 또한 서로 협력하여 난민을 멀리 격리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바우만은 뼈아프게 지적한다. , '연민'을 기반으로 하는 인도주의적 손길에 대해서 고용된 사람이든 자원봉사자든 인도주의적 보조자들은 바로 배제의 사슬을 형성하는 중요한 고리가 아닌가?” “난민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 그들을 위험에서 멀리 떼놓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인종 청소자들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통렬하게 질문한다. 그리고 인도주의적 일꾼들은 적은 비용으로 난민을 배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요원이며 그들은 나머지 세상 사람들의 불안을 덜어 주거나 없애 주려고 마련된 장치, 우발적인 사고에 대한 공포와 절박감을 완화하는 동시에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방관자들의 양심의 가책까지 달려 주려고 마련된 장치가 아닌가라고 비판한다.

또 다른 한편, 우리들의 맘속에 도사리고 있는 '증오'는 잠재적 인간쓰레기를 양산하도록 만드는 1%, '비가시적인' 엘리트들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기에 도리어 정부의 선전에 휘둘려 망명 신청자들에 대한 적대에 복무한다고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선전과 그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를 생각해 보라. 따라서 내곽을 치고, 자신들까지 의지하며 엑스레이 촬영기와 폐쇄 회로 텔레비전 카메라를 설치한 울타리를 세우는 정책과, 입국 사무소 안에는 관리를 더 배치하고 밖에는 국경 감시원을 늘리는 정책, 입국 및 귀화 관련법의 그물을 더 촘촘하게 하는 정책, 엄격하게 감시하는 격리된 수용소에 난민을 가두는 정책, 이주민이 국경에 도착해 난민이나 망명자 신분을 요청할 기회를 얻기 전에 자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벽은 결국 잠재적 인간쓰레기인 자신을 막는 거대한 장벽임에 다름 아니다.

 

 

4. 불확실성 시대의 유토피아

 

우리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토피아를 꿈꿨다. 바우만은 지금까지 유토피아를 사냥터지기, 정원사, 사냥꾼의 유토피아로 비유한다.

 

사냥터지기는 관리하도록 맡겨진 땅에 인간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이른바 땅의 자연적 균형’, 즉 신이나 자연의 무한한 지혜의 체현물을 보호하고 보조하는 것이 목적이다.

 

반면, 정원사는 자기가 끊임없이 보살피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질서가 없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그는 우선 머리에 바람직한 배치도를 마련한 다음에 정원을 그 이미지에 맞춘다.

 

그런데 이제 정원사의 태도는 사냥꾼의 자세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사냥꾼은 전체적인 사물의 균형에 신경쓰지 않고 자루를 최대한 채워 줄 만큼 큰 사냥감을 죽이는 것이다. 사냥감이 없어지면 다른 숲으로 옮기면 그만이다. 문제는 사냥은 일단 맛을 들이고 나면 다시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중독되며, 집착하게 된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계속 사냥에 참여하는 삶이 또 다다른 유토피아라면 그것은 끝이 없는 유토피아이다. 정원사에게 유토피아는 길의 끝이었지만 사냥꾼에게는 길 자체다. 끝이 있다면 삶은 끝나고 만다.

 

 

5. 바우만을 위한 변명

 

