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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잡상인 - 2009 제3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우승미 지음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누가 누구에게 삼류인생이라고 하는가? 팍팍하고 지리멸렬한 삶 속에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방치하는 사람이야말로 삼류인생, 막장인생이 아닐까?
방송국에서 퇴출당하고, 극단에서도 뚜렷한 성과 없이 밀린 전직 개그맨 철이는 청년 백수다. 방구들 짊어지고 만화책이나 보고 비디오나 보면서 시간 보내기 일쑤. 그의 삶은 이렇다 할 전망도 희망도 없어 보인다. 화려한 미모를 자랑하는 왕년의 여배우 조지아 킴 여사, 철이를 키운 할머니. 집에서 빈둥대는 철이를 보다 못해 지하철 잡상인계의 전설 미스터 리에게 보내버린다. 스승으로 삼고 지하철계에서 돈 좀 벌며 인생을 살아보라고. 지하철에서 칫솔을 팔다가 만나게 된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미혼모 수지, 그녀를 만난 철이의 인생은 살짝 바뀌기 시작한다. 수지의 동생 효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를 사랑하며 한집에서 복닥거리는 지효. 이들의 삶은 평탄해 보이지 않는다.
남들에게 갑갑해 보이는 일상이라도 그들만의 법칙과 행복이 숨어 있다. 철이는 느리지만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유쾌한 변화 말이다.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스타 개그맨이 된다거나 얼토당토 않게 열심히 살아가는 청년이 된 건 아니지만, 타인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행복을 찾아가는 행로를 시작한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미혼모 수지와 소통하게 되면서, 그는 조금씩 자신을 바꿔나간다.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철이 씨, 전에 나한테 물었지. 내가 효철 씨 사랑하는 거 맞느냐고, 혹시 동정하는 거 아니냐고."
"그랬지."
"동정이 나쁜 거야?"
"그럼. 나쁜 거지."
"어째서?"
"동정은 내가 그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거잖아. 너는 많이 아프구나, 나는 안 아픈데, 참 안됐다 얘. 그러니까 나쁜 거지. 아무리 같이 아파하는 척해도 고통은 공유할 수 없어. 고통은 온전히 당사자의 몫이라고. 사실은, 얘는 정말 불쌍해, 그래도 나는 얘보다는 덜 불쌍해서 다행이야, 그러면서 자기 위안을 느낀다고. 그게 동정의 본질이야."
"사랑은?"
"사랑은 서로 동등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거지. 너, 나 좋아해? 나도 너 좋아해, 이렇게 시작되는 게 사랑이잖아."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아. 사랑이라는 것, 늘 동정과 연민에서 시작돼. 누구에게나 삶은 고달픈 거잖아. 상대방의 고달픔을 보고, 너도 힘들구나, 너도 나처럼 아프구나. 그렇게 생겨나는 감정이 동정이고 연민이야. 타인에 대한 배려든 사랑이든 희생이든 모두 동정과 연민의 바탕 위에 있어. 그러니까, 동정이든 연민이든 사랑이든 이름만 다를 뿐 결국 다 같은 거야. 철이 씨, 사람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위에 설 수 없어. 우리는 모두 다 아래에 있으니까.
효철을 사랑하는 것을 동정이라고 여겼던 철이는 지효의 말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수지를 사랑하게 되고, 수지의 아이를 자기가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이고 의문이 들지만, 결국 사랑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된 철이. 자신이 짊어져야할 그리고 책임지고 싶은 것들이 생기면서, 철이는 나태와 무력함을 벗어던지고 서서히 허물을 벗고 그의 삶을 위해 노력을 시작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등장 인물 모두가 자신만의 상처가 있다. 하지만, 심각하지 않다. 그 상처 때문에 지금의 삶이 불행하다거나, 상처의 그늘에 묻혀 산다거나 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조지아 킴 여사가 왜 부모도 버린 자신을 거두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슴에 품으며 살아온 철이는, 그녀가 수지를 보자마자 만삭의 배를 어루만지며 '탐스러운 달' 같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때 철이는 이해와 배려와 사랑을 느낀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는 수지의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것과 연결되고 그것은 자신의 상처와 고통의 치유와 연결된다. 그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없는 개그맨이었던 것은 그의 상처에도 관련이 있었던 듯싶다.
그는 이제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생겼고, 관계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감춰두었던 상처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간다. 행복을 찾는 변화가 급격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 속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분명하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누군가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변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