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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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예술가란 독창적이고자 하는 격렬한 욕망에 항상 몸을 불사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들은 이 정체 모를 욕망에 사로잡혀, 시대와 인생에 대한 따분하고 판에 박은 상식을 돌파하려고 쉬지 않고 싸운다. 돌파에 성공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다수는 분수에 맞지 않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파멸하고 만다.
잘 살지 못하는 예술가한테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착하다'거나 '모범적'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예컨대 사임 수틴(Chaim Soutine)은 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화가의 한 사람인데, 시민적 도덕의 기분으로 보면 빈말로라도 모범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잘 산다'는 것은, 수틴이 그러했듯이, 무엇보다도 창조의 욕망에 충실하게 산다는 뜻이다.   -  12p 

 
서경식의 삶의 배경은, 예술작품을 보는 시선에도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일까?
쫓겨야 했던 예술가들, 사회로부터 억압받아야 했던 예술가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었던 예술가들. 청춘의 사신(死神)에 소개된 작품과 화가들은 뾰족한 고통에 갇혀 그림을 그리다 죽어가기도 하고, 사회의 이념에 거부당한 채 도망 다니거나 숨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광기 어리고 반항하며 고통받고, 힘에 겨워 했던 화가들의 그림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화가에 대한 서경식의 집약된 설명은, 그 느낌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 책에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서양 작가들에 집중한 많은 칼럼, 미술 이야기들과 달리 그가 일본에 적(籍)을 두고 살았고, 마이니찌 신문에서 연재하던 글이었기 때문인지 일본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
사에끼 유우조우의 <심바시 풍경>이나 이께다 요오손 <재화의 흔적>은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화조풍월(花鳥風月)만을 주제로 삼았던 시대에서 일본화의 울타리를 깨뜨리며 어두운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그들의 그림에서 매력을 느꼈다. 시대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그렸던 일본 화가들의 의지와 고집이 나를 사로잡았다.

앞서나갔던 그림들, 현실을 반영했던 그림들은 20세기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나치즘이 판치던 시절, 많은 작가는 퇴폐화가로 분류되며 붓과 그림을 팔 수 있는 통로마저 빼앗겼다. 불행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던 예술가들은 극심한 스트레스와 심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서경식이 소개하는 그림들은 그래서 더욱 강렬하고, 충격적이다.  오토 딕스의 <늙은 연인들>, <일곱 가지 대죄>는 진실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표현한다. 그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해직을 당하고 제명을 당하면서도 당당히 맞섰고, 망명을 선택하지 않고 전선으로 보내지기까지 한다.

로비스 코린트,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파울 클레, 에밀 놀데...
모두 동시대에서는 억압당하고 조롱당한다.
또 사임 수틴이나 샤갈 등 망명자, 디아스포라들의 그림을 설명하며 느껴지는 그의 애착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동병상련, 동질감을 화가에게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많은 그림을 직접 보러 다녔다. 그의 눈 앞에 그림들은 그에게 많은 메시지와 이야기를 던져준 듯 보인다. 그는 그림을 그린 '사람'을 잘 알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글로 전달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뼈 아픈 역사적 진실과 독재, 식민지라는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상황을 이해하며 작가를 깊게 들여다 보았다.

대량학살, 세계대전, 난민의 시대인 20세기는 참혹했고 메말라 있었다.

청춘의 사신(死神). 언제나 죽음은 근접해 있었고, 언제든 죽을 수도 있었던 시기였다. 고통과 악몽 속에서 자신을 추스르기도 급급했던 시기에 예술가들은 열정을 표현했고, 그 열정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그 감정과 상황들은 그림의 형태로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서경식은 이 모든 예술가들이 그에게 창(窓)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어둡고 답답한 삶에 창(窓)이  되고 있다고. 예술가들의 창(窓)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 그림들이 지금 우리에게 창(窓)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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