모두스 비벤디는 말그대로 '삶의 방식(양식)'이다. , 개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세계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지를 지속적으로 강요한다. 교육을 통해서 매체를 통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는 세계가 구성한 삶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그런 삶의 방식이 누가 만든 방식이고 누가 작동시키는지를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그런 삶의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의 삶을 '인간쓰레기(잉여인간)', '벌거벗은 목숨'으로 '생존'만을 영위하는 삶이라고 문제제기한다. 결국 이 책은 근대 자본권력의 권력유지를 위한 '유동하는 근대'로의 변화가 사람들의 삶에 부딪치게 되고 그렇게 불확실한 사회에 맞게 살도록 삶의 방식에 영향을 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해결책은 전혀 없다. 그래서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스스로 "질문은 던지지만 명쾌한 답변은커녕 답변을 제시하려는 시도조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나는 모든 답변이 독단적이고 시기상조이며, 사람들을 호도할 여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요컨대, 앞에서 말한 변화들로 인해 사람들은 불확실성이 만연한 상황에서 예상 손익을 계산하고 결과를 평가하면서 계획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런 불확실성의 원인을 탐구하는 일, 그리고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그런 장애물들을 통제하려 할 때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도전에 (개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단적으로) 대처할 우리의 능력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드러내는 일, 이것이 내가 이제껏 노력해 왔고 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될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이처럼 바우만은 불확실성이 만연한 유동하는 근대에 살아가기 위한 삶의 방식의 구축이 지닌 문제들을 아주 미시적인 것에서부터 아주 거시적인 것까지 망라하여 제시하고 있다. 인간쓰레기의 탄생과 확대도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사안이다. 어떻게 보면 바우만의 문제제기는 지나친 감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를 아예 잠재적 쓰레기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점을 다시 확인해야한다. 인간쓰레기 또는 벌거벗은 생명을 명명하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자본권력이다.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쓰레기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존중과 자기 비판의 계기를 찾아야 한다. 더불어 우리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정치가 필요한 순간이다. 바우만은 이 점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에서 얘기하고 있다. 나아가 삶의 방식도 그들이 만드는 것에 개별적으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인간들의 '연대'를 통해 만들어야한다는 점에서 결코 우리를 쓰레기로 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쓰레기가 아니다. 만들어진 삶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닌 우리들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가는 한에서 말이다. 이건 가난과도 관련이 있다. 부유해 지려고 하는 삶은 어쩌면 자본권력이 만들어 놓은 삶의 방식일 것이다. 그런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달하지 못하면 이미 쓰레기가 되는 삶이 되는 거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만든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면 전혀 쓰레기가 될 이유가 없다. 그런 잣대로 이웃과 세상을 보는 건 이미 스스로 인간쓰레기가 되지 않는 삶을 나타내는 것이니 오히려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NGO 등이 실행하는 각종 사회 개혁프로그램 또는 이른바 약자 또는 타자에 대한 긍적적이고 실천적 활동에 대해 바우만은 비판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하는 작은 실천이 의미 없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실천으로 만족하거나 안주하는 삶의 방식 또한 자본권력이 만든 것이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조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런 작은 실천이 자본권력의 삶의 방식을 거스르는 또는 빗나가게 하는 행위이면 오히려 자본권력을 문제 삼을 수 있는 행위라는 것도 바우만의 숨은 얘기기 된다.

 

어쩌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바우만의 말은 작고 큰 실천적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실천적 행위 또한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방식일 때 더욱 암울한 현재를 형성한다고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고민은 오히려 작은 실천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러한 실천이 자본에 포섭 또는 활용되지 않도록 더 고민하고 깊이 생각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변화하고 변화시키는 행위를 중단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런 작은 실천적 행위가 실은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니까.

 

또한 이런 점에서 바우만은 중요한 점을 언급한다. 근대 자본권력이 만든 삶의 방식은 이미 전제된 것이기에 개인들은 그 잣대에 맞춰 살아가야만 하는 개별존재로 파편화시킨다는 점이다. ,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삶의 방식이 자본권력이 만들고 작동시키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답도 어느 순간 나와 있는 듯하다. 그가 지속적으로 얘기하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연결을 의미하는 '연대''공동체적인 삶'이 그것이다. 연대와 공동체적인 삶만이 우리가 쓰레기가 되지 않는 법이다. 더 나아가 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힘이다. 각각의 역할과 각각의 생각과 각각의 고민과 각각의 행위가 어우러져 갈등하고 불화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그런 연대야말로 인간쓰레기를 양산하며 권력을 향유하고 하는 근대 자본권력의 힘을 중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자타 존중과 자기 비판의 힘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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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의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을 읽기 위한 해설서 또는 질문총서로써 간행된 <<타자로서의 서구>>는 스피박의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도록 한편으로는 친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친절하다. 친절한 것은 스피박의 책 순서에 따라 그녀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어서 친절하면서도 불친절한 것은 해설서이기 때문에 생략이 많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스피박의 논의가 많이 생략된 것처럼 느껴져서 더욱 그런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불친절함이 오히려 스피박의 책을 손에 들도록 하는 힘도 있는 것같아 그리 나쁘지 않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피박의 주요한 주장과 지금 여기에서 스피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참고가 되는 분명 좋은 해설서로 생각된다.

