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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일요일은 제96주년 3·1절이다. ‘주년을 지키는 행사가 국가의 권위를 위해 과거를 단순히 기념한다면 현재의 우리를 확인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3·1절은 191931, 강제로 병합된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스스로 선언한 날이다. 그런데 독립은 누구의 간섭과 도움 없이 스스로 바로 서는 것이다. 한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독립도 선언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라는 개인도 독립된 개체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나와 너를 넘어 공동체의 독립을 보장할 수 있다. 나아가 공동체의 독립은 우리들만의 독립을 의미하지 않으며 모든 우리들의 독립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독립은 독립된 개체간의 관계가 모든 공동체의 원리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1931일의 독립선언과 이후의 만세운동은 나와 너, 그리고 공동체들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린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범상치 않은 학생 세 명이 스스로를 증거 삼듯 어렴풋이 영남루가 보이는 밀양강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 명은 봇짐과 지팡이, 그리고 짚신을 신고 있고 다른 두 명은 두루마리 차림이다. , 여행가는 이와 그를 배웅하는 이가 증거를 남기듯 함께 영남루와 밀양강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식민지 조선, 그것도 일본인들에 의해 점점 소외되고 있던 부산진 조선인마을에서 자라나 부산상업학교(부산상고의 전신, 현 개성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이들 세 사람(좌로부터 김인태, 왕치덕, 오택). 10대의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찍이 스스로 독립된 사고 속에 이웃 조선인들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며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나아가 김인태는 우리와 같은 세계의 약소민족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모색하기 위해 1914년 여름, 세계 무전여행에 나섰고 이를 배웅하기 위해 왕치덕과 오택이 밀양까지 배웅했던 것이다. 김인태는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고 왕치덕, 오택도 역시 친구인 박재혁, 최천택 등과 함께 부산의 의열단원이 되어 의열투쟁 등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이 한 장의 사진은 스스로의 독립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비장한 각오로 세계 무전여행을 떠나고 배웅하던 10대들의 모습을 오늘날의 10대와 우리에게도 비춰볼 수 있게 고스란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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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 NIE에 올해부터 연재하는 글을 옮겨 놓는다. 사진에 '재현된 지역'을 통해 내가 발딛고 있는 시공간을 이해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한국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억하기와 사유하기라고 해두자.]


