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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고개를 돌린 여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풍성하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어디를 바라보는 것일까? 우리는 가끔, 아니 종종 말문이 막힐 때가 있다. 누군가 내 곁에 있는데도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적막함이 나를 감싼다. 그 아스라함은 나의 입을 막고, 마음을 열고 다가오는 존재에게 거리를 두게 한다.
제 아무리 인생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해도 모두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 221p <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中
누구에게 이해받기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런 사실을 잊는다. 사람과 어울려 사는 삶은 즐겁기도 하지만, 때때로 나를 피곤하게 한다.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이해시키려고 온 시간을 쏟아붓고 나면, 허무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나 또한 종종 누군가를 오해하고 이해하지 못해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크나큰 폐를 끼치고 있는다. 이해와 오해 사이에는 소통과 침묵이 가로막고 있다. 그 소통과 침묵은 약과 독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 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 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81p <세계의 끝 여자친구> 中
우리는 타인의 생각을 '발견'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살아온 그 시간 속에서는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깨닫기도 한다. 타인의 생각을.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더욱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 때가 있다. 사랑의 자만심에서 비롯된다. 언젠가는 수긍할지 모르나, 당장은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소통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침묵하게 된다. 그리고 마음을 닫게 된다. 내 쪽에서 그쪽의 생각을 '발견'하게 될 때까지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이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이야기다. 이 우주의 90퍼센트가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것들로 이뤄져 있지만, 결국 케이케이의 어린 몸도, 그 몸을 사랑했던 내 세포들도 달리 갈 곳은 없을 것이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그걸 보지 못할 뿐이다.
11p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 봤어> 中
이미 나의 세포들은 모두 나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 세포들이 가진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하기란 무의미하며, 소모적이다. 그랬을 뿐이다. 나를 이해해달라고 애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가진 기억들과 내 삶의 조각들은 '너'가 아닌 '나'에게 감동적인 것이다. 그 감동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그걸 모두 말로 설명해야 하지는 않은가. 침묵으로 일관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말하지 않고 숨겨도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가끔은 그런 것들을 알아주면 얼마나 좋단 말인가? 타인에 대한 궁금증, 지나치면 서로에게 상처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내가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인정해주면 좋을 텐데.
힘든 건 마음이 힘든 거고, 고통은 몸이 고통스러운 거 아닐까?
126p <모두에게 복된 새해> 中
누군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나의 마음은 힘들어졌다. 누군가를 오해하기 시작하면서, 오해하는 만큼 내 마음은 힘들어졌다. 결국, 오해였고 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어떤 말들은 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침묵하고 있어서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가끔 변명이 된다. 모른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침묵이 길어지기도 한다.
미래를 바라봐온 십대, 현실과 싸웠던 이십대라면, 삼십대는 멈춰서 자기를 바라봐야 할 나이다. 이젠 좀 솔직해져도 괜찮은 나이다.
96p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中
솔직해지기 위해 평생을 싸운다. 그 정점이 되었을 때조차도. 솔직함 때문에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다. 그렇게 겪어 낸 시간들이 우리에게 소통의 부재를 가져온다. 서른 살, 나는 얼마나 변할까? 2010년 나의 서른 살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변할 것인가. 나이가 들수록 입을 다물 일들이 많아진다. 남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고, 내 인생을 참견하면 목소리가 높아진다. 마음을 열지 못한 게 아니라 굳어진 가치관들의 충돌이 쉼 없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난 220V인데 110V로 바꾸려 하는 일들을 겪게 되면서 날이 서고 칼을 벼른다. 나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은 결국 쓰레기보다 못하다는 걸 깨닫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모두 이기적이 되고, 자만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이야기'란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기침이나 한숨 소리, 혹은 침 삼키는 소리 같은 데 담겨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인생이 바뀌는 순간의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릴테이프를 돌려가며 그녀가 가위로 오려낸 조각들과 함께 사라졌다.
237p <달로 간 코미디언> 中
어쩌면 침묵은 침묵이 아닐 것이다. 고요함에서부터 소통이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를 것이다. 그 시점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좀 더 편안해질 것이다.
듣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도 없어. 세계는 침묵이야. 암흑이고.
249p <달로 간 코미디언> 中
외로움은 자신을 외롭게 하는 자에게 찾아온다. 결국 침묵과 암흑은 자기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깨닫게 될 때쯤 인생을 접는다. 소통과 침묵은 쳇바퀴 돌듯 돌고 돌고 멈추었을 때 세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