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에 의하면 잠재성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지닌 상태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연성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연성은 "가능성을 실제로 줌, 잠재성이 그러한 것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며 "존재할 능력과 존재하지 않을 능력 사이에 휴지를 부여하는, 잠재성의 사건"이다.

그럼 우연성은 어떻게 촉발되며 또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일단 아감벤은 "이러한 '줌'은 주체성의 형식"을 띤다고 한다. 그래서 "우연성은 주체를 시험대에 올리는 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연성은 주체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때 주체성은 아감벤의 주장에 의하면 탈주체와 주체의 이중성을 의미하며 좀더 내 식으로 풀면 자신에 대한 탈주체화와 타자에 대한 주체화이지는 않을까?

정리하면 잠재성이 가능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연성이 개입되어야 하면 이 우연성은 주체 즉 타자의 주체성을 시험대에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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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중인 인류>

 

난민의 탄생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발전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주의화(산업화)를 기반으로 양산된 잉여 인간(인간쓰레기)’를 비자본주의적 토지에 버림(식민제국주의)으로써 성장했다. 그러한 시스템은 여러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더 이상 비자본주의적인 토지가 존재하지 않게 되자 문제에 봉착했다. 더불어 후발 자본주의 국가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화(산업화)를 통한 잉여 인간의 양산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되었고 인간쓰레기의 양산이 확대되면서 전지구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난민의 발생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난민 발생의 역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과 이렇게 닮아 있을까? 결국 난민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 양산되는 인간쓰레기인 난민은 크게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배지로써 작동한 비자본주의적 토지의 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발생했으며 더불어 전개된 정치적, 경제적 내전을 비롯한 전쟁, 학살 등으로 인하여 대량으로 발생되었다. 이 내전, 전쟁 또한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측면이 강하다. 이에 대해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그들이 이용하며 활용하고 처리했던 쓰레기 재활용쓰레기 처리를 위한 정책을 점차 줄이는 대신 역류하는 인간쓰레기의 이동을 막기 위한 봉쇄 정책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이동하는 인류(난민)의 대부분은 돌아갈 수 없는 또는 돌아가지 못하는 자국의 경계 또는 선진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버려지거나 수용소 생활을 통해 인간쓰레기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쓰레기 '판정'과 쓰레기 '재활용'의 경계

이때 난민인 인간쓰레기는 다행히 지역적 일국적 차원에서 재활용이 가능하게 된다면 노동 예비군으로서 인간쓰레기가 되는 삶은 잠시 보류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재활용 판정을 받지 못할 경우 인간쓰레기의 삶을 또 다시 영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항상 '잠재적' 인간쓰레기이다. 재활용 처리라도 받기 위해 일생을 여기에 투자한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려 스펙을 늘리고 학벌을 쌓아도 재활용 처리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고 그 처리 기준 또한 자의적이기에 결국 재활용 처리를 받지 못하면 그마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바우만은 한번 난민은 영원한 난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난민은 법 바깥에 있으며 법 자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한다. , ‘벌거벗은 생활뿐이다. 더불어 이중 구속 상태(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른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에 있다. 따라서 이 지상에서는 설 곳을 잃은 채, 존재하지 않는 곳, “비공간”, “유령마을에 내던져졌거나 바보들의 배에 실려 황무지로 내팽개쳐진다. 그렇기에 그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육화된 비확정적 존재이며, 불가촉의 존재이며,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즉,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런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더불어 이들은 평범하게 사는 것 이상으로 살아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연민과 증오'의 교차

이에 대한 잠재적 인간쓰레기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민과 증오뿐이다. 그러나 이 모순적 행위 또한 서로 협력하여 난민을 멀리 격리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바우만은 뼈아프게 지적한다. , '연민'을 기반으로 하는 인도주의적 손길에 대해서 고용된 사람이든 자원봉사자든 인도주의적 보조자들은 바로 배제의 사슬을 형성하는 중요한 고리가 아닌가?” “난민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 그들을 위험에서 멀리 떼놓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인종 청소자들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통렬하게 질문한다. 그리고 인도주의적 일꾼들은 적은 비용으로 난민을 배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요원이며 그들은 나머지 세상 사람들의 불안을 덜어 주거나 없애 주려고 마련된 장치, 우발적인 사고에 대한 공포와 절박감을 완화하는 동시에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방관자들의 양심의 가책까지 달려 주려고 마련된 장치가 아닌가라고 비판한다또 다른 한편, 우리들들의 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증오'는 잠재적 인간쓰레기를 양산하도록 만드는 1%, 즉 '비가시적인' 엘리트들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기에 도리어 정부의 선전에 휘둘려 망명 신청자들에 대한 적대에 복무한다고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선전과 그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를 생각해 보라.  따라서 내곽을 치고, 자신들까지 의지하며 엑스레이 촬영기와 폐쇄 회로 텔레비전 카메라를 설치한 울타리를 세우는 정책과, 입국 사무소 안에는 관리를 더 배치하고 밖에는 국경 감시원을 늘리는 정책, 입국 및 귀화 관련법의 그물을 더 촘촘하게 하는 정책, 엄격하게 감시하는 격리된 수용소에 난민을 가두는 정책, 이주민이 국경에 도착해 난민이나 망명자 신분을 요청할 기회를 얻기 전에 자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벽은 결국 잠재적 인간쓰레기인 자신을 막는 거대한 장벽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잠재적 인간쓰레기로 판정받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

