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전남 곡성 출생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1년 계간 「창작과 비평」겨울호에 단편 '씨앗불' 을 발표하여 작품활동을 시작
 1993년 여성신문학상 수상
 1995년 제13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삶과 글

대중적 평가보다는 문학적 평가가 더 높은 여성 작가. 세련된 여자보다는 촌스런 여자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우리 곁에 살아 남을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우리 시대 가난한 여성들의 굴절된 삶과 그 속에서 용솟음 치는 생명력을 생동하는 문체로 묘파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시골의 폐교된 분교에서 산다. 교실 두 칸을 거실과 집필실로, 교무실을 부부와 딸들의 방으로 고치고, 마당에는 닭도 치고 채소밭도 일궈가며 산다. 어설픈 농구대와 이순신 장군 동상이 한켠에 세워져 있는 자그마한 운동장이 그의 집 뜰이다. 방 한 구석에는 아직도 칠판이 남아 있어, 아이들의 글쓰기 연습장이 되고 있다. 화장실은 산골 초등학교 아이들이 쓰던 곳을 그대로 쓰고 있다. 엉덩이 까고 주저앉으면 바로 곁에서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졸졸졸 들리는 그런 재래식 화장실이라고 한다.

이 목가적 풍경 속으로 찾아 들어오기까지, 공선옥은 그가 쓴 소설의 주인공들만큼이나 팍팍한 삶을 살아 왔다. 그 팍팍한 삶은 우리 현대사에 큰 상처자국으로 남아 있는 5.18과 깊은 연관이 있다. 5.18 당시 공선옥은 전남대 구내에 있던 사대부고 1학년생이었다. 5.18의 생생한 현장을 목도한 그는 대학 진학 후 2년 만에 학교를 그만 두고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이때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사업도 무너지면서 채권자들이 모든 것을 가져갔다. 밥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삶이 1년쯤 지속된 뒤, 전부터 그냥 알고 지내던 광주 시민군 출신의 한 '아저씨'와 덜컥 결혼해 버린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쉽게 한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고, 둘째를 임신한 채 3년 만에 이혼으로 끝났다.

이혼 후, 생계에 대한 살인적 공포 속에 아이들을 광주시립임시아동보호소라는 곳에 맡기고, 자신은 고향 근처 태인사의 공양주로, 즉 절의 식모로 들어 갔다.

처음에는 두 아이의 목숨을 떠맡은 데서 해방되어 한시름 놓았으나, 허전함을 견딜 수 없어 3개월 만에 큰 딸을 데리고 상경했다. 달동네를 전전하며 재봉일로 두 입에 풀칠을 하다가, 1년 만에 둘째를 데려왔다. 이 시절 그는 '내가 내 힘으로 아이들 먹여 살린다'는 기분 하나로 버텼다고 한다. 결핵에 걸려 몸무게가 38kg까지 축나기도 했다.

2년 동안 서울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먹고 사느라 바빠 따로 글 쓸 시간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재봉틀 위에 원고지를 올려놓고 재봉질 틈틈이 소설을 썼다. 그렇게 쓴 글이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등단작 '씨앗불' 이다. 결혼도 다시 했다. 이번에도 남편은 광주 시민군 출신. 도청에서 끝까지 싸우다 살아남은 전력까지 똑같다.

차 한 대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길로 하루에 버스가 4번밖에 안 들어오는 가난한 산골에서 살지만, 공선옥은 이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병도 나았고 생계의 공포로부터도 벗어났다. 부잣집 아이도 가난한 집 아이도 똑 같이 흙발로 뛰어다니는 농촌 풍경만큼 공선옥의 마음가짐은 여유롭다.


작가 생각

화장을 예쁘게 한 여자는 아름답다. 날씬한 몸매를 가진 여자는 아름답다. 좋은 옷을 입은 여자도 아름답다. 그러나 화장하지 않고 날씬하지도 않고 남루한 옷차림을 한 아이 딸린 여자가 노동하는 모습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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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다며 빨리 돌리지 말고

슬로우 모션으로 천천히 보면,

우리가 못보고 그냥 지나친 장면들을 세세하게 다 볼 수가 있다.

내가 과연 이런 행동과 표정을 지었던가......

의문이 생길 정도다.

