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 제14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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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극한의 슬픔이 찾아온다면, 참을 수 없는 감정의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 누군가가 길을 떠난다. 눈먼 강아지 '와조'와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는 길을 떠난다. 모텔을 전전한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번호로 기억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길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전한다. 연필로 꾹꾹 감정을 눌러담고, 일기를 쓰듯 말한다. 고시원에서 생활 중이던 367번 어머니의 불륜을 알게 된 239번 여고생, 자살을 하려 했던 이를 구하고 자신이 목매 죽으려 했던 운동화끈을 바꿔 맸던 32번,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편지를 보낸다. 비상한 자신의 기억력이 주소를 기억하고 사람을 기억할 때는 아주 유용하다. 그는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린다. 여행을 떠나 왔으니, 그의 답장을 기다려주는 이는 따로 있다. 그의 친구. 아침마다 그를 깨워 우편물이 왔는지 확인하지만, 아무도 편지하지 않았다. 그는 한 장의 답장이라도 도착한다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아무도 편지하지 않아 3년 동안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말더듬이였던 그는, 타인의 앞에 나서서 매끄럽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 속에서 훈련한 그만의 치료 방법. 말을 심하게 더듬어 모든 게 자신 없었던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의 강요에 못 이겨 우편배달부를 하게 된다. 우편배달부는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에, 엄마와 가족들이 그의 직업을 결정했다. 형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직업이니 멋지다고 추천했지만, 소식이란 나쁜 것, 좋은 것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즐거움만을 전해주진 않았다. 아버지는 발명가였다.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마다 발명을 했고, 발명품을 소중히 여겼다. 장난감 가게를 운영했는데, 아버지는 형이나 여동생보다 그가 아버지의 장난감 가게를 이어 운영해주길 바랐다. 여동생은 공부도 잘했고 똘똘한 아이였지만, 외모로 판단하는 사회에 질려 얼굴을 고쳐나갔다. 결국,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도 사람들은 얼굴만 예쁜 사람만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엄마, 아빠, 형, 동생에게도 편지를 쓴다.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담아 멀리멀리 보낸다. 그의 집으로.

모텔을 전전하며, 뚜벅이 여행을 하던 그에게 나타난 751번. 그녀는 자신이 쓴 소설을 팔러 다니는 특이한 사람이다. 지갑을 소매치기당한 그를 도와주게 되어 여행을 함께 하게 되고 그는 그녀의 책을 파는 일을 돕기도 한다. 티격태격 싸우고, 한 방에서 같이 자기도 한다. 아플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은 그녀였고, 와조를 돌봐주던 이도 그녀였다. 어느 날부터 여행 동지가 되어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삶과 길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그의 여행 습관을 그녀 때문에 바꿔야 하기도 했고, 길거리에서 낭독도 하고 지하철에서 그녀의 책을 팔아주기도 했다. 누군가 함께 하기만 하면 잡음을 냈던 그녀는 점점 그에게 익숙해지고, 그를 편하게 느낀다. 그녀가 옆에 있는 게 싫지 않다. 

어느 날, 그와 그녀는 고시원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고, 그날 밤 고시원에 불이 나게 된다. 와조가 그가 자살하려 할 때 날뛰어 그를 구했던 것처럼, 그를 깨워 불구덩이에서 탈출시킨다. 뉴스에도 크게 보도될 정도로 큰불이었고, 많이 지쳐 있었던 와조는 힘겨워한다. 눈이 보이지 않던, 나이가 많았던 와조. 할아버지의 맹인견이었던 와조는 할아버지와 함께 사고를 당한 후에 눈이 멀게 되었다. 와조를 부탁하던 할아버지, 와조를 누군가에게 맡길 수 없어 먼 길 여행을 함께 했던 와조. 이제 와조가 아프다니 그는 돌아갈 결심을 한다.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집이지만, 집이기에 받아들여야 하기에 돌아간다. 

텅빈 집, 고요한 집, 아무도 없는 집에 도착한 그. 3년 전 일들이 떠오르고, 또 발작을 일으킨다. 친구가 와서 떠드는 통에 증상이 호전되기도 하지만, 혼자 남게 되면 어김없이 발작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웃집 아줌마가 찾아 와 그가 돌아온 것을 확인한 후, 들고 온 꾸러미. 온통 편지뿐이다. 그가 그렇게 기다렸던 답장은 그렇게 쌓여 있었다. 눈물이 난다. 편지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말이다. 그가 보낸 소식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고, 그가 기억한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거짓 주소를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고, 답장이 오지 않자 또 보낸 사람도 있었다. 

그는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떠났다. 여행 길목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주소를 묻고, 번호로 기억해 편지를 보냈다. 그들의 답장을 기다리면 길에서 보냈던 3년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 그는 오지 않는 편지 때문에, 많은 생각을 했다. 모두들 그에게 주소를 잘못 알려줬을지도 모른다는, 답장하고 싶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많은 상상 속에 아쉬워하고 힘들어했다. 하지만, 자신이 정한 규칙과 원칙을 지키며 여행내내 매일 밤 잠들기 전 기억 속에 가둔 사람들을 끄집어내어 편지를 썼다. 매일 실망하면서도 매일 편지를 썼다. 그에게는 어떤 의식이었고,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말을 더듬던 그가 말을 더듬지 않게 된 것도, 집에 돌아와 발작이 멈추게 된 것도 편지 속의 주인공들과 그 편지들 때문이었다. 그는 희망을 발견한다. 슬픔의 먼지를 털고, 세상 속으로 나가려고 준비한다. 그동안 주저했던 일들을 이제는 해야 할 시간이다. 와조도 떠났고, 소중한 사람이 그를 떠나갔지만, 이제 다시 시작할 힘이 난다. 그가 보냈던 편지들에 대한 답이 그에게 힘을 준다.

몸부림쳐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고통이 있다면, 억지로 고통을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훌쩍 떠나거나, 훌쩍 돌아오거나, 낯선이들을 만나 나를 소개해도 좋다. 그들의 인생 소식을 들으며, 내 고통과 상처를 잠시 잊을 수 있고, 그들의 인생 고통을 들으며 공감하며 치유할 수도 있다.
그가 받은 '편지'는 그가 삶을 다시 살아갈 '희망'이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순간, 모든 이들이 떠났다고 생각한 순간, 그에게는 모두가 생겼다. 길에서 만난 모두가 그의 인생의 모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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