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정은선 지음 / 예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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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다. 갑자기 떠난 사랑하는 여인을 찾기 위한 OK김, 막장 드라마 작가에 표절의 오명까지 뒤집어쓴 나작가,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사채를 쓰고 쫓겨 다녀야 했던 박벤처, 감 떨어진 포토그래퍼에 사랑하는 여인마저 잃게 된 원포토.
OJ김여사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OJ'에서 만나게 된 이들. 누군가를 찾는 이, 머리를 식히려고 떠나온 이, 누군가를 지우려고 떠나온 이 사연도 가지각색. 하지만, 그들은 OJ 여사의 참견 속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마음껏 즐겨야 한다. 

삶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가 극도로 달했을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린다면, 뭐든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찾기 위해 떠나기도 한다. 도대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맞는 곳인지 의문을 품은 채 살아가는 게 힘들어질 때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디론가 떠난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 더 큰 세계가 있다는 깨달음, 문화, 음식, 낯선 세계 속에 타인, 그리운 일상. 떠나보면 알지 못하는 여유와 자유까지도 우리는 어딘가를 갔을 때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여인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자기 일을 내팽개치고 그녀를 찾아 미친 듯이 지구 반 바퀴를 돈 OK김. 그는 그녀를 찾는데 온 힘을 기울이지만, 겹겹이 쌓인 난관에 마음만 탄다.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OJ여사는 대체 입을 열 줄 모르고, 엿듣기도 불사하며 그녀를 찾아 나선다. 9일간 그녀를 찾아 헤매며, 그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상처, 그녀가 떠나온 이유, 알고 싶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던 것들. 그는 망설인다. 과연, 나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찾으려 했던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일까? 망설이는 그의 등짝을 치며 그녀에게 달려가라는 OJ여사. 그는 그녀를 찾으러 부에노아이레스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그가 찾게 된 것은 그 이상이었다.

쓰고 싶었던 드라마는 종래 쓰지 못하고 막장 드라마를 만드는 작가가 된 노작가. 이번에 만든 드라마는 심지어 표절 시비까지 걸렸다. 인기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도 욕을 먹으며 살았기에, 사람이 두려웠고 사람이 불편했다. 모든 걸 내던지고 부에노아이레스로 왔건만 지갑을 잃고, 어떤 여자의 도움으로 게스트하우스OJ에 당도한다.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었는데, OJ여사는 사람을 끈다. 그리고, 세상을 등지고 사라져버릴 것 같은 원포토를 만난다. 둘이 함께 아르헨티나를 돌며 노작가는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빈둥거리며 라면을 먹는 박벤처. OJ여사 아들 아리엘과 아르헨티나를 심드렁하게 즐긴다. 그는 가족을 등지고 아르헨티나로 떠나온 중년의 남자. 사업이 망하기도 했지만, 아내의 등쌀에 아이들 교육비로 수많은 돈을 미국으로 보내며, 고시원으로까지 쫓겨나게 됐다. 기러기 아빠로 살며, 아이들은 지원해야 했기에, 사채까지 쓰게 됐고 어느 날 펑하고 터져버렸다. 아르헨티나에서 아무도 모르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의 시름은 깊어 가지만, OJ여사는 그가 가족을 등지고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인을 다른 남자에게 떠나보내야 했던 원포토. 그녀를 만나고 삶의 힘을 얻었는데, 그녀를 잃고 삶의 힘을 잃는다. 잊기 위해, 버리기 위해 찾아온 아르헨티나. 죽을 것만 같다. 한 때는 자신에게 찍히기 위해 모델이 줄을 섰고, 사진을 배우겠다며 간도 쓸개도 뺀 아이들이 줄을 섰지만 이제는 감 떨어진 사진작가라는 오명에 B급도 되지 못한다. 사진 찍는 일도 두려워졌다. 그에게 남은 게 없다. 하지만, 그의 절망 뒤에는 또 다른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찾거나, 헤매이거나,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아르헨티나를 여행한다. 밤 문화에 미쳐있는 젊은이들이 가득찬 클럽을 구경하기도 하고, 열정적인 탱고쇼에 매료되기도 한다. 거대한 크기에 움직이는 꽃 조형물 플로라리스 헤네리카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기도 하고 부에노아이레스의 신흥 부촌 푸에르토 마데로에서 멋진 야경에 즐거워하기도 한다. 거대한 빙벽과 무엇이든 삼킬 것 같은 폭포. 그들이 지나치고, 머무르는 그곳들은 변화와 용기를 주는 이상한 힘이 있다. 세상의 끝 우체국에 섰을 때 끝보다 시작이 보이던 여행길.

그들 모두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멍하니 헤매고 있을 때 아르헨티나와 OJ여사는 마법의 가루를 뿌려 그들이 힘을 내게 한다. OJ여사도 남편이 떠난 후, 그를 기다리며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아들을 키웠다. 그 또한 상처에 가득하고 힘든 삶을 살았을 테지만, 아르헨티나는,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9일간의 여행, 그리고 선택, 누군가는 무엇을 버렸고 누군가는 어떤 것을 찾았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기 전에는 괴로웠고, 고통스러웠고, 상처투성이였지만 다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삶의 터전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기억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몸속으로 퍼져 기운을 준다.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작가가 찍은 사진, 명소에 대한 설명이 섞인 자전적이며 픽션을 가미한 소설이다. 그녀가 떠난 여행에서 얻었던 것들에 인물을 만들어 새로운 생명력을 넣어 만든 이야기다. 인물에 대한, 아르헨티나에 대한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다. 현실처럼, 혹은 거짓처럼 아르헨티나를 짚어갈 수 있다. 흔해 빠진 여행 소개책보다는, 픽션을 가미한 여행 소설쯤 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 또한 만신창이가 되어 아르헨티나에 도착했지만, 돌아올 때는 새로운 힘을 얻었다.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힘을 얻었다'라는 사실적인 이야기보다, 각각의 인물이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며, OJ여사의 말에 따라가며 힘을 얻는 모습이 더 설득력 있는 여행담을 만들어낸 것 같다.

여행 후에 반드시 남겨야 할 것.
담아온 추억들을 삶의 현장에 투영시키기!
찾아온 무언가가 현실에서 느껴질 때 우리는 이미 또 다른 여행지에 서 있다.
- 268p

작가는 아르헨티나에서 담아온 추억들을 그녀의 현장에 투영시켜,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만신창이가 되었던 마음을 위로받고 돌아와, 이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여행을 떠나고 있는 작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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