삶이 지겹다고 느끼는 것은 그 삶 속의 미세한 감정들을 그냥 흘려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이란 평범함 속에서 희열을 찾아내는 작업과도 같은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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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몽실언니>

서정주<민들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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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나비 넥타이

 

1947년 경북 군위 출생
 경북중 졸업, 고등학교 중퇴, 1966년 대입 검정고시 합격
 34살에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공부
 1977년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단편 '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등단
 1991~1996년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종교학 연구원 재직
 199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비교문화인류학 연구원 재직
 1998년 중편 '숨은 그림 찾기'로 동인문학상 수상
 2000년 소설집 <두물머리>로 제8회 대산문학상 수상
 2000년 한국번역가상 수상
 2000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 출간
 2002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2>와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출간
--신화 관련한 다수의 역서가 신화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잘 말해 준다.--


삶과 글

한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번역작가이자 인문학적 글쓰기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문인. 난해하기로 이름난 세계적인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푸코의 진자>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장본인으로, 지난 20여년 간 내놓은 번역서가 1백 50여권에 이른다.

그의 글들은 질적으로 아주 양호한 최상등품일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엄청난 속필다작이다. 1년에 열대여섯 권의 번역서와 소설, 산문집을 낼 정도니 알 만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에게 번역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 소설인데, 열 번쯤 되풀이해 읽은 후 번역에 들어가 1주일 만에 끝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작가의 학력을 굳이 따져보자면 `중졸`이다.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서른이 넘어 신학교도 다녔으니 `중졸`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여하튼 고등학교는 진학 후 두세 달 만에 작파했고, 그 후로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우고 익혀 왔다.

그가 번역을 할 때 사전에서 가장 많이 찾는 단어는 Idea와Boy라고 한다. 번역작가가 이런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 본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문맥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그 의미를 딱 찍어 찾아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노력은 약과다.

아무리 사전을 뒤지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많다. 사전 속에 갇혀 있는 말이 아니라, 등 푸른 생선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는 마치 해독이 안 되는 난수표를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다. 한 단어 때문에 꽉 막힌 채 애꿎은 술만 축내게 된다.

이윤기가 인문학의 바다에 처음 뛰어든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학비를 면제 받는 대신 교내 도서실 사서를 맡으면서, 물을 만난 고기마냥 도서관을 가득 메운 지식의 세계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었다.

미 8군에서 흘러나온 일본 시집이니 영어로 된 소설따위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겉 멋을 부려 본 것도 그 시절의 추억이요, 유달영 박사의 영향을 받아 `우리가 한국 농촌의 미래를 바꿔놓자`고 친구들과 의기투합했던 것도 그 때의 낭만이다.

영어와의 인연도 그 당시부터로, 새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영어에 미쳐, 무슨 말이든 영어로 바꿔 보려고 했고, 그게 잘 안되면 먹지도 자지도 못할 정도였다. 평생의 관심사가 된 종교학이나 신화, 인류학과의 만남도 중학 시절의 사건이었다.

이렇게 중학 시절에 이미 인문학의 단맛을 보아버린 이윤기에게 개발시대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육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도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무언가에 얽매이는 것을 거부한다. 직장생활을 한 것도 일생을 통틀어 딱 4년이다. 생활도 남들과 반대로, 조간신문을 읽고 취침해서 대낮에 일어난다.

1969년 국군 나팔수로 근무하던 그가 베트남전에 자원하여 참전했던 것도 별난 일이었고, 귀국 시 남들은 전자제품이다 뭐다 해서 한 밑천 장만해 오는데, 700여 권의 서양책들을 질머지고 돌아온 것도 별난 일이었다. 이 책들은 이윤기의 재산목록 1호가 되었으며, 그 중 여러 권이 번역되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가 뒤늦게 종교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종교학이라는 큰 저수지 곁에 가면 크고 희한한, 인간의 본질과도 같은 고기가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991∼96년 사이에 미국 미시간주립대 종교학 연구원으로, 1997년에 같은 대학 비교문화인류학 연구원으로 있었던 것도 동일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이다.

그는 자신의 인문학적 관심을 스스로 `인간현상학`이라 명명하고,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이며, 종교란 또 무엇이며, 인간의 원형은 무엇인가 하는 화두에 매달리고 있다. 이 또한 그가 평생 추구해 온 `독학` 노선의 연장이다. 독자들은 그 사색의 결과물들을 이윤기의 산문집이나 소설들을 통해 음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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