한국이 식민지로 강제 병합되기 직전인 1909,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장악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황제를 회유하여 영남과 관북으로의 순행을 진행했다. 순종황제의 이른바 남순행은 17일부터 13일까지 7일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수행원 총 96(한국인 68, 일본인 28)을 거느린 순행은 남대문에서 궁정열차를 타고 대구(1)->부산(2)->마산(2)->대구(1)를 거쳐 다시 남대문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이때 순행은 주로 능행이나 원행이며 도성 주변과 경기도에 한정되던 이전 순행과는 사뭇 달랐다. 더불어 사전 논의 없이 통감과 통감부의 일본인들에 의해 급박하게 진행되었고, 통감을 비롯하여 일본인 관료가 직접 황제를 배종했다. 이는 순종황제의 순행이 통감부의 특별한 정치 기획이며, 일본의 의도와 계획 속에 진행된 이벤트임을 알 수 있다. 1909년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반면, 한국인들은 의병운동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일본에 저항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인들의 저항을 진압하지 못하면 한국의 식민지화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일본은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의병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한편, 순종황제를 앞세운 순행이라는 정치 이벤트를 통해 한국인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18일 오전 1145분 부산역에 도착한 순종황제는 이틀에 걸쳐 동래부와 일본 제2함대 및 상품진열관을 방문했다. 동래부 행차는 연도 및 동래부 한국인들을 위무하며 통치 안정화를 꾀한 것이었다면, 군사적 침탈의 상징인 제2함대 및 경제적 침탈의 상징인 상품진열관 행차는 황제의 권위와 상징성을 동원하여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한 것이었다. 이는 통감부가 제작한 한국황제폐하행행기념엽서 사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순종황제의 상품진열관 행차를 담은 이 사진은 한일우호를 강조하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된 장수통(, 광복로)을 지나가는 황제 일행과 이를 환영하는 길가의 지역민들을 보여준다. 그런데 순행행렬은 이토 통감 및 일본인들이 배종했고 환영인파도 대부분 일본인들이다. 물론 두루마리와 댕기머리의 한국인이 보이지만 소수이며 그마저 뒤편에 처져 있다. 이는 한일우호를 강조하지만 순행 및 환영의 주체가 오히려 일본과 일본인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순종황제의 부산 순행도 일본의 기획에 의해 식민지화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데 이용당한 정치 이벤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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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EXPO)라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정치 선전장으로 1851년 런던의 하이든파크 수정궁에서 만국박람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특히나 제국주의시기의 만국박람회는 자국의 권력을 뽐내며 자국민에게 식민지 경영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선전하는 장일뿐만 아니라 식민지민에게조차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식민지가 필요하다는 문명과 야만의 지배 이데올로기(식민주의)가 작동하는 동화의 장이기도 했죠. 그래서 반인종적이고 비인간적인 식민지민의 전시 또한 자행되었습니다. 조선인 또한 일본의 만국박람회 속에서 전시되는 수모까지 겪기도 했죠. 물론 이러한 반인종적이고 비인간적인 박람회는 1,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행위자체가 문제시 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선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술력 경쟁장으로 변신했습니다. 그런 공간으로 엑스포가 지금까지 계속해서 개최되고 있습니다. 기술력 경쟁장으로 바뀐 엑스포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경쟁의 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주체국의 기술적 우위를 국민에게 선전할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간의 기술의 우열을 가리며 선진국과 후진국을 위계열적으로 질서 지우려는 근대 정치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지요. 주제관 및 주체국관, 그리고 국제관이 바로 그런 위계열적인 질서를 배우고 습득하는 공간입니다. 여수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는데 물론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어긋남도 존재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보려고 하지만 후진국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나라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런 엑스포이기에 어떤 선전의 장인지 궁금했던 저로써는 관심이 가는 건 당연했습니다. 물론 이미 엑스포가 지니고 있는 권력의 현전으로써의 전시 정치라는 점에서는 흥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어떤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그들의 질서 속에 끌어들이는지 관심이 갔죠. 그 질서를 알아야지 그 질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엑스포는 과연 뭘 보여주고자 하는지 너무나 단순해서 그러한 선전이 지금까지의 선전과 어떤 면에서 차별화되는지 또는 어떤 면에서 고도화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제 엑스포는 단순한 자본주의의 유희 공간 정도에 그치지 않을까 또는 그러한 기대조차 미치는 못하는 장이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진단도 가능한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주체국의 기업들이 기업관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에서도 이점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하면, 해양 또는 바다라는 주제에 대한 주체국 및 참가국, 그리고 참가기업의 생각 자체가 너무도 천변일률적이고 안일할 뿐만 아니라 어쩌며 그렇게 상상력이 빈곤한지 뭐라고 말하기 너무 힘든 상태였다고나 할까요. 