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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평점 :
프랑스 문학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
우연히 만난 그의 산문집을 읽으며, 웃고, 생각하고, 깨달았다. 그의 인생철학이 담긴 위트 있는 문장들은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어린 시절 철학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던 투르니에는 푸코, 질 들뢰즈와 함께 그룹을 만들기도 했단다. 그래서인지, 사물, 혹은 사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매우 철학적이다.
메모하는 것을 즐겨한다는 그는, 내면이 아닌 외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생각을 메모해 책으로 묶었다. 그 외면의 일들은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결국 내면의 의식이 발현되는 것이다. 어떤 사건과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들은 그의 생각이 덧입혀져 다른 사고로 발전한다.
병원에 갔더니 심장이 커지고 있다는 말에(미셸 투르니에는 심장이 좋지 않다) 이런 글을 남겼다.
심장이 그렇게 커졌다 이 말이지! 그런데 사실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암으로 인한 더러운 죽음과 심장으로 인한 깨끗한 죽음 말이다. 그렇다면 내겐 깨끗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니 좋은 일 같다. - 14p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도, 긍정적인 그의 내면이 덧입혀지니 우울했던 외면이 유쾌하게 바뀐다. 외면일기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그의 유쾌함이다.
나는 새해의 시작을 구실 삼아 그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몇몇 친구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 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 19p
아마도 새해가 되어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다가 느낀 그의 생각이리라.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잊고 있는 사실들, 사건들은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도록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밖으로 노출된 빙산의 일각과도 같은 얼굴은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한다. 다른 여러 기관들과 더불어 의복 속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덩어리인 몸은 빙산의 잠겨 있는 부분이다. 그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 97p
그는 혹, 표정으로 말로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비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얼굴은 빙산의 일각이고 몸이 빙산의 잠겨 있는 부분이라니. 어찌 보면 정확한 생각이지만, 우리는 쉽게 잊고 속는다. 결국, 빙산의 일각만 보고 홀리는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비꼼이리라~
떠돌이냐 붙박이냐? 인간의 근본적인 구별.
붙박이 농사꾼 카인과 항상 갈등관계에 있는 떠돌이 목동 아벨 혹은 붙박이 나무와 떠돌이 카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카누를 만들자면 나무를 베어야 하니 말이다. - 238p
외면일기를 읽다 보면 이런 글 만나게 된다. 생각하고 또 돌려 생각하고, 몇 번 생각해야 하는 글. 그의 머릿속에 들여다 보지는 못하지만, 가끔 감동한다.
이 외에도 그의 일기 속에서 유쾌한 유머와 재밌는 상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짧지만, 간략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요점이 확실히 정리된 일기. 이런 일기를 훔쳐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결국 일어나는 사건과 일상이 나의 내면을 재구성할 힘을 준다. 아! 감동이다!
이제부터 나의 외면도 내면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미셸 투르니에의 발끝도 못 따라가겠지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