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 길 내는 여자 서명숙의 올레 스피릿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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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제주도 가는 항공권을 검색해 보곤 합니다. 올레를 다녀온 이후, 올레 예찬을 입이 닳도록, 온  힘을 다해 떠들어도 가보지 못한 이는, 그냥 제주도 관광쯤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너무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제가 느꼈던 감동을, 그들에게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을 테지요.

올해, 천안함 생존자로 제대한 제 동생은 작년 서명숙 씨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 책을 휴가 때 나와서 빌려 갔었습니다.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았었고, 그녀석도 제대 후에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것이었겠죠. 그래서 낼름 책을 빼어 빌려줬습니다(참고로, 제 동생은 22살 이전까지 책은 장식용 쯤으로 생각했고, 책을 많이 읽는 누나는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사는 이라고 느꼈던 아이입니다). 배를 타는 동안에는 근무 시간 외에 시간이 많이 남으니, 게다가 말년 병장이니 책을 읽을 시간이 많았겠지요. 그렇게 서명숙 씨의 제주 걷기 여행에서 본 올레에 흠뻑 빠진 제 동생은 제대를 하면 동기들과 올레를 걷기로 약속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제대, 그리고 천안함 침몰. 동생의 동기들은 모두 전사했고, 동생은 홀로 남아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거기가 어땠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 않아도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말이죠. 저도 그랬습니다. 직작생활에서 피폐해진 제가, 그 책 한 권을 읽고, 제주도로 떠났고, 자연을 자연으로 보지 않고, 나의 고통을 잊겠다는 욕심에 기를 쓰고 걸었던 길이었으니까요. 3코스, 4코스를 외로이 걷고 다리가 끊어지는 고통을 얻었을 때는 옆에 눈부시게 출렁이는 바다가 야속할 지경이었으니까요.

5코스는 버리고, 같은 처지의 여인들을 만나 6코스를 향하던 날. 그들에게 폐가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절뚝거리면서도 폭설이 내리는 그 날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고통은 또 다른 고통을 낳았지만, 포기하고 떠나버리기엔 제게 너무 많은 것을 일꺠워줬던 곳이 올레입니다.

굽혀지지 않는 다리 때문에 울고, 미친듯이 내린 폭설 때문에 야속했지만 7코스를 걷는 날, 느낀 감동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 저는 다시 시작할 힘을 얻었지요. 예전엔 아케이드 상가로 불렸던 그곳에서 족발과 감귤 막걸리를 사들고 돌아온 게스트 하우스에서 처음 만남 부산 처녀와 끝없는 수다를 떠들었지요. 헤어짐과 만남 속에서 깨닫고, 정리했던 많은 일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납니다.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넘나들며 버텼던 그 시간들 속에는 올레가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8개월을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 잊었다는 표현보다, 모른척 했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생각하면 떠나고 싶을 까봐. 언제든 달려가고 싶을 까봐. 그냥 모른척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올레 두 번째 이야기가 나왔네요. 이 책은 말이죠. 강릉으로 취재를 떠나던 날 읽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찔끔찔끔 삼켰고, 울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고마워서 말이죠. 

서명숙 씨, 아니 서명숙 선생님이 아니, 올레를 만든 올레를 갈고 닦은 그 사람들이 너무 고마워서 말이죠. 어떤 사연을 가진 이가 걷는지도 모르면서, 누가 이 길을 고맙게 생각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뚝심 하나로 길을 내고 사람을 받아들인 그들이 너무 고마워서 말이죠. 이제는 나만 아는 길이 아닌 모두가 아는 길이 되었었어도, 노여워 하거나 화내거나 시기하는 게 아니어서 말이죠. 올레를 지나는 모든 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말이죠.

사연이 없는 인생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만키로 올레를 만들고, 지키는 이들도 제각각 인생의 사연을 갖고 있답니다. 그래서 더 소중합니다. 그들의 사연이 없었다면, 올레가 이렇게 더 소중해지진 않았을 테죠. 여인들의 쉼터로, 휴식처로, 치유길로 작용하지 않았을 테죠.

누군가를 위해서 살았던 어머니들이 올레를 찾는 걸 환영합니다.
자신의 길을 잃은 이들이 올레를 찾는 걸 환영합니다.
의심하는 이들이 올레를 찾는 걸 환영합니다.
제주를 찾는 누구나 올레를 찾는 걸 환영합니다.

올레가 있어서, 버스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들도, 택시 아저씨들도 행복해졌다고 합니다. 사람을 그리워하던 할망들도 즐거워졌다고 합니다. 황폐한 곳에 산다고 생각했던 도시인들도 길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되지 않았습니까? 올레에 가는 이유. 올레를 걷는 이유.

빨리 간다고 멋지다고 하지 않습니다. 느리게 간다고 바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길은 그곳에 있고, 걷는 이 마음대로 입니다. 그 길 옆에는 바다도 있고, 함께 걷는 이름모를 사람들도 있고, 하늘도, 바람도 있습니다.

죽을 결심을 했는데, 살고 가는 이. 헤어질 결심을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는 이. 떠날 결심을 하고 왔는데 떠나지 못하는 이. 올레의 힘은 무엇일까요? 궁금하다면, 가보세요. 그리고 서명숙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코끝이 찡해오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사연들이 줄줄이 쏟아집니다. 올레를 올레로만 보지 못하게 되는 사연들 때문에 올레가 더 소중해집니다. 

올레길에서 스탬프를 찍을 때를 기억합니다. 아픈 다리를 질질 끌고, 지나치지 못한 스탬프 찍는 곳. 내가 했다는 것을 무엇이라도 증명해줬으면 싶었습니다. 속물이라고, 쓸데없고 괜한 허세라고 해도 좋았습니다. 눈 쌓인 스탬프를 당겨 하얀 올레 패스포트에 찍는 쾌감은 느껴보지 않은 이는 모르겠죠.

아직도 길을 내고 있는 여자. 서명숙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배낭을 짊어지고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떠나는 순간, 그리운 길이 될 겁니다. 그 길 사이사이 숨겨진 보물을 찾고, 가슴에 간직하게 되고 그 기억을 떠올리며 힘을 얻게 될 겁니다.

그녀의 말처럼. 꼬닥꼬닥 걸어가는 그 길에는 당신이 예상하지 못한, 상상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숨어 있을 겁니다. 아! 잠깐, 떠나고자 하신다면 꼭!!! 서명숙 씨의 책을 먼저 읽어보세요. 그 길을 걷는 감동이 두배, 세배, 아니 열배쯤 커질 테니까요.

 


단단히 묶인, 그 반가운 리본은 길 잃은 나그네에게 그늘을 내주듯 편한 흔들림이다.

 



새도, 바람도, 하늘도 걷는다. 사람이 걷는 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빛을 , 퍼져나오는 빛을 , 구름 뒤에 숨었던 빛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마지막 날의 만찬,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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