먼저 주체국을 보죠. 한국이 주체국이니 한국관과 주체측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주제관을 보면 단번에 그 내용의 빈곤함과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주제관의 내용은 듀공이라고 하는 멸종위기에 빠진 고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바다오염에 대한 이야기와 아이와 듀공과의 만남을 통해 바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죠. 그런데 이 여수 엑스포가 진행되는 동안 MB정부는 포경을 재개한다고 했죠. 한국 정부의 천박함이란...더 기막힌 것은 한국관입니다. 한국관의 내용은 2개의 영상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영상물은 내용은 역사를 통해 바다와 가까웠을 때는 부강한 나라였고 바다와 멀어졌을 때는 가난한 나라였다는 메시지이며 두 번째 영상물은 함께 앞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해양개발사업에 적극 뛰어들어야하고 또 뛰어들고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대표적인 산업으로 담수플랜드사업과 조선플랜드사업을 들고 있습니다. MB스러워 경악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바다오염을 말하며 듀공이라는 고래를 내세우면서 포경사업을 재추진하고 더불어 해양개발을 말하는 이 웃지못할 주체국과 주체 측의 전시가 과연 어떤 효과를 발휘할까요? 실소를 금치 못하는 전시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서 국제관의 각 개별 국가관은 또 어떤가요. 대표적으로 미국관을 보죠. 힐러리와 오바마의 파트너쉽을 강조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영상물과 바다를 둘러싼 미국인의 풍경을 통해 결국 나의 바다우리의 바다이니 이를 공동으로 탐사, 관리하고 경영해야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없어 함께 그런 아이디어를 내어 함께 관리하고 경영해야한다는 메시지이지요. 흔히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의 바다에 대한 인식이 이정도이니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겠죠. 그저 바다와 각 나라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소개가 모든 참관국의 전시 내용이었습니다. 그저 바다와 관련된 각 나라의 환경을 보여주고 바다오염을 말하며 함께 고민하자고 하는 것에 그치고 있죠. 정말 바다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해양이라는 이번 엑스포 주제에 대해 주체국은 물론이고 참가국 또한 전혀 생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 엑스포에 수많은 국민의 혈세와 그것도 모자라 관객으로 또 관람료를 내는 한국민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국가라는 하는 권력기구가 반국민적인지 또 한번 세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업관, 참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바다에 대해 진지하게 한번도 생각하지 못한 기업을 엑스포에 끌어들이려고 정부가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유언비어처럼 간혹 들려옵니다만 어이가 없긴 매 한가지입니다. 특히 가장 많은 관람객을 끌어 모으고 있던 삼성관을 보죠. 삼성관은 삼성호라는 파빌리온을 통해 바다(?)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천편일률적이게도 개발’(삼성이 이런 얘기도 하는 군요)에 의해 지구가 병들고 그 병든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삼성호가 노아의 방주처럼 나타나 그 속에 수많은 동물과 식물과 인간이 타게 됩니다. 그리고 삼성호에 탔던 어린 소녀가 지니고 왔던 장미꽃이 시들면서 빛과 물과 흙의 회복과 장미꽃의 다시 핌으로 이야기가 끝맺죠. 지구와 인간 멸망에 가장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업인 삼성이 개발의 문제를 지적하며 노아의 방주를 소재로 얘기를 진행하다니 이것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참 자본은 무섭군요. 돈이 된다면 자신을 팔아서라도 자본을 확대재생산하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삼성이라는 기업이 얼마나 바다와 관련하여 상상력이 부재한지를 또한 명확하게 드러내 주더군요. 이처럼 기업관도 주먹구구식으로 기업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는 도저히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상의 몇 가지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수 엑스포는 만국박람회라는 그 태생부터 지금 전시되고 있는 내용까지 총체적 문제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드네요. 위로 아닌 위로는 이제 엑스포는 더 이상 위계질서를 배우고 습득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전시의 정치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공간으로 변화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계의 정치적 장은 다른 장으로 이동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자동차 또는 전자제품 전시장이 그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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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올리는 영화에 대한 저 개인의 후기는 영화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이 점에 유의하여 후기를 읽어주길 바랍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감정은 복잡했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어떤 감정인지 미세한 떨림이 몸 전체를 휘감았다. 슬픔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사자후tv 속의 절규와 외침에 난 전혀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아마 어떤 실재와의 만남으로 인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재의 목도는 그렇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어느 철학자는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침묵으로, 말더듬으로, 표정으로, 몸짓으로 나타난다고.