아님 스스로 그 판을 걷어차고 새로운 삶을 고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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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는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자본-국가-민족(국민)의 삼위일체에 의해 운용되며 그 생명력이 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 쪽이 위기에 처해지면 다른 쪽이 보완하는 형태로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독립된 하나(자본 또는 국가 또는 민족)만을 문제삼아 극복하는 것은 잘못된 대응이라고 하며 그 대안을 어소시에이션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아래는 이 책의 결말이며 대안적 실천의 장인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정리글이다.  

어소시에이션은 3가지 교환양식 중 자본주의와 관련이 있는 상품교환을 중지시키기 위한 호수 또는 호혜를 기반으로 하는 교환양식이 중심인 공간이다. 특히 맑스의 공산당 선언에서와 같이 고진은 단순한 어소시에이션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호혜적 교환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과 함께 그런 공동체간의 호혜적 교환이 지속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품교환을 중지시키는 호수적(호혜적) 교환의 어소시에이션에 대해 고진은 생산자협동조합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우리가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것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이 둘의 연결을 주장하며 생산자협동조합뿐만 아니라 소비자협동조합도 상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동체의 공동체도 가능하지 않을까? 즉, 맑스가 말한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며 이럴 경우 자본주의에 의한 상품교환은 숨이 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생산자협동조합과 같은 어소시에이션을 확대 강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진은 프루동과 맑스의 경험을 통해 이에 대한 해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고진의 주장을 되돌아보면 알다시피 3가지 교환양식 중 또 문제가 되는 교환양식이 국가에 의한 약탈-재분배양식이다. 이 양식은 상품교환양식과 병행하여 서로 의존하고 있다. 서로 기대어 부양하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상품교환양식을 중지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에 의한 약탈-재분배양식도 중지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시도되었던 것이 우선 프루동과 같이 생산자협동조합과 같은 어소시에이션을 국가가 조장해야한다는 주장과 혁명을 통한 국가를 어소시에이션이 대체해야 한다는 맑스의 주장이다. 경제혁명과 함께 정치혁명이 동시에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물론 맑스는 정치혁명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한시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국가의 소멸이 진정한 해방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있다고 고진은 강조한다. 즉 국가란 다른 국가에 대해서 국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부적 투쟁을 통해 국가를 해체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했던 파리 꼬뮨과 소비에트를 생각하면 이점은 충분이 이해할 수 있다. 국가는 다른 국가와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혁명 이후에 해체되어야할, 맑스의 표현으로 보면 어소시에이션에 의해 대체되어야할 국가가 오히려 강화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이 지점이 고진의 독창적인 주장이며 이 지점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즉, 국가들을 제어할 수 있는 세계공화국의 건설을 주장한다.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상품교환이 중지되는 경제혁명 또한 내부적인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폐 때문이다. 화폐도 또한 국내적 유통에 사용되지만 이를 넘어서 국제적 결재수단이다. 어소시에이션 안에서의 대체화폐 또는 신용화폐만으로는 자본의 마지막 숨통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고진은 맑스를 넘어서고 있는 듯 보인다.

자! 이제 고진의 최종 결론을 정리해 보자.

