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바르는 “보편적인 것들”을 모호한 보편성 또는 보편적인 것의 다의성으로 보낸데 왜냐하면 그것의 “대립물들”(특수한 것, 차이, 독특성)에 관한 우리의 논쟁이 어떤 일의적 준거에 기초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보편적인 것의 다의성을 있는 그대로, 보편적인 것에 구성적인 것으로 사고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기획은 우리로 하여금 한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이행하도록, 부분적으로나마 인지가능한 경로들을 구성하도록 해 주는 언표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게 이끌 것이며, 최종 분석에서는 이러한 질서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대응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선택들을 행하게 도와 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그는 라캉에게 영감을 얻어 3가지 용어법으로 구별하여 보편적인 것의 아포리아적 성격의 탐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먼저 세계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표상을 문제시하도록 이끌 현재[실재]로서의 보편적인 것,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의념들이 대칭적으로 대립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논쟁의 고유한 장소로서 허구로서의 보편적인 것, 그리고 상징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의 곤란들에 대한 검토로써 이상성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를 세 가지 보편적인 것을 구별한다.

Ⅰ.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은 발리바르에 의하면 ‘세계화’(또는 지구화)로 읽혀지는데 그는 이것을 세계라 불리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내지 단위들의 실제적 상호의존성이라는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상호의존성은 외연적 측면(제도와 기술의 전세계적 확장)뿐만 아니라 내포적 측면(개인에게의 직접적인 침투) 또한 갖는다. 따라서 “현실적” 보편성은 적어도 “근대 세계”의 출현 이후 이러한 현실은 현존하며,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근대성이라 부르는 것의 지평을 이룬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그렇다면 세계국가의 창설을 기획하거나 인류를 인간 해방과 관계 맺게 하는 동시에, 자연적이며 동시에 도덕적 형상으로서의 인류 자신과 관계 맺게 만드는 일을 기획하는, 보편성과 세계성의 유토피아적 형상들은 돌연 시대에 뒤진 것, 대상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역사의 종언”를 표시하지는 않으며 다만 “유토피아적 세계시민주의”의 종언, 즉 특정한 이론적 휴머니즘의 종언을 표시할 뿐이며 세계화가 달성시킨 것과 같은 인류의 통일은, 또한 현실적 보편성의 도래는, 유토피아가 자신의 전제나 즉각적 결과물로 표상하는 도덕적, 문화적 가치들의 작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다시 그는 질문을 던진다. 이제 더 이상 세계를 통일시키는 것 또는 세계를 현실적으로 실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문제인가? 발리바르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즉, “세계를 변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맑스적 도식(적대)과 홉스적 도식(“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통제)이 존재하나 현실적 보편성은 그렇게 적대와 통제가 가능한 단순하고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고 한다. 즉 현실적 보편성이 경제 구조들의 단일한 세계화로 환원되지 않아서, 그리고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세계적 규모에서의 규제의 중심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요원한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갈등들이 보여주는 복잡성에 대해 장악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둘 다 현실적 보편성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현실적 보편성(세계화, 지구화)은 새로운 복잡성(다의성)의 형상을 특징으로 하는데 주변부, 외부 지역들이 종속, 통합되어 구성되는 “중심”이 존재하며 정치적 지배도 불평등도 폐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와 빈곤, 권력과 무권력의 양극화가 전례 없이 수위에 도달하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더 이상 유일한 중심도, “중심적 지역”도 없이 오히려 하나의 네트워크가 있을 뿐이며 신식민지적 팽창과 중심 사회들의 조직 내로의 주변의 현상들과 집단들의 역침투의 불안정한 균형이 있을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소수자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소수자라는 개념은 법적 준거(미성년자)와 사회정치적 준거(약소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현실적 보편성이 소수자에 대해 상당히 양가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즉 현실적 보편성은 소수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역에 들어와 살던 자들과 전 세계로부터 새롭게 도착한 자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소수자”의 지위를 일반화시키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바로 소수자와 다수자 간의 구별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향을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점점 더 많은 수의 개인들과 집단들이 일의적인 종족적, 문화적, 언어적, 심지어 종교적 동일성들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소수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소수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점점 더 곤란해진다고 한다. 더 나아가 특정한 “다수자들”이 역으로 “소수자들”로 나타날 위험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며 이들의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동일성의 특징들은 절대적 특권을 갖지 않는다고도 주장된다.
이제 발리바르는 한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수자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반면, 안정적이거나 이론의 여지없는 다수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나는 현실적 보편성을 특징짓는 가장 폭발적인 모순에 이를 직접 연결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내적 배제의 독특한 체계의 틀 속에서 종족적 차이들과 사회적 불평등이 결합되는 것에 관해 논하고 싶다고 말이다. 발리바르는 이제 내적 배제가 외적 배제를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즉, 세계는 신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할 수 없는 “하류계급”이 세계적 규모로 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반면, 또 다른 극단에서는 관민족적인 특권 계급이 공통 언어와 이해의 형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인종주의의 새로운 형태는 외적 배제가 아니라 내적 배제에 준거한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현실적 보편성은 모든 개인이 적어도 잠재적으로 다른 모든 개인들과 교통하게 되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적 통신망들이 각 개인에게 다른 모든 개인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제공해주는 상황, 다른 모든 개인들을 자기와 “유사한” 개인들과 “다른” 개인들, 심지어 “다른 종에 속하는” 개인들의 이분법으로 투영시키는 상황이며 이제 점점 덜 분리되어 있는 동일성들이 또한 점점 더 화해불가능하게 되며, 덜 일의적인 동시에 더 적대적이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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