 

그런데 실재를 직시해야한다는 그 철학자의 주장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곤 했던 내가 이 장면에서 이상한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실재의 목도 이후를 생각할 수 없어서일까? 정확하게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압도적 국가폭력 앞의 두려움이었을 테고 분노였을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이 장면 또한 실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큐라고 하지만 영화는 실재의 재현인 상징적 세계이며 또한 영화 속의 사자후tv 또한 상징적 세계이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실재를 가장한 환상이다. 이렇게 용산이라고 하는 사건의 실재는 렌즈 저 멀리 존재한다. 겨우 재현의 재현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올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능하지만 그래도 국가폭력을 들춰내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왜 나는 재현의 재현에 실재의 목도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 것일까?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건 실재를 보고 느낀 감정이 아닌 것은 아닌가? 오히려 실재를 가장한 환상 효과는 아닌가? 왜 나는 이 장면에서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던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그러다 문뜩 예전에 읽었던 홀거 하이데의 두려움과 분노에 대한 글(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이 생각이 났다. 국가폭력을 직간접적으로 목도한 우리들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문제는 두려움을 통해 국가(자본)권력이 우리들에게 복종심, 경쟁심, 폭력성을 배우도록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가는 폭력을 항상 가시적으로 상연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의 의도(어떤 의도인지 모른다)와는 달리 국가폭력을 순응하도록 하는 효과로도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 감독은 국가폭력의 실체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분노의 감정을 자극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나도 그런 감정이 들었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그럼 또 다른 측면에서 느낀 저항의 긍정적 감정인 분노는 어떠한가? 알다시피 분노는 최근 월스트리트의 점령과 더불어 저항을 위한 긍정적 감정(정념, 정동)으로 주목받고 있다(분노하라!). 하지만 또 다시 하이데는 분노나 대중 심리 또한 대개 불의에 토대하기 때문에 결국은 정의롭고 합리적인 해결책(국가자본권력의 합리적 지속)으로 결론이 나버린다고 한다. 근원적인 치유가 아니라 임기응변으로 덮어버리는 봉합이다. 더군다나 만약 이 저항이 패배하는 경우 좌절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또 다시 적응하면서 현실로 복귀해 버린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근본적 문제해결은 요원하다. 하이데가 말하는 근본적 문제해결은 폭력을 상연하는 권력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벤야민의 내리치는 신의 폭력이 이에 해당될 것이며, 아감벤의 세속화또한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다만 나는 순수 수단(국가와 자본의 폭력 중단)으로써의 신의 폭력세속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이후를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는 찬동하지 않는다. 어쨌든 문제의 해결은 압도적 국가폭력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과 일시적으로 자극된 분노가 아닌 지속가능한 분노와 저항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영화는 마지막 국가폭력의 재현 장면이 아니라 감독이 그렇게 공을 들였던 앞의 장면에 초점이 맞춰져야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 영화가 왜 철거민(특히 용산 철거민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철거민,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우리 모두)은 망루에 올라가야했는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 시의적절한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의 시간을 용산참사에 참여한 철거민의 삶을 조명하면서도 우리에게 왜 망루에 올라갔는지에 대해 끝끝내 납득할만한 설명과 묘사를 보여주지 못했다. 근원적으로는 이 땅에서 우리는 왜 길거리로 내려앉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건 한국사에서 언제나 항상 유리걸식하는 민들의 모습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영화에서 철거민들이 매번 상투적으로 얘기하는 자본권력이란 무엇이며 이들이 자행하는 구조적 폭력은 또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 국가로부터 폭력단체라고 명명되며 이 사건의 주범처럼 인식되고 있는 철거민이 우리와 결코 다른지 않다는 주장. 그들은 결코 범죄자도 폭력조직도 아니라는 주장. 누구나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그 압도적 폭력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망루에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 등이 이 영화에 드러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은 어쩐지 설득의 실패를 폭력의 실체를 통한 분노로 연결시키는 감정의 정치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감정의 정치학은 국가와 자본이 너무도 잘 이용하는 정치적 수단이라는 점이다. 만약 단순히 제목처럼 국가는 폭력이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다면 망루를 둘러싼 공권력의 폭력적 행동을 사자후tv 등의 당시 촬영분을 통해 재구성하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런 점에서 망루의 폭력에 대한 진실 공방은 또 다른 용산 영화인 <두 개의 문>에서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설득의 실패로 말미암아 어쩌면 국가폭력의 교육적 효과와 결부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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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포토 보기

 

공간초록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 본 모래를 시네마떼끄의 인디스데이를 통해 보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초록에서는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인디스데이는 없었다는 점이다.

감독에게 묻고 싶은 점이 많았는데 아쉽긴 하지만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하며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을 여기에 남긴다.