고진의 결론은 조금 허망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이 필요한지는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하면 그걸 만들 수 있는지는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국가와 자본의 공생관계를 끝장내고자 하는 시도가 어떤 지점에서 실패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면서 우리들에게 실패를 딛고 또 다른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진의 해결은 경제 및 정치혁명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운동만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운동(“국가들을 ‘위로부터’ 封함으로써”)을 통한 글로벌 커뮤니티의 실현이다. 그 단초는 칸트의 영구평화를 위한 ‘국가연맹’ 구상에 기초하고 있이다. 이미 역사 속에서 2차례 전개된 예가 있다. 1차 세계대전과 관련하여 국제연맹이 2차 세계대전과 관련하여 국제연합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칸트에게서도 현실주의적 타협안에 지나지 않았기에 현실적으로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들을 위에서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여전히 미국을 비롯한 패권 국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이제 고진의 철학적 기초인 칸트의 평화론을 언급하지 않고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224~225쪽 요약) 현재 인류의 긴급한 과제를 세 가지로 집약됩니다. 전쟁, 환경파괴, 경제적 격차가 그것이죠. 이 세 가지는 분리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가지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죠. 더불어 이것들은 국가와 자본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렇다면 국가와 자본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것들은 일국 단위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국가에 대항하면 좋을까요?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서서히 국제연합에게 양도하도록 하여, 그것을 통해 국제연합을 강화 재편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국에서 일어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국가들을 ‘위로부터’ 봉(封)함으로써만 단절을 면합니다.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운동의 연계에 의해 새로운 교환양식에 기초한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서서히 실현됩니다. 물론 이 실현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 길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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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바르는 “보편적인 것들”을 모호한 보편성 또는 보편적인 것의 다의성으로 보낸데 왜냐하면 그것의 “대립물들”(특수한 것, 차이, 독특성)에 관한 우리의 논쟁이 어떤 일의적 준거에 기초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보편적인 것의 다의성을 있는 그대로, 보편적인 것에 구성적인 것으로 사고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기획은 우리로 하여금 한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이행하도록, 부분적으로나마 인지가능한 경로들을 구성하도록 해 주는 언표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게 이끌 것이며, 최종 분석에서는 이러한 질서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대응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선택들을 행하게 도와 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그는 라캉에게 영감을 얻어 3가지 용어법으로 구별하여 보편적인 것의 아포리아적 성격의 탐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먼저 세계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표상을 문제시하도록 이끌 현재[실재]로서의 보편적인 것,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의념들이 대칭적으로 대립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논쟁의 고유한 장소로서 허구로서의 보편적인 것, 그리고 상징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의 곤란들에 대한 검토로써 이상성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를 세 가지 보편적인 것을 구별한다.

