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 중인 인류>

 

난민의 탄생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발전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자본주의화(산업화)를 기반으로 양산된 잉여 인간(인간쓰레기)’를 비자본주의적 토지에 버림(식민제국주의)으로써 성장했다. 그러한 시스템은 여러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에서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더 이상 비자본주의적인 토지가 존재하지 않게 되자 문제에 봉착했다. 더불어 후발 자본주의 국가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화(산업화)를 통한 잉여 인간의 양산이 대량으로 발생하게 되었고 인간쓰레기의 양산이 확대되면서 전지구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난민의 발생의 역사가 이렇게 시작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 난민 발생의 역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과 이렇게 닮아 있을까? 결국 난민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에 양산되는 인간쓰레기인 난민은 크게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배지로써 작동한 비자본주의적 토지의 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발생했으며 더불어 전개된 정치적, 경제적 내전을 비롯한 전쟁, 학살 등으로 인하여 대량으로 발생되었다. 이 내전, 전쟁 또한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측면이 강하다. 이에 대해 전지구적 자본주의 하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는 그들이 이용하며 활용하고 처리했던 쓰레기 재활용쓰레기 처리를 위한 정책을 점차 줄이는 대신 역류하는 인간쓰레기의 이동을 막기 위한 봉쇄 정책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이동하는 인류(난민)의 대부분은 돌아갈 수 없는 또는 돌아가지 못하는 자국의 경계 또는 선진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버려지거나 수용소 생활을 통해 인간쓰레기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쓰레기 '판정'과 쓰레기 '재활용'의 경계

이때 난민인 인간쓰레기는 다행히 지역적 일국적 차원에서 재활용이 가능하게 된다면 노동 예비군으로서 인간쓰레기가 되는 삶은 잠시 보류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재활용 판정을 받지 못할 경우 인간쓰레기의 삶을 또 다시 영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항상 '잠재적' 인간쓰레기이다. 재활용 처리라도 받기 위해 일생을 여기에 투자한다. 엄청난 노력을 기울려 스펙을 늘리고 학벌을 쌓아도 재활용 처리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고 그 처리 기준 또한 자의적이기에 결국 재활용 처리를 받지 못하면 그마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바우만은 한번 난민은 영원한 난민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난민은 법 바깥에 있으며 법 자체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한다. , ‘벌거벗은 생활뿐이다. 더불어 이중 구속 상태(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다른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에 있다. 따라서 이 지상에서는 설 곳을 잃은 채, 존재하지 않는 곳, “비공간”, “유령마을에 내던져졌거나 바보들의 배에 실려 황무지로 내팽개쳐진다. 그렇기에 그들은 존재하지만 존재할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이며, 육화된 비확정적 존재이며, 불가촉의 존재이며, 불가사의한 존재이며,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즉,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런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더불어 이들은 평범하게 사는 것 이상으로 살아야만 비로소 생존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연민과 증오'의 교차

이에 대한 잠재적 인간쓰레기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민과 증오뿐이다. 그러나 이 모순적 행위 또한 서로 협력하여 난민을 멀리 격리시키는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고 바우만은 뼈아프게 지적한다. , '연민'을 기반으로 하는 인도주의적 손길에 대해서 고용된 사람이든 자원봉사자든 인도주의적 보조자들은 바로 배제의 사슬을 형성하는 중요한 고리가 아닌가?” “난민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 그들을 위험에서 멀리 떼놓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인종 청소자들을 돕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통렬하게 질문한다. 그리고 인도주의적 일꾼들은 적은 비용으로 난민을 배제하는 일을 담당하는 요원이며 그들은 나머지 세상 사람들의 불안을 덜어 주거나 없애 주려고 마련된 장치, 우발적인 사고에 대한 공포와 절박감을 완화하는 동시에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방관자들의 양심의 가책까지 달려 주려고 마련된 장치가 아닌가라고 비판한다또 다른 한편, 우리들들의 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증오'는 잠재적 인간쓰레기를 양산하도록 만드는 1%, 즉 '비가시적인' 엘리트들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기에 도리어 정부의 선전에 휘둘려 망명 신청자들에 대한 적대에 복무한다고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선전과 그에 대한 우리들의 분노를 생각해 보라.  따라서 내곽을 치고, 자신들까지 의지하며 엑스레이 촬영기와 폐쇄 회로 텔레비전 카메라를 설치한 울타리를 세우는 정책과, 입국 사무소 안에는 관리를 더 배치하고 밖에는 국경 감시원을 늘리는 정책, 입국 및 귀화 관련법의 그물을 더 촘촘하게 하는 정책, 엄격하게 감시하는 격리된 수용소에 난민을 가두는 정책, 이주민이 국경에 도착해 난민이나 망명자 신분을 요청할 기회를 얻기 전에 자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벽은 결국 잠재적 인간쓰레기인 자신을 막는 거대한 장벽임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잠재적 인간쓰레기로 판정받지 않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

아님 스스로 그 판을 걷어차고 새로운 삶을 고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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