 

모래(My Father’s House)는 영문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아버지의 집이며 그 집이 모래 위에 지어진 위태로운 집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아버지의 위태로운 집을 통해 가족 또한 모래위에 만든 허물어지기 쉬운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이 영화는 아파트 값을 둘러싼 자본주의적 욕망(감독조차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가족의 관계 아님(비-관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문제작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의미있고 그렇기에 당혹스럽다.

의미있는 점은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가족관계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그 이면에 숨어있기 때문에 그렇고, 당혹스러운 것은 최근에 느낀 나의 가족 또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감독의 가족 또한 문제적인 가족이기에 어쩌면 우리네 가족(이렇게 보편화하는 것은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의 가족)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지 하는 점에서 당혹스럽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얼핏 너무도 쉬운 질문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 고민스러운 질문이다.

쉬운 답은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할 수 없는...

그렇기에 우리는 주어진 가족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가족은 다음과 같은 의미 부여 속에서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파트라는 대상을 통해서만 어느 정도 가족과 가정을 꿈꾸는 아버지.

딸이라는 대상을 통해서만 가족을 생각하는 어머니.

새로운 가족을 이루면서 이전의 가족과 현재의 가족을 비교하고 더 나은 가족을 꿈꾸는 여동생.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통해 가족의 문제에 직면한 감독.

 

너무도 제각각이며 파편화된 가족이라 모두들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이런 관계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잖이 의문이 든다.

그렇기에 이 영화 속에서 이른바 가족의 '관계 있음'은 상징적이지만 매번 과거의 사진 또는 가족 사진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속에서는 이렇게 잘 봉합되어 있지만 현실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져 파편화되어 있다.

잔인할 정도로 영화 속에서는 매번 가족은 혼자이다(몇몇 부분에서는 아니지만).

관계 속의 소통은 전혀 없다. 그저 감독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점이 위안이 될 뿐...

그래서인지 나는 이 영화가 아버지가 구축한 가족 자체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위태롭다고 비판하기 위해 시작했다가 가족 구성원 각자가 구축한 가족 또한 파편화되어 있고 위태로운 가족이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중앙과 지방, 강남과 비강남, 그리고 버블경제, 부동산투기에 사로잡힌 허영에 가득찬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비판적으로 그려내다가 자신도 그 허영 속에 있음을 알아채고 당황해하는 영화일 뿐만 아니라 가족 관계란 결혼과 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 아님(비-관계)'의 제도적 가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관계 회복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파편화된 관계를 이어줄 매개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관계 맺음의 매개는 자본이라고 생각된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영화의 프레임에 딱 한번 동시에 등장하는데 이때도 아파트 재개발이 가능할 것이라 하는 소식, 즉 자본에 의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기의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여전히 상품과 그 광고를 통해 꿈꾼다.

근대는 그렇게 시작했다.

근대적 가족을 행복한 가정으로 상정했고 그렇게 스윗 홈은 문화주택을 통해야만 가능하며 그 속에서 행복한 가정은 피아노를 치며 함께 노래부르며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지금도 여전히 상품 광고 속에서 행복한 가족은 그렇게 꿈꿔지고 있다.

수많은 의식주 광고들을 보라.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가?

또 다른 매개는 존재할까?

그게 아니라면 다시 전통적인 가부장제적(권위적) 가족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지금 당장 내세울 만한 해답은 없는 것 같다.

다시 가족의 관계를 새롭게 고민해야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이때 우리가 생각하고 실험해야할 관계는 이미 주어진 관계의 회복 또는 복귀가 아니다.

구성원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만들고 허물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다시 구성하자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뱀발이지만 강유가람 감독에게 기대하고픈 점이 있다.

강감독이 아버지의 허황된 꿈을 비판하기 위해 카메라들 들었다가 가족의 실재에 봉착하면서 느꼈을 곤욕과 당혹감이 그에게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곤욕과 당혹감이 앞으로의 작업에 소중한 의미를 북돋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우리 시대 가족의 실재를 드러내고 고민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고통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실재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대부분 회피하고자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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