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 독살사건>
▣ 경종이 재위에 있은 기간은 불과 4년 2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4년 세월은 격동의 시대였다. 부왕 숙종 대를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고, 그 정쟁의 결과 서인이 승리하였다. 또 100여 년을 집권한 서인이 몸집이 비대해져 송시열의 노론고 윤증의 소론으로 자체 분열한 시기도 숙종 때였다.
같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린 후 서로 대립했듯이 노론과 소론도 대립했다. 심지어 노론과 소론은 옷차림도 달라 멀리서 봐도 당색을 알 수 있었다. 노론은 저고리 깃과 섶을 둥글게 접었으나 소론은 모나게 접었고, 노론 아녀자의 치마 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었으나 소론 아녀자의 치마 주름은 가늘면서 접은 수가 많았다.
남인과 싸울 때는 다 같은 서인이었으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서 싸울 때는 오히려 소론이 남인 편을 들 정도로 한 번 갈라지면 적이었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등식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무료 45년 10개월 동안 재위에 있었던 숙종은 이런 당쟁을 왕권 강화의 기반으로 이용했고, 이를 통해 27명에 이르는 조선의 어느 임금보다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강력한 왕권은 제도적인 틀로서 마련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 정치력에 의한 것이란 한게가 있었다. 숙종이 당쟁을 이용해 각 당파를 때에 따라 올려치고 내려치는 동안 각 당파는 서로를 저주하게 되었다. 숙종의 이런 당쟁 이용과 당파 간의 싸움은 끝내 한 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를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바로 그 장씨의 아들이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었으니 비극은 이미 싹튼 셈이었다.
▣ 정의가 승리하는지, 승리한 것이 정의인지를 판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불의는 일단 승리하고 나면 정의로 뒤바꾸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게 마련이고, 때로는 이런 기도가 성공하기도 한다. 또한 정의니 불의니 하는 것들도 시대의 산물이어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면의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 중국의 황제권은 여타 국가와는 비교가 안 된다. 평민 출신으로 명조를 개창한 주원장은 중서성 자체를 폐지시켜버렸다. 중서서의 승상이 황제권을 견제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또 6부를 황제에게 직속시키고, 대도독부를 5군도독부로 고쳤으며, 어사대를 도찰원으로 고쳐 황제에게 직속시켰다. 그야말로 국가의 모든 권력이 황제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다. 신하들이 권력을 두고 황제와 다툰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웠다. 중국이 대신들보다는 주로 환관들의 전횡이 무제가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다 보니 황제와 지근거리에 있던 환관들이 힘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달랐다. 왕조 국가인 조선의 국왕은 일본의 천황처럼 허수아비는 아니었고, 중국의 황제처럼 절대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이론상의 절대권이었을 뿐 실제 조선의 국왕은 신하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중국의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조선의 국왕은 무조건적인 숭배와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조건부 충성의 대상일 때도 많았다.
▣ 독살설에 휘말린 국왕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적인 특색이 있다. 독살설의 배후에 그 임금을 반대했던 정당이 존재하며, 숙종 즉위 때를 제외하면 임금이 죽은 후 어김없이 그 당이 집권한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정당이 특정 임금과 정치적 갈등이 극대화되었을 경우 임금을 갈아치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선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임금이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한 정당이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였음을 뜻하는 동시에, 신하들이 특정 임금을 배척할 수도 있었음을 뜻한다. 이를 신하가 임금을 선택했다는 뜻의 ‘택군’이라 하는데, 국왕 독살설은 그야말로 이 ‘택군’의 결과였다.
택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국왕을 독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임금을 공개적으로 갈아치우는 것이다. 왕을 갈아치우는 것을 ‘반정’이라 한다. 연산군을 내쫓은은 중종반정이나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축출하고 새로운 임금을 옹립한 쿠테타였다. 그나마 ‘정도로 돌아가다’는 뜻의 반정은 신하들이 임금을 내쫓을 명분과 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였다.
그러나 명분이 부족하거나 명분을 강행할 만한 힘이 부족한 경우에는 은밀하게 국왕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독살’이다. ‘반정’과 ‘독살’은 둘 다 신하들이 임금을 선택한 결과라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이다. 반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사당한 정치적 부담이 있는 데 비해 독살은 은밀히 이루어지므로 정치적 부담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택군의 논리야말로 조선시대 국왕 독살설을 만들어낸 정치 용어자 왕조 국가 조선이 말기까지 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의 국왕 중 독살설에 휘말린 인물은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포함해 9명이나 되는 셈이다.
2명의 세자를 제외하더라도 8명의 임금이 독살설에 휘말렸다는 것은 조선이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였음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또한 27명의 임금 중 무려 8명의 임금이 독살설에 휘말렸다는 것은 조선이란 정치 체제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단순히 ‘조선’이란 과거의 왕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을 연구하는 적업이기도 하다. 비록 36년 간의 식민지 통치 기간이 중간에 개재되어 있다 해도, 한국은 조선을 계승한 나라인 것이다.