 

참고로 타자로서의 서구에서 언급된 스피박의 주장 또는 임옥희의 용어설명에서 앞으로 고민해야할 대목이 있어 옮겨 놓는다.

 

먼저, 서구의 사상과 문학에서 전개된 주체 속의 타자 설정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다. 최근 서구 사상가들의 작업들 중에 주체 속에 타자성을 설정하는 작업들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 같다. 아감벤의 '탈주체의 주체'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일방적이지만 스피박은 기존의 제국주의적 독법이 타자를 억압, 삭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포스트식민시기에는 "타자를 단지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주체의 이중적 자아로 만들어서 주체의 자기 확장을 도모하는 음험한" '포스트'(이건 나의 첨가어) 제국주의적인 독법이라고 비판한다. 타자 또는 타자성을 강조하는 서구중심적 작업 중에 이런 측면이 없는지 주의깊게 살펴봐야할 점이라고 생각든다.

 

그리고 임옥희가 정리한 용어 사전 중 정동(affect)을 옮겨 본다. 최근 정동의 의미를 강조하는 주장들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백발의 맑스주의 신사들의 '사랑'도 그렇고 최근 국내 학자의 '슬픔'도 그렇다. 근대가 이성이라면 후기 근대는 감정이라고 하는 얘기는 이미 널리 퍼져 있다. 이것을 어떻게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건강한 에너지로 활용할 수 있을지 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될만도 하다. 일단 임옥희가 정리한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옮겨보며 특히 슬픔에 대한 내용에 주목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이성에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는다.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인간은 이성이 아니라 혼란스런 느낌, 정서, 의지, 충동과 같은 여러 가지 정념, 즉 희로내락애오욕과 같은 전의식적이고 상징계 이전의 잔재로 남아 있는 어떤 흐름과 강도를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런 감정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지와 운동이라는 맥락 속에서 다양한 모습의 강도와 흐름을 지니게 된다. 그것을 스피노자는 정동이라고 부른다. 스피노자에게 수치심, 복수심, 두려움, 유사희망, 불안, 공황 등은 상황에 따라 슬픔으로 정지될 수 있다. 수치심은 자신이 타자에게 비난받는다고 상상하는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복수는 타인에게 슬픔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슬픔이다. 두려움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에 의해 자극되는 슬픔이다. 불안은 자신의 욕망이 침해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정할  때 비롯되는 슬픔이다. 공황은 작은 악을 통해 큰 악을 피하려는 욕망, 즉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방해당하는 일반화되고 대규모화된 두려움이다. 스피박에 따르면 서구 철학은 이런 정동을 이성에 종속시킴으로써 서구 제국주의의 문명화 사업을 훨씬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진행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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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롱이 2012-08-0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느 것에도 흔들림 없는 이성, 명백하고 확실하고 누구나 진실이라고 말하는,의 강조를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문명화 사업을 공고히 했다는 거군요? 항상 무엇엔가 휘둘려 보이는 감정을 컨트롤 하는 이성이 그리 대단해 보이긴 했지요. 지금까지는. 님의 글을 통해 정말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네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시키는대로, 감정이 시키는대로 사는 것이 그리 잘못된 것일까? 이렇게 살면 사회의 생산성은 떨어지는 것일까?"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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