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초록에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 본 모래를 시네마떼끄의 인디스데이를 통해 보게 되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초록에서는 감독과의 대화가 있었는데 인디스데이는 없었다는 점이다.
감독에게 묻고 싶은 점이 많았는데 아쉽긴 하지만 앞으로의 작업을 기대하며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을 여기에 남긴다.
모래(My Father’s House)는 영문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아버지의 집이며 그 집이 모래 위에 지어진 위태로운 집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는 아버지의 위태로운 집을 통해 가족 또한 모래위에 만든 허물어지기 쉬운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이 영화는 아파트 값을 둘러싼 자본주의적 욕망(감독조차도 벗어나지 못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가족의 ‘관계 아님(비-관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문제작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의미있고 그렇기에 당혹스럽다.
의미있는 점은 우리 삶의 토대가 되는 가족관계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가 그 이면에 숨어있기 때문에 그렇고, 당혹스러운 것은 최근에 느낀 나의 가족 또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감독의 가족 또한 문제적인 가족이기에 어쩌면 우리네 가족(이렇게 보편화하는 것은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의 가족)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지 하는 점에서 당혹스럽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얼핏 너무도 쉬운 질문이지만 따지고 보면 정말 고민스러운 질문이다.
쉬운 답은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선택할 수 없는...
그렇기에 우리는 주어진 가족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가족은 다음과 같은 의미 부여 속에서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파트라는 대상을 통해서만 어느 정도 가족과 가정을 꿈꾸는 아버지.
딸이라는 대상을 통해서만 가족을 생각하는 어머니.
새로운 가족을 이루면서 이전의 가족과 현재의 가족을 비교하고 더 나은 가족을 꿈꾸는 여동생.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통해 가족의 문제에 직면한 감독.
너무도 제각각이며 파편화된 가족이라 모두들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이런 관계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잖이 의문이 든다.
그렇기에 이 영화 속에서 이른바 가족의 '관계 있음'은 상징적이지만 매번 과거의 사진 또는 가족 사진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속에서는 이렇게 잘 봉합되어 있지만 현실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져 파편화되어 있다.
잔인할 정도로 영화 속에서는 매번 가족은 혼자이다(몇몇 부분에서는 아니지만).
관계 속의 소통은 전혀 없다. 그저 감독이 가족의 일원이라는 점이 위안이 될 뿐...
그래서인지 나는 이 영화가 아버지가 구축한 가족 자체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위태롭다고 비판하기 위해 시작했다가 가족 구성원 각자가 구축한 가족 또한 파편화되어 있고 위태로운 가족이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중앙과 지방, 강남과 비강남, 그리고 버블경제, 부동산투기에 사로잡힌 허영에 가득찬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비판적으로 그려내다가 자신도 그 허영 속에 있음을 알아채고 당황해하는 영화일 뿐만 아니라 가족 관계란 결혼과 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 아님(비-관계)'의 제도적 가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관계 회복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파편화된 관계를 이어줄 매개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관계 맺음의 매개는 자본이라고 생각된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영화의 프레임에 딱 한번 동시에 등장하는데 이때도 아파트 재개발이 가능할 것이라 하는 소식, 즉 자본에 의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기의 우리는 행복한 가정을 여전히 상품과 그 광고를 통해 꿈꾼다.
근대는 그렇게 시작했다.
근대적 가족을 행복한 가정으로 상정했고 그렇게 스윗 홈은 문화주택을 통해야만 가능하며 그 속에서 행복한 가정은 피아노를 치며 함께 노래부르며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지금도 여전히 상품 광고 속에서 행복한 가족은 그렇게 꿈꿔지고 있다.
수많은 의식주 광고들을 보라.
그렇다면 우리는 자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가?
또 다른 매개는 존재할까?
그게 아니라면 다시 전통적인 가부장제적(권위적) 가족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가?
지금 당장 내세울 만한 해답은 없는 것 같다.
다시 가족의 관계를 새롭게 고민해야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이때 우리가 생각하고 실험해야할 관계는 이미 주어진 관계의 회복 또는 복귀가 아니다.
구성원들에 의해 주체적으로 만들고 허물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다시 구성하자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뱀발이지만 강유가람 감독에게 기대하고픈 점이 있다.
강감독이 아버지의 허황된 꿈을 비판하기 위해 카메라들 들었다가 가족의 ‘실재’에 봉착하면서 느꼈을 곤욕과 당혹감이 그에게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곤욕과 당혹감이 앞으로의 작업에 소중한 의미를 북돋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우리 시대 가족의 실재를 드러내고 고민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고통스러운 작업일 것이다.
실재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대부분 회피하고자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