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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2disc) - 할인행사
프란시스 로렌스 감독, 키아누 리브스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비디오 가게에 갔다. 이것도 보고 싶고 저것도 보고 싶고, 보고 싶은 영화가 참 많았는데 어째 하나같이 빈 케이스뿐이다. 한참을 방황하다 빈손으로 나오기 억울했던 난 결국 바로 이 영화 <콘스탄틴>을 들고 나왔다.
사실 난 공포영화를 싫어한다. 좋지 않은 여운이 너무 오래 가는데다가 시간이 지나서 무서운 장면들을 내가 잊어먹었다고 해도 이미 내 머리나 마음이 받은 충격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건 단지 슬픈 영화를 보고 마음이 아픈 것과는 다르게 영혼을 상하게 만들어서 보지 않기 전으로 돌릴 수 없다. 그럼에도 <콘스탄틴>을 들고 나온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배우들 중 몇 안 되는 잘생긴 배우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하는데다가 영화의 소재가 ‘퇴마’이기 때문이다. 퇴마는 내가 좋아하는 소재인데다가 선과 악의 구조가 분명하고 끝에는 꼭 등장인물들 중 한 명의 ‘희생’이라는 부제를 넣어서 단순히 사람을 죽고 죽이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리고 그 ‘희생’이 <콘스탄틴>에서도 역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다만 주인공이 다른 영화와는 다르게 ‘퇴마’라는 일에 조금 덜 투철(?)하고 주인공이 보여준 ‘희생’이 다른 영화와는 성질과 동기가 좀 많이 다르다. 하지만 그 내용을 얘기하면 영화에서의 결말을 얘기하는 것과 같기에 영화의 줄거리나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점은 피하는 게 좋겠다.
<콘스탄틴>을 보고 먼저 느낀 건 장르가 장르인 만큼 DVD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질이나 음향도 생생하고 그래픽도 어색하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 악의 세계인 불의 붉은 빛과 촉매의 역할을 하는 물의 투명한 특성을 잘 매치해서 적당히 음침하고 무서운 분위기를 촌스럽지 않게 표현했다. 특이한 점은 공포영화지만 무서운 장면이나 소름이 돋을 정도의 긴장감, 순간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이 영화 <콘스탄틴>에는 없다. 그런 재미를 기대하고 영화를 본다면 좀 실망할 것이다. 반대로 난 영화의 처음부터 무서운 장면이 나오자 괜히 빌렸다 싶었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반대로 건진 게 더 많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솔직히 <콘스탄틴>은 공포 영화를 못 보는 내가 봐서도 별로 무섭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이유가 쉽게 짐작이 가겠지만 이건 앞에서 언급한 주인공의 캐릭터와도 연관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선한 쪽도 악한 쪽도 너무 싱거워서 부딪히는 매력이 감소한 것. 어쩌면 주인공 안에 진정한 ‘선’ 이 없으니 영화 속에도 ‘악’ 다운 ‘악’이 없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마지막에 영화에서 얘기하는 메시지를 생각해 볼 때 이 점은 정말 아쉬운 점이다.
무섭지도 않고 주인공도 약한 <콘스탄틴>에서 뭘 건질까 싶지만 이 영화에는 정말 중요한 메시지 하나가 있다. 몇 개 안되는 간단한 문장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성경책이 갖고 있는 주제의 요약이기도 하고 나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물음이기도 하다. 바로 인간과 선택이다.
영화에서 가브리엘이 말한다.
“너희는 크나 큰 은총을 받았어. 주의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살인마든 강간범이든 회개만 하면 주의 품에 안길 수 있지. 우주만물 중 인간만이 그런 큰 혜택을 받았어.”
대사를 하는 가브리엘을 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대천사 가브리엘조차 인간을 질투하는 것처럼 얘기한다. 마치 영화<트로이>에서 브래드 피트가 신들은 실상 인간을 질투한다고 말하는 부분과 묘하게 비슷하기도 하다.
어쨌든 이 말은 사실이다. 사실 종교를 떠나서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살고 있는 생명체는 세상에 인간밖에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의지를 갖고 선택할 수 있으면 또 자신이 선택한 것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 인간만이 갖는 이 혜택이 얼마나 큰가하면 이 선택 안에는 신도 들어가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엔 종교의 자유가 있다. 이는 헌법에도 명시된 것이다. 어떤 종교든지 신이 창조주이고 인간이 피조물이거늘 피조물이 창조주를 선택하다니! 이보다 더 큰 선택권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가브리엘의 말처럼 바로 이 선택이 완전히 인간의 몫이어서 항상 바른 길로만 갈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어렵고 중대한 결정이라도 신조차 나를 대신해서 나에게 어떠한 것이든 어떠한 방법으로든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이건 나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결과도 책임져야할 의무이다. 그래서 세상을 사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고 만약에 무엇이든지 가야할 길만을 날 대신해서 알려주는 신이 있다면 우리는 그 신의 꼭두각시일 뿐 그 신이 사랑하는 주체인 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비록 내가 신이 보여준 최선의 길을 알고서도 내가 다른 것을 선택했을 때조차 날 버리지 않고 그 의사를 존중받을 때 비로소 난 인형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창조주조차 이렇듯 소중히 아끼고 존중하는 ‘나’이고 ‘너’인데 세상에 사람만큼 귀한 것이 또 있겠는가!
그렇지만 역시 영화의 마지막에 콘스탄틴이 얘기한 것처럼 신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건 마치 내가 하늘을 보는 것과 하늘이 날 보는 것이 같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할 것 같다. 난 눈에 보이는 하늘만 보이겠지만 하늘은 나와 다른 것과 모든 것이 다 보일 것이다. 여기서 콘스탄틴은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고 했지만 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선택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어떠한 것이든 내가 선택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사실 나도 나의 신을 생각 할 때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건 나의 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걸 주는데도 받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면 주는 쪽은 오죽 답답하겠는가! 그럼에도 난 나의 신이 날 사랑한다는 걸 알기에 나도 사랑하기로 선택한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사랑할 수는 있기에…….
사랑하기로 ……. 자신조차 선택 안에 넣으신 ....나의 조물주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