Ⅰ.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은 발리바르에 의하면 ‘세계화’(또는 지구화)로 읽혀지는데 그는 이것을 세계라 불리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내지 단위들의 실제적 상호의존성이라는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상호의존성은 외연적 측면(제도와 기술의 전세계적 확장)뿐만 아니라 내포적 측면(개인에게의 직접적인 침투) 또한 갖는다. 따라서 “현실적” 보편성은 적어도 “근대 세계”의 출현 이후 이러한 현실은 현존하며,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근대성이라 부르는 것의 지평을 이룬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그렇다면 세계국가의 창설을 기획하거나 인류를 인간 해방과 관계 맺게 하는 동시에, 자연적이며 동시에 도덕적 형상으로서의 인류 자신과 관계 맺게 만드는 일을 기획하는, 보편성과 세계성의 유토피아적 형상들은 돌연 시대에 뒤진 것, 대상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역사의 종언”를 표시하지는 않으며 다만 “유토피아적 세계시민주의”의 종언, 즉 특정한 이론적 휴머니즘의 종언을 표시할 뿐이며 세계화가 달성시킨 것과 같은 인류의 통일은, 또한 현실적 보편성의 도래는, 유토피아가 자신의 전제나 즉각적 결과물로 표상하는 도덕적, 문화적 가치들의 작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다시 그는 질문을 던진다. 이제 더 이상 세계를 통일시키는 것 또는 세계를 현실적으로 실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문제인가? 발리바르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즉, “세계를 변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맑스적 도식(적대)과 홉스적 도식(“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통제)이 존재하나 현실적 보편성은 그렇게 적대와 통제가 가능한 단순하고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고 한다. 즉 현실적 보편성이 경제 구조들의 단일한 세계화로 환원되지 않아서, 그리고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세계적 규모에서의 규제의 중심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요원한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갈등들이 보여주는 복잡성에 대해 장악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둘 다 현실적 보편성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현실적 보편성(세계화, 지구화)은 새로운 복잡성(다의성)의 형상을 특징으로 하는데 주변부, 외부 지역들이 종속, 통합되어 구성되는 “중심”이 존재하며 정치적 지배도 불평등도 폐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와 빈곤, 권력과 무권력의 양극화가 전례 없이 수위에 도달하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더 이상 유일한 중심도, “중심적 지역”도 없이 오히려 하나의 네트워크가 있을 뿐이며 신식민지적 팽창과 중심 사회들의 조직 내로의 주변의 현상들과 집단들의 역침투의 불안정한 균형이 있을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소수자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소수자라는 개념은 법적 준거(미성년자)와 사회정치적 준거(약소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현실적 보편성이 소수자에 대해 상당히 양가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즉 현실적 보편성은 소수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역에 들어와 살던 자들과 전 세계로부터 새롭게 도착한 자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소수자”의 지위를 일반화시키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바로 소수자와 다수자 간의 구별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향을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점점 더 많은 수의 개인들과 집단들이 일의적인 종족적, 문화적, 언어적, 심지어 종교적 동일성들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소수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소수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점점 더 곤란해진다고 한다. 더 나아가 특정한 “다수자들”이 역으로 “소수자들”로 나타날 위험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며 이들의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동일성의 특징들은 절대적 특권을 갖지 않는다고도 주장된다.
이제 발리바르는 한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수자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반면, 안정적이거나 이론의 여지없는 다수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나는 현실적 보편성을 특징짓는 가장 폭발적인 모순에 이를 직접 연결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내적 배제의 독특한 체계의 틀 속에서 종족적 차이들과 사회적 불평등이 결합되는 것에 관해 논하고 싶다고 말이다. 발리바르는 이제 내적 배제가 외적 배제를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즉, 세계는 신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할 수 없는 “하류계급”이 세계적 규모로 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반면, 또 다른 극단에서는 관민족적인 특권 계급이 공통 언어와 이해의 형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인종주의의 새로운 형태는 외적 배제가 아니라 내적 배제에 준거한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현실적 보편성은 모든 개인이 적어도 잠재적으로 다른 모든 개인들과 교통하게 되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적 통신망들이 각 개인에게 다른 모든 개인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제공해주는 상황, 다른 모든 개인들을 자기와 “유사한” 개인들과 “다른” 개인들, 심지어 “다른 종에 속하는” 개인들의 이분법으로 투영시키는 상황이며 이제 점점 덜 분리되어 있는 동일성들이 또한 점점 더 화해불가능하게 되며, 덜 일의적인 동시에 더 적대적이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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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은 <<목적없는 수단>>의 <이 망명지에서, 이탈리아 일기 1992~4년>에서 이탈리아 사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탈리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글이라 단순한 대입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아감벤은 패배와 불명예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며 1994년 이탈리아 국회의원 선거의 좌파 패배를 언급한다. 이탈리아 좌파의 패배는 아감벤이 보기에 대립적인 우파와의 입장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스펙터클, 시장, 기업의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좌파나 우파 중 "누가 실천할지를 결정해준 것"이었기 때문에 불명예라고 강조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탈리아 국회의원 선거는 좌파나 우파나 모두 스펙터클한 자본, 국가,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 치뤄진 선거였고 여기서 좌파가 패배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아감벤은 지성의 완전한 부패를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진보주의를 기만적이고 보수주의적인 형태에 도달한 것으로 파악한다. 장-클로드 밀네르의 글을 인용하면서 더욱 그 이유를 명시하는데, 밀레르는 '진보주의'를 다음과 같은 타협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  

"혁명은 자본, 권력과 타협해야 하곤 했다. 마치 교회가 근대 세계와 협정을 맺어야 했듯이 말이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주의의 전략을 이끌던 좌우명이 그런 식으로 조금씩 형태를 갖춰갔다. 모든 것에 양보해야 한다. 반대파와 모든 것을 화해해야 한다. 지성은 텔레비전, 광고와 화해하고, 노동계급은 자본과 화해하며, 언론의 자유는 스펙터클한 국가와 화해하고, 환경은 산업발전과 화해하며, 과학은 의견과 화해하고, 민주주의는 투표기계와 화해하며, 죄의식, 개종은 기억, 충실성과 화해해야 한다."(148쪽)

이상과 같은 타협적인 전략이 좌파를 모든 영역에서 화해의 도구와 합의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선거에서의 패배와 더불어 우파가 별 어려움 없이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구와 합의를 그저 사용하면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패배가 아니라 불명예라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와 겹쳐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한국의 좌파는 밀네르를 인용한 아감벤의 주장처럼 '진보주의'는 아닌가? 한국의 좌파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니 무엇을 할 것인가? 스펙터클, 자본, 권력과의 